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봄은 어느덧 다 가고 여름이 소리없이 다가왔다.

회사의 버스는 모두 11대였는데 4월 말까지 운행할 수 있는 버스가 7대로 되었다. 여름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머지 버스를 복구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운전수는 원래 맡은 차를 계속 운전하게 했고 차장은 일정한 시일을 두고 차를 바꿔 타게 규정했다. 나진은 그때까지만 해도 대합실 (버스대기실)이 없었고 지대 안의 어느 곳에든지 나진과 마찬가지로 대기실이 없었기에(지대 밖으로는 버스가 다니지 못했다) 다 차장이 현장에서 표를 파는 수밖에 없었으며 돈을 받고 표를 주지 않으면 그 부분의 돈은 차장이 챙길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운전수와의 파트너를 바꾸는 것으로 그 받아 들이지 못하는 수익금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려는 심사에서였다. 그래서 차장을 수시로 바꿀 때가 많았던 것이다.

했으나 일부 돼먹지 못한 차장들이 운전수들과 짜고 들어 수익금 중의 일부를 훔치는 현상은 내가 나진을 떠날 때까지도 근절되지 않았었는데 주요한 원인이 바로 대기실에서 직접 표를 팔지 못하고 후에 대기실을 새로 지어 놓았지만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진에는 원래의 자동차 사업소에 몇 대의 버스가 있었는데 이 기업소는 우리 회사의 전신인 나진 여객수송합작회사의 조선측 상대였다. 나진 여객수송회사가 단독 기업소로 된 후 조선 기업으로서는 버스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기업소였고 우리의 주요한 경쟁 상대였다. 그리고 나진 금컵 여행사에 버스 두 대, 선봉 운수사업소의 몇 대의 버스와 선봉 해양사업소의 버스 한대도 여객 수송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이 되었기 때문에 역시 경쟁 상대였다.

우리 회사의 우세는 지대 안에서 버스 보유량 중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것과 부품 공급이 원활한 것뿐이었고 정책적으로는 오히려 열세에 처해 있었는데 이제 여기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자.

외국인 단독 기업으로 나진의 여객수송 시장에 경쟁을 건 이상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그 주요한 고리인 수리 보장 문제도 풀려서 이젠 든든한 뒷심이 있게 된 상태이고 최대한으로 11대 차량이 다 경쟁 마당에 나갈 수 있으면 우리는 곧 경쟁에서 앞서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기업소의 차들은 부품에서 골탕을 먹고 있었다. 제일 큰 난제는 타이어였는데, 일본에서 넘어 온 중고 타이어는 값이 싼 반면에 닳고 닳아서 한대 당 하루에 몇 번씩 펑크가 났기 때문에 정상 운행이라는 건 도저히 보장될 수 없었다.

우리도 일본 중고 타이어로 수리반에서 매일 수십 번씩 타이어 작업을 하는 통에 그 아우성을 귀 아프게 들어오는 터였고 그 때문에 다른 작업도 엄청 많이 밀리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큰 이모부가 6월 달부터 중국 타이어 수입을 결심하고 조직해준 후로부터 타이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어 더 큰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심한 고장이라도 부품 공급이 잘 따라 줬기에 늦어도 3일 내로 버스가 다시 운행할 수 있게 보장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기업소의 버스들은 고장난 후 부품 때문에 적어도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다시 나올 수 있었는데 그 방면에서 일단 경쟁 상대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쟁 상대는 대략 일년이 지난 후에야 타이어를 비롯한 부품 문제에서 우리와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부품들은 다시 보수해서 쓰는 형편이어서 고장난 부품을 그냥 교체해 버리는 우리의 수준에는 줄곧 미치지 못했으므로 이 경쟁에서만은 우리가 많이 앞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책상에서의 불공정한 대우는 오히려 우리의 경쟁력을 약화시켰으며 지어는 훼멸성적인 실패를 겪을 번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먼저 합작 기업이 단독 기업으로 되었기에 번호판의 《합》자를 《외》자로 고쳐야 했다. 서류는 이미 다 들어갔고 5월초의 어느 하루 먼저 10대의 차량번호를 받아 왔다. 《라선ㅡ외ㅡ213》부터 《라선ㅡ외ㅡ222》까지었는데 3월에 약수터 사건을 일으켰던 버스는 5월 말에 먼저 《라선ㅡ외ㅡ127》을 가졌다가 몇 달 후에 《라선ㅡ외ㅡ223》으로 바뀌었다.

승용차와 찦차도 바꾸었는데 《라선ㅡ외ㅡ86》부터 《라선ㅡ외ㅡ89》까지 네 개 번호를 가진 후 찦차에(원래의 128호) 86호를, 도요다 승용차에(원래의 96호)에 88호를, 그리고 후에 살려낸 닛산 승용차에 89호를 달았고 벤츠 승용차에 87호를 남겨 두었는데 87호는 후에 끝내 사용하지 못했고 네 대의 작은 차 중에서 벤츠 차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이건 후에 언급하도록 한다.

