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자로서도 땅문서는 뜻밖이였다. 로인네가 2년을 함께 살면서 한번도 땅이 있다는 말을 한적이 없었다. 가만, 그럼 혹시 녀자가 영주권신청을 하려면 재산공증이나 통장증명이 있어야 된다고 했을 때 걱정말라고 하던게 이 땅문서때문이였는가? 땅문서로 재산증명을 해서 내 영주권을 해주려고? 그래도 딸인데 이 아침 땅문서를 가지러 온 딸을 그처럼 매몰차게 내치는걸 보면 오만정이 다 떨어지긴 했나보네? 하긴 아무리 자식이라도 하는 짓이 이뻐야 이쁜 법일테지. 녀자는 로인을 쳐다봤다. 로인은 굳어진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북어국을 휘휘 젓고있었다. 녀자는 로인한테 김치를 집어 건넸다. 로인이 김치를 저가락으로 받아 우걱우걱 입안에 넣고 씹는다.
"자네 영주권 신청한다는거 말이여, 준비하는 서류는 알아본겨?"
며칠뒤, 아침식사를 마친 로인이 휴지로 입을 닦으며 하는 말이다.
"네?"
녀자는 황급히 서랍을 들춰 종이를 꺼내 로인한테 건넨다. 로인이 돋보기를 걸고 녀자가 건네주는 준비서류가 적힌 종이를 들여다본다.
"자네 돈 가진거 있긴 있는겨?"
로인이 돋보기너머로 묻는다.
"그게 한 천만원정도는 어떻게 될것 같은데. 나머지가 영."
"알았어. 그럼 그 천만원을 내 통장에 입금을 시켜놔. 내가 나머지는 어떻게 융통을 해볼테니. 증명만 하고 돌려주면 되는거 아니여?"
"네, 천만원이 될지 모르겠는데 나머지는 어떻게 융통을 하시려구요? 그리구 아무래도 한동안. 그러니까 영주권이 허가되기전까지는 통장안에 돈이 있어야 될건데요."
"그래. 내가 알아서 해줄터이니 걱정말고. 그동안 자네가 늙은이 밥해주느라 고생 많았응께. 자식두 안거두는 늙은이를 거뒀으니 내가 그 보답은 해야지."
녀자는 보리차를 새로 가스불에 올려놓고 로인한테 당부하고 나서 집을 나섰다. 해빛이 뜨겁다. 녀자는 출근길에 은행에 들른다. 천만원이 조금 안되는 돈이 통장에 찍혀있다. 녀자는 주머니를 들춰 천만원을 맞춘다. 로인의 통장에 이체를 하고 나자 녀자의 통장은 바닥을 보인다.
"그려, 알았응게 시름놓고 출근햐."
"가족관계증명서랑 등본 떼여오시는거 잊지 마시구요?"
"그려."
로인이 낮게 대답한다.
녀자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흰 구름이 유유히 떠있다.
며칠전, 로인은 전에없이 밤늦게 들어왔었다. 항상 텔레비앞에 마주앉아 녀자의 퇴근을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로인이 그날은 녀자가 퇴근해서도 한참 지나서야 들어왔었다. 많이 지쳐보였다. 어데 갔다 왔느냐는 녀자의 말에 대답도 없이 자리에 눕더니 이렇게 련 며칠째 일어나지를 않고있다. 녀자가 어데 아프냐고 해도 대답도 없다. 병원에 갈거냐고 해도 부산떨지 말라고 힘없는 소리로 중얼거린다. 주민등록등본도 떼오고 영주권신청하러 출입국사무소에도 가야 되는데 왜 이러고 있는건지, 정말로 많이 아픈건 아닌지 녀자는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다.
"돈은 어찌됐어요? 돈은 구했어요?"
끄응. 로인은 다시 등을 보이며 돌아눕는다.
"제발 당신 말 좀 해봐요. 서류를 준비해갖고 언능언능 한다면서요. 아프면 아프다고 하구요. 병원에 가던가 자식들한테 련락을 하던가 해야지 누워만 있으면 어떡해요? 어떻게 된 일인지 말 좀 해봐요. 돈을 못 구한거예유? 그래서 병난거예유? 못구했어두 괜찮아요. 아직 시간이 있는데 천천히 구하면 되지. 그러니까 말이라도 좀 해봐유. 네? 아이구 답답해 미치겠네"
로인을 만나서 처음으로 녀자가 짜증을 낸다.
눈을 감은채 미간을 찌프리고 누워있던 로인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옷걸이에서 회색 홑잠바를 벗겨내 안주머니를 뒤진더니 뭔가를 녀자앞에 던졌다.
저축통장? 이걸 왜 나한테? 녀자는 의아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펼쳐들었다. 녀자가 로인한테 돈을 입금시킨 내역 바로 밑에 그대로 다시 돈이 출금된 내역이 적혀있다. 출금내역에 찍힌 이름은 이나연. 통장잔고는 달랑 25만원이 남아있다. 하늘이 노래진다.
