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곡절적이었지만 초창기 당해에 마진이 많이 남고 그 기초에서 새롭게 대기실을 지을 수 있는 발전의 길로 치달아 오를 때 뜻하지 않던 일이 발생했다.

11월 말의 어느날 눈길을 달리면서도 사고치지 않던 버스가 선봉읍에서 인명 사고를 냈다. 조경화가 운전했는데 그 때의 차장은 문은실이었다.

손님을 태우기보다 짐실이가 개인적으로 돈을 챙기는 데 더 좋았다. 손님들에게서는 돈을 받고 차표를 끊어주었지만 짐은 사람처럼 표를 주지 않아도 되었고 그 짐 돈으로 점심 식사를 해결하고 나머지는 자기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심 식사하는데 1인당 150원까지는 허락했기에 조금씩은 돈을 남기도록 기회를 만들어 준 셈이었고 어떤 담대한 차장들은 중간역 손님한테서 돈을 받고 표를 주지 않으면서 그 돈을 챙기는듯했다.

하여튼 이번 사고는 짐때문에 난 사고임에 틀림없었다. 선봉 정류소에서 짐실이(조경화와 문은실은 승인 안했음)로 선봉읍의 어느 곳엔가 가려고 나온 후 웅상리 쪽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기 전이었다.

선봉 회관 앞의 4차선 넓은 도로 가운데로 여자 두 명이 걷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경적을 울리면서 제동 준비까지 했다. 경적 소리에 깜짝 놀란 두 명 중 한 명이 도로밖으로 뛰었으나 다른 한 명은 차도로 더 들어왔으며 브레이크 페달을 밟는 중에 버스와 부딪히고 말았다.

그때 상황이라면 사람이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는 데도 불구하고 버스 앞에 뛰어들었다는 것과 당시의 속도로 인명 사고까지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도 약한 체질의 그 여자가 길에 넘어지면서 떵떵 언 아스팔트길에 자기 머리를 사정없이 박아놓고 말았다. 조경화가 내려가보니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고 한다. 병원에 실어갔지만 얼마 안되어 저승 길로 떠나고 말았다.  

처리 결과는 나중에 보기로 하자. 여기서 먼저 나 개인적인 소견으로 사고 분석을 해보려 한다.  

나진이 개방된 뒤 배급제가 취소되었고 사람들은 생활비에 매달려 생활하는 방식을 하루 아침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개인 장사를 하지 못하게 했기에 생활비는 유일한 생활 원천으로 되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나 조선은 나라적으로 공업이 마비에 빠진 듯했고 생산은 거의 중지 상태였다. 자원 문제도 있겠고 비개방적인 정책 문제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진에도 생산이 정지된 기업소가 수없이 많았으며 생활비를 몇달 간 지어는 1년 이상씩 미루면서 주지 않고 있어서 생활난에 허덕이는 가정이 많았었다.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외국인 기업도 생활비를 몇 달씩 미루는 데가 더러 있었고 그 것은 아마 은행에 현금이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외국인 기업으로서의 우리 회사는 은행에서 미루어도 손에 있는 돈으로 먼저 생활비를 내주었으며 제일 길어도 닷새 이상을 미루지 않았다. 게다가 버스 운행은 사고가 없기만 하면 높은 상금까지 포함해 항상 지대에서 규정한 4천8백의 고정 생활비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모험이 거의 없는 도거리인데 일자리로는 나진시적으로도 가장 좋은 일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수익금 중의 일부는 챙길 수도 있다.  생계를 위해 거짓말과 도둑질을 밥먹듯이 하고있는 마당에 이런 일자리가 차례지는 도 그네들한테 복이라면 복이겠다.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차를 정비했고(비록 기능이 낮다 하더라도) 남 먼저 첫 손님을 태우려고 새벽 운동을 오래도록 해왔다. 원래 약한 체질에다 피곤이 몹시 쌓였고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술밖에 찾을 수 없다. 운전 기능보다 피로 운전과 음주 운전때문에 사고칠가봐 많이 걱정했는데 이제 그 예감이 현실로 다가온거였다. 이번 사고는 피로 운전에다가 개인적인 지나친 탐욕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점찍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후창 노선이 취소된 후로 우리 버스는 나진-선봉 노선과 선봉을 경과하는 나진-원정 두개 노선만을 달릴 수 있었다. 이 두 노선을 제외한 다른 노선에서 우리 차가 나타나면 무조건 처벌이 내려지게 되는데 경하면 벌금이고 중하면 버스를 몰수했으므로 우리는 항상 노선외 운행을 하지 말라고 기사들에게 경고해 왔으며 짐실이로 선봉읍 내에서나 나진 시내 구역 어느 곳에든지 가지 못하게 단속해온 터였다.

