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선이 끝내 차 사고를 냈다. 피로 운전에다 음주 운전이 겹쳤는데 버스가 굽이를 꺾지 못하고 길 옆의 강냉이 밭에 들어갔다. 다행히 인명 사고는 없었지만 차장과 함께 군대와 인민들에게 얻어맞았다. 

차장은 김영숙이라는 처녀인데 아직 파견장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걸 기다리는데 저그만 치 3개월 정도 기다려야 했다. 일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았고 먼저 데려다 쓰면 생활비도 내주었으므로 노동국에서도 묵인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223호 버스는 일단 안전부에 억류되고 운전수도 갇혀 버렸다. 이 버스는 3월 달에 약수터 사건을 일으키고 처음에 《라선ㅡ외ㅡ127》을 받았 다가 후에 《라선ㅡ외ㅡ223》으로 고쳐 받았다. 

차장은 찾아보기 힘든 미인인데다 키도 컸고 후일 생활태도가 단정치 못한다는 풍문을 듣고 난 뒤 파견장이 내려오기 전에 잠시 낮 경비로 쓰다가 내보냈던 것이다. 

후에 정화가 세관 수속하러 가는 길에 나를 보면서  

“저 미친년 좀 보쇼.”  

하는 것이었다.   

“뭘 그러니?”  

“결혼도 하지 않고 남자 집에 가 있는 게 미친 거지, 아임까?”  

아직도 정조 관념이 강하게 뿌리박고 있구나하고 생각하는 동안에 저 영숙이가 제일 많을 때 여섯 명의 남자 친구가 있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녀의 집이 회사 옆에 있어서 가끔씩은 보이기도 했었는데 얼굴이 유난히 예뻤기에 내가 오늘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숙모가 부기장으로 된 이래 처음으로 되는 노선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모부와 함께 나갔다. 

불의의 습격에 차장들이 갈팡질팡했다. 수익금과 표가 맞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나 그래도 대부분은 조금씩 밖에 차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명은 너무도 욕심이 컸다. 김은숙은 1,270원, 김금실은 620원이 드러났다. 당장에서 두 명을 해고했다. 차장은 승무대 처녀들이 대신하는 걸로 했다.   

김은숙은 연애에서 금방 실패 본 여자였는데 집은 회사 옆에 있었고 함남도의 대학생 총각과 동거 생활을 하면서 대학 경비를 대주었으나 총각 집에서 기를 쓰고 반대해서 며칠 전에 총각 만나러 여행증을 만들어 갖고 함남도까지 갔다 온 적까지 있었다. 

후에도 이웃에서 살았기에 자주 만났었는데 얼굴이 주근깨 투성이인데다 몸이 실팍해서 다들 팡즈(중국어로 뚱보의 뜻인데 나진에서는 중국어를 더러 쓰고 있었다.)라고 불렀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 성격이어서 그런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창주 차에 원정 차장을 한 적도 있었으므로 내가 원정에 다닐 때면 걸직한 농담도 잘 주고받았었다.  

김금실이는 후에 어디로 갔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진시장 정류소에서 내가 선봉 깡패들과 말싸움을 끝냈을 때 나하고 몇 마디 주고받은 인상이 남아 있을 뿐이다. 키가 작고 말수 적은 처녀다.  

그 날 내가 심부름을 나갔다가 정류소에 찦차를 세우는데 쬐꼬만 녀석 셋이   

“차 탑시다!”  

하였다.  

내가 선봉 쪽으로 가는 거라고 여기고 공짜로 타려는 심사였다. 

버스 사정이 안 좋았고 특히 늦은 시간에 시장 정류소 쪽은 차잡이 하는 사람들로 욱실거렸는데 군대와 인민들이 길 가운데 서서 고개 밑의 회사로 가는 우리 차를 가로막고 싱갱이질 한 적도 더러 있었다. 어떤 사람은 기어이 고집 쓰면서 비집고 탔는데 회사까지 가고 나면 맹랑해하면서 내렸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입에 담지 못한 상욕도 해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분개하여 그들과 싸우려 들었는데 상욕을 밥먹듯이 해대는 나진의 말 버릇에 습관 되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피하느라고 사고를 칠 번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못 태우겠소!”  

