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차 여섯 대 중에서 덤프 트럭을 제외한 다섯 대가 이미 나진에 다 갔었다. 그 중의 네 대를 팔고 크레인 차 한대가 남았다.  

안화동 회사 앞으로부터 시가지 쪽으로 선봉으로 가는 길목까지 1키로 되는 도로는 사람의 손이 가지 않아서 상태가 엉망이었다. 고개 밑에 있는 몇십 세대의 주민과 우리 회사, 단련대가 이 길에 의지하고 있었다. 

두 기업소에서 의논한 결과 우리가 차를 내고 단련대에서 인력을 내여 이 1키로를 잘 닦기로 합의했다. 버스로 소를 쳐죽인 용구가 그 크레인 차를 운전했고 단련대의 사람들이 흙을 실어 날라서 약 반달 간에 도로 정비를 끝내었다.  

소 말이 나왔으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진에서 소를 구경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수량도 적었고 형편없이 야윈 소들이었다. 일 잘할 수 있기는 다 틀려먹은 소다. 사람의 말을 통 들어주지 않았다. 

뒤울안 파종 때 옆에서 소로 밭갈이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이 쌍! 빌어먹을 간나 새끼! 야, 가라! 빨리, 야!”  

처음에는 누굴 욕하냐고 두리번거리며 찾았으나 한참 후에야 사람을 욕하는 것이 아니고 소를 욕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사람도 싫어하는 그 지독한 상욕을 듣고서야 소는 겨우 움직여 주었었다. 그런데 그런 소가 조선에서는 인간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소를 죽이면 살인과 같이 취급한다고 한다. 농장에 있는 소들은 다 등록이 되어 있고 소가 늙거나 병들어 어쩔 수 없이 잡아야 할 때는 반드시 신고해야 하고 허락이 되어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은 평생 소고기 맛보기를 손꼽아 셀 수 있는 정도로 소고기를 못먹고 있는거였다. 

우리가 초창기 때 소고기를 잘 내다 먹었는데 우리 침실을 기웃거리는 종업원들이 많았었다. 소고기보다 소 대가리를 자주 실어다 먹었다. 중국에서 나간 소대가리를 까는 작업도 내가 무수히 해보았었다. 

한번은 차장 김영옥이 어머니 간염 치료에 쓰겠다면서 청을 들어서 소 눈알을 빼준 적도 있었다. 얻기 힘든 것을 그렇게 나마 얻어서 무척 고맙고 기쁜 표정이었었다. 그런 소를 쳐죽였으니 용구가 단련대 신세를 질 수밖에, 그것도 경한 처벌이다. 소를 노상에서 본의 아니게 실수로 죽인 게 큰 죄로는 될 수 없었는가 보다. 그러나 허락 없이 소를 죽이면 엄하게 다스린다고들 했다.  

그나저나 그 도로 공사때문에 버스와 승용차가 이 구간에서 생각지도 않은 고장을 일으키던 현상이 없어졌고 도로때문에 사람들이 차 수리와 부품 구매를 못 오던 현상도 없어져서 도로 공사에 들인 돈이 오히려 크게 은을 내고 있는듯 했다. 

회사 건물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고 도로 정비까지 끝내니 이제야 회사가 회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참말로 무수한 노력으로 힘들게 걸어온 초창기였다. 그런 초창기를 보내고나니 약간 휴식하고 싶어졌다. 마침 공화국 창건의 날인《9.9》절을 맞이해서 종업원 전체가 추진바다에 가서 하루 놀기로 했다.  

기대해도 어지간히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바다 옆에까지 갔지만 그때까지 바다에 뛰어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우리 식구중에 나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추진 바다는 지대안에서 관광객들에게 개방한 유일한 해수욕장이기도 했다. 언녕 준비했던 수영복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청년절날 슬레이트 하차 작업때문에 제대로 놀지 못한 사로청원들은 괜히 흥분해서 가는 동안에 쉴새없이 노래를 불렀다.  동명동의 산고개를 타고 추진의 해수욕장까지 가는 도로 옆의 원시적인 멋도 우리 팀의 여행에 이채를 돋구는듯 했다.

오락을 노는 데도 두 나라 사이에 일정한 장벽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민요와 조선 노래를 부르는 건 괜찮았지만 중국 노래, 한국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부르고 나면 우리한테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노래를 들은 조선 사람들한테는 일종의 죄로 되어 있어서 입에 오른 중국 노래와 한국 노래를 마음대로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백사장에서의 축구, 옅은 바다에서의 배구, 여럿이 모여들어 한 사람을 옷입은 채로 바다에 처넣기, 섭죽 끓이기, 알방게 잡기, 성게 잡기에다 즉석에서 먹기, 배 타기 등은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되는 바다놀이였고 바다 수영이 엄청 힘드는 일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우리 식구들 몇몇은 보트를 세내어 바다 먼곳까지 갔었다.  로얼은 연변의 조선족 노래를 흥에 겨워 부르기도 했고,  다른 보트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소리치기도 했었다.  뭍에 돌아온 후 나는 훈춘 식구들이 단체로 만든 삼배 적삼을 벗어내치고 제일 첫 사람으로 바다에 뛰어들었고 잠수하면서 성계를 잡아내었다.  이날 우리 팀의 성게는 모두 내가 주어냈고,  일반 성게와 참성게를 구분하는 요령을 익히기까지 했다.

지금도 그 날의 바다를 잊지 않고 있다. 

공해없는 깨끗한 바다에 들어가면 내 마음과 영혼이 씻겨져 깨끗해지는 느낌이었고 새로운 내가 환생하는 기분이었다. 

바다 수영을 하면서 내 인생도 그렇게 힘든 것이라는 걸 느꼈고 깊은 바다에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는 항구의 등대처럼 길을 알려 주는듯한 그 무엇이 아득한 곳에서 나를 향해 손짓하는듯한 기분 좋은 환각도 들었다.  

추진의 바다, 그 바다가 나에게 희망의 인생 공부를 하게 한 바다였다. 이제까지 나진에 살면서 회사 밖으로 나진만을 내다보는 것이 아침에 일어나서 첫 코스였지만 그렇게 보는 것과는 차원이 한단계 뛰어오른 다른 교과서를 찾아낸듯한 느낌이었다.

바다에 뛰어들어야 인생을 알 것 같았으므로 후에 나는 기회만 있으면 바다에 들어갔고 그렇게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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