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는 중고차로서 트럭을 대량 수입했으므로 나진의 트럭 부품 시장은 그야말로 호경기를 맞은 셈이었다. 신품은 가격이 엄청 비싸도 팔리긴 했지만 그보다는 값이 싼 중고 부품이 더 인기 있었다. 중국에서는 고철로 여길 지 모를 형편 없이 싼 중고 부품이 신품 가격으로 불이 나게 팔리는 나진의 부품 시장, 여러 가지 형식으로 그 부품 시장의 대부분을 1년 후에 우리가 독점하다시피 되기까지 상당히 큰 노력이 들었다. 

나진과 선봉의 각 농장들에서는 현금이 없었으므로 우리보다 가격은 싸지만 현금만 받는 다른 상점들에서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종이돈(수표, 위임장, 행표 등을 나진에서 그렇게 불렀다.)을 들고 우리 회사의 매점으로 찾아오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간혹 현금이 있으면 다른 상점으로 가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부품 종류가 더 구전한 우리 매점을 찾아온다. 그만큼 나진에서뿐만 아니라 지대 밖에서도 불원천리하고 찾아오는 터였다. 지대 안의 기업소, 농장, 군부대는 우리 회사가 없으면 자동차를 세워야 할 지경이었다. 부품만이 아니라 건축 자재와 연유도 종이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2년 동안 종이돈으로 물건을 살수 있는 외국인 기업소는 우리 회사뿐이었으니 그 영향을 독자들이 상상해도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중고 부품 중에서도 판 스프링이 제일 잘 팔렸다. 나진의 자동차 보유량을 죽 살펴보면 그리 많지 않은 것이었지만 소련차, 일본차, 중국차로 차종이 다양했고 게다가 부품 공급이 거의 안되었기에 간단한 고장 하나로 차를 수년 동안 세워두는 폐단이 있었다. 소련차와 일본차의 부품은 중국에서도 비싸다고 혀를 내두르는 판인데 조선에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사는 때도 있었으므로 주문을 하면 더러 파는 경우도 있었지만 장사거리는 아주 적었다. 

그런데 중고 판 스프링을 조금만 개조하면 어느 차에든지 다 쓸 수 있었으므로 주로 내가 연길시에서 대량 구입해서 조선에 내갔으며 곁따라 훈춘에서 구입하지 못하는 부품도 구입하군 했었다. 물론 그 연줄은 이모부가 놓은 것이었고 나는 작업만 하면 된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연길에 다녀와야 했다. 내가 자동차 공학을 전공했고 인수원을 시작한지도 한참 되었는지라 부품에 대해서 가격까지도 잘 알고 있어서 적성에 맞았을 뿐만 아니라 한창 젊음이 넘쳐 흐르는 때여서 일도 걸싸게 잘해 재꼈기 때문에 나진이나 훈춘에서 두 세 명 일을 혼자 감당한 거나 마찬가지었다.   

그때까지 나의 호적은 연길에 있었다. 훈춘에서 태어나 훈춘에서 자랐지만 고중(고등 학교)은 연길에서 다녔고 대졸 후에 연길의 B공장에서 4년 정도 엔지니어로 있었고 그 후에도 연길에 4년 동안 살았기에 타향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고 아내와 5년 정도 함께 산 곳이었으며 아들애까지 세 명의 호적은 연길에 두고 있었다. 

훈춘에서 나진으로 다니는 데는 신분증(주민등록증)이 훈춘 호적으로 된 것이 가장 편리했다. 여권이 없으면 통행증을 만들어야 했는데 훈춘 호적이 아니면 타지방 시정부(시청)에서 훈춘시 정부에 보내는 위탁서에다 타지방 관할 파출소의 서류(무범죄 증명서)까지 있어야만 통행증 발급이 가능했었다. 

유효 기한이 3개월이어서 3월 달에 처음 출국할 때 만들었던 통행증을 6월 달에 교환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아내는 나와 아들애의 호적을 훈춘에 옮기라고 달마다 성화 전화를 해왔고 출국의 편리도 있고 해서 호적을 옮기려고 결심했고 그래서 아내와의 만남도 자연히 이루어졌다. 