“어째 못 탄다는 거요?”  

벌써 말투가 변해 있다.  

“못 탄다면 못 타는 거지, 왜 지랄이야?”  

한놈이 이미 내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당장 내 손이 그놈의 귀뺨으로 올라갈  것 같다.  

“이씨, 그 잘난 차를 가지고.”  

다른 두 놈도 내 옆에 와 섰다. 좀 누그러드는 듯 하면서도 옷자락을 놓지 않는다.  

“이거 못 놓개?”  

“못 놓겠다!”  

“니 오늘 죽고 싶나?”  

“이게 씨, 어디 와서 개소리야?”  

내가 중국에서 왔다는 것을 차번호를 보고 건너짚는 듯 했다.  

“그래, 강 건너에서 온 중국 놈이다. 할 말 있냐?”  

“…에씨, 오늘 재수 없다.”  

그러더니 슬슬 물러갔다. 외국인과 함부로 싸움하면 그놈들이 박살난다. 이렇게 싸움을 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 방법을 후에 많이 썼었다. 그때 옆에서 이 정경을 다 보고있던 금실이  

“영도 선새임, 저 새끼들과 싸움 안하기 잘했음다. 버스 타고 돈을 내지도 않는 망나니들임다. 그런 망나니들과 싸울 가치가 없지 않음까?”  

아직도 씨근거리는 나를 위안하는 말 중에서 그 세 놈이 선봉의 깡패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치사한 놈들인데 나이는 25세 가량 되었지만 키가 작고 17세 정도의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깡패의 맛이 전혀 없다. 나진의 깡패 이야기는 뒤로 미루기로 한다.   

차장을 해고했는데 운전수 두 사람이 다른 기업소로 간다면서 나갔기 때문에 차장과 운전수가 다 부족하였으므로 빠른 시일 내에 다른 사람들로 보충해야 했다. 리영숙과 채정심이 차장으로 왔고 김용구와 전정임이 운전수로 왔다. 

여기에 홍의리 아바이 엔진사건을 이어 전정임 사건이 새로 생긴 것을 소개한다.  

조선 사람치고는 우리 회사에 키다리가 최광수밖에 없었다. 다들 키가 170센치도 안된 작달만한 키에 여위기까지 해서 나진의 세찬 바람에 날려가고 말 듯한 체격이었는데 재길이가 특별히 50키로도 안 되는 몸무게로 제일 약한 사람이었다.   

이번에 새로 온 전정임은 키가 광수와 비슷해서 180이 될 것 같았다. 수리반장인 용철이와 1주일 정도 엔진 대보수를 했고 다 그랬듯이 인력으로 차에 들어 올렸다. 모든 수리 작업이 다 끝났고 검차를 받으면 노선에 나갈 수 있었다.   

나진에서는 6개월에 한번씩 검차를 했다. 기사가 차를 차 감독소 앞에까지 몰고 간 다음 기술적인 검차 절차를 끝내고 나서 기술 검사증에 도장을 찍으면 또 반년을 뛸 수 있었다. 검차라는 것도 전문적인 자동화 검차가 아니고 차 감독소 앞의 시내 도로상에서 모든 걸 사람이 눈으로만 하는 제일 낙후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   

차영감이 수년동안 다녔고 안면도 있어서 어떨 땐 회사까지 와서 도장을 찍어주었는데 그 대가는 그들이 타고 온 승용차에 휘발유를 넣어주는 것이다. 돈은 아예 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습관을 후일 내가 겨우 고쳐 버렸는데 그 대신 검차 수속을 까다롭게 해주었고 첫 번째는 언제나 합격주지 않았었다. 