시내버스가 없는 나진시내와 선봉 읍 두곳에서는 노선 버스가 시내구역 지정된 곳에서만은 운행이 가능하다. 나진시에서는 새로 짓는 대기실 부근의 장마당으로부터 청계동까지의 시내 노선을 허락하는 상황이어서 이 구간은 노선 외 운행이라고 할 수 없었다. 선봉에서 원정으로 가는 길에 웅상리(더 가면 이 나라 북녘끝인 서수라에 갈 수 있다.) 쪽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지는데 이번 사고 지점은 그 갈림길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역시 노선 외 운행에 속하지 않았다.

일단 노선 외 운행이 아니면 사고친 운전수한테는 더없이 좋은 조건으로 되고 따라서 운전수한테서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처지에서 모든 경제적인 손실을 안아야 하는 회사의 입장도 좋은 위치에 서게 된다. 이번 사고의 직접적인 책임은 죽은 그 여자에게 있었지만 이 나라 법이라면 무조건 운전수한테 죄가 돌아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일단 조경화를 구류했고 버스도 차압했다. 조경화를 어떻게 처리하는 가는 선봉군 안전부에서 할 탓에 달렸고 우리는 버스때문에 발편잠을 잘 수 없었다. 명색이 안전부인 그 울안이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전은선의 차로서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전은선이 음주 운전으로 비록 인명 사고까지는 치지 않았지만 버스는 나진 안전부에 차압당했었다. 전은선이 단련대로 혁명화를 가고나서 얼마 안되어 그가 운전하던 223호를 가져가도 된다는 통지를 받았었다.

차영감이 먼저 갔다와서 하는 말을 듣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탱크에 휘발유가 한 방울도 남지 않았고 배터리도 온데 간데 없다. 게다가 발전기(올터네이터)도 없어졌다.

휘발유 20키로에 배터리와 발전기를 가지고 가서 내가 작업했고(안전부 울안에는 외국인을 들여놓지 않았지만 내가 전기 수리공이었기에 막무가내로 들여놓은 것 같다.) 그때 입사한 지 얼마 안된 이춘일이 몰고 돌아왔었다. 버스는 돌아왔지만 안전부 울안에서 도난당했다는 느낌이 좋을 수가 없었다. 조경화가 단련대 혁명화로 6개월 처분이 내려진 후 처음 경험 대로 휘발유에 배터리도 싣고 버스가지러 갔는데 추측과 같이 휘발유는 한 방울도 없고 배터리도 없어져 있었다.  

어이 없게도 안전부 울안에서 도난당한 우리 버스!  

버스를 돌려준 것만 해도 큰 자비를 베푼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당시에 시비 걸려는 생각은 꼬물도 없었다. 로따가 묵묵히 받아들이는 현실을 내가 떠든다고 해결받을 일이 아니다.

용구가 소를 떠받아 죽인 사고 끝에 그저 휘발유만 잃어지고 버스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 탱크에 자물쇠가 걸려 있어도 키는 차와 함께 있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빼갈 수 있다하지만 어쩌면 그렇게도 말끔히, 철저히, 모조리 뽑아갈 수 있단 말인가? 나진에 있는 동안 조선 국내 기업소의 차가 단속되었을 때 우리와 같은 경험을 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었다.  

조경화는 구류된 지 20여 일만에 선봉 안전부에서 나왔으며 그때 이미 수리된 86호를 몰고 내가 데리러 갔었다. 세포 비서와 조경화의 아내, 문은실이도 함께 갔다. 다른 사람들보다 줄타기를 잘한 덕에 두터운 솜옷을 들여 보냈기에 난방이 없는 곳에서 지탱할 수 있었고 집에서 지은 밥도 먹을 수 있어서 그리 축가지도 않았지만 그 아내와 은실이는 눈물을 펑펑 쏟았었다.  