이때는 우리가 헤어진 지 1년 3개월 넘은 시간이었으나 호적 문제는 피일 차일 미루어왔던 것이다. 다른 원인이 아니고 아들애는 내가 키우기로 했지만 조건이 더 좋은 연길에서 공부시켜야 하겠다는 욕심과 혹시 다시 모일 수도 있다는 미련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호적과 부품 두 가지 문제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걸려야 할지 모른다. 연길의 셋째 고모(아버지의 사촌 여동생)집에 주숙을 정했고 일단 먼저 연길시 호적을 보류하는 쪽으로 시도해서 고모네 집에 호적을 넘겨 놓기로 의논을 다 해놓은 상태였다. 

출국 수속이 불편한 것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아들애의 공부 문제도 당장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곱 살이어서 다음해 8월 달부터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데는 연길이냐 훈춘이냐였다. 시도해서 실패하면 둘의 호적을 훈춘으로 옮겨놓고 아들애는 훈춘에서 공부시킬 수밖에 없다. 훈춘보다 연길 쪽이 애들 공부에는 더 좋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느 호텔 로비의 커피숍에서 아내와 만났다. 내가 조선 예술 영화에 미쳐있을 때 《춘향전》을 보고 나서 춘향이와 생김생김이 같은 여자와 만나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대학 때 만나 춘향이처럼 생겼다고 인정했기에 연애하고 결혼했던 여자다. 원래 연애하던 여자와 헤어지면서까지 어렵게나마 붙잡을 수 있었고 마음씨도 춘향 같았으면 하고 바라던 여자였다.   

그 모습은 여전히 예쁜 그대로였다. 쥬스를 두 컵 시키고 나의 생각을 말했다. 생각지 아니하게 부모님들이 경한 중풍을 맞아 운신이 많이 불편하고 게다가 한국에 간 외사촌 누나의 딸애마저 데려왔기에 출국이 잦은 내가 그냥 부모님들께 맡기는 것보다 엄마가 봐주는게 좋겠다고. 나의 호적은 가져가되 아들애를 연길에서 공부시키고 싶은 욕심도 있어서 애의 호적을 남긴 채 이제부터 엄마 곁에 두고 싶다고 했다. 말하자면 부양권(양육권)을 다시 아내한테 넘기겠다는 거다.   

“정말 안 됐음다. 고려해 보겠음다.”  

처음에 그렇게 대답한 아내는 내가 거듭 호소하자 막무가내라는 듯 한마디 뱉어내는 거였다.  

“내가 맡겠음다!”  

헤어지면서 몸이 허약한 자기가 아들애를 키우기 힘들다, 아들은 그래도 아버지가 곁에 있어야 한다 등등의 이유로 나에게 밀어 맡긴 아내였는데 이제 한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부모님들을 걱정해 주고 아들애를 걱정해 주는 것이 내가 제일 마음 들어 하던 거였다. 이제는 나의 호적을 옮기는 일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유쾌한 기분으로 고모 집으로 돌아 왔다.   

저녁 식사를 한지 이슥해서 고모 집으로 아내가 전화를 걸어 왔다. 재삼 고려한 결과 지금 형편으로는 도저히 맡지 못하겠으니 아까 한 약속을 취소한다고 했다. 

하루 사이에 나한테 두 가지 대답을 하는 거다. 어머니와 통화했고 당신이 내일 연길에 와서 직접 아내와 만나 얘기해 보겠다고 했다. 사실 아들애한테 이상한 증세가 있어서 수술도 받을 겸 해서였다.   

간밤 여러 가지 생각으로 잠을 설쳤고 엉망된 기분으로 이튿날 오전의 부품 구매 작업을 어렵사니 마치고 나서 점심에 어머니와 만났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이미 아내와도 만났다고 하셨다.
아내는 만일 자기가 애를 맡는다면 영원히 우리 가족에서 애를 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으름장 비슷한 말을 하더라고 했다. 

어머니는 평소 상냥하던 모습으로 내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여러 번 하면서 아내한테 호소했다고 한다. 그런데 도저히 먹혀들어 가지 않아 한시간 정도 싱갱이질 하다가 분김에 한 마디 했다한다.   

