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진에서 북동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나진시의 관곡동이다. 그래서 나진에서는 어떻게 부르는 지는 몰라도 우리는 이 고개를 관곡 고개라고 불러 왔고 우리 회사는 고개 이쪽의 안화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회사의 초창기는 이 안화동에서 간고한 조건 밑에 말로서는 표현하기 힘든 노력으로 점차 잘 자리잡혀 가고 있었다.

아직 도장 작업까지는 안되었지만 허름한 건물이 있게 되었으니 일단 회사의 기본은 있게 된 거였고, 나진에서는 한다 하는 기능공과 정열적인 사무실 종업원들이 모여 들었으므로 회사 운영의 인력도 다른 회사와 짝지지 않았다.

선반으로부터 용접, 철판 다루는 일 모두가 능란한 이창현, 궂은 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수리 작업 잘 하는 남수남과 송정은 용철이가 반장을 맡고 있는 수리반에서 일했고, 부기실에는 일 깐지게 해내는 남연숙과 차춘화 두 출납원이 있었는가 하면 노동 지도원에 김정애, 무역 지도원으로 최영복 그리고 세관 신고원으로 김정화가 있다.

이들 모두가 일을 그렇게들 잘했다.

원래 합작 회사에서 조선측 사장이었던 차영감은 주로 버스 운행을 관리했으며 사실상 이모부가 모든 업무를 맡긴 것과 마찬가지어서 많은 일을 했었는데 조선 종업원들은 습관대로 계속 사장동지라고 불렀으나 우리는 그냥 아바이라고만 불렀다.

운전수와 차장은 각 11명씩 되었고 그 중에서도 김봉식 아바이와 이창주가 운전술이 뛰어났고, 차장 처녀들은 다만 화장품 신세를 지지 못했을뿐 본바탕 그대로 볼 때 다 예쁜 모습들이다.

얼굴도 예쁘고 일하는 맵씨는 더 예쁘게 보였다. 그만한 나이면 한창 낭만적인 연애도 하고 몸매도 잘 발육되어 있어야겠는데 연애 생활도 슴슴한 것 같았고 영양 실조로 키도 작았고 몸은 야위여 있어서 그 얼굴이 아까워서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어디서 무슨 힘이 나오는 지 일을 할라치면 그 여린 몸으로 남자 하나 당하는 양의 일을 해내군 해서 처음에 얼마나 놀랐는 지 모른다.

그 외에도 경비로 이일부 영감과 김용철(金勇哲)이 있었는데 김용철이는 금방 제대한 29세의 총각으로 아직 연애도 못해보았다 한다. 회사마다 한사람씩 교통 경찰을 도와 교통 질서를 유지하는 교통 관리원 1명씩 두었는데 서창화 영감이 그일을 하고 있고 얼굴 보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종업원 중에서도 사무실 종업원들이 제일 알쭌했었다. 운전수와 차장은 경우에 따라서 해고를 밥먹듯 겪고 있었고 노동당 세포 비서자리는 그때까지도 비어 있었다.

이제 침실에 있는 훈춘 식구들을 보도록 한다.

큰 이모부는 훈춘 M무역회사의 총경리로 있었기에 계속 총경리로 불리웠고 둘째 이모부는 창고장으로 있었으며 장용철(张龍哲)은 수리반장, 나는 전기 수리공, 영철이는 매장 판매원이다.

다섯 명은 침실에서 또 다른 분공이 있었다.

큰 이모부는 부엌에서 불 때기, 둘째 이모부는 밥 짓기, 용철이는 침실 청소, 나는 옷 세탁, 영철이는 땔나무 패기였다. 아침에는 나랑 영철이가 찦차로 샘터의 물을 길어 왔었다. 6월 달에 가서 수백미터 떨어진 골짜기 샘터에서부터 주방까지 수도관으로 연결하고 양수기를 놓아서야 이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자 없는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여자 종업원들의 손을 더러 빌려 썼으므로 식사를 포함한 거의 모든 생활이 기본상 보장되었다. 