***

창밖에서는 깊은 겨울의 눈이 소리없이 내리고 있다.

12월초에 내린 눈으로 하여 회사에서 버스 운행을 취소해 버렸는데 이미 운전수와 차장들이 방학을 한 상태었고 늄창조, 무역조(창고장인 영철이와 판매원 설화, 무역 지도원 최영복, 세관 신고원 정화 등 네명), 그리고 내가 일이 있는 외 다들 한가해 있었고 낮 시간을 마작 놀이로 보내고 있을 때이다.

대기실도 겉 도장이 안되어 있을 뿐이고 종업원들은 12월 초의 회의 때 더러는 해고되고 새로 몇명이 입사했었다. 운전수 중에 재길이와 용구가 해고당했고 서종호, 김중신이 새로 왔다. 이춘일은 들어온 지몇 달 되였다. 운전과 정비 기능이 약해서 해고되는 일이 많았는데 운전만 할줄 아는 운전수는 우리 회사에서 배겨내지 못한다. 이춘일과 김중신은 합작 회사 때의 운전수였는데 집에서 몇 달 간 놀고있다가 입사했다. 서종호는 제2건설 사업소에서 전근되어 왔다.

차장들중에는 입사한 사람들 뿐으로 김성옥과 나옥분이 왔다. 김성옥은 김정숙 사범대학에 입학한 적이 있으나 돈을 대지 못해 중퇴했고 후에 한 중국인 회사에서 신고원을 하다가 그 회사가 파산을 해서 집에서 놀고있던 중 입사했고, 나옥분은 고아로 시 인민위원회에서 넣어준 거였는데 부모님들이 무슨 비밀 공작을 하는 사람이고 다들 한 차례의 임무 수행 중에 순국해서 열사로 추인된 것이고 지금은 그 집에 숙부네가 와서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둘 다 예쁜 처녀였다.  

수리공인 송정과 남수남은 계속되는 도둑질로 끝내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수리반의 공구와 일부 부품은 송정이 많이 훔쳐 내갔는데 수남이는 그와 함께 춤추었었다. 둘 다 일을 잘했었다. 송정이 심장병을 앓고 있어 내가 약을 몇번 사다준 적이 있는데 내가 중국에 가 있을 때 해고되다 보니 쫓겨가는 그 당시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요즘 남수남이 매일 로따에게 빌고드는 모습이 보였다. 연며칠 눈물 콧물 쥐어짜며 빌고들어 마침내 남겨두고 쓰기로 했으며 수리공이 아니고 아랫집의 경비를 맡겼다. 남수남의 그때의 이상은 용철이에게서 엔진 수리를 잘 배워 독립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수준의 기능을 갖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몇 달 간 배워도 그 모양 그대로이고 키 작은 체질에 힘든 일을 잘할 수 있는 정도이고 타이어 손질에 특기가 있을 뿐이었다. 연말의 그번 회의에서 해고를 선포한 상태어서 보름이 지난 다음에야 남수남은 다시 출근할 수 있었다.

배터리 도난 사고로 이일부 영감이 해고된 것이 요즘 일이어서 급히 경비설 사람이 수요될 때였다. 그 당시 종업원들을 보면 기본상 괜찮은 사람들만 남았고 일부는 해고를 밥먹듯 하는 데에 일정하게 경계하면서도 도둑질을 상습적으로 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아주 잘했었다.  

12월 19일 오후에 로따가 연길 여관(중국인 단독회사)에 방 하나를 잡았다. 이 일은 계획한 지 오래 되었다. 위성 안테나가 있고 자가 발전을 하는 이 여관은 중국 TV 프로 시청이 가능했고 아침부터 마카오 반환 실황을 생방송했으므로 밤을 새울만한 날이었다.  

통일이란 단어를 여러번 떠올리게 하는 날이다. 그날 거의 열 명되는 우리 식구가 카드 놀이하면서 생방송을 보았고 거기서 밤을 샜다. 북경 시간 밤 12시, 그러니까 12월 20일 0시에 포르투갈 국기가 내려진 뒤에 중국의 오성기가 게양되는 걸 보면서 환각에 잠기기까지 했다.  