"나연이 이 년이 하도 죽는 소리를 쳐갖고 나도 어쩔수가 없었어. 어른들은 그렇다쳐도 이제 세살배기가 에미애비 잘못 만나서 바깥에 나앉게 됐다는데 어떡혀. 엄마를 일찍 잃어갖고 이년도 차암 불쌍하게 컸어. 애비가 돼갖고 딱히 해준것도 없고 나도 갸한티 많이 미안혀. 그나저나 어떡혀. 내가 자네한티 미안혀서 어떡혀. 미안혀. 내가 미안혀. 자네 사정 알면서 내가 죽일 넘이여, 나 같은 로인네가 무에 좋다고 자네도 여까지 따라왔능가. 이왕 만날거믄 젊고 일 잘하는 놈 만나서 덕이라도 좀 보든가 아니면 돈이라도 많은 넘 만나서 돈이라도 좀 얻어쓰던가 했어야지. 아이구 복도 없는 사람아. 내가 첨서부터 자네를 내치는건데 나도 내 욕심땜시 그라지 못했어. 나도 따순 밥 얻어먹고 싶었구 사람이 그리웠다구. 그래두 일이 이렇게 됐으니 그렇지 내 맴은 그게 아니였어. 아들넘 장가갈 때 저 집 내가 전세 얻어준거니 그거 문서는 내놓으려니 하고 자네 보구 걱정말라구 한겨. 근디 며느리가 안내놓는디 어떡햐. 자네한테 영주권을 해주면 자네가 그날로 도망갈거라고 하드라구. 내가 아니라고 해도 통 안들어. 땅문서도 몇년전에 그넘이 아부지 돌아가시면 여러가지로 복잡하다고 해서 명의를 넘겨준건데 엊그제 전화를 넣어보니 지네가 사는게 힘들어서 것두 벌써 몇년전에 남 손에 넘어갔댜. 그나저나 자네 돈은 다치지 말았어야 했는디 나두 귀신한테 홀리웠는지 어떻게 그날 홀라당 가서 넘겨줘 버렸으니 어휴, 그걸 넘겨놓구 나도 내 손모가지를 자르고 싶었어. 자네를 볼 면목이 없어서 집에를 못들어 오겠어서 한참 밖에서 헤매다가 들어왔던거여. 이 사람아, 자네는 또 왜 그렇게 순해 빠져갖구 그 돈을 홀라당 나한테 넘긴겨. 허이구 어떡햐."
로인네가 더듬더듬 두서없이 변명을 한다.
녀자는 꿈을 꾸고있는듯 몽롱하다.
"나연이가 지 신랑이 돈을 융통해오는대로 자네 돈부터 넣어준댔으니 시일이 걸리더라두 받을수 있을겨. 조금만 기달려봐. 그 돈 안내놓으면 내가 이년집에 가서 들어누워서라도 받아올겨. 그러니. 허이구 그나저나 자네 괜찮은겨? 자네 병날가봐 그게 더 걱정이여. 마음 편히 가지게나. 자네 병나믄 안댜. 병나믄 절대루 안댜."
로인의 입술이 실룩인다. 뭐라고 중얼중얼 장황하게 말을 늘여놓는다. 로인의 눈빛은 무구하다. 뚤렁, 로인의 눈에서 맑은것이 굴러떨어진다. 어떤 사악함도 찾아볼수가 없어서 더 아득해진다. 로인은 녀자의 포개진 무릎에 두손을 올려놓고 흐느낀다. 이 순간, 녀자를 마주하고 앉아 울고 있는 로인은 힘없고 아무것도 할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잘못을 저지리고 용서를 구하는 아기 같다.
녀자의 눈에서도 맑은것이 굴러떨어진다. 아들애가 보고싶다. 할머니품에 안겨 눈물을 글썽이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볼을 부비고싶고 손을 잡고싶다. 로모가 보고 싶고 오래동안 잊고 있던 남편얼굴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녀자는 두눈을 감아버린다. 뭔가가 보인다. 뱀이다. 완전한 어둠도 아닌 어스름속에서 여러마리의 뱀들이 서로를 휘감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다. 주홍색의 얇고 가는 혀를 날름거리는 뱀들은 잔뜩 화가 나있는듯 몸뚱이를 세차게 꿈틀댄다. 대가리가 잘라진 뱀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피범벅이 된 몸뚱아리가 있는 힘을 다해 요동친다. 사이사이 누에고치같은 뱀대가리들이 몸뚱이를 잃은채 흩어져있는데 치켜뜬 눈은 녀자를 노려보고 있는듯하다. 오스스 몸이 떨린다.
녀자는 머리를 감싸쥔다. 로인네는 녀자의 울음을 말릴 생각도 못하는 양 녀자의 무릎에 얹은 두손만 간헐적으로 떨며 으으 신음소리를 내고있다. 윽윽. 녀자가 흐느껴 운다. 녀자의 어깨가 오르락 내리락한다.
번쩍, 하얀 빛 한줄기가 녀자와 로인사이를 찢더니 뒤이어 우르릉 꽝. 꽝. 우뢰가 운다. 후둑후둑 비방울소리가 들리고 커다란 물방울들이 창문에 맺힌다. 마을꼭대기 허름한 판자집이 비에 젖고 있다. 바람이 불고 날이 어두워진다.
비방울은 점점 거세여 진다.
글쓴이 하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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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가슴이 졸여져서… 재밋기는 한데 읽기가 좀 두렵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김기덕 감독 영화랑 비슷한 분위기가 있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