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봉화, 녀, 1910년생
길림성 룡정시 렬사유가족 양로원 거주

내 고향은 조선 함경남도 원산시 명석동이다. 내 우로는 형제가 없구 열살아래인 동생이 하나 있었을뿐이다. 그래서 내가 열네살이 되자 우리 집에서는 남자 일손이나 얻자구 나보다 열살이나 이상인 데릴사위를 데려왔다. 한데 그 남편되는 사람이 늘 자기 집에 가있으면서 땔나무도 바로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할수없이 시집에 옮겨갔다. 시집이라는건 집도 없어서 남의 사랑칸을 얻어서 거기다가 구들을 놓구 셋째시삼촌네까지 함께 살았다. 거기서 근근득식으로 사는데 한번은 시누이가 와서 만주라는 곳에 가면 땅도 넓구 인품도 후하다고 하는것이였다. 그래서 만주로 갈 타산을 하고 시누이네가 사는 함경북도 계원군 고군원이란데 가서 중국 만주소식을 더 탐문했구 어떻게 들어온다는것까지 알았다. 

그게 1931년이었다. 우리는 이불에 입을 옷을 한데 꿍져가지구 짚신을 신은채 길을 떠났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밟으며 고향을 떠나느라니 자꾸자꾸 눈물이 앞을 가리워 뒤를 돌아보군 했다. (지금도 고향에 있을 때 일들이 자꾸 눈앞에 얼른거린다. 후–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에야 어찌 잊겠는가!) 

중국에 들어와서 돈을 많이 벌어가지구 인차 나가자 했는데 3년만에 그만 령감이 덜컥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나는 혼자 아들을 데리구 남의 집 머슴살이두 하구 이집저집 다니면서 삯일두 하면서 살았다. 후에는 또 심양가기전의 조양진이란는데 가서 왕가 성을 가진 지주네 집에서 머슴질을 했다. 그때 우리 머슴들은 소나 돼지 같은 생활을 했다. 우리는 무산에서 온 아주머니까지 셋이서 고방에서 잤는데 까래가 없어 가마니랑 깔구 헌누데기 이불을 덮구 잤다. 밥두 먹다 찌끄레기를 구들에서도 못먹구 땅바닥에서 먹었다. 우리 아이가 상우의걸 가리키면서 《엄마, 우린 저런걸 못먹소?》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못먹는다. 그건 어른들만 잡숫는게다.》라고 했다. 그래두 그 애는 자꾸 지주네 밥상만 쳐다보지 않겠는가. 언제 지주들이 다 먹고 남으면 먹겠는가구 말이다. 

한번은 여섯살되는 아들애가 장난친다구 글쎄 그 집 령감태기가 장작개비를 줴뿌린게 다리가 맞아 맞아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 애가 《엄마–》 하면서 우니 나도 같이 섧게 울었다. 잘버나 못버나 애비가 있으면 무슨 이렇겠는가싶었고 고향을 떠나 낯선 고장에 와서 이게 무슨 신세인가싶었다

그런데로 나는 지주집에서 부엌일두 하구 빨래질두 하구 집안일을 돌아가며 했다. 그런데 한족옷을 할줄 몰라서 글쎄 그 지주놈한테 쩍하면 욕을 먹었다. 

한번은 내가 병에 걸렸었다. 추운 동삼(겨울)에 강에 나가 빨래를 씻구 들어오니 으스스 춥던게 그날 저녁부터 병이 났다. 아픈것두 부엌에 내려가 일하다가 그만 눈앞이 핑그르르 돌아가면서 쓰러졌다. 같이 일하던 무산각시가 놀라서 지주한테 손시늉으로 일하다가 쓰러졌다고 알렸던 모양인데 그 지주놈이 글쎄 《저 작은 방에 끌어다놔!》 하였단다. 그리구는 죽으면 죽구 하면서 나에게 약 한첩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래서 무산각시가 생각다못해 지붕꼭대기에 굼벵이를 말리워서 달아맨게 있는걸 보고 내리워다 삶아서 들구 들어왔다. 내가 이게 무엇인가 하니 《언니, 이게 약이요. 이거 잡숫구 땀을 내면 일없다우.》 하였다. 별일이였다. 내 그 굼벵이국을 먹구 일어나지 않았겠는가

그후 우리 어머니와 같은 밀양 박씨인 사람이 나보구 《야, 아무래두 지주집 일을 할바 하구는 조선집에 가 해라. 말두 알구 풍속습관두 알구 하니 그렇게사 천대받겠니?》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훈춘으로 왔다. 