나진 기차역에서 탄 열차로 조상의 고향인 영천으로 가는 내 모습을 보았고 두만강 국제 공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는 내 모습을 그 환각 속에서 보고 또 보았다.  

***

12월에도 중고 부품에다 발전소의 파이프를 여러번 싣는 작업을 하는 중 로따의 동의를 거쳐 내 동생도 회사의 일원으로 되었다. 나는 여름철부터 차를 많이 몰았지만 겨울의 눈길에는 정말 자신없었다. 무직업으로 집에서 놀고 있는 동생의 처지가 딱했는지 로따가 입사를 허락했고 동생은 면허가 있었기에 함께 중고차를 나진까지 운전할 수 있어 나는 인수원 노릇 반년만에 마침내 조수가 있게 되었다.

동생 입사 전에 중국의 최영감이 중고차를 더러 운전했는데 나이가 많아 주로는 중국쪽 차수리를 맡기고 있었고 쟈쟈까지 인제 우리 훈춘 식구가 저그만치 열네 명이 되었다. 불과 며칠 후에 숙모가 단독기업으로 된 후 훈춘 식구의 첫 사람으로 해고되어 집으로 돌아갔고 그 자리로 이모가 나오게 되어 역시 열네 명으로 새해를 맞게 되었다.  

숙모는 언녕 돌아갔어야 했다. 오래동안 평균주의의 국가 기업에서 얼렁뚱땅 지내왔기에 수익금관리 외에 부기의 기본인 장부도 할줄 몰랐다. 중국에서 초중(중학교) 졸업생으로 한자를 대충 아는 정도면 기업의 부기원 노릇을 하기에 적합하지는 않았지만 여러가지 강습반에 다니기도 하고 중공 당원이면 기업소에 대한 공헌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괜찮은 부서의 일을 맡겨주기도 했는데 한사람의 사업상의 부족점은 많은 사람이 같은 일을 하는 데서 매몰되어 잘 알리지 않을 수도 있다. 숙모는 바로 그런 사람중의 한사람이었다.

숙모가 원래 근무하던 곳은 나진의 회사와 본질상에서 비슷한 기업소였는데 부기원으로 있은 숙모가 나진의 부기장 일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건너짚은 것은 완전히 오산이었다는 것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이모가 12월 중순에 나진에 도착하여 일 주일 간 검토한 결과 숙모가 근무한 기간의 장부는 엉망이었고 일개 부기원으로서 최저한의 자질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판명났다.

게다가 습관적인 불면과 음주로 사업에 막대한 영향까지 끼쳤다. 이 것은 개인 기업에 있어서 큰 실수였고 거대한 충격이었다. 이모는 단과 대학 졸업생으로서 줄곧 부기일을 해왔기에 숙모의 허점을 단번에 보아냈고 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계속 쓸 수 없다고 단정한 나머지 마침내 자신이 직접 나진에 나가서 부기장을 맡을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새해를 이틀 앞둔 29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새로 나온 상무 여권으로 나진에 나가 로얼과 내가 같이 지내고 나머지 식구들은 전부 귀국시켰다가 신정 휴가 후에 다시 나가게 하려고 계획했다.

통행증은 유효 기일이 길어서 석달이고 연말이면 유효 기일을 이듬해까지 석달을 다 주는게 아니고 무조건 12월 31일까지어서 그 통행증으로 신정 뒤 며칠 후까지 나진에 있으면 불법 체류로 된다. 상무 여권은 유효 기일이 2년이어서 2년 동안 임의의 시간에 나진에 있어도 무방하다. 로따가 고집스레 혼자 나진에 있겠다고 하는 걸 설득해서 돌려보내고 로얼과 나 둘이 나가있기로 했던 것이다.  

이날 중고 반짐차에 중고 부품을 한차 싣고 오후에 출발했는데 동생이 몰았고 내가 조수석에 탔다. 주유소에 들려 만탱크하고나서 나진에 가려고 했다. 이날 따라 주유소에 차가 많았다.

