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올해의 풍부한 수확은 이미 따놓은 거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므로 아무 부담없이 대기실 건설을 시작할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와 나 개인적으로 마음 한구석에 시원치 않은 그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떨쳐버릴 수 없었으니 마음이 편해질 수가 결코 없었다.  

종수의 문제를 놓고 보자. 

몇달 간 열심히 택시를 하는 것 같더니 회사의 벤츠를 중국에 넘겨간 이래 크게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88호의 돈을 다 지불한 것 같지 않았고 벤츠(87호 번호판을 달지 않고 그냥 세워두고 있었다.)를 팔고 난뒤 돈을 갖다주기로 했는지 그의 일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구식 벤츠였으므로 고철로 놓아두기보다는 보내는 것이 그래도 제일 좋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돈을 썩 뒤에 받더라도 똥차로는 만들지 말아야 했다.  

돈 문제도 괜찮았다. 로따에게 걱정 거리가 생겼다. 대학 간 큰아들이 한달만에 자원 퇴학을 한 것이었다.  

옛날부터 천하 모든 부모들은 하나같이 자식이 출세하기를 얼마나 기대했는지 모른다. 특히 우리 민족의 전통에 자식이 공부하는 데 소를 팔아서까지 뒤바라지했으며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기어이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힘겹게나마 보장해주었고 그것이 지금도 미덕으로 남아 있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은 사회주의 사회의 특유한 계획 경제의 영향밑에 재능이 없는 사람도 얼렁뚱땅 살아갈 수 있었던 그런 시기를 겪어왔었다. 뭐나 다 평균주의였던 그 시기에 우리 아버지 세대는 공부도 제대로 못했거니와 경쟁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았으며 해놓은 일이 많던 적던 나라에서 똑같이 먹여 살리는 정책으로 하여 근심 걱정없던 나날을 보냈었다.  

요즘 세상은 이미 생존 경쟁이 치열한 약육 강식의 사회로 변했으며 그러한 경쟁 사회에 적응하려면,  또한 생존해 나가려면 반드시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되어야 한다. 

그 첫 보조로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다. 미덕은 미덕이로되 대학에 붙고 나오는 일은 진정한 인생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첫 스타트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떤 열악한 조건과 환경이든지 다 적응할 수 있는 방법과 사회의 모든 현상들을 분석하고 능란하게 일처리를 하는 기능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학교의 우열에는 상관 없이 자신이 그런 도리를 터득하고 열심히 배워만 내면 일단 첫 보조는 성공한 거다.  

그런데 학교가 썩 안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학 공부를 포기하다니? 로따 내외가 마음에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로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혹시 재수생으로 다시 공부해서 더 좋은 대학에 갈수 있다면 별문제인데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경우 아주 심각한 문제로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 전도를 가지고 장난치는 하등의 필요 없는 자존심이고 허영일 수밖에 없다.  

정말 천하 제일 불쌍한 것이 부모 마음이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사건이었다. 기분 없이 다니는 로따를 볼 때마다 측은한 생각이 갈마들었다.  

중국의 휘발유는 가격이 오를대로 올라 더 오르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그 영향을 조선에서도 받고 있었다. 원래 우리도 가끔 중국의 연유를 내다가 팔았었는데 유조차를 빌려 쓰다가 후에는 자체로 유조차 한대를 샀으며 그 유조차로 열번 정도 실어 나르다가 연유 값이 오르는 바람에 나진의 회사 안에 세워 두었고 그래서 러시아 연유를 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유조차는 쟈쟈가 운전하였었는데 그 차를 세워두니 8월에 구입한 중고 트럭으로 물자를 실어 날랐으며 역시 쟈쟈가 운전했다.  

그런 쟈쟈도 문제였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벌써 수명의 여자들과 관계한 연애 전문가였고 술을 무짐작으로 마셨으며 마시고 나면 반드시 취했었다. 그것도 괜찮았는데 제일 골치 아픈건 차를 잘 관리하지 않는 거였다.  

저술령에 습격조가 나타났다. 

어느 한번은 타이어, 칼라 TV, VCD, 자전거 등을 한꺼번에 잃은 적이 있었는데 습격조의 신출귀몰은 하느님도 울고갈 지경이었다. 저술령뿐이 아니고 청학고개와 관곡 고개에도 나타나 늘 중국차들을 괴롭혔다.  

또 후창 버스 노선을 취소한다고 했다. 

원래 지대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전부 후창 기차역에서 내려 바로 옆에 있는 버스 정류소(역시 노천)에서 증명서 검열을 받은 후 차타고 나진시까지 왔었다. 무슨 감투끈인지 모르게 지대의 범위를 줄이기로 했으며 원래 이름이 《나진-선봉시자유경제무역지대》였던 것을 《자유》두 글자를 빼버린 《나진-선봉시경제무역지대》로 고친다고 했다.

후창에 가기 전에 진수 고개라 부르는 자그마한 영이 있다. 내가 첫 출국 때 갔던 명호 마을에서 조금만 더 가서 진수 고개를 오르는 산기슭에다 종합 검사장을 만들어 놓았고 습관적으로 후창 세관이라고 불렀으며 지대를 상징하는 철조망을 후창 기차역으로부터 진수 고개 이쪽까지 철수해 왔다. 

원래의 후창 세관과는 진수 고개를 사이 두고 있었다. 지대는 육지 부분을 지대 바깥과 철조망으로 갈라놓고 두른 것이어서 보는 사람마다 이곳이 특별한 지역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는데 원정과 똑같은 성질의 종합 검사장이 후창에 있는 것으로 하여 지대안은 나라안의 나라라고 해도 말이 되었다. 지대는 나라에서 시험적으로 하는 개방 지역으로서 결국 색다른 정책을 실행하는 곳이었으며 지대 밖에서 처음 오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오지 않았나 의심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지대 안에 지대 밖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다니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일단 후창 노선을 취소한다는 거다. 왜서 통제하는 지는 누구나 다 아는 지는 모르겠고 그건 우리가 관심할 문제가 아니었지만 노선이 취소된 뒤에 발생할 결과에 대해 신경이 쓰어졌다.  

나진의 10여대의 버스와 선봉의 여라문 대의 버스가 나진-선봉 노선에서 경쟁한다. 20여대가 두 노선에 널려 있다가 한 노선에 몰키면 결과적으로 수익금이 형편 없이 줄어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물론 우리한테 경쟁에 유리한 조건이 그 누구에게보다 많다. 11대의 버스 가운데서 최저 7대는 가동될수 있었고(수시로 수리하고 검차 준비때문에 세워두는 경우도 있었으며 혁명 사적지 답사차로 빌려 주어 노선에 나가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버스 기사들의 적극성이 좋았으며 노선에서의 현지 수리도 보장이 잘 되었다. 

문제는 한가한 때가 많아서 기사들이 술추렴을 할 시간이 많아지는 거였다. 여름내내 새벽 운동으로 하여 몸이 피곤해져 있었고 피곤하면 먼저 찾는게 휴식할 장소가 아니라 술이었다. 피로 운전과 음주 운전때문에 꼭 언젠가는 사고를 칠 것만 같은 예감이 든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차영감이 고문으로 된 후 차대는 로얼이 맡았고 건설 일도 거의 마무리되었을 뿐더러 갈수록 관할 범위가 적어지게 되여 영감이 심술부릴 때도 가끔 있었다. 

호칭도 고문 아바이로 되었고 회사의 많은 일을 감당해왔지만 조금씩 소외되는 감을 느꼈는지 어느 하루 나보고 전기수리를 맡겨달라고 얘기한 적 있었다. 스타트 모터와 발전기 등속을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대답은 했지만 아바이가 손을 대려고 하면 기어이 못대게 하고 내가 직접 수리했다.  

새 변압기를 장치한 일, 경비실의 부엌을 다시 손질하고 작은 물탱크를 개조하여 큰 물탱크를 만들어서 부엌위에 올려놓아 겨울에 버스들이 더운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만든 일, 회사 울타리밖에 핏트를 만든 일, 중고 반 짐차와 바꾼 선반을 장치한 일, 건설자들을 지휘하여 지난해 못다한 일을 말끔히 해 치운 일 등등 아바이는 후방 일을 무던히도 잘해 냈다. 

새하얀 회사벽은 멀리 관곡 고개위에서도 내려다 보였는데 아바이의 노고를 충분히 말해주고 있는듯 싶었고 구내의 질서 정연한 모습은 다 차영감의 피타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거였다.  

그런 차영감이 지금은 할 일없이 경비실에 앉아있다. 그 시래기 부스러기같은 잎담배를 연이어 말아 피웠고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많은 것처럼 그 입에서 들어도 들어도 다 들어내지 못할 재미있는 이야기가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투리로 구수하게 엮는 그의 이야기는 일손을 놓으면서도 꼭 들어야만 하는 음담 패설, 웃음 주머니에다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바로 그거였다.  

관리 부문에서 오는 압력도 컸다.  