“제가 영원히 보이지 않겠다고 하는데 우리도 이제부터 에미한테 애를 영원히 보이지 않겠소! 어떤 일이 있든 지간에!”  

내가 B공장에서 나올 때 그 공장에 다니던 아내도 같이 나왔고 그 후 아내는 단과대학 선생(교직 공무원)으로, 나는 여행사의 가이드 노릇했었고 애는 겨우 한살이었다. 가이드 생활은 집에 드는 시간이 적었고 그것도 4년 동안 했으니 아들애는 나보다도 엄마한테 정이 더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정을 끊겠다고 하니 엄마의 마음이 어떠할까?  한참 눈물이 글썽해서 생각을 굴리던 아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고 한다.   

“내가 맡겠음다!”  

수술 받은 애를 데리고 어머니는 오후 차로 집에 돌아 가셨다. 저녁에 다시 약속을 취소하겠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결혼 생활 중에서 늘 보이던 스타일은 지금도 여전했고 강경한 어조였다. 

여자의 마음은 돌아 앉으면 변한다더니 그 말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호적을 내일 중으로 당장 옮겨가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할 것이라는 말을 하던 여자 같지 않았다. 자기의 마음에 대해서 평생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던 아내 같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는 돌아 서면 남이라고 하는 걸까?  

나와 아들애의 호적을 고모네 집에 옮기는 일에 착수했다. 고모네 관할 파출소에 찾아가니 동거 상태로는 호적을 옮기지 못한다는 새로운 규정이 나왔다면서 수속을 거절해왔다.   

무슨 정신에 나왔는지 모르겠다. 빽이 있는 사람을 찾아 사정하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결혼 생활을 파멸로 이끌어준 연길을 이제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마음에 다지고 다지면서 둘의 호적을 훈춘으로 옮기는 것을 결심하는 나를 지나가는 구름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귀찮았다.  

판 스프링과 중고 엔진, 중고 액슬, 중고 미션 등을 꽉 박아 실은 차가 언제 훈춘에 도착했는 지, 어떻게 부리웠는 지 도무지 기억에 남지 않았다.   

옛말에 팔자 도망은 가지 못한다고 했다. 애가 엄마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팔자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더없이 저주스러웠다. 앞으로 외롭고 적막한 생활을 하더라도 견디어낼 수는 있겠으나 아들애한테 죄지은 마음은 영원히 떨쳐버릴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도 마음이 평안치는 않으리라. 이제부터 애한테 더 깊고 훌륭한 사랑을 주리라고 다짐하고 보니 덮치듯이 달려와서 품에 안기는 아들애가 귀여워 죽을 지경이다. 

초창기의 바쁜 시절에 고양이 손도 빌려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지경이었으므로 내가 시간을 내기 힘든 상황에서 둘의 호적 문제는 어머니가 후일 해결하기로 의논이 되었으며 며칠 동안 지쳤던 몸을 침대에 묻었으나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아내와의 옛일이 새삼스레 되살아난다. 대학 3학년 때 아내가 우리 학교에 입학했다. 동갑이었는데 생일은 오히려 나보다 몇 달 앞섰기에 연상이라고 봐야겠으나 어차피 후배였다. 나와 같은 해에 대학에 붙은 적이 있었으나 입학 3개월만에 퇴학하고 재수생으로 다시 붙은 거였다.  

처음 도착하는 날 다른 친구들이 다 들어간 자리에 내가 밤늦게까지 기다려줘서 둘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학교는 집에서 3천키로나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조선족이 입학하면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 선배들의 전통으로 남아 있었으므로 다른 조선족 친구들과 함께 기다리다가 나만 남아서 그렇게 만났던 것이다. 

타향에서 밤도 깊었는데 우리말을 하는 남자를 단둘이서 만났으니 그런 교묘한 일치가 있었다는 흥분함과 새로 드는 기숙사에까지 안내하고 이튿날 아침에 학교 식당에서 밥 먹을 수 있게 식권까지 내놓는 자상함에 마음이 설레이게 되었던가 본다. 

