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강철 가족, 남, 1914년생.
길림성 도문시 월궁가 3위 1조 36호 거주
나는 쏘련 홀룡포라는 곳에서 태여났다. 나의 아버지가 조선땅에서 애국운동을 하다가 실패하니 쏘련으로 피해갔던것이다. 그때 조선은 왜놈들의 박해가 심했고 또 먹을것도 변변치 못했다.
쏘련에서의 생활형편도 역시 곤난했었다. 밭에는 귀밀, 채밀, 콩을 많이 심었다. 조선에서 가만히 벼종자를 얻어다 벼농사도 해보았는데 그렇게 잘되지 않았다. 어쩌다 잘될 때가 한두해 있었다. 그곳은 음력 7, 8월이면 벼가 여물었다.
내가 아홉살나던 해 즉 을추년(옮긴이 주: 乙丑 1925년, 출생년과 약간의 차이 있음) 10월에 우리 집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보니 발붙일 곳이 없어 길주에 있는 삼촌집에 가서 몇년 같이 살았다. 생활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좀체로 펴일줄 몰랐다. 그때 짚신을 신고 다니면서 남들이 신은 고무신이 그토록 부럽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 편지를 했다. 그때는 북간도로 가면 잘살수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고 또 마침 우리 친척들이 북간도 구도구(九道沟)에서 살고있었으니까. 편지를 띄웠더니 얼마 안가 회답이 왔다. 좋은것은 못먹어도 배불리 먹을수 있고 손님이 오면 기장밥은 대접할수 있다는것이였다. 하여 우리는 음력 10월에 간도로 떠났다.
그때 회령에서 삼봉까지, 삼봉에서 로두구까지 철길이 놓여있었다. 조선사람들은 먼길 떠날 때면 미시가루를 닦는다. 우리는 집에 있는 쌀을 빡빡 긁어서 미시가루를 만들어 메고 이빠진 쪽박을 둬개 차고 북으로 걷기 시작했다. 길주 장백면부터 걸어 명천, 라진을 지나 회령까지 걸었다. 옹근 엿새를 걸었다. 길에서 먹은것이란 랭수에 미시가루였고 잠은 길옆에서 쪼크리고 잘 때도 있었고 사람없는 농막에 들어가 잘 때도 있었다. 우리는 가지고 떠난 려비 몇푼으로 회령에서 차를 타고 삼봉까지 왔다.
구글 지도(맨 밑이 '길주')
두만강을 건너 간도땅에 들어서자 아버지 어머니는 돌아서서 강건너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언제 조선땅을 다시 밟아볼가!》, 《잘살아가지고 꼭 돌아가야지!》하고 눈물을 흘리며 자꾸자꾸 되뇌이는것이였다. 그때 나어린 나는 간도땅이 어디나 다 컴컴해보여 막 무서워나는것이였다. 똑마치 못올 곳으로 온것 같은 그런 기분이였다.
다리를 건너고나니 모두들 다리가 퉁퉁 붓겨나서 걷기가 몹시 힘겨웠다. 게다가 음력 10월말이라 날씨가 몹시 추웠다. 우리는 기다싶이 해서 지금의 조양천(朝阳川)까지 왔다. 그때 조양천이란 곳은 스무호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이였다. 게다가 눈까지 가득 내려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조양천에서 구도구까지는 소수레를 삯내여 더는 걸을수 없게 된 녀성들과 어린애들을 싣고 갔다. 이렇게 하여 끝내 친척들이 살고있는 구도구 채령(菜岭)에 도착했다.
이곳 사람들은 인심이 참으로 후했다. 조선에서 이민들이 들어오면 이집저집에서 강냉이며 감자며를 몇마대씩 모아서 가져다주군 했다.
한데 무진년(戊辰年[옮긴이 주: 1928년])부터 흉년이 들었다. 기사년(옮긴이 주: 己巳 1929년)엔 농사를 하려 해도 먹을것이 있어야지. 그래서 집집마다 한사람씩 로두구 큰지주네 집으로 량식 꾸러갔다. 지주는 뜬 수수를 얼마간씩 뀌여주었다. 하도 먹을것이 없어 산에 가 쑥을 뜯어다 쑥떡을 해먹었고 다 캐여간 감자밭을 뚜지고 또 뚜졌다. 짚신을 신고 눈속에서 배추뿌리를 캐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진저리를 치게 된다.
해방이 날 때까지 이렇게 헤아릴수 없는 고생을 하며 살았다.
북경대학 김훈 정리
*글의 맞춤법과 표기는 원문 그대로 두었다. (굵은 글씨, 밑줄과 옮긴 이 주는 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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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북경대학 김경일 교수 반도문제 칼럼 모음(한겨레, 내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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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민실록] 006. 박춘협 등 5인(도문 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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