주유가 끝나 출발하려 할 때 앞에 난데없이 역 순서로 들이닥친 차가 길을 막았다. 뒤에 줄 서있던 차들은 우리 차를 빨리 빼라고 경적을 울려댔고 우리도 그 차에 신호했다. 듣는둥 마는둥 그 기사가 느릿느릿 차에서 내렸고 당장 주유하기라도 할듯한 기세로 주유기 옆에서 주유 건을 주어들려고 했다. 참으로 재수없는 놈이었다.  

“여, 길을 비켜 줘!”  

중국어다. 나의 곱지 않은 말투였다. 힐끔 보는것 같더니 돌따서 가는 시늉을 하다가 다시 주유기곁에 오는 것이었다. 모양을 보니 떼놈이다.  

“여, 사람을 놀리는 거야?”  

역시 중국어로 했다. 시간이 지체되면 오후 시간에 다리를 건너지 못한다.  

“이 사람들 병이 좀 있는것 같다.”  

그 놈은 혼자 말로 씨벌이고 있었다.

(어디서 난 개좆같은 놈일까? 버릇을 고쳐 줘야지.)

“병은 너한테 있는것 같다. 뒤에서 숱한 차가 우리가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잖아! 넌 거꾸로야!”  

그게 나와 무슨 상관 있어? 나는 급해 먼저 넣어야겠다.”  

그때 원래 이 병신같은 놈을 가만 뒀어야 했다. 혹자는 뒤차들을 동원해서 몰아내게 하는 것도 괜찮았다. 그런데 나는 이미 그의 앞에까지 갔고 주먹이 어느새 그의 턱을 올려치고 있었다. 뒤로 한번 휘청하더니 자기 차에로 갔다. 

“꺼져!” 

그 것으로 끝난 줄 알고 나는 조수석에 앉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놈이 자기 차에서 쇠몽둥이를 들고 내리더니 곧추 그때 탱크 뚜껑을 닫고 있던 동생한테로 가는 것이었다.  
 
“너 그 걸로 여기를 쳐봐라.”  

동생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이미 나의 행동을 다 보았고 사태를 안정시키려는 것 같았다. 싸울 생각은 전혀 없는듯 했다.  

그런데 그 놈은 만만찮은 놈이었다. 멍한 모습으로 서있는 체 하다가 운전석에 오르는 동생의 허리를 갑자기 그러안아 멨다꼰졌다. 준비가 없던 동생은 허망 밑에 깔렸고 이 놈은 쇠몽치를 감히 쓰지 못한 채 헛 주먹질만 해대고 있었다.  

(이 씨팔 놈이 환장을 했구나! 죽여야지! )

씽 달려 내려갔다.  머리채를 당겨 얼굴에 발길을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코피가 쏟아져 나왔다. 동생을 잡은 손이 풀리지 않았다. 두번째 발길에 손이 풀렸고 쥐고있던 쇠몽치도 놓았다. 세번째 발길은 정확히 명치를 걷어찼다. 주유소에서 통쾌한 싸움을 했다. 나진의 2차 전쟁 뒤로 3차 전쟁을 겪은 거다.

누워서 꼼짝 못하던 놈이 어디서 난 힘인지 부리나케 일어나더니 주유소 밖으로 정신없이 내뛰었다. 우리 차는 오도 가도 못하게 갇혀 벼렸고 잠시후 들이닥친 110차에 형제가 나란히 관할 파출소로 모셔졌다. 그 놈이 핸드폰으로 부른 거였다.  

파출소에 간 다음에 누가 옳다고 아무리 시비해도 다 헛일이다.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때린 사람이 맞은 사람에게 치료비 주고 벌금하고 나면 그만인 거다. 이날도 돈 천원을 내쳐서야 자유의 몸이 될수 있었다. 떼놈은 그때까지도 핸드폰으로 사람을 부르느라 미쳐 날뛰었다.

파출소장하고는 안면이 있는 것 같았고 우리 형제는 곱다라니 서있는데 완전히 주인 행세다. 파출소에서 나간 다음 불러온 사람들로 우리를 묵사발 만들어 버리려는 심사같았다. 모든 수속이 끝났지만 파출소에서는 우리를 놔주지 않았고 오히려 불손하게 말을 거는 거였다. 중국어다.  

