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가족, 남, 1919년생.
길림성 룡정시 조양향 근로촌 거주

나는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상우남면 운주동에서 태여났다. 그때 할아버지가 계셨지만 명함이 기억나지 않는다. 큰아버지는 김문칠이였고 사촌형 김상훈, 김상길, 사촌누이 김채선, 김복선이 있었다. 아버지는 김경칠이였고 형 김상우, 누이 김어금, 김월금, 김금옥이 있었다. 나는 이 녕월(寧越)김씨네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큰집과 우리 집은 모두 안개가 자욱히 껴있는 기운봉기슭에 초가 륙간집을 짓고 살았다. 한전 5헥타르 남짓이 있었는데 말이 밭이지 떡돌같은 돌이 쭉 깔린 돌밭이였다. 그래서 재하구 오줌을 섞어서 돌틈에 걷어넣구 보리나 메밀을 심었다. 가을이면 메밀이 꼿꼿이 쳐든게 그 돌밭에서 셋의 량식도 못거두었다. 그래서 메밀을 껍데기채로 가루를 내서 먹었다. 그런게라도 많으면 좋지 않겠는가. 보리고개를 넘기전에 다 떨어져서 여름이면 나리랑 삽지(삽주)뿌리랑 세투리(사라구)랑 캐먹구 살았다. 

그만하면 그래도 괜찮은셈이였다. 그때 일본놈들이 두메산골인 나의 고향에까지 쳐들어와서 그 산에 있는 돌밭에다 이깔나무를 심으라고 강박했다. 그때는 일본놈들의 세상이라 어쩌는수없이 명줄이나 다름없는 그 돌밭에 이깔나무를 심었다. 나중에 그놈들은 터밭에까지 이깔나무를 심게 했다. 그래서 한번은 메돼지가 다 터밭에 들어왔댔다. 

그뒤로 우리 집에서는 터밭에 겨우 감자나 심어 먹을수 있었다.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렵게 된 우리는 하는수없이 남의 변돈 300원을 꿔썼다. 그땐 80원이면 소 한마리를 살수 있었으니깐 300원 변돈이라는게 적지 않았다. 그 변돈에 우리 집은 쫄딱 망했다. 빚군들이 문턱이 닳게 찾아들었던것이다. 

살길을 찾아야 했다. 할아버지가 큰아버지와 아버지만 데리구 만주로 갔다. 듣는 소문에 만주에서는 <미운 사람에게도 기장밥을 해준다> 했구 <땅이 넓어서 기장밥에 토장국을 먹는다> 했던것이다. 거게 간 아버지는 한해동안 반헥타르밭을 소작지어서 기장쌀 대여섯마대를 거두었다. 그래서 인편에 우리더러 중국에 들어오라는 기별을 보내왔다. 

그것은 내가 일곱살을 먹은 해인 1925년 겨울이였다. 눈보라가 윙윙 몰아치는 설한풍을 맞으면서 어머니는 19살나는 형님과 아주머니, 나를 데리구 정든 고향을 떠나 누데기 몇벌을 싼 보따리를 이고지고 만주로 떠났다. 11월중순에 떠나 우리는 보름동안 걸어서 12월초에 지금의 연길현 조양향 동성촌 함흥툰에 왔다. 큰아버지네 집에서 서너달 살다가 천지꽃산아래에 있는 소시거란 곳으로 갔다. 소시거는 산골막치기에 있었는데 김대동과 주현경이란 두 조선인이 거기서 막을 치고 살고있었다. 골안 묵밭아래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꽉 들어서있었다. 그 골안으로 흐르는 태평강에는 손바닥만한 버들치며 잉어며가 많았다. 그런데 우린 그때 고기 잡을줄도 몰라 못잡아먹었다. 우리는 소시거에 초가 륙간집을 짓고 그해 봄에 한족 장지주네 묵밭을 서너헥타르를 부쳤다. 