15대의 차 중 11대의 버스는 《합》으로부터 《외》자 달린 번호를 받고 네 대의 작은 차도 원래의 번호를 바꾸어서 번호판을 발급 받아야 하는 데는 또 문제가 생겼다.

나진 차감독 사업소에서는 번호판을 만들 철판을 회사에서 자체로 해결해야 한다고 해서 중국에서 규격대로 철판 30장을 만들어 내갔는데 이 것을 금형 사이에 끼워 넣고 틀에 고정시킨 후 함마로 내리쳐서 찍어내는 것이었다.

글자와 숫자 하나에 금형이 하나씩이었는데 한번 내리쳐서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기에 여러 번 내리쳐 댔고 나중에 철판이 조금 찢어지는 때도 있었지만 너무 찢어지지만 않으면 합격된 셈,회사에 갖고 와서 판을 파란색 페인트로 칠하고, 글자는 하얀 페인트로 붓으로 그려야 한다.

자동차 번호판을 세계적으로 제일 원시적인 방법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글자 찍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작업을 재료로부터 다 자체로 해결했으니 억울했지만 그 후에도 여러 번 겪으면서 점차 습관 될 수 있었다.

번호판에서 가장 궁금한 건 작은 차 번호판인데 처음부터 《외》자였다. 버스처럼 《합》으로부터 《외》를 바꾸는 게 정상이겠는 데 말이다. 그 궁금증은 지금도 풀지 못했으며 거기에 깃 든 사연을 내가 모르기에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기기로 한다.

번호판을 정책 때문에 바꾸었으나 또한 우리에게 크나큰 시련을 안겨 주었고 그 충격 때문에 11대의 버스가 전부 저승 길에 오를 번했다. 바로 《외》자 달린 차에 내국인을 태울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의 버스 운행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보위부와 운수 관리국에서 연합으로 단속해 왔다. 이해 초여름에 회사는 준엄한 시련을 겪었고 회사는 설립된 지 두달 만에 파산 될 위기 속에서 몸부림쳐야 했다.

5월 중순 경에 버스 운행이 강제로 중지되었다. 단속하는 데 계속 운행하면 아예 차를 몰수해 갔으므로 우리 쪽에서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표면상에서 그네들이 일방적으로 운행을 중지시킨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으나 따져놓고 보면 회사가 조금은 돈을 벌게 되고 잘 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 같으니 질투한 나머지 고안해 낸 무지막지한 방법이었다.

그 것은 어디까지나 비뚤어진 심사의 발로였다. 나는 그 결과를 이모부가 몇년 동안 나진에서 사업하면서 어떤 사람들을 노엽혀 이루어진 결과라고 인정한다.

우리 회사의 설립과 운영을 비준한 자체가 나진시인민위원회(시청)의 사업상 실책이니만큼 이같은 경쟁을 당해내지 못한 그들이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므로 국내 기업인 자동차 사업소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동분서주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정책이라는 강유력한 무기를 가지고 눈에 거슬리는 것을 제거하려는 심사를 보여주어 뇌물이라도 얻어가질 궁리를 하던 그네들이다.

서면상으로 운행을 중지한다고 통지한 것이 아니라 전화 한통으로 통지를 했기에 우리가 억지로 버스를 내 보내는 것으로 항의를 할 수도 있었으나 그 것은 미련한 방법으로밖에 될수 없다. 우리 회사의 운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모든 부문의 책임자들 중에는 남의 일이 잘되는 것을 볼 때마다 혈안이 되어 꺾지 못해 안달아 하는 인간들이 더러 있었다.

우리가 중국에서도 많이 보아 왔고 특히 치열한 경쟁을 겪어보지 못한 조선에서는 어디까지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중점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 여객 수송회사이니만큼 여객 수송이 주업이었지만 그 것으로 회사의 모든 지출을 해결하기는커녕 도로 밑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우리는 그 외에 다른 업종도 허락 받아서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여객 수송 쪽에서 나오는 적자를 미봉하고 회사 운영을 지탱하였을 뿐더러 이윤도 일정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업종이란 자동차판매와 수리, 그리고 자동차 부품, 가전, 연유, 건축 자재 등의 판매었는데 여객 수송보다 이익이 더 많이 나오는 부업이었고 오히려 주업인 여객 수송이 있음으로 하여 이런 업종을 부가로 허락 받을 수 있었기때문에 정상적인 여객 수송을 보장하지 않으면 부업을 할 수 없었으므로 사실상 회사가 파멸의 길을 걷는거나 마찬가지였다.무슨 방법을 대서든지 여객 수송을 보장해야 했다. 

