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헌순, 녀, 1905년생
길림성 화룡현 화룡진 신원하남로 29번지 거주
나의 고향은 조선 함경북도 혜문이다.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지어준 이름은 최분돌인데 후에 농민들을 위해서 녀성공작할 때 부르기 좋지 않다구 전대장이 최헌순이라구 고쳐주었다.
조선에 있을 때 살림살이라는게 형편없었다. 그저 농민으루 있으며 숱한 고생을 했다. 우리 아버지 내 세살때 세상뜨구 우리 어마이 홀로 네남매를 자래우다가 내 14살때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때 참 고생스레 걸어왔다. 우리 어마이는 짐을 많이 이구 왔다. 짐이 뭐 좋은건 없었다. 그저 림시 먹을것으로 미시가루구 엿이구 이구 왔다. 그때 려관이란건 보이잖구 주막집이 있었다. 오랑캐령이란데로 오니까 그런 주막이 있었다. 거기서 되는대로 누워자구 미시가루를 풀어 요기를 한 다음 계속 걸었다.
오다가 보면 길옆 나무밑에 돌각담을 만들어놓은게 있었는데 그게 치성을 하는데였다.우리 어마이는 오다가 그런 돌각담을 만나면 두손을 마주 비비며 《술한 식기(식구)를 데리구 가는데 아무쪼록 무고하게 해줍시사, 많이 도와줍시사!》 하면서 그냥 절을 꿉석꿉석 하는것이였다.

중국에 금방 와서는 우리 삼촌집에 있었다. 우리 삼촌네는 저기 작은 혜문이란데서 살았다. 거긴 산골이라도 무서운 산골이였다. 거기 와서 보니깐 마음에 안들었다. 우리 삼촌네가 소개해서 조양천이란데루 이사했다.
조양천에 와서 허태준이란 길주사람네 토지를 부쳤다. 집은 새로 지었다. 조선서 한전만 부치다나니 여기 와서 처음엔 벼농사를 지을줄 몰라 애먹었다. 그래두 애쓴 보람으루 쌀이 그립잖게 살았다.
이 조양천 철길은 우리가 들어온후에 놓은것이다. 철길놓기전엔 생활이 괜찮았다. 물고기랑 먹으며 살았으니까. 일본사람들이 들어와서 철길을 놓으면서부터 그들의 압박과 착취를 받다보니 점차 살기가 어려워졌다.
어느해인가 우리가 금방 한해 농사를 다 짓고 낟알을 거두는데 일본놈들이 마차를 가지구 와서 두마차 골똑 실어갔다. 그러니 우리 집에 뭐가 남았겠는가. 한해 농사를 다 털리운셈이였다. 참,일본놈들처럼 악독한건 세상에 없다.
일본놈들은 부역도 많이 시켰다. 우리 집 령감도 동성비행장 닦는데 끌려나갔댔다. 그때 우리 시어마이(시어머니)가 편치 않아서 우리 령감이 못가겠다 하니 무조건 가야 한대서 할수없이 갔댔다. 령감이 가서 며칠 안돼서 시어마이가 병이 중해졌다. 그래 내가 장밤 걸어서 동성비행장에 가 시어마이가 당금 세상뜨는데 하며 울고불고하여 겨우 령감을 데리고왔다.

그런데 조양천어구루 오니까 쏘련군대가 온다 하면서 길 량옆에 사람들이 꽉 서있었다. 그 중간으루 쏘련군대들이 오는것이였다. 경찰서 문앞에 오니깐 경찰들이 말짱 총을 땅에다 눕혀놓구 칼두 싹 눕혀놓구 기척을 한채 서 있는것이 였다.
이렇게 광복을 맞이했다.
단경 정리
*글의 맞춤법과 표기는 원문 그대로 두었다. (굵은 글씨 만은 옮긴 이)
[연관글]
[자료] 북경대학 김경일 교수 반도문제 칼럼 모음(한겨레, 내일신문)
[조선족이민실록] 그 령감이 생전이므 좋은 얘기 많을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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