그런 눈치를 모르는 내가 아니었지만 이미 죽마고우인 여자 친구가 있었기에 첫눈에 반한다는 여자들의 낭만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연애를 해도 두 사람과 동시에 하지 못한다는 순결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연애관이 지배한 것도 있지만 처음 만나서 끌릴만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후에도 여러 번 사교 의향을 비쳐왔지만 그냥 모르는 척 하였다.  

이듬해 한 우연한 사건과 동난(한국에서는 천안문사태라고 한다.)때문에 우리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고 그때의 나와 아내의 도덕관으로는 회피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기회는 우리한테 결정적으로 다시 만나게 해준 은하수의 까치 다리와도 같은 것이라는 걸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 때문에 원래의 연인과 4년 동안 이어온 연정을 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그 우연한 사건을 보도록 하자.   

한 여자 P가 사랑에 빠졌다. 남자한테 몸까지 허락했는데 차이고 만다. 자살을 시도했다. 

P는 나와 한 학년에 다니고 있었고 같은 민족에 같은 고향이었다. 나한테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아내한테 붙여 주지 못해 안달을 떨었고 나와 아내 사이에 오해가 벌어지게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그 해 3월의 어느 날 대량의 수면제를 먹은 P를 아내가 병원에 실어갔고 그녀가 링게르 주사를 맞으면서 잠든 사이에 아내가 나를 찾아왔다.

한 고향에서 온 사람은 너뿐인데 니가 가만있으면 누가 살펴 주겠느냐, 그래도 한 고향 사람이 곁에 있어주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며 나를 설득했다. 

이미 P에 대한 시시껄렁한 말을 많이 들어온 터여서 처음엔 시답지 않게 여겼지만 한시간이나 설득하는 아내 고집에 못 이겨 내키지 않게 병원에 가게 되었고 나중에 일장 기편극이라는 걸 알아채고 비분에 떨며 집(그녀는 담차게도 남자와 셋방에서 동거하고 있었는데 그때의 도덕관으로는 나는 도저히 이해해 주지 못했고 자살도 가짜였다.)을 뛰쳐나왔다.

학교까지 같이 돌아오는 길에서 아내는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P의 집에 있는 동안 밤낮으로 자살을 막아주고 한 가마 밥도 먹으면서 두 사람 똑같이 수업도 1주일 정도 받지 못했다. 그동안 착한 마음씨에 끌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고 P가 눈물 흘리면서 내 손을 잡고 일부러 정 깊은 말을 주고 받느라고 꾸미는 데도 질투하는 아내를 처음 알았다. 조금은 심각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오늘 다른 친구가 집을 봐 주어서 같이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저녁 둘이는 날을 새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며 아내의 옆 모습을 보면서 어쩐지 춘향이처럼 생겼구나하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래세가 있다면 이 여자와 만나고 내 아내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되여 가는 것을 걷잡을 수 없었다.  

내 죽마고우의 여자 친구를 처음으로 검토해 보게 되었다. 4년 동안 사귀어 왔지만 손도 한번 잡아 보지 못한 슴슴한 연애였다. 그때의 연애는 키스나 포옹이라는 것이 적었고 그 이상의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연애 관계를 결정한 후부터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끔씩 받아왔던 터였다. 방학 때마다 만났고 편지도 자주 오갔지만 격정이 결여했다. 만나면 서먹서먹했고 편지에서마저 서먹서먹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인데 이제 사랑을 확인하지 못하면 헤어져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검토를 끝냈다.   

동난 때문에 집에 일찍 돌아 왔고 숙모의 알선으로 자동차 전기 수리 실습을 하는 동안(이 실습이 후일 나진에서 차수리 기능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휴일마다 연길에서 약혼녀와 만났고 계획대로 하나하나 떠보았던 것, 결국 여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방학이 끝나 학교에 돌아간 후 두 번째 편지 내용이 바로 절교하자는 거였다. 대졸 후에 내 친구인 룡수라는 놈이 그래도 동창생 행세를 하느라고 둘의 재회를 마련해주었지만 내 결심을 꺾지 못했다. 