“당신들은 참 괜찮다. 연말이 되니까 우리 사업을 돕느라고 그랬지?”  

파출소에도 연 계획이 있다. 그 계획이라는건 사건을 해명하는 건 수와 벌금 액을 정해놓고 연내로 완성하는 것인데 계획을 수행하지 못하면 월급을 주지 않았고 연말 상금이라는 것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구정 전에 상금을 주는 것이 통상적이었고 그전에 계획을 잘 완성하거나 넘쳐 수행하면 좋은 일밖에 없다. 벌금을 받아내기 힘든 세월에 고스란히 갖다 바치는 사람이 나졌으니 아마 마음이 흐뭇해 났을 거였다. 그런데 말씀하나만은 정말 건방지셨다. 《경찰과 후적은 한집안 식구》라는 중국의 명언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이다.  

두 시간이나 지났다. 이젠 나진으로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 되었다. 날도 어둑어둑해져 간다. 내일 오전에는 갈 수 있을는 지는 지금 상황으로 놓아주느냐 안 놓아주느냐가 문제였다.  

파출소로 한무리의 어중이 떠중이들이 들이닥쳤는데 앞선 자와 제일 먼저 인사를 나눈 사람은 내 동생이었다. 파출소장과 그 떼놈은 대번에 주눅이 들었다. 이내 풀려 나왔고 소장은 게면적은 웃음을 지으면서 공손하면서도 비굴하게 말하는 거였다.  

“영수증을 이미 떼놓아서 물려 드리지 못하게 됐습니다.”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면서 훈계하던 사람같지 않았다. 그 떼놈 새끼가 사람을 불러오는데 너희들은 맞아죽어도 괜찮다는 표정을 짓고있던 얼굴이었고 불측하게 맞아죽는 시간까지 규정을 무시하면서 우리를 대기시켜놓은 인간같지 않았다. 어릴적부터 가슴에 서려오던 민족 차별시의 모욕을 생각케 하는 모습이어서 그 자가 소장이든 말든 한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꾹 참고 나와버렸다.  

지금은 중국에서 민족 차별시의 현상을 볼 수 없으나 내가 어렸을 때엔 유난히 심했다. 우리 집은 훈춘 시내 동쪽에 있었고 내가 다니던 조선족 소학교는 시내 서쪽 켠에  있어서 매일 먼길을 걸어 통학했었다.

중간 지점에서 한족 애들을 종종 만나게  되는데 처음엔 꼬리빵즈(고려 몽둥이-한족 사람들이 조선족을 놀려 이르는 말)하고 먼저 욕해대다가 수가 적은 우리들을 마구잡이로 두드려 패고는 제 갈 길을 가군 했다.

거의 매일 매맞고 들어서는 애를 보는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학교에 가는 길, 집에 돌아오는 길 가리지 않고 궈테(옥수수떡-조선족이 한족 사람을 낮춰 이르는 말)들에게 맞았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세살 이상 큰 많은 수의 궈테들한테 맞고 다녔으니 얼굴의 코피는 마를 날 없었고 몸에는 항상 퍼런 멍이 나있었다. 새를 잡는 공기총에 사격당하는 일도 있었다. 어쩌다가 한번 반격하면 더 혹독한 물매가 떨어졌고 나이가 들면서 피의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중학교에 가기 전의 어느 날이었다. 길에서 혼자 빈들거리는 놈 하나를 만났다. 이 놈은 우리 학교에서 들놀이를 가던 날에 가죽 채찍으로 나를 여지없이 때려주던 자인데 그때 혼자 얻어맞고나서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고 언제든지 네 놈들을 하나하나 요정내 버릴 거라고 이를 부득부득 갈던 차에 만났으니 가만 놔둘리 만무했다.  

형세가 불리함을 느꼈는지 이 놈은 슬슬 꽁무니를 뺄 준비부터 했다. 갑자기 돌따서 뛰는 놈을 내가 선참으로 쫓아가서 다리 걸어 넘어뜨렸다. 그날 그 자식은 잠깐새에 얼굴이 장마당이 되었다. 코피를 펑펑 쏟는 그 놈을 보면서 그때 처음으로 짜릿한 쾌감을 경험했었다.

