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교영, 남, 1925년생
길림성 안도현 명월진 흥화촌 거주
나는 열네살에 부모를 따라 조선으로부터 중국으로 이주해왔는데 그제의 피눈물어린 수난의 력사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있다.
나의 옛집은 원래 조선 경상남도 협천군 가회면 월계리에 살았다. 한심한 심산벽촌이였다. 나의 아버지 리기일은 선조의 피땀이 슴배인 문전옥답을 왜놈들에게 빼앗긴뒤후 사당패에 가담하여 꽹과리수로 만방을 떠돌아다니며 집에 있지를 않았다. 나는 여섯살적부터 어머니따라 남의 집 삯일도 하고 호구할수 없어 바가지를 들고 동냥을 다니기도 하였다. 내가 여덟살적에 아버지는 광대놀이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왔다. 온 집 다섯식구는 한 친척집 사랑칸에서 살게 되였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남의 집 머슴질하면서 쪽지게로 식량을 지여나르고 소를 먹이고 하면서 근근득식하였다.
내가 열네살되던 해, 즉 1938년 정초에 우리 경상도에서 개척민을 뽑아 만주로 집단이주를 보내는 바람이 일어났다. 왜놈들은 만주에 가면 땅이 많고 집도 있어 잘살수 있다고 버쩍 선동하였다. 나의 부모는 땅 없는 고생을 모면하고 참말 «락토»가 있겠는가 하여 이주민으로 떠날것을 신청하였는데 과연 며칠후 인차 비준이 내렸다.
우리 집에서는 나의 부모, 나, 나의 녀동생, 동생 모두 다섯 식솔이 떠났다. 나의 조부모는 정든 고향이 하도 아쉬워 떠나지 않았고 여러 자손들과 눈물로 석별하였다. 우리는 고향 월계리에서 15리 걸어서 가회면에 이르렀고 거기에서 트럭에 실려 2백리가량 떨어진 대구에 도착하여서야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 가지고 떠난 가산이란 절구방아, 쪽지게, 호비, 쪽박 같은것뿐이였다. 협천군에서 40세대 떠났는데 대구시에 모인것이 도합 2백세대였다. 대구에 이르면서부터 10세대씩 한반을 무어가지고 개별행동을 취하지 못하게 하였다.
기차 타고 사흘이 지난 뒤에야 두만강 건너 개산툰에 이르렀다. 3월이라 하지만 산설고 물선 만주의 땅은 눈보라 몰아치는 백설의 산야였다. 베옷과 무명홑옷바람으로 떠난 우리는 추위에 떨며 후회와 원망의 눈물을 뿌리였고 기편당해 이국땅에 오는 망국노의 설음을 가슴아프게 느꼈다. 안도현 명월구에 와서 기차에서 내린 다음 만척회사 마당에 모여갔다. 거기에서 분배한데 의하여 백세대는 복흥향으로 향하고 다른 백세대는 장흥향으로 향하였다. 장흥향에 백세대중 40세대가 주가촌(오늘의 52촌)에, 60세대가 도안구(島安溝)에 와 정착하였다.
나의 일가는 도안구로 가게 되였는데 우리는 명월구에서 하루밤 묵은 다음 달구지에 짐을 싣고 산골길에 들어섰다. 왜놈들이 만주를 «비옥한 무산천지»요, «호의호식의 락토»요 하던 선전은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였다. 가자니 태산이요, 돌아서자니 숭산이라, 첩첩산중을 걸으며 우리는 설음에 겨워 울음을 터치였다. 명월구에서 도안구까지 약 50리가량 되는네 골짜기 내물가는 거치른 갈밭이요, 산은 산마다 우중충한 원시림천지였다.
도안구에 도착한 우리는 남의 집 방에 들게 되였고 만척회사에서 선대해주는 좁쌀 한마대씩 탔다. 조선에 있을 때는 적어도 이밥이나 보리밥을 먹었는데 여기서에 와서는 조밥이나 감자를 주식으로 해야 했다. 채소란 주로 배추시래기나 무우오가리밖에 없었다.
우리가 도안구에 도착한 날이 3월 25일로 기억된다. 도착한 사흗날부터 집집의 세대주들은 동원되여 집을 지어야 했다. 산마다 나무숲인지라 나무를 베여 그 자리에 초옥을 지을수 있었다. 나는 날마다 어머니와 같이 괭이와 삽으로 생땅을 파서 밭을 만들고 씨앗도 뿌리였다. 처음에는 주로 감자농사를 하고 옥수수와 콩도 조금씩 붙이였다. 골짜기에 논을 풀고 벼농사를 한것은 몇년 지난후부터였다. 만척회사에서 두집에 소 한마리씩 쓰라고 빌려줬지만(후에 돈을 물기로 하고) 시초에 소와 소수레를 쓸줄 모르는 우리 《경상도치》들은 그냥 이전 멋대로 쪽지게로 행사하였다. 50리밖에 있는 명월구에 가 식량을 타와도 그 쪽지게로 지여왔다. 강기슭의 좁다란 벌을 가대기와 곽지로 개척하고 점차 논을 풀었다. 겨울에는 숯구이를 하여 만척회사의 빚(소, 씨앗, 식량빚)을 물어야 했다.
