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협 등 5인 가족
길림성 도문시 월청향 마패촌

마패촌은 백여호 인가가 살고있는데 죄다 백의동포들이다. 두만강을 사이두고 동남쪽은 조선땅이 바라보이고 서북쪽 멀지 않은 곳엔 층집들이 줄지어 선 도문시가 자리잡고있다. 이곳 동포들은 두만강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있다. 옛날의 오막살이는 종적을 감추고 벽돌집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정리자는 1989년 2월 13일 이 촌에 거주하는 김광률 등 5명 로인을 찾아 <이민실록> 취재수첩을 펼쳐들었다.

박춘협(남, 1915년생):
나는 이곳 태생이다. 우리 가족은 나의 아버지때 이곳으로 들어왔다. 나의 아버지 고향은 조선 북경성이였다. 거기서 살자니 산이 많고 농사가 잘되지 않아서 굶어죽을바엔 간도땅으로 가자 하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때 중국땅으로 들어오려면 머리를 깎아야 했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상투머리를 하고 다녔으니깐.

김광률(남, 1918년생):
그럼. 아마 계인년*에 머릴 깎기 시작한것으로 기억된다. 중국사람들이 상투 쓴 사람만 보면 저네 사람이 아니라구 어찌 못살게 구는지.
(*옮긴이 주: 경인[庚寅]년의 잘못으로 보임. 1890년.)

박춘협:
나의 부친의 말에 의하면 그때 두만강을 건너 간도땅으로 들어오니 이곳은 가는 곳마다 쑥밭이고 가둑나무숲이 우거져있었다 한다. 내가 자랄 때도 그랬으니깐. 그때 이곳엔 산짐승도 수없이 많았다. 곰, 메돼지, 놀가지(노루), 승냥이… 두만강에는 물고기도 많았다.

주상록(남, 1930년생):
그때는 조선에도 짐승이 많았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조선 명천서 살았는데 산에 가서 큰나무를 찍어다 대문을 든든히 만들었다. 그리고 문에다 작은 구멍 하나만 남겨놓았다. 산짐승이 저녁이면 어찌나 많은지 울안에서 제 집 개인가 보면 승냥이일 때도 있었으니말이다.

박춘협:
그때 이곳엔 밭이라곤 별로 없었다. 제일먼저 중국으로 들어온분들이 땅을 일궈 감자를 심고 옥수수, 조를 심었다. 그때 한족들도 몇호 살고 있었고 한족지주도 있었다.

김광률:
한족들이야 일본사람들이 들어와 못살게 구니 많이 달아나버렸다.

박춘협:
그땐 삼도 많이 심었다. 그것으로 실을 뽑아 무명적삼을 해입었다. 의복이라야 몸이나 가리우는 형편이였으니깐. 여름에는 맨발바람으로 나다녔다. 겨울에는 짚신을 삼아 신었다.
이곳은 조선땅이 저렇게 눈앞에 바라보여선지 우리 아버지때까지만 해도 다른 나라로 온다는 생각이였지만 우리 때는 간도땅 간도땅 하면서 자주 드나들었다.

최석련(남, 1910년생): 
그때야 땔나무고 집재료고 모두 다 저 건너편에 가서 해왔지… 놀가지 사냥도 자주 가구. 어째 중국으로 들어왔는가? 우리 집은 조선 온성군인데 거기서 괜찮게 살았다. 나의 아버지가 좀 돈이나 더 벌가 해서 남의 돈을 꿔가지구 소 10마리를 사서 쏘련으로 팔러 떠났다. 가다가 라자구라는데서 엽전을 받구 다 팔았다. 당나귀에다 엽전꿰미를 싣구 돌아올 때 압록강을 건너다가 그만 당나귀가 물에 넘어가는바람에 당나귀구 돈이구 몽땅 물에 밀리워가버렸다. 어쩔수없어 집에 돌아가 땅이구 소구 몽땅 팔아가지구 남의 돈을 물어주고 중국으로 건너왔다. 여기 와서 한 고생은 말할데 없었다.

김광률: 
우리 집이야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가 이곳 태생이다. 증조부가 열여덟살나 는 해에 중국으로 들어왔다. 내가 여덟살나는 해에 부친이 우리 세 오누이를 버리고 쏘련으로 돈벌이를 떠났다. 내 그때 여덟살이였는데 방법없이 앞마을에 가서 남의 농군으로 일했다. 그런데 지주집에서 빚을 못문다고 집을 내라구 을러대니깐 남의 사랑방에 가서 사는수밖에 없었다. 친척 하나 없는 형편이니 참 구차했다. 

그때 우리 모친은 병환에 계셨구 열살되는 녀동생이 십리밖에 있는 남의 아이를 보았다. 나는 어쩌면 돈이나 벌가 해서 나돌아다닐 때도 많았다. 그런데 돈이 어디 그렇게 많겠는가. 게다가 사랑방이 또 물앉아버렸지. 그래서 주인집과 사정해서 네식구가 웃방에 들고 밖에서 밥을 지어먹었다.

9.18사변 나는 해 내가 열세살이였는데 남의 땅을 부쳤다. 아침 3시에 일어나 기슴(기음)을 매야 했고 또 닥치는대로 무슨 일이나 다해야 했다. 눈물 흘리며 혼자 일밭으로 나갈 때가 많았다. 일년내내 일해서 가을에 돈 4원을 받았다. 그때 돼지새끼 한마리에 50전 했고 소 한마리에 3원 했다. 김은산(부농)네 집을 짓는 해였다. 모친은 그 집에 가서 입살이를 하고 나는 반작으로 콩농사를 했다. 그해 돈을 좀 벌어 오막살이집을 5원 주고 사놓고 보니 어찌나 기쁘던지. 그게 내 열여섯살 먹는 핸데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박춘관(남, 1911년생): 
왜놈들이 들어온후 고생을 많이 했다. 내 소왕청에 있을 때인데 일본토벌대가 들어와가지고 앞마을에 불을 질러 몽땅 태우고 야단하니 뒤마올 사람들이 산골로 몽땅 달아났다. 산에서 돌아와보니 지푸래기 하나 남기지 않고 반반히 싹 끌어간것 이였다. 사람은 살아야 하겠지 할수 없어 열한살 난 녀동생을 매혼해서 겨우 살아나왔다.

김광률: 
왜놈들이 들어와 못된 일을 많이 했다. 나는 봉사만 해도 몇번 갔다 왔는지 모르겠다. 스물여섯살때 라자구에 봉사 가서 다른 마을 사람을 알게 돼서 이듬해에 겨우 장가를 들었다. 구차하다나니 장가가기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박춘협: 
그랬다. 옛날엔 구차한 사람이 장가를 늦게 갔다. 그때야 아홉살 열살이면 장가들었지. 내 장가들 때는 “낟가리혼사”란 말이 있었는데 생활이 구차하면 새기들이 시집오자 안하니까 낟가리를 크게 만들어놓았다. 그속에 뭐가 들어있든간에 낟가리 제일 꼭대기에 조이단 몇단을 얹어놓지. 그러면 오고가는 사람들이 이 집은 잘산다 하거든. 그래서 딸들을 시집보내고 보면 빈털터리였다. 하하하…

주상록: 
간도땅에 와 한 고생 이야 더 말할데 있겠는가. 하여간 지금이야 세월이 좋아 잘살고있다.

북경대학 김훈 정리

*글의 맞춤법과 표기는 원문 그대로 두었다. (굵은 글씨 만은 옮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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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북경대학 김경일 교수 반도문제 칼럼 모음(한겨레, 내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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