사실 나진의 차들은 엄격한 범위에서 말할 때 어느 한대도 기술적 검차에 합격할만한 차가 없다. 그런 차를 다 불합격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 또 나진에서 우리가 수리해 낸 차들은 언제나 성능이 제일 좋았었다. 불합격을 줄 이유가 없어서 두세 번 찾아가면 마지못해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런데 그날 당장 도장을 찍어야 할 전정임의 차는 대사고를 치렀다. 

기사가 차에 시동을 걸기 전에 오일과 냉각수, 휘발유를 점검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3검이라고 했으며 우리가 그렇게 말하니 회사의 운전수들도 습관이 되여 같이 《3검》이라 했고 조선식으로는 자검 자수라고 했다. 

자체로 점검하고 수리한다는 뜻이었는데 나진에는 《자검 자수》의 수준이 형편없는 기사가 부지기수로 많았으며 우리 회사의 운전수들은 그래도 수준이 괜찮은 사람들로 남아 있어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지만 도둑이 살판 치는 고장이라 오일이나 휘발유를 도둑 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중에서도 오일 점검은 항상 해오는 터였다. 

그런데 전정임이 전날 저녁에 이미 오일을 다 도둑 당한 줄도 모르고 점검해 보지도 않은 채 시동을 걸었으니 그 후과가 어떠했겠는가? 

도둑은 긍정코 회사내의 다른 기사가 차 밑에 들어가 빼서 훔친 것이었겠으나 훔친 자를 보지 못했으니 잡아 낼 수 없는 일이었고 엔진은 엔진대로 절어 붙고 말았다. 그 사고로 당일에 전정임은 해고되었다. 

운전수와 차장을 해고하는 일이 쉬운 반면에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후에도 많은 사람이 바뀌었으며 그러는 동안 운전수들은 기능이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만 남았고 차장들도 양심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로 남았으며 감히 차 수리와 수익금 관리를 등한시하는 사람이 적어졌으므로 차대는 점차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시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매일마다 돈 작업이 문제여서 밤늦게 퇴근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으므로 통근차로 버스 한대를 내였다. 

석건 영감은 58세로 회사의 운전수 가운데서 나이가 제일 많다. 집이 안주동 제일 구석 쪽에 있었는데 걸어서 한시간이 걸려야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나와 저녁 늦게 퇴근도 보장해야 했다. 하루에 취침 시간이 네시간 정도밖에 안되었으므로 몹시 피곤한 상태로 낮에 노선에 나갔지만 웬 일인지 이모부는 계속 그 영감의 차를 통근차로 쓰고 있었다. 

이장근은 집이 바로 회사 옆이었고 버스는 회사에 세워 두었으므로 그의 차를 통근차로 쓰면 가장 합리했는데 말이다.  석건 영감이 한달 후에 코피를 쏟는 것을 보고 내가 보다못해 건의했더니 장근이 통근차를 하게 되였는데 며칠하지 않은 채 통근차를 취소한다고 한다. 

그래서 다들 아침에는 통근차 신세를 지지 못하게 되었으며 저녁에는 찦차로 마지막에 퇴근하는 사람을 실었었다. 

다들 자전거를 사기 시작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두달 생활비를 모아서 한푼도 쓰지 않아야만 살수 있는 자전거를 차장들은 다 갖추었지만 남자들 중에 몇 명은 생활난 때문에 끝내 사지 못했었다.   

자전거는 일본에서 중고로 왔는데 적어도 7천 원 정도를 주어야 했고 처녀들은  맵씨 좋은 자전거를 선호했는데 만 5천 정도를 주고 사고 있었다. 

지대 밖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면 엄청 잘사는 집이라고 인정 받았으며 그 해 여름부터 여자들이 바지입고 자전거 타는 것을 단속했기 때문에 치마를 입고 걸어 다니는 수밖에 없었고 바지 입은 여자들은 주요 단속 거리를 피해서 멀리 에돌아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동방영도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좋아요 좋아요
7
좋아요
오~ 오~
0
오~
토닥토닥 토닥토닥
0
토닥토닥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