이미 아내한테 마음이 가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여 마침내 연말부터 아내와 연애하기 시작했고 아내가 나보다 2년 늦게 졸업한 그 해에 결혼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결혼 때까지 만도 이혼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던 내가 5년 후에 이혼을 결심한 것은 남에게 알리기 부끄러운 가족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이었는데 마치 김병연이 삿갓을 눌러쓰고 팔도 강산을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닐 때의 심정과도 같은 것이라고나 할가.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철이 안 들었다. 지금 생각으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예 결혼을 포기했을 거였다. 돈을 많이 벌어들이지 못하는 나에게 점점 실망하고 있는 듯 했고 사실상 무직이나 다름없는 나를 비꼬고 의식적으로 골려주는 데는 그래도 참아 주었다. 

우리 집은 할머니와 아버지가 오랜 환자였고 아버지한테는 정신 질환까지 있었으므로 나는 자비감이 심한 사람으로 성장했고 어머니가 집안 일을 잘 처리하고 가족을 잘 이끌었기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지만 살림은 항상 펴이지 못한 그대로였다. 

돈이 벌어지면 부모님들한테 보내 주었고 그런 눈치를 아내도 아는 듯 싶었지만 아내한테 한푼도 들여놓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그 돈이 적을지라도 나한테 마음대로 분풀이도 하지 못해 끙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듯도 하다. 아내는 애가 돌이 채 안되었을 때 나한테 이혼을 한번 선언한 적이 있었다. 그 해에 나는 가이드 생활에 완전히 물 젖었고 아내는 하루 밤에 열두 번도 더 깨어나 보채는 애를 고생스레 혼자 키웠다. 이혼을 선언하는 아내의 심사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젖이 안 좋아 매일 설사를 해대는 아들애를 업고 가출했고 실종 된지 3일 만에 어머니와 내가 빌고 들어서야 겨우 돌아왔었다. 

남자라는 자존심, 남편이라는 자존심이 형편없이 구겨지는 바람에 그대로 이혼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울면서 호소하는 어머니와 돌도 채 안된 아들애를 보면서 내 마음이 약해졌었다. 

아내는 그때 가출하기 전에 내 생애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말을 했었다.   

“너네 집 사람들은 다 개새끼들이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 말로 한 지독한 상욕이었다. 중국어로 욕하면 표현이 좀 달라서 듣는 사람의 기분도 좀 차이가 난다. 그때 나는 집에 있던 유리 컵을 박살냈었다. 나를 아무렇게나 무시하고 욕한대 해도 참을 수 있었으나 가족을 욕하는 데는 도저히 참지 못하는 것이 내 성질이다.   

아내가 실종된 동안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결과도 나와 가족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이 되었는지 아내는 그 후 내 앞에서 감히 성을 내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 대한 무시, 나에 대한 불만과 불신임은 날에 갈수록 심해졌다. 

남편이 몇 년 동안 벌어들여 놓았다는 것이 아파트 한 채 살 돈도 안되었고 비수기인 겨울철에 또 그 돈을 내다가 뭉청뭉청 쓰는 것을 아니꼽게 보아오던 것이 위험하게도 나와 냉전을 벌리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이라도 격정이 지나가면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로 평범한 생활을 하게 되고 그의 기본은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존중이다. 이걸 떠나서 알량한 사랑을 계속 이어갈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을 했었다. 다만 사랑의 표현이 너무 적었던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다.  《사랑해요!》를 하루에도 수십 번 하는 요즘 사람들과는 달리 그런 표현력이 무디어져 있었고 게다가 아내는 돈 때문에 무던히도 나를 달구었고 나는 나대로 아내보다 부모님들 걱정으로 더 마음을 썩였었다. 

결혼 생활이 피곤하게만 느껴지는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믿음과 존중이 사라져 버리고 부부사이의 다리인 의사 소통마저도 이루어질 수 없을 정도로 자기 고집만을 부렸고 제 나름대로 일 처리를 해서 상대를 기분 상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냉전에 냉전을 거듭 겪어 왔었다. 

연애할 때의 격정은 식어버린 지 오래 되었고 그런 생활이 더없이 지겨워져서 마침내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 여자와 헤어질 수 있겠는가에 골몰하던 차 가장 바보스런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계획적으로 아내가 나한테 신임을 주지 않고 나를 남편 같지 않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고 확인하면서 시일을 기다렸다. 멀리 북경에 가서 2년 동안 가이드 노릇 하다가 집에 돌아오니 많이 서먹서먹해졌다. 