조선측 종업원 대부분이 여객 수송 쪽에서 움직이고 있고 생활비(월급) 지출만 해도 엄청났다. 규정상 외국인 기업소(합작, 단독, 합영 전부 포함) 종업원의 1인당 생활비는 조선원 16,000원이었는데 (당시의 환율로는 미화로 80$ 정도) 그중 70%는 세금으로 상납하고 나머지 30%인 4,800원을 종업원들에게 생활비로 주고 있었는데 그 부분만 하더라도 월 당 수십만 원이었고 훈춘 식구들의 생활비와 그 외의 비용(각종 세금과 일반 비용 전부 포함)을 다하면 백여만 원의 지출이 생긴다.

그런데 여객 수송 쪽의 수익금은 11대의 버스가 다 가동한 6월 달에 최고로 175만원이 되어서 거의 평형을 잡았을 뿐 기타의 달에는 줄곧 100만원 정도밖에 안되어서 적자를 보고있는 형편이었으므로 부업을 해야만 회사가 지탱할 수 있었고 또 더 많은 이윤이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회사가 노리는 것도 결국 주업을 바탕으로 한 부업쪽이었던 것이다.

오직 세치 혀를 놀려서 설전으로 승리해야만이 회사가 살아 남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만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로 반박함으로써 순 억지인 이번 사건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모부는 요즘 매일 설전을 하는 데 전력을 몰붓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가지고 면담을 거절하거나 다른 일 보러 나가서 사무실에 없게 되면 책임자들을 만날 수 없어서 다음날 다시 찾아가군 했는데 매일 면담하러 다니면서도 우리한테 수리임무를 주어서 월말 전에 11대의 버스가 다 살아날 수 있도록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면담 결과가 안 좋은 지 기색이 말이 아니었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화술이 뛰어나고 사업을 도와 줄만한 친구를 사귀는 데 능란했던 그는 언제나 정력적이었지만 어느 하루는 드디어 몸져 눕게 되었고 회사는 마비 상태에 빠져서 이제 더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가 파멸되는 것을 앉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몇 년 동안의 신고 끝에 경험도 많이 쌓았고 어렵게나마 자기에게 속하는 기업을 만들어 냈지만 그런 이모부 외 다른 훈춘 식구들은 어느 누구도 회사를 이끌어 나갈만한 재목감이 아니었다. 이제 마지막 수단을 쓸 결심을 하고 이모부는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며 5월 중순의 어느 날 우리 훈춘 식구들한테만 비장하게 선포했다.

-회사를 양도하거나 차를 몽땅(전부) 고개 밑에 가져다 놓고 불살라 버리겠다!

조선의 정책과 법을 등한시한 외국인들이 수없이 밑지고 나앉는 판에 회사를 양도받으려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그러니 이모부의 말인즉 법으로 합법적인 이익을 보호함으로써 회사의 위기를 제거하고 정상적인 운영을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후일 이 것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것은 또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많은 외국인들이 법을 무시했기 때문에 투자는 했으되 수년이 지나도 회수하지 못한 채로 귀국하는 일들이 비일비재로 많이 발생했으며 그 것을 조선에서 사기치는 것으로 인정했지만 어디까지나 투자 경험이 없는 그들이 자기 절로 제 발등을 깐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중국사람이라는 것만은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관리 부문에서도 법이라는 무기로 우리를 제압하고 있었으나 이모부의 몇 마디 말로써 이번 설전은 우리 쪽에 유리해지게 되었다.

“당신들은 여객 수송을 보장해야 한다는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가리킴)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소? 우리 회사의 버스는 노선 버스 중의 절반이나 되는데 우리가 노선에 나가지 못하면 지대 안의 여객 수송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겠소?”

노선에서 달리는 버스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사실이었다. 차 당 70~80명 지어는 100명 정도씩 싣고 다녔고 지대 안의 노선이라야 나진ㅡ선봉과 나진ㅡ후창(청진으로 가는 쪽의 지대의 남쪽 문으로써 세관이 있었고 조선 국내의 사람들은 여행증과 공민증이 있어야만 통과할 수 있는 곳이었다.) 두개뿐이었고 우리 회사의 버스가 투입된 조건에서 두 노선에서 달리는 회수도 차 당 1일에 4~5차씩 보장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 책임자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며칠 후에 우리는 위에서 허락했으니 운행해도 된다는 것을 역시 서면으로가 아니라 전화로 통지받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승리한 거였다. 참으로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답답하면서도 아슬아슬한 고비를 우리는 그렇게 무난히 넘을 수 있었고 6월에 11대의 버스가 전부 가동하여 회사의 역사에서 최고의 여객 수송 수익금 기록을 올릴 수 있었다.

차 사업소나 선봉의 다른 차들은 고장만 나면 수일 동안 지어는 한달 이상이나 노선에 나오지 못했으므로 사실상 지대 안의 여객 수송 과업은 우리 회사가 70% 이상 감당하는 거나 다름 없었고 우리의 부담도 최대한 줄어들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불행 때문에 호황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회사의 운명으로 놓고 말할 때 중대한 전환의 시기였고 계속 발전할 수 있는 무궁한 행운이 차려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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