1940년부터 집단부락을 만드느라 토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산골에 공산군이 오는것을 막기 위함이란 하였다. 우리는 왜놈들의 강박에 의해 사득판의 초탄덩이를 뜯어다 마을 둘레에 토성을 쌓아올리고 네귀 모통이에는 또치까를 쌓았으며 토성밖에는 깊다란 웅덩이까지 파놓았다. 남북 두 대문밖에 통로가 없고 밤이면 자위단들이 보초를 섰다. 나의 아버지와 나도 이런 부역에 동원되어 왜놈과 만군의 이중압박을 받으며 갖은 인생고를 다 겪었다.
1945년 정초, 나는 징용훈련반에 뽑혀 명월구에 가서 훈련받는 기간 왜병들의 모진 구타를 받았다. 나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민적을 다시 해오려고 경상도 고향을 갈 차비로 집의 소까지 다 팔았었는데 그만 툰장한테 발각되는통에 성사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해 3월에 제3기생 징병훈련반에 뽑혀 흑룡강성 할빈에 실려갔다. 거기에는 3천명 청년이 강제병으로 나갈 긴급훈련을 받고있었다. 거기서 굶주리고 매맞으면서 피골이 상접하게 된 나는 왜놈들의 대포밥이 되고말리라 근심하던중 다행히도 8.15해방의 덕을 입었기에 귀향의 길에 올랐다. 란리판에 기차가 통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겨우 트럭에 몸을 싣고 사흘밤낮 부대낀 끝에야 구사일생 환고향하여 그립던 부모처자와 상봉하였다.
해방후 나의 일가는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였다. 1948년 새마을이 서면서 우리 집도 도안구를 떠나 새마을에 와 살기 시작하였다. 사망된 나의 아버지, 어머니 무덤은 모두 도안구 남산 묘지에 썼다. 우리는 모두 7남매였는데 각기 제갈길을 갔다. 내가 맏형, 한평생 도안구골안에서 농사를 하다가 작년에 흥화에 이사왔다. 둘째(남)는 1947년에 참군하여 중국해방전쟁에서 공을 세웠고 항미원조전투에서 희생되였다. 셋째(녀)는 해방직후 공주령에 가 살다가 인차 남조선으로 나갔는데 지금 부산에서 살고있다. 넷째(남)와 다섯째(녀)는 1963년도에 수속을 거치고 조선으로 나갔는데 지금 황해도에서 사업하고있다. 여섯째는 명월구에서 가정주부, 일곱째(남)는 안도현 모 공장 공장장이다.
나는 아들 넷, 딸 둘을 두었는데 그중 셋이 안도현내에서 사업하고있으며 셋이 도문, 조양천, 오상현 등지에서 각기 다른 사업에 종사하고있다. 나는 지금 넷째아들과 함께 흥화촌에서 새 기와집을 사놓고 만년을 지내며 자손들의 공부를 받들어주는 한편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민속놀이를 이어주기 위해 남은 힘이나마 바쳐가고있다.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꽹과리수로 계속 활약하고있는데 지금 타곳에 이사해왔지만 새마을에 중요한 민속놀이가 있으면 거기 가서 활동에 가담하며 지휘를 감당한다. «문화대혁명»의 역경속에서도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꽹과리를 우리 집 지붕에 감추어 살궈냈다.
1989년 나는 로친과 같이 남조선에 친척방문 갔을적에 옛고향인 경상도 협천군 조부모의 무덤을 찾아 참배를 올렸고 대숲과 칡넝쿨이 우거진 고향집터에서 기념사진도 찍었고 그 걸음에 또한 돈도 벌어가지고 왔다. 첫번째 고향에 대한 정도 잊을수 없겠지만 나는 자기 손으로 개척하고 가꾸던 이곳 두번째 고향이 더욱 그립고 또 수십명 혈친들이 모여사는 곳이 더욱 좋다고 생각하기에 이곳 백두산기슭에서 계속 만년을 즐겁게 보내고있다.
(김응준 정리)
*글의 맞춤법과 표기는 원문 그대로 두었다. (굵은 글씨, 밑줄과 줄바꿈은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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