그런데 전기가 제대로 공급이 안되었기때문에 가전을 제대로 사용하게 되지 않는다. 전기밥솥, 세탁기, 텔레비전은 거의 벙어리나 다름 없다. 특히 채널이 하나밖에 없는 조선TV프로조차도 시청하기 힘들었으므로 밤 생활이 제일 큰 문제였다. 다행히도 촛불과 마작이 좋은 친구로 되어 주었기에 괴괴하고 지루한 밤을 어렵지 않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가끔 TV를 볼 때도 있었다. 우리 회사 바로 앞에 보이는 산 정상에 중계소가 있었는데 전기 공급이 정상일 때 TV프로를 시청할 수 있었다.

전기는 나진에서 부분적으로 공급하거나 전부 정전될 때도 있었는데 후자의 경우를 두고 《6만 정전》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정확히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대개 나진 전기의 주요 인입선인 6만볼트의 고압선에 전기가 들어 오지 않을 경우 시내가 전부 전기 공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해했었다.

나진은 보통 선봉의 화력 발전소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았다. 일제가 30년대에 건설해 놓은 발전소인데 석탄 자원이 고갈되어 가고있는 상황이고 열효율도 높지 않기때문에 중유를 태운다고 했다. 중유는 발달한 나라들에서 석유를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로서 그네들한테는 쓰레기나 다름 없었으나 조선에서는 수입한 후 거기서 10%정도의 디젤유를 뽑아내고 남은 찌꺼기를 연료로 사용했는데 열효율이 상당히 높다고 한다.

디젤유를 제련할 때는 나진과 선봉군 대부분이 전기를 공급받아 생산에 지장이 없었으며 제련이 끝나면 발전소와 제련소 부근에만 전기를 보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밤에 관곡 고개 저쪽의 제련소 부근을 지날 때는 항상 불빛을 볼 수 있었으나 다른 곳에는 거의 매일마다 6만 정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디젤유는 품질이 안 좋아서 연유가 긴장한 조선의 차들은 더러 사용했지만 나진으로 다니는 중국차들은 절대 쓰지 않는다. 우리 찦차가 값이 싸다고 몇번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한번 연유 탱크로부터 모든 연유 파이프를 대청소 해낸 적이 있었다.

하여튼 조선은 나라적으로 연유와 전기 사정이 형편없이 안좋은 상황이었다. 원유를 사들인다거나 발전소가 새로 건설된다는 따위의 좋은 소식은 아예 하늘 멀리 놀러가 있는 모양인 지 도무지 귀에 들려오질 않았다.

1996년에 나진시와 선봉(先鋒)군을 합쳐서 《라진-선봉시 자유무역경제지대》로 명명했으며 1999년 연말에는 그 이름 중의 《자유》 두 글자를 빼냈고 2000년 가을에는 이 지역의 이름을 라선(羅先)시로 고치고 조선 사람과 중국인을 비롯한 모든 외국인들은 간단히 《지대》라고 불러 왔었다. 말하자면 중국에 있을 때는 나진이라고 말하고 나진에 있을 때는 《지대》라고 습관적으로 외웠고 나진 혹은 나선이란 지명을 거의 쓰지 않았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께서

“라진ㅡ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를 훌륭히 건설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지시한 적이 있어서 역경속에서도 심혈을 기울여 방방곡곡의 지원을 받으면서 건설이 진척되어 가고있는 중이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나진과 같은 성질의 경제 특별구거나 개발구를 건설하는 중에서 가장 큰 모범을 보여준 나라가 중국이었고 또 중국과는 이웃이었기때문에 중국의 경험을 어느 정도 본받고 있었고 경험 그대로 옮겨 놓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비사회주의적인(사회주의가 아닌) 경향도 더러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밀고 나가는 모양이었고 풍문에 조선 정책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게 선봉의 비파도 관광지 입구에 도박장도 건설한다는 놀라운 소식도 듣게 되여 정말 오리무중에 빠지게 되고 뭐가 뭔지 모르게 헛갈리는 느낌도 심심찮게 받기도 했었다.

전기 사정때문에 조선 국내의 기업소들은 생산이 거의 중지되다시피 됐고 자가 발전을 하는 경우 얼마간 생산이 보장되는 수도 있었다. 지대 안에서는 자동차용 배터리도 충전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대를 잘 건설한다는 것은 빈 말에 지나지 않는다. 외화를 벌만한 것은 관광업과 수산물 관계업밖에 없는 듯이 보였는데 관광업은 활기가 없었고 외화 수입은 주로 수산물에 의거하는 정도다.

