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택, 남, 1925년생
길림성 돈화시 민주가 연하위 1조 거주

나는 충주 김씨인데 고향은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삼가면 조동당 채동이다.

채동은 30여호가량 되는 인가가 산밑에 군데군데 널려진 부락이었는데 마을에 하대벌로 내려가는 작은 강이 있었다. 워낙은 살기 좋은 고장이였는데 일본놈들이 들어와 땅을 강점하고 토지세를 받아내면서부터 살기 어려워졌다. 우리 부모들은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소작농질하면서 나무장사까지 했지만 살림은 점점 쪼들리기만 했다.

그때 간도는 땅이 흥하고 지주의 소작료도 조선보다 낮아 살기가 아주 좋은 곳으로 알려져있었다. 그래서 1930년 정월에 아버지가 사촌형을 찾아 중국 룡정시 동불향에 이사자리 보러 왔다. 아버지를 반갑게 맞은 큰아버지는 소작농질해도 조선에서 하기보다 만주에서 하는것이 낫다, 죽을 먹으나 밥을 먹으나 한곳에서 살아야 할게 아니냐 하면서 어서 이사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해 2월하순에 우리 온집식구가 아버지를 따라 채동에서 북간도를 떠났다. 아버지는 소발구를 얻어서 솥, 나무함지, 바가지, 누데기 따위를 실었다. 나와 동생은 쪽발구에 앉고 부모님들과 형님들은 걸었다. 하루 걸어서 길주령을 넘어 길주역에서 차를 타고 회령까지 왔다. 삼합에 건너온 뒤 소수레를 한대 얻어서 짐을 싣고 눈보라 휘몰아치는 오랑캐령을 넘어 룡정에 왔다. 거기서 하루밤 자고 이튿날 삼봉동령을 넘어 조양천을 거쳐 동불사에 도착하였다. 5호 동네에 이사짐을 부리운 우리는 남의 헛간을 손질하고 들었다.

우리는 한족대지주 조가네 땅 2000평을 소작맡았다. 쌀 한섬을 꿨는데 가을에 갚을 때 대두 세말을 더 주기로 하고 꿨다. 소는 지주의 소를 가을에 쌀 한섬을 주기로 하고 밭갈이철만 쓰기로 하였다. 아버지가 농사를 하는 한편 어머니는 지짐장사를 했다. 

그런데 첫해에 농사를 늦게 시작해서 벼가 잘 여물지 않았다. 탈곡을 하니 낟알이 얼마 안되었다. 한데 지주의 아들들이 권총을 차고 탈곡장에 나와 소작료와 빚을 바치라고 눈을 부라리는바람에 그걸 다 바치구나니 빈털터리로 됐다. 

살림이 막막하게 되자 아버지는 그해 음력 11월초에 고향에 돈부조를 받으러 나갔다. 허나 고향형편도 말이 아니라 아버지는 말도 못하고 소발구를 빌어 나무장사를 했다. 한편 어머니는 해산한지 일주일만에 지짐을 구워 팔아서 쌀을 샀다. 끼니를 잇기 위하여 어머니는 시집올 때 가지고 온 다리미로 좁쌀 한말을 바꿔온 일까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고향에 간 아버지가 글쎄 일본놈들한테 지하당원으로 지목받아 경찰서에 잡혀가지 않았겠는가! 아버지는 죽게 맞아서 아래웃이가 몽땅 부러지고 얼굴에 피멍이 들었다. 경찰서에서 나온 아버지는 피를 토하며 앓다나니 청명절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 아버지가 일을 못하는바람에 농사가 잘못되자 지주는 땅을 뺏아갔다. 그래서 우리는 외삼촌이 있는 화룡시 두도구 아동촌에 가서 지주의 헛간에 들었다. 그때 큰형님은 그만 촉한에 걸려 거의 죽다가 침구로 살아는 났지만 일시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고마이(고등어)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했고 11살인 둘째형님과 8살인 나도 일하러 다녔다. 그해, 영양실조로 앓던 동생은 의사가 약 한알이면 산다는것도 돈이 없어 못사먹여 그만 죽고 말았다. (이 일을 어머니는 평생을 두고두고 외웠는데 림종시에도 외웠다. 실로 한뉘 한이 된것이였다.)

