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따네 집에 경사가 났다. 큰아들이 대학에 붙었다. 

친척들과 친구들이 오고 숱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축하해 주었다. 로따네 내외가 그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처음 본 것 같다. 9월에 입학식을 한다고 했다. 나는 축하 행사에 참가하고 나서 남들 먼저 나진에 나왔다.  

8월 28일은 조선의 청년절이다. 그동안 나진을 다니면서《5.1》노동절과 단오를 제외하고 조선의 명절 쇠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었다. 이날 회사의 청년들(대부분은 차장)은 버스로 바다에 놀러 간다고 했다.

이런 날에는 회사의 아줌마들이 하루 차장노릇을 한다. 비서, 출납원과 차장중에서도 시집간 여자들 이렇게 청년들이 기분 좋게 휴식의 한때를 보내라고 대신해 주는거다. 그러니 버스는 정상운행을 할수 있고 평상시와 다를바 없이 회사 구내는 조용해져 있다.  

점심때가 거의 되어 우리 식구들도 외식을 한다면서 나가려고 서둘렀다. 다들 중국에 가고 숙모, 용철, 나, 영철 넷이 남았었다. 어쩐지 무슨 일이 있을 예감이 들고 술놀이가 싫었으므로 그들이 떠난후 혼자서 경비실에 멋없이 앉아 있었다.  

수리반의 종업원들은 점심 식사후에 낮잠을 자는데 습관이 되어 있었다. 아침에 일찍 출근했기에 점심 식사도 11시(중국 시간 10시)가 좀 지난 시간에 다 끝냈고 이 시간에는 잠을 청한다. 

그때까지만도 회사에는 전화 한 대밖에 없었는데 경비실에 두고 있었고 그것도 교환원이 이어주어야 통화할 수 있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수동식 교환 전화였다. 전화 옆에서 이 점심 시간에만 낮경비를 맡아보는 것이다. 괜히 짜증만 나고 점심 밥 먹을 생각도 없어졌다. 담배를 연이어 태우고 있을 때 열두 시가 거의 되는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생각 밖으로 전기사가 원정에서 걸어온 거였다. 지금 슬레이트를 싣고 가게 되는데 오늘내로 집에 돌아갈 수 있게 신고원을 대기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토요일이어서 시간이 지체되면 휴일인 일요일까지 나진에서 지내고 월요일에 돌아가야 했으므로 괜한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원정에서 나진까지 한시간 반정도 걸렸으므로 평소같은 때면 정화가 그 시간에 회사에 나와 있기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상황이 달라져 있다. 정화가 바다놀이를 나갔고(이미 사로청 비서로 임명되어 모든 동맹 활동을 관할하고 있다.) 그녀를 데려와야하겠는 데는 차가 한 대도 없다. 

닛산을 우리 식구들이 타고 나갔고 찦차는 종수가 가파로운 올리막을 올라 가다가 물 웅덩이에 빠지는 통에 차가 더 기울어지면서 엔진이 오일 공급 차단으로 절어 붙어있다. 도요다는 종수가 없는 동안 그의 친구가 빌어가지고 비파도 엠페러 호텔(이듬해 9월에 신장 개업을 했는데 그때 공사중인 호텔 옆의 임시 건물에서 시험적으로 카지노장을 운영하고 있었다.)에 놀러 가다가 길 옆의 암반에 충돌하면서 고장을 내서 세워두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때 같으면 판매용으로 중고차도 한두 대 서있을텐데 그 날따라 그 것도 없었다. 정화가 어느쪽으로 갔는 지를 확인해야 했고 차도 구해야 한다. 낮잠을 달게 자는 이창현이를 깨웠고 자전거를 빌려 타면서 경비를 서줄 것을 부탁해 놓았다. 정화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 창현이도 모르겠다고 했다. 

먼저 닛산을 찾기로 했다. 평소 많이 다니는 가까운 식당 몇 곳에 들렸으나 찾지 못했고 안주동으로 나가는 동명 다리를 건너서야 시당 맞은 켠의 관광 봉사소 식당 앞에 서있는 닛산을 발견했다. 

우리 식구들은 영철의 친구까지 네명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잘 차린 상에 둘러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닛산의 키를 받아 쥐고 나와서 일단 후진했다. 공교롭게도 길바닥의 뾰족한 돌에 걸려 펑크날줄이야, 스피어도 없다. 