게다가 자체 생산이 거의 정지된 상태에서 작은 것은 조미료로부터 큰 것은 가전에 이르기까지 가정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과 그밖의 대부분 상품은 주로 수입에 의해 해결하다보니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라는 걸 대뜸 보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개인 장사를 자본주의로 보았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엄금되어 있었으나 그래도 장사로 개인이 돈을 많이 벌고 있는듯 했고 그런 돈은 은행에 다시 돌아갈 줄 모른다. 저금소라는것이 얼마 없고 저금하면 본전도 찾기 힘든 금융 정책이라서 돈은 자체로 보관한다.

은행은 현금이 엄청 부족한 경우를 일년에도 여러 번 겪는듯 했고 2000년에는 500원짜리 고액권 지폐도 새롭게 나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것은 가혹한 통화 팽창일 수밖에 없었지만 조선 사람들은 통화 팽창이라는 개념마저도 모르고 있었으니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로 사는 처지마저도 세상 부러운 것 없는 아름다운 생활이고 자기 나라가 제일이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외국 방송을 듣지 못하며 외국인과 단독으로 담화하지 못하고 외국인 차를 타지 못하며 외국인 친척들과 만나려면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하고 외국인과 동석 식사를 못하며 개인 장사를 못하고…

그저 안타까운 일만 수두룩하다. 도둑질은 상습적인 것으로 되었고 남자들은 술 주정을 잘한다.

도난 신고를 하면 깔아두고 해결해주지 않았으므로 저주스럽기만 했고, 차 운전 때에는 주정뱅이와 개를 조심해야 했다.

교통 의식이 너무 차한 인민들과 차를 태워 달라고 길을 막아서는 군대들도 천만 조심해야 했다.

항상 간첩 투쟁을 하는 그네들처럼 우리도 신경을 도사리고 긴장하게 살았으니 그 피곤함이 어떠했는 지는 가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그런 피곤함이 지속되고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자질구레한 작업을 하는 동안 안화동의 봄은 깊어갔고 나는 점차 그런 생활에 습관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중학교 때 미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조선 예술영화 구경을 TV로 가끔씩 할 수 있었던 일이다. 훈춘에서는 내가 중학생이던 80년대 초에 TV가 보급됐고 그때는 훈춘에 중계소가 없었던 탓으로 조선 TV프로만 볼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 영화 구경 하는 것이 나한테는 제일 재미있는 일과였다.

이름 그대로 예술적인 것이 사람의 마음을 꼭 잡아주기 때문이었고 영화의 주제가도 빼놓지 않고 배워 두었다. 나진에 있는 동안 영화 배우들과 영화의 주제가를 너무 잘 알고있는 나를 두고 사무실 종업원들은 외국인이 아니라 나진에서 자란 사람으로 취급하기까지 하는 정도였다.

세상에 조선의 예술성을 따를만한 영화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인정한다.

후에 칼라 TV가 보급되고 케이블 TV가 들어오면서 중국의 수십 개 채널에 의해 조선 TV프로가 파묻혀져서 수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TV 하나로 가정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때문이었으나 10여년동안 영화의 줄거리와 노래 가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진은 이해부터 TV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내가 다 보지 못한 영화를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기때문에 오히려 나진이 10여년 전의 훈춘으로 느껴지면서 정이 드는 것이다.

더우기 소박한 인품이 마음에 들었고 청신한 공기와 아무데서나 만날 수 있는 샘물, 그리고 나진-원정 구간의 원시적인 자연미, 이 모든 것들은 내 마음의 상처를 소독해주고 아픔을 멎게 하는 좋은 약으로 되기에 너무나도 손색없는 것들이었다.

그 풋풋한 인정미와 무공해의 덕택을 부담 없이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니 내가 나진 사람으로 되지 않나 의심이 들 지경이다.

1999년 봄은 나에게 저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애착을 느끼게 했고 일할수록 신나게 만들었으며 고뇌와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어서 내 인생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는 등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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