첫 번째 계획은 그렇게 실행했고 저녁에 곁을 주지 않았다. 오래 떨어져 있으면 한달 정도 지나야 정상적인 부부 생활이 돌아온다고 하는 것은 후에 책을 보아서 안 것이지만 심신이 엄청 지쳐 있어서 밥 먹고 난 후 하는 노릇이란 잠자는 것밖에 몰랐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집에 들어서면 여자 손이 간 것 같지 않은 집 살림을 보는 것이 항상 께름직했다.  

하루는 찬장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들여다보았더니 밥이 네 그릇 놓여 있었고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데로까지 차례로 곰팡이가 적은 데로부터 많이 생겨나 있었는데 마지막 밥그릇 위에는 곰팡이 꽃이 너무나 많아서 구토를 느낀 나머지 하마터면 토할 번했다. 

그걸 코를 싸쥐고 버리고 나서 한참 통풍시켰는데도 이상한 냄새가 계속 나서 집구석을 뒤졌더니 LPG 가스통 옆의 비닐주머니에서 언제부터 썩었는지 모를 감자와 가지가 나왔다. 비닐 주머니를 헤치니 푹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기에 멀리 갖다 버렸다. 

다시 찬장을 열어보니 계속 냄새가 나는 듯해서 전기밥솥을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 남아있던 밥이 썩다못해 새까맣게 되었었다. 새 밥솥을 사서 쓰기 시작한 후 씻지 않은 채로 처박아둔 게 분명했다. 분김에 통 채로 갖다버렸다. 하수도 쪽에 있는 설거지 뒤끝의 찌꺼기도 여러 날 째 버리지 않아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런 집에서 사는 게 사람인지 의심할 지경이다.

우리가 잘 살지 못하는 건 내 본의가 아니었다. 아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선생들이  

“나그네가 돈 많이 번다는 데 어떻게 잘 사는지 한번 구경하자.”  

하고 어떤 기회에 어쩌다 한번 집에 놀러왔었다. 어수선한 집안을 둘러보고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또한 그때 심히 난감했던 심정이었다면서 나를 보고 하소연하는 아내는 남편의 생각에도 더는 관심이 있는 여자가 아니다. 

내가 능력 부족이라는 걸 하나 하나의 일로부터 하나 하나 확인해주고 돈을 벌어오라고 윽박지르는 듯한 그의 표정에서 들떠버린 여자의 마음도 읽을 만했다. 대학 때의 살뜰한 여자로부터 이제는 떨어진 단추 하나도 안 달아주는 시시껄렁한 여자로 돼버렸다. 

더우기 가족 중의 아버지와 남동생네 부부, 지어는 삼촌 네 식구들까지도 눈에 차지 않는다는 말을 서슴없이 해대는 한마디로 기분을 상할 대를 상하게 하는 여자로 전락되었다.   

마침내 터질 때가 되었다. 내가 한창 씩씩거리면서 욕지거리를 해댔고 그러다가 이내 둘 다 냉전으로 낑낑했기 때문에 그 정도에서 넘을 수 있는 위기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방정맞게도 둘째 처형이 놀러 왔다. 들어가면서 곱게 하는 내 인사도 받는지 마는지 하였고 부엌에 불을 때면서 자꾸 말을 걸어 보았지만 처형과 아내는 묵묵부답이다. 

드디어 처형이 돌아가고 둘만 남았는데 아내는 외박한다며 나갔다. 나와 냉전하기 위해 피하는 게 아닌 나의 존재를 무시하는 최악의 행위였다. 나와 이혼을 선언하면서 실종된 사건 뒤 두 번째로 되는 가출이었다. 

나의 자존심을 형편없이 만들어놓은 아내를 더는 용서할 수 없었다. 아내보다 항상 부모님들 때문에 전전긍긍했던 나로서는 이혼하고 부모님 곁으로 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도라고 생각되었다. 

