[조선족이민실록] 016. 리옥녀 가족 (료녕 심양)

서탑에는 전부 조선족들이 살고있었는데 조선말을 할수 있었고 옷도 로인들은 조선서 입던대로 한복을 입고 다녔다.


리옥녀, 녀, 1915년생.
심양시 화평구 시부대로 2단 22번지 거주

우리 집은 원래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살았댔는데 생활이 너무 곤난해서 중국에 오게 되였다. 먼저 고려문에 와서 7년간 살다가 마적단의 성화에 배겨낼수 없어서 흥개현으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 심양까지 기차를 타고 와서 차를 바꿔타려는데 지게를 진 조선족 로인이 우리를 보고 어디로 가는냐고 묻는것이였다. 우리가 흥개현으로 농사하러 간다고 하자 지게장사를 하든 농사를 하든 그래도 여기가 살기 좋다면서 우리를 한사코 만류하는것이였다. 그 로인이 서탑에다 집까지 하나 구해주는데서 우리는 행장을 풀고 눌러앉았다. 

그때 심양을 봉천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왔을 땐 지금의 남쪽역전 부근은 전부 풀밭이였고 시가지라는것도 거의다 오막살이 집들이 들어앉아있었다. 

그때 봉천에는 아편장사가 많았다. 아편을 피우다 죽은 시체를 보는것은 별로 희한한 일이 아니였다. 그때 봉천에는 조선료리집, 국수집, 일본료리집이 많았다. 불고기집두 많았다. 서탑에는 전부 조선족들이 살고있었는데 조선말을 할수 있었고 옷도 로인들은 조선서 입던대로 한복을 입고 다녔다. 한데 젊은이들은 양복을 많이 입었다. 서탑에는 조선족장사군이 많았는데 특히는 천장사군이 많았다. 

학교는 조선족 소학교와 중학교가 다 있었는데 학교에서 조선말은 못하고 일본말만 하게 했다. 후에 일본이 망하고 국민당통치시기가 시작되자 중국글 절반 조선글 절반 배웠다. 

그때 일본놈들은 민족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량식배급을 그에 따라 다르게 줬다. 일본사람은 《1등공민》이라 하고 시퍼런 통장에 입쌀을 주고 조선사람은 《2등공민》이라 하고 누런 통장에 보리쌀을 줬다. 한족사람은 《3등공민》이라 하고 콩깨묵 같은걸 줬다. 그래서 한족사람들은 조선사람을 미워했다. 광복이 나자 조선족이 적은 곳에서는 조선사람이 맞아죽은 일이 많았다. 이는 일본놈들의 민족리간정책의 결과였다. 

봉천에 온 나는 풀을 베여 팔기도 하고 지게장사를 하기도 했다. 후에는 또 정거장에서 짐을 메여나르는 일도 했고 술공장이나 과자공장 같은데 가 일하기도 했으며 일본사람집에 가 아이를 봐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19살에 시집을 가서 아들을 하나 낳아 키웠다. 

광복이 나니 적지 않은 조선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북경 중앙민족번역국 김광현 정리)

*글의 맞춤법과 표기는 원문 그대로 두었다. (굵은 글씨, 밑줄과 줄바꿈은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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