1933년 5월 16일, 병석에서 신음하던 아버지가 끝내 피를 토하고 저주로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엿장사에 고마이장사로 무거운 가정부담을 떠멨다. 그해 로동력이 없어 기음을 못매다보니 논이 묵었다. 가을에 지주에게 주자를 갚는데 두말이 모자랐다. 허군직지주는 그걸 빚으로 매겨두고 땅을 빼앗았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룡정 외사촌누이 소개로 팔도구에 이사갔다. 외삼촌네 집에서는 내가 1년동안 소 두마리를 먹여준 품값으로 닭 여섯마리를 주었다. 우리는 그 닭을 판 돈 3원 70전으로 밑가루 한포대를 샀다.

그후로 큰형님과 둘째형님, 나까지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등짐으로 팔도시내에 가져다 팔았다. 한달동안 나무장사를 해서 어머니가 순대장사를 할 밑천을 만들었다.

어머니가 장사를 하게 되자 맏형님은 광산로동자로 들어갔다. 둘째형님과 나는 김도 매고 팔도금광에 가 등짐으로 버럭을 져내기도 했고 나무를 해다 팔기두 했다. 큰형님과 둘째형님은 광산에서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 후에 예약금 10원을 받고 소풍만수력발전소건설공사장에 갔다. 거기서도 돈을 못벌고 도망하여 왕청에 갔다. 거기서 목재채벌을 했다. 허나 역시 돈을 벌지 못했다. 그후 순사질을 하라는걸 일본놈들 주구노릇이라구 거절해버렸다

집살림은 점점 어려워만 갔다. 할수없이 어머니는 두부장사를 시작하였다. 내가 땔나무를 해오고 어머니와 같이 매돌을 갈았다. 둘째형님은 하루에 좁쌀 서되를 받으면서 정미소에 들어가 기계를 보았다. 

그해 나는 팔도금광의 소년공으로 들어가 질통을 져날랐다. 별로 크게 보탬이 못되는지라 나는 참외철에 어머니와 함께 참외밭에 가서 참외를 사서 허리에 띠고 등에 지고 해서는 시가지에 가져다 넘겨팔았다. 

1939년 2월하순에 우리 집은 또다시 아동촌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서 송지주네 땅을 소작맡고 그 집 한칸을 빌려들었다. 한데 그 이듬해 3월초에 송지주는 안쪽에 있는 아들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밤중에 우리보고 집을 내라구 했다. 우리는 별수없이 밤중에 쫓겨나서 웃마을 김진사네 사랑방에 들었다. 송지주는 땅마저 뺏아 먼 친척에게 주었다. 할수없이 우리는 두도에서 제일 큰 지주였던 주로삼의 땅을 8천평 소작말았다. 그때 강건너에 룡문소학교가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몇이 못다녔다. 주로삼의 아들은 반벙어리소릴 하면서두 신사옷차림을 하구 구두를 신고 우쭐대였다. 그놈이 구두를 신구 소작농 아이들의 맨발을 꽁꽁 밟아놓군 했으나 누구나 아프다는 말도 바로 못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여름이면 일본놈들이 집단부락을 만들면서 산재부락을 없앴다. 둘째 형님은 인부로 뽑혀 장인강 십리평에 가서 부락주위에 토성을 쌓는 일을 하였다. 일본놈들은 인부들에게 토성밖에 깊이 2메터되는 홈채기를 파구 물을 대게 했구 뾰족한 나무꼬챙이를 촘촘히 꽂아놓게 하였다. 

1943년, 큰형님은 근로봉사대에 끌려나가 조양천에 가서 2년이나 일했다. 그해 겨울에 나는 낮에는 나무를 해서 팔구 저녁이면 정태렬, 한정호 두 친구와 함께 소학교 졸업생인 채택선을 찾아가 글을 배웠다. 석유등불밑에서 배웠는데 동지달부터 이듬해 한식까지 배웠다. 

1944년 2월에 룡정 말발굽산밑에 있는 룡정 간도농민도장에서 학생모집이 있었다. 나는 학생모집하는데 갔댔는데 일본글을 몰랐지만 벼모를 키우고 논물을 보는 기술이 있었길래 그 학교에 들어갔다. 나는 학교에서 벼모키우기, 비료주기, 논물보기 등 농사기술일을 책임지고 포전에 나가 일했다. 그땐 일본놈들이 대동아전쟁에서 망하게 될무렵이여서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고 일만 시켰다. 

나는 이 학교에서 2학년을 다니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연길 연변일보사 김문일 정리

*글의 맞춤법과 표기는 원문 그대로 두었다. (굵은 글씨, 밑줄과 줄바꿈은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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