어차피 최근 들어 시부모님들에 대한 아내의 불효도 가슴 아프게 확인해오던 때임에랴.  부모님 생일에는 늘 전날에 왔다가 당일 저녁에 친척들이 다 모이는 때를 피해서 점심때 떠나는 성미였다. 그래서 친척들뿐만 아니라 내 친구들도 아내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연길에 내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집을 모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만큼 사람을 싫어했다. 나를 포함해서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싫어했다.  

이제 철저히 헤어지고 말리라. 내가 다시 부모님들 곁마저 떠나서 정처 없이 헤매며 다니는 김삿갓과 같은 운명을 만나도 이 여자와는 인연을 끊으리라. 말로 해서는 통하지 않았으므로 장편을 적어놓고 집을 나와버렸다. 그 장편을 종합하면 바로 두 글자 – 《이혼》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최후의 계획대로 내가 아내에 대한 불신을 확인시키기 위해 가이드생활 중에 여자들의 온갖 유혹을 다 물리쳐 왔지만 이번에는 찾아서 놀아댔고 성병도 묻혀 왔다. 여자들은 거의 다가 남편의 바람기를 저주했고 가정에 충실하지 않는 배신 행위로 보고 있었으므로 그 때문에 이혼하는 경우가 많다. 

아내의 경우에 특히 심각했는데 나는 이혼을 위해 바람피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이혼을 반대할 이유가 없는 아내이기도 했다. 합의 이혼이었으므로 법정에 나서지 않아도 되었고 모든 재산을 집까지 포함해서 뿌려주고는 애만 달랑 끌고서 훈춘에 왔었다. 

사람이 싫어지니 재산도 귀찮았다. 얼마든지 벌 수 있다고 확신했고 마음이 거뜬해졌다. 그런 실패의 혼인을 경험한 나에게 있어서 이혼은 일종 해탈이라고 굳게 믿어마지 않았지만 요즘 아내의 행실을 보고 나서 어쩐지 보이지 않는 덫에 치운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  

요즘 어떤 여자들은 참말로 싸가지가 없이 논다. 남자들이 무리로 실업 당하고 있는 반면에 여자들이 살만한 세상이 되었다. 벌어서 남자를 먹여 살리고 빨래와 밥을 해주는 일이 혼자 사는 것보다 못하게 느껴지는 거, 그만한 책임감과 숙명을 버리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남자를 맹꽁이라고 생각다못해 사랑이고 가정이고 다 구만리 밖에 팽개친다. 혼자 살지 않으면 한국이나 일본, 미국으로 가서 다른 남자의 품에 서슴없이 뛰어든다. 중국의 남자는 눈에 차 하지도 않는다. 아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그래 내가 과연 아내의 덫에 치웠단 말인가? 아내가 소리 없이 늘여놓은 그물에 내가 걸려들고 이혼이라는 함정을 파놓은 데 빠지고 거기서 가정 파멸이라는 덫에 걸린 것이나 아닐까? 내가 계획적으로 이혼을 시도했다면 아내의 이혼은 더 계획적이고 치밀해서 내가 미처 간파하지 못했단 말인가? 만일 내가 그 장편을 남겨놓지 않았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장편 때문에 아내는 자기 나름대로 나와 헤어지려는 계획을 감쪽같이 이루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역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니 여자들의 교활한 덫이란 얼마나 무서운 가를 알 것 같았으며 그런 여자와 헤어진 일이 얼마나 다행이었는 지 모른다고 감탄하게 되었다. 

이혼을 하게 되니까 한 여자를 철저히 알게 되었다고, 잘된 일이라고, 어쩐지 처음 이혼 말이 났을 때 헤어졌더라면 더 잘 될 걸 그랬다고 맘 아프게 반성했다.    

이제는 내 멋대로 살리라. 내 아들한테는 죄인이지만 풍류스러워도 좋고 방랑 생활을 해도 좋고 아무래도 좋으나 다시 결혼을 하지 않으리라. 누가 뭐라든지 이 세상 끝가지 혼자 내 기분대로 가리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어느덧 날도 밝아왔다. 

오늘 또 나진으로 가야 한다. 나진에 가서 힘겨운 노동을 하고 일에만 뱅뱅 돌아 친다면 엔젠가는 내 머리 속에서 아내의 존재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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