나는 8살때부터 아주머니가 기음을 매는 앞에서 풀을 뽑았구 13살때부터는 보리를 베고 밭갈이두 했다. 우리 집에서는 큰집 소를 길러주구 그 소로 밭갈이를 했다. 농사철에 배고픈 고생을 많이 했다. 먹는것이란 죽뿐이였는데 글쎄 죽사발을 들여다보면 얼굴이 환히 비치여보였다. 그런 죽을 한사발 후루룩 들이켜고나면 얼마 안가 인차 허기가 났다. 그래가지구 일하자니 얼마나 배고팠겠는가. 그래두 어머니가 세투리랑 능재(능쟁이)랑 달리(달래)랑 부지런히 캐다가 슬쩍 데쳐 줴기를 해서 죽에 넣어주니 그게 꺼지지 않는게 좋았다. 

소작농사를 부지런히 한데다가 형님이 황무지개간을 해서 내가 열여섯살나던 해엔 조선에서 지고 온 빚을 리자에 리자까지 다 물었다. 그해 우리 집에서는 지주네 밭두 더 부치구 송아지두 한마리 샀다. 

19살 먹던 해에 나는 역시 조선에서 함흥촌으로 이주해온 개성 최씨네 맏딸이였던 지금의 로친과 결혼을 했다. 한데 내가 새 살림을 꾸려서 얼마 안돼서 일본놈들이 간도성 성장 리범익을 사촉해서 조선에 적을 둔 조선청년들가운데서 일본주구군대인 특설부대 군인까지 뽑았다. 그때 우리 마을에서 나까지 다섯사람이 걸려서 제비를 뽑았는데 재수없게도 그 액운이 면바루 내게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추운 겨울날 문창구멍을 내구 엉뎅이를 얼군 다음 홍문왼쪽켠의 가려운데를 면도칼로 긁어서 치질을 하는것처럼 부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구나서 촌장을 찾아가 치질루 아파서 못가겠다구 짝 잡아뗐다. 조선서부터 우리를 못살게 군 일본놈의 군대에는 죽어두 가기 싫었던것이다. 때마침 한마을의 김금산이란 청년이 자원해나서서 나는 다행으루 거기서 벗어났다. 

내가 22살때니깐 아마 40년도였을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앞마을 4툰의 리지주라는 한족지주네 논밭을 부쳤다. 그 논밭은 계관산앞에 있었는데 그 서쪽켠에 길 하나를 사이두구 4툰의 한족지주 지학사네 한전이 있었다. 나는 우리 논물이 지학사네 배추밭으로 흘러들가봐 매일 집으로 올 때마다 논뚝을 살펴보군 했다. 한데 어느날 점심에 내가 집에 왔다가 나갈때 먼발치로 볼라니깐 지학사란놈이 글쎄 우정 우리 논뚝을 터쳐놓구 논물을 제 밭에 대는게 아니겠는가. 그러구서두 그놈은 우리 아버지가 논밭에 나오니 <어째 내 밭에 물을 댔는가?>고 을러메더니 다짜고짜루 괭이루 우리 아버지 옆구리를 찍어놓는것이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륵골이 세대나 부러졌다. 나는 참을수 없어서 그날로 지금의 태동촌에 있는 일본분주소를 찾아서 그놈을 고소했다. 그러니 한족 소장이 하는 말이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것이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장면을 본 송가라는 사람을 찾았다. 그가 지학사의 세력이 두려워 증인으로 선뜻 나서주지 않을가봐 나는 다짜고짜 이렇게 들이댔다. 

<너 어째 나의 아버지를 괭이로 찍었니? 분주소로 가자!>

그러니 그 사람이 <아니요, 내가 치게 아니라 지학사가 쳤고.>라고 했다. 그럼 너 증명설만한가고 하니 그는 제 발뺌을 하기 위해 서겠다고 했다. 

내가 송사를 건다고 하니 가근방의 위지주요 제지주요 장지주요 하는치들이 몽땅 나를 찾아와서 지학사가 밭 한뙈기만 들이밀어두 넌 어디 가 해볼데 없이 지고말것이니 아예 송사를 걸지 말라구 했다. 아니나다를가 분주소 소장이란 녀석이 벌써 지학사란 놈의 집에서 술을 처마시구 낯판대기 뻘개서 흔들거리며 돌아가는게 아니겠는가!