이날처럼 차가 애 먹이는 날은 없었다. 키를 뿌려 주다시피 주고 자전거로 나진시 도심의 남산 호텔로 갔다. 그 앞에 택시가 많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걸 이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돈은 나중에 어차피 회사에까지 갈 것이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  

영철의 친구는 놀러 잘 다녔다. 안화동에 올적마다 자기 찦차를 타고 다녔으며 아까 식당은 그가 근무하는 합작 회사의 식당이어서 자기 차를 바로 옆에서 직접 빌려 줄 수도 있었다. 이날 따라 그 차도 수리중이였다. 어차피 비싼 택시를 타게 되었다.  

나진에는 외국인들이 많았고 택시의 수입은 주로 외국인들로부터 발생하고 있었다. 키로당 백원이었는데 우리에게도 비싼 가격이었으니 조선 사람들한테는 더 비쌀수밖에.  

내가 알고 있는 동명동 산 너머의 추진이라는 곳에 가보았다. 백사장이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의 천연 해수욕장이다. 단오날 오후에 잠깐 다녀온 적이 있었던 곳인데 거기서 정화를 보지 못했다. 기사와 물어서 해상금에 갔을거라고 다시 판단했고 거기까지 가서야 마침내 정화를 만나 데려올 수 있었다.  

안화동에 도착하여 뒤 트렁크에 실었던 자전거를 부리고 있는데 전기사의 차가 도착했다. 전기사의 차에 정화를 태워보낼까 하고도 생각해보다가 아무래도 택시를 계속 이용하는 게 좋을상 싶어 전기사에게서 원정 쪽의 수속 서류를 받아든 정화를 택시에 보냈던 것이다.  

전기사와 둘이서 아무도 없는 썰렁한 침실에서 찬밥을 먹었다. 남들은 산해진미인데 왜서 나는 고생을 죽게 하고도 식은 밥밖에 차례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오늘따라 외식을 하는 식구들이 괘씸했고 외숙모가 없는 동안 식사 보장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숙모도 미워났다.  

숙모는 주방 일에 서툴렀었다. 그래서 외숙모가 없으면 우리의 식사는 항상 엉망이었다. 드문드문 여자 종업원들을 불러 시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장구지책이 아니었고 쩍하면 외식이었는데 오늘은 명절날이어서 더구나 얼싸 좋은 날이다.  

아침에 남긴 묵은 밥이 있는 것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슬레이트를 부릴 때 술 마시고 돌아온 식구들이 옆에서 흥타령이나 하는 걸 보면서도 꾹 참고 종업원들과 같이 일했던 것이다. 

슬레이트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다 놀이를 포기한 채 차장들이 회사에 와서 작업하는 모습이 이쁘게 보였다. 그래서 그들과 정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차장들이 물건 부탁을 할 때면 꼭꼭 사다주어 조금이나마 고마운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반대로 나와 우리 식구들 사이에 점점 두꺼워져 가는 벽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전기사는 시간을 맞추어 돌아갔지만 엄청난 택시비를 지불하게 되어 기분이 나빠졌다. 나진 시가로 휘발유 50키로 이상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저녁 식사까지 하고 나니 이젠 더는 밸을 참지 못하겠다.  

키를 달라해서 닛산을 바다 쪽으로 몰았다. 첫 출국 때 로얼이 보여 주던 코스대로 안주동 쪽에 정신없이 내달았다. 바다 옆에서 줄 담배로 한시간정도 서 있어서야 서서히 안정이 되었다.  

드라이브가 참 좋은 일이라는 걸 이날 알았다. 교통 지대의 경찰들과도 많이 익숙해져서 지정차가 아니더라도 우리 식구들은 눈감아주고 있는 터이다. 2급 면허로 바꿀 필요 없이 4급으로 거의 2년동안《외》자 달린 차든 중국 차든 닥치는 대로 운전했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므로 후날 기분이 상할 때마다 바다 옆의 도로에서 먼지를 보얗게 일구면서 드라이브를 즐겼었다. 

기분이 전환되는 좋은 찬스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었고 팔자 타령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진에 나가 있던 우리 식구들 중 그 누구보다도 감수가 깊을 수 있었고 나진을 좋아하면서도 떠나야 했던 이유를 그때부터 하나하나 찾아낼 수밖에 없었던 나의 경우를 지금도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더러 가지기도 하지만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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