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종호, 남, 1920년생
길림성 룡정시 동성용향 평안촌 거주

나는 공주리씨인데 고향은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 주름면의 한 편벽한 산골마을이다나의 큰아버지는 리춘삼과 리인삼이었고 아버지는 리원삼이라 불렀다내우엔 형님 리장활리장은리장묵이 있었고 아래로는 동생 리장록리장권이 있었으며 누이동생 둘이 있었다두메산골인 고향마을은 인가가 20호쯤 되었다그때 두 큰아버지네 식구까지 우리 온 집은 식구 스물이 거의 됐지만 손바닥만한 땅도 없어 지주네 땅을 부쳤다

그런데 그놈의 땅이라야 떡돌같은 돌덩이가 울퉁불퉁한 비탈밭이어서 풀도 잘 자라지 않는데 곡식이 잘될수 있었겠는가그런데다 한정보나 둬정보되는 밭에 귀밀을 심어 거두면 지주가 7, 8할 잘라가구나면 죽을 멀겋게 쑤어먹어도 보리고개를 넘기기 바빴다그러나 별수없이 도라지세투리(사라구), 미나리 같은 나물을 캐다가 먹으면서 생계를 이었다

집이 헐망하여 겨울이면 어찌나 추운지 아버지가 부지런히 뒤산에 가 나무를 해다가 불을 달고있어야 했다아버지는 힘이 어찌나 셌던지 땔나무를 할 때면 남들처럼 낫이나 도끼를 가지고 다닌적이 없었다팔뚝만큼만 생나무도 두손으로 꽉 쥐고 밀면 뚝뚝 끊어졌고 다리만큼 실한것도 어깨를 대고 밀면 언나무 밑둥이 뚝뚝 끊어졌고 어떤건 뿌리채로 뽑혀 나왔다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모두 나의 아버지를 꼬리없는 황소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힘을 믿구 부지런히 밭을 가꾸었고 겨울이면 땔나무를 해다가 팔아 좁쌀이나 사서 보태면서 살아가려고 애썼다그런데 일본놈들은 우리 고향 마을까지 들어와서 제 마을의 나무마저 하지 못하게 하였다밭도 없는데 땔나무도 못하는 판이니 어떻게 살수 있었겠는가.

그때 일본놈들의 잔혹한 압박과 조선 지주들의 혹독한 착취를 피해 땅이 넓은 중국 만주로 가는 사람이 많았다듣는 말엔 중국은 땅이 넓은데다 지주들이 소작료를 절반밖에 받지 않는다는것이였다그래서 우리 일가는 1929년에 가마를 빼 지구 보짐을 싸 이구 정든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왔다.

우리는 집도 없는데 식구가 많으면 살기 바쁘다고 두 큰아버지네와 갈라져서 지금의 룡정시 지신향 장재동 동북쪽에 있는 물박골로 왔다지금 물박골에는 마을이 없어졌다그때는 깎아지른듯이 우뚝 솟아있는 선바위 동북쪽으로 흐르는 강물에 물방아가 있었다아마 그래서 그 산골과 한 스무호 있는 그 마을을 물박골이라고 한것 같다.

첫해에 집이라는게 없어서 우리는 그 물박골의 조선족지주 리명률네 토굴같은 농막에 들어 살았다우리는 리명률네 밭을 세헥타르 일곱짐을 부쳤다.

나는 아홉살부터 세 형님들과 함께 한전기음을 맸다모두 스무살을 넘었거나 그밑에 간 형님들을 따라 기음을 매느라면 잔등이 물자루로 되나 다름없군 했다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따라 이른아침 해뜨기전부터 밭에 나가 기음을 맸다사래긴 조이밭고랑을 한고랑이나 매고 아침때가 되면 어머니가 집앞 언덕까지 올라와서 «얘들아어서 아침을 먹고 매라!» 하고 소리치군 했다어머님의 그 모습이 상금도 눈앞에 삼삼거리고 정다운 그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인제 돌아가신지 몇십년이 되고 내 나이 일흔이 다됐지만 자다가도 어머님 생각하면 눈물이 나군 한다.

땅을 믿고 산 우리는 땅동이를 쏟으면서 밭을 걸구려 애썼다그런데 원체 한심한 밭이여서 조와 콩을 심긴 했어도 잘되지 않았다그런대로 우리는 가을을 해놓았다.

그해 리명률저주는 우리 손을 빌어 땅을 더 걸구고싶었는지 소작료를 소출의 절반밖에 받지 않았고 이듬해도 계속 밭을 부치게 했다.

허나 그 이듬해 우리 집에서 둼두 내구 밭을 애써 다루어 곡식이 좀 잘된듯 같으니 7할로 소작료를 받고 우리를 3할만 가지라구 했다세번째해에는 소작료 8할을 내고 2할을 먹으라구 했다실로 조선의 지주나 만주의 지주나 욕심이 많기는 똑같았다아무리 힘이 센 아버지라도 그 많은 밭을 부지런히 가꿔두 열이나 되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다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밭기음을 매면서도 세투리나 민들레만 보면 캐서 허리에 찬 주머니에 넣군 했다그래서 집으로 올 때면 나물이 한주머니씩 되군 했다그걸 어머니가 데워(줴기를 해주면 먹고 주린 배를 달랬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 쌀이나 사려구(물론 일본놈들의 핍박이긴 했지만룡정으로부터 개산툰까지 소수레로 량곡을 실어날랐다그해 아버지는 남들이 둘이서 한마대씩 싣는 쌀마대를 한팔에 한마대씩 껴서 들어올렸다그래서 사람들은 떼도적을 막으려고 아버지를 언제나 맨 앞장에 서게 했다.

한번 소수레군들속에 일본놈한테 가서 아버지가 쌀을 덜어냈다고 물어넣은자가 있었다분이 치면 아버지는 어느날 그자식한테로 씽 달려가 쌀 일여덟마대를 실은 수레를 번쩍 들어 번져놓았다그걸 보고 술한 사람들이 혀를 홰홰 내둘렀다이 일로 하여 일본놈들은 삯전도 주지 않고 아버지를 내쫓았다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가마에 안칠 쌀이 없어 맴도는 어머니를 보고 화가 나서 드러누워 앓았다.

쌀이 떨어지자 아버지는 마른 팥을 하루에 두줌씩 씹어자시군 했는데 소화가 되지 않고 대변이 굳어져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파내야 할 지경이었다돈을 꿔가지구 병원으로 가자 해두 아버지는 변돈을 맡으면 망한다구 가지 않구 고통스레 앓다가 한많은 세상을 떴다아버지가 세상을 뜬지 얼마 안돼서 어머니도 갑자기 별스레 숨이 막혀 세상을 뜨고말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해에 다 잃은 우리는 큰형님과 아주머니의 말대로 물박골로 떠나서 지극의 룡정시 광신향 승지촌에 이사해갔다거게 간후 우리는 집이 없어 형제끼리 뒷산에 가서 나무를 끊어다가 대강 집이라구 지었다그런데 열세식구가 20여평방밖에 안되는 집에서 살자니 비좁아서 말이 아니었다엎친데 덮친 격으로 얼마 안되여 녀동생 둘이 다 홍진에 걸렸다낮엔 불그스름한 도드라기가 막 돋구 열이 올라 야단인데 먹을 쌀도 없는판에 어디에 돈이 있어 치료할수 있었겠는가결국 약 한알 먹이지 못하구 둘 다 저 세상으로 보내고말았다.

열다섯살나던 해에 나는 둘째 형님과 형수와 함께 지금 살고있는 룡정시 동성용향 평안촌 제4촌민소조로 왔다그때 이 마을에는 인가가 10여호밖에 없었고 마을주변에 논이 올망졸망하게 있있다그 논의 주인은 지주 김경화와 박주호였다우리는 림시 농막에 들어있으면서 박주호네 논 3헥타르 4무를 부쳤다그 논밭주변에는 버들이 꽉 들어서있었는데 우리는 쌀 한알이라도 더 얻자고 버들을 뽑구 논을 얼마간 더 풀었다그래서 만주에 와서 처음으로 밥술이나 얻어먹을수 있게 되였다.

나는 21살에 이 마을에 있던 정득현로인네 청혼을 받구 그 집 딸 정옥분이와 결혼하였다아마 내가 힘꼴을 쓰는걸 보고 그 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였다몇해후 우리는 아이가 있게 됐다한데 입은 하나 더 불었는데 지주가 소작료를 더 내라구 하지 일본놈들이 비행장일을 자꾸 하라지 생 죽을 고생을 했다.

그러나 몇해 안가서 광복이 났다.

지금도 가끔 옛날에 여기서 고생스레 살던 일과 산나물을 캐먹으면서 살던 조선의 고향마을이 눈앞에 삼삼히 떠오른다그럴 때마다 슬하에 33녀를 두고 행복하게 사는 오늘이 소중한게 새삼스레 생각히운다.

연길 연변인민방송국 김장혁 정리

*글의 맞춤법과 표기는 원문 그대로 두었다. (굵은 글씨, 밑줄과 줄바꿈은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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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북경대학 김경일 교수 반도문제 칼럼 모음(한겨레, 내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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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민실록] 002. 김정록 가족(길림 돈화)

[조선족이민실록] 003. 한희운 가족(길림 돈화)

[조선족이민실록] 004. 최헌순 가족(길림 화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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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민실록] 006. 박춘협 등 5인(도문 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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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민실록] 009. 백리호 가족 (통화시 강전자향)

[조선족이민실록] 010. 김진 가족 (룡정시 조양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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