그러건말건 나는 입술이 말라터지구 발바닥이 닳도록 분주소루 찾아다니며 시비를 캐였다. 그래서 끝내 이겨 지학사란놈에게서 그때 돈으루 40원을 치료비로 받아내고야말았다. 

그후로 나는 성이 손가라는 한족지주네 밭을 부쳤다. 한데 농사짓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처음엔 보통 반작으로 소출을 거두어가던 지주들이 후엔 6씩 바치라고 했던것이다. 게다가 여러가지 가렴잡세가 많았다. 하여 일년내내 뼈빠지게 일해도 가을에 가선 남는것이 별로 없었다. 이런데가 재해까지 드는 해엔 쫄딱 망하는판이였다. 어느해인가 큰물이 졌다. 벼이삭이 팰 때 져서 물이 간 다음에 높은데다 심은 벼를 얼마간 살리고는 통 못먹게 됐다. 그해 가을에 나는 얼마 안되는 낟알을 몽땅 바치고 빚만 가득 걸머졌다. 이런 판에 부모님과 13살난 막내누이동생까지 우리 집에 오다나니 실루 먹을 고생을 기차게 했다. 그때 우리 안사람은 어린애 하나를 업고 배속에 또 하나 밴채 큰집 작은집 다니면서 매돌을 돌려주구 콩물을 얻어먹으며 살았다. 다행히두 큰집형님네가 좁쌀 서말을 줘서 그걸루 죽을 쒀먹으면서 겨우 목숨을 이었다. 

그해 겨울에 네살난 큰딸이 천연두라는 몹쓸 병에 걸렸다. 처음엔 왼볼이 벌겋게 되던게 썩어서 가새(가위)로 살을 베내니 이발이 다 들여다보이는게 죽을 먹이니 죽이 볼루 막 나왔다. 제 살붙이인 딸의 쌀이 썩어서 뚝뚝 떨어져나가는걸 두눈 펀히 뜨고 보면서두 돈이 없어 병원 문앞에두 못가보구 결국 그 애를 잃고말았다. 게다가 그 병이 큰아들 영혁이에게 전염돼서 두달만에 또 그 애가 죽어나갔다. 또 한달이 지나서 갓 태여난 아들애가 굶어서 젖도 안나오는 메마른 에미젖꼭지를 빨고빨다가 굶어죽고말았다. 그러니 그놈의 저주로운 세월에 석달사이에 살붙이 셋을 련달아 잃은것이다. 

그후에도 재난이 끝없이 들이닥쳤다. 우리 안사람이 또 전염병에 걸려 거의 죽다 살아났구 나의 형님이 불쌍하게도 굶어서 사망을 했다. 그 며칠전에 형님은 우리 집에 왔다가 죽을 한그릇 잡숫구 그토록 즐거워하며 돌아갔는데 그것이 마지작 길일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잘살아보자구 고향을 떠나 산설고 물선 타향에 왔다가 이렇게 여러 육친과 살붙이를 잃구 속으로 피눈물을 떨구며 죽지 못해 살다가 요행 광복을 맞았다. 

광복후엔 인민해방국에 입대하여 토비숙청에두 참가했구 영광스럽게 입당을 하구 주 당학교에두 다녔으며 촌 당총지부 서기사업이랑 하면서 보람있게 살구 복하게 살았다. 

지금도 눈을 스르르 감으면 안개낀 기운봉기슭에 자리잡은 고향마을이 선하다. 스무살에 로친과 함께 고향에 가보구선 52년이 지나도록 고향땅에 가보지 못했다. 인젠 일신을 쓰지 못하게 됐으니 영영 가보지 못하게 됐다. 

실루 지나간 세월 고생살이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듯 아프다. 

연길 연변인민방송국 김장혁 정리

*글의 맞춤법과 표기는 원문 그대로 두었다. (굵은 글씨, 밑줄과 옮긴 이 주는 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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