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성, 남, 1916년생
길림성 통화현 강전자향 민생촌 제1생산대 거주

길림성의 통화현(通化县), 환인현(桓仁县), 집안현(集安县)은 압록강을 국경으로 조선과 린접한 현들이다. 이곳은 조선족들이 제일 일찍 중국땅으로 이주한 지방의 하나이다. 력사기재에 의하면 1677년(강희16년) 청정부는 동북지방 류조변외(柳条边外)에서 “봉금”(封禁)정책을 실시했다. 그때 훈강으로부터 관전(宽甸)에 이르는 평지는 중립지대로 결정되였다. 즉 청한(清韩) 두 나라 국민은 이 지방의 땅을 써서는 안된다는것이다.

18세기말에 조선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의 압록강 배사공 계준범(桂俊范)이란 사람이 압록강, 훈강의 중국측 땅이 좋고 또 사는 사람이 없음을 알고 배를 던지고 강안에 올라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때로부터 조선이민들이 이 지방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곳은 또 조선이민이 중국땅에 와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1875년전후에 이곳의 벼농사가 시작되였다. 이곳에서 생산한 벼는 질이 좋아 줄곧 청나라 황제에게 바쳐졌다 한다.

나의 아버지는 조선 정주에서 살았다. 천주교를 믿었는데 왜놈들이 들어와 못믿게 하는통에 결국 쫓기여 중국으로 도주해왔다. 그때 아버지는 년세가 어떻게 되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30세였고 성은 안씨였다.

1910년 그때 이 부근에 스무나문호 살았다. 지금은 이 지방에 200호도 나마 되는데 거개가 1943년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내가 태여나서 지금까지 계속 벼농사를 지었는데 이 지방에선 청말(清末)부터 벼농사를 시작했다. 그러니 아버지가 이곳으로 오기 퍽 전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였던것이다. 나는 이곳 태생인데 여태 사방 백리를 떠나본적이 없다. 제일 멀리 갔다는것이 일본놈 길닦기에 붙잡혀갔을 때의 80리였다.

그때 이야기라야 슬픈 이야기뿐이다. 해방전에 나는 혼자서 25무 밭을 부쳤다. 농사는 잘되였다. 허나 가을이면 이리저리 뜯기고나면 남는게 별로 없었다. 어느해 설인가는 빚을 채 못물었다고 지주가 와서 바리까지 몽땅 빼앗아갔다. 분해도 해볼데가 없었다. 그때 맏매부와 같이 살았는데 맏매부가 지주집에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저녁녘에야 바리를 찾아왔다.

그때 옷은 베천을 짜서 해입었다. 누에도 쳤는데 누에실로 만든 솜을 “꿀솜”이라 했다.

명절때가 되면 우리 조선사람끼리 모여앉아 때도 같이 먹고 또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다.

우리 아버지때는 한족지주들이 벼가 뭔지 몰랐다. 가을걷이를 해놓고 입쌀을 한족지주한테 바치니 이게 뭔가, 싫다 했다. 그래서 한번 밥을 해서 먹어 보라구 했더니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곡식도 있는가 하며 이듬해 이곳 조선사람을 조선에 보내여 사람들을 많이 불러다 벼농사를 짓게 했다. 그때로부터 이곳 쌀은 우리도 못먹어볼 때가 많았다. 청나라 황제에게 바친다, 만주국황제한테 바친다 하면서 죄다 끌어가군 했다.

이곳은 일본놈들이 들어오기전엔 들짐승도 많았다. 그리고 산비탈은 모두가 소나무밭이였는데 왜놈들이 그좋은 소나무를 몽땅 찍어갔다. 지금은 나무도 없고 짐승도 구경할수 없다. 앞강에 그렇게 많던 뱀장어(腮鱼)도 온데간데없다.

북경대학 김훈 정리

*글의 맞춤법과 표기는 원문 그대로 두었다. (굵은 글씨 만은 옮긴 이)

[연관글]

[자료] 북경대학 김경일 교수 반도문제 칼럼 모음(한겨레, 내일신문)

[조선족이민실록] 그 령감이 생전이므 좋은 얘기 많을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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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민실록] 002. 김정록 가족(길림 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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