훈춘에 간 다음 나는 처음에 홍가 성을 가진 조선사람(소지주)네 집에 1년 반 있었다가 나와서 또 심가 성을 가진 사람네 사랑칸에 있었다. 그 사람이 내 고향이 원산이라니깐 자기네 강원도와 한고향이라면서 사랑칸을 내주어 가있게 된게다. 그 집 사랑칸에 있으면서 남의 벼두 베주구 빨래두 해주구 했다. 그러다가 생각해보니 그냥 그렇게 하루살이처럼 살아선 안되겠다싶어 후에는 탄광에 가서 석탄을 가리는 일을 했다. 

탄광의 석탄무지는 정말 높았다. 거기서 일본놈들이 딱따구리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우리 녀자들이 힘을 다 내서 해두 자꾸 안한다고 하면서 《바가야로》하며 그 망치루 툭 쳐놓구 툭 쳐놓구 하지 않겠는가. 지금 내 머리에 허물이 두개 있는데 그때 그놈들이 망치루 때린게다. 그때 탄광은 일본놈들겐데 일본놈들의 앞잡이질하는 조선사람두 있었다. 그 조선놈들 가운데는 일본놈들 못잖게 악한 놈두 있었다. 어떤 놈은 일본놈들에게 잘 보이느라구 더 못된 했다. 점심때가 됐는데두 계속 더하라구 지랄했다. 우린 그놈들이 간 다음 뒤손가락질하면서 《저게 한뉘 일본놈앞잡이질하겠는가, 아무때고 우리가 제 나라를 찾아가지구 잘살게 되면 저따위것들이 어쩌는가 보자!》라고 했다

이렇게 탄광에서 일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후에 아들을 군대에 보내구 나 혼자 고향에 돌아가려구 조선과 가까운 도문으로 나왔다. 도문에서 로비를 마련하느라구 성이 안가인 사람네 꾸리는 식당에서 일했다. 로비를 거의 마련했는데 그 집에서 한사코 권해서 령감을 했다. 그래서 영영 물앉아버렸다

그래두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 기차다. 더구나 항미원조에 나갔던 아들이 전사하여 그곳에 묻혀있음에랴! 늙을수록 더 사무치게 그립다. 그래서 내 언젠가 원장보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골회를 두만강에다 뿌려주오. 〈고향으로 가시우〉 하구!》 

(북경 중앙민족학원 김학철 정리)

*글의 맞춤법과 표기는 원문 그대로 두었다. (굵은 글씨, 밑줄과 줄바꿈은 옮긴이)

[연관글]

[자료] 북경대학 김경일 교수 반도문제 칼럼 모음(한겨레, 내일신문)

[조선족이민실록] 그 령감이 생전이므 좋은 얘기 많을겐데

[조선족이민실록] 001. 조봉학 가족(길림 훈춘)

[조선족이민실록] 002. 김정록 가족(길림 돈화)

[조선족이민실록] 003. 한희운 가족(길림 돈화)

[조선족이민실록] 004. 최헌순 가족(길림 화룡)

[조선족이민실록] 005. 엄동성 가족(길림 통화)

[조선족이민실록] 006. 박춘협 등 5인(도문 월청)

[조선족이민실록] 007. 권봉희 가족(안도 송강)

[조선족이민실록] 008. 리강철 가족 (도문시 월궁가)

[조선족이민실록] 009. 백리호 가족 (통화시 강전자향)

[조선족이민실록] 010. 김진 가족 (룡정시 조양향)

[조선족이민실록] 011. 리종호 가족 (룡정시 동성용향)

[조선족이민실록] 012. 김의택 가족 (길림성 돈화시)

[조선족이민실록] 013. 황치일 가족 (길림성 연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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