한번은 유리 한차를 실어 내갔는데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유리 상자에 끼워 넣은 벼짚을 조선 땅에까지 내오지 말아야 한다면서 식물 검역에서 난리쳤다. 벼짚은 포장할 때 끼워 넣은 것이었고 조선의 규정대로 하려면 중국에서 그 포장을 풀고 벼짚을 말끔히 가려낸 후 다시 포장해야 했었다. 

고양이 손도 빌려쓰기를 마다하지 않는 우리에게 그런 여유를 부릴 시간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검역 소장이 하는 말이 걸작이다. 중국에서 바람에 벼짚 한오라기가 날아왔는데 그 때문에 국경 쪽 농장 수전의 벼들이 전부 다 죽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두만강 너머는 훈춘의 경신진이었고 마주하고 있는 데가 하여평리었다. 경신진은 《어미지향(魚米之鄕)》으로 불리는 주요한 민물고기 생산 기지에 백미 산지다. 그만큼 한전은 극히 적고 대부분이 수전이었으며 나진의 속담과 비슷한 《바늘귀만한 구멍에서 소대가리만한 바람이 나온다.》는 곳이다. 

중국에서 과학 영농을 보편화하고 있는 때어서 많은 농약과 화학 비료를 쓰고 있었는데 소장은 그것을 빗대고 얘기하는 것이다. 후에는 시끄러워 벌금을 얼마간 내는 것으로 끝을 보았는데 그일 때문에 1주일간이나 우리 회사에 다니면서 귀찮게 굴었고 그 목적인즉 바로 그 개도 안 먹는 돈 때문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부문에서도 시끄럽게 굴 때가 많았는데 휘발유와 부품이 수없이 공짜로 나가고 있었고 대외 상품검사소의 정영감은 검사 때마다 식사를 원했고 최소한 담배를 한두 갑 받고서야 물러서는 위인이었으므로 그가 나타나면 누구나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후에는 로따와 손찌검이 거의 날 지경으로 말다툼을 한 후로 다시 오지 않았었다.  

그런 시비 거리를 매일이다시피 겪었고 또 집식구들 사이에도 일정한 모순이 있었다. 

로얼과 숙모 사이, 나와 용철이 사이, 숙모와 외숙모사이, 우리 식구들과 종업원들사이… 그 중에서도 숙모가 제일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맡은 일을 하면서도 중국의 대기업에 있으면서 굳혀온 습관들을 여기 개인 기업에 가지고와서 쓸데 없는 물의를 일으킨 적이 한두 번만이 아니었다. 기업이 어떻게 되든지 먹고 마시고 기업의 돈을 자기 돈 쓰듯 하던 옛 습관이 여기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매일이다시피 하는 술집 소비를 내놓고라도 외식에 들어가는 비용은 눈을 감고서도 어느 정도 되겠다는 게 짐작된다.  

회사는 후에 수십만 달러의 재산을 가진 기업으로 될 때까지 절약을 제일 근본으로 삼고 모든 일은 최저의 투입으로 최고의 이익을 보는 쪽으로 밀고 나갔었는데 숙모의 습관은 절약 정신이 너무도 결여하였기때문에 일정한 손실까지 빚어냈었다. 

제일 대표적인 것이 휘발유 가격을 사람에 따라 마음대로 여러 가지로 해놓은 거였다. 이것은 휘발유가 한방울도 나지 않는 조선에서 물가 개념이 엉망인 조선 사람들에게도 납득되지 않는 일이었고 더우기 회사의  발전에도 영향이 컸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험이 풍부한 로따에게 의뢰한 것이 아니고 중국에서 일을 할 때의 판단과 개인적 주장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결정했는데 회사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음에도 자신은 감촉하지 못하고 있다. 

안면이 좀 있다고 휘발유 가격을 낮추어 파는 것은 중국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조선에서도 절대적으로 삼가해야 할 일이었으나 그런 일이 비일비재로 많이 있었고 저녁에 술놀이가 밥 먹듯이 이루어졌기에 수면 보장을 하지 못해 늘 밥맛이 없다고 투정아닌 투정을 해댔으니 자기 음식 솜씨에 대해 언제나 자신 있어하는 외숙모와의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은 로따의 심신을 너무도 지치게 만들었다. 

사람 사는 동네가 모순 없이 살아간다면 거짓말이겠으나 그런 모순과 모순이 엇갈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안화동이었다. 

안화동은 모순의 미로속에서 준엄한 시련을 겪고 있었고 언제나 민감한 조선 사람들처럼 우리 식구들사이에도 언제쯤은 폭발할 것같은 팽팽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서 모두가 다 긴장한 가운데 마가을은 거의 다 지나가고 이제 바야흐로 겨울이 닥쳐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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