그후부터 싸움 하면 꼭 피를 보고야 말았으며 상대가 큰 놈이면 더 악을 쓰고 달려들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얻어 맞으면서 증오심을 키워보았고 여러 번을 때려주면서 쾌감도 얻었으며 그러는 동안 싸움의 요령을 익혀가고 있었지만 보복은 어디까지나 피해야 하는거였기에 방학마다 대반령너머 외갓집에 피신해 가있었던 것이다.  

중학교 때는 길이가 30센치미터 되는 몽둥이를 항상 차고 다녔다. 중국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고려 사람들의 몽둥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 몽둥이로 하는 격투에 상대가 없다는 것을 세세 대대로 전해오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중국에 이민간 조선족을 꼬리빵즈라고 불렀으며 특히 일제 시대의 봉천(奉天-지금의 심양시)에서는 늘 조선인과 구역 다툼을 했던 연고로 꼬리빵즈라면 어느 정도 배척 심리를 갖고 있었고 해방이 난 후 썩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그 심리로 우리 조선족 2~3세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 같다.

꼬리빵즈라는 말이 어떻게 되어 조선족을 얕잡아 이르는 욕으로 되었는지는 몰라도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꼬리빵즈라면 덮어놓고 욕하고 때리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세대 다수는 합심해서 반격하겠다는 생각이 꼬물도 없었던 것 같았고 나처럼 자기 몸 보호용으로 간단한 무기 정도나 갖고 있는것이 고작이었다. 한 동네에 살던 조선족 형님이 혼자서 10여명의 한족을 쓸어눕힌 뒤로 조선족 애들이 뭉치기 시작했으나 더 큰 무리로 우리를 기시하는 한족 애들의 기염을 꺾기에는 턱도 없는거였다.

그런 민족 차별시의 억눌림 속에서 고중(고등학교)까지는 가까스로 마칠 수 있었는데 고졸 때의 서울 아시안 게임으로부터 노골적인 기시는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하고 대졸 후엔 서울 올림픽도 지난 때라 꼬리빵즈라는 욕도 얻어듣기 힘들게 되는 민족 차별시의 와해를 경험하게 되었다. 조상의 나라가 강성한 나라로 모든 중국사람들 앞에 나타났을 때 중국 사람들을 전율케 했던 것 같다.

폐쇄 정책으로 개방하기 전까지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 등 큰 사건으로 남조선이라고 불리면서 아주 적게 알려지고, 수교되기 전에는 두번의 게임으로 처음 널리 알려지더니 중국의 조선족이 어렵게나마 한국으로 다녀오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한족들은 졸지에 주눅이 들었고 꼬리빵즈라는 말도 감히 번지지 못하고 있었으며 대하는 태도가 공손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집정당인 공산당이 수십 년을 두고 민족 차별시를 소멸하려 노력했지만 성공 못했던 일이 이때에야 비로소 우리 곁에서 종적을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제3차 전쟁이 나더러 이같이 까마아득한 옛날 일까지도 상기하게 하는 것을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 비굴한 파출소장의 얼굴 모습으로부터 내 동년의 아픈 기억을 되살려 낸 일을 정말 알고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말의 여러가지 일로 쌓인 스트레스는 풀려 있었고 미칠 것 같던 내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고 나서 그런 돈을 한번 써볼만하다는 생각이 고패쳐서 즐거워 지기도 하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로따는 고집대로 혼자 안화동에 남았고 다른 식구들을 신정 전날까지 모두 귀국시켰다. 훈춘의 이름난 한식집에서 연말 총화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어 가족까지 거의 30명이 모여졌다. 로따의 회사로 하여 근무하는 이들의 가족까지도 먹고 살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장소였다.  

연말 총화라는것이 지나온 1년의 사업과 생활을 돌이키면서 새해 계획을 세우고 검토하는 형식적인 것으로부터 돈 팔아 기껏 먹고 마시고 난 뒤 2차로 노래방에 가고 3차로 늦은 시간에 양고기 꼬치구이를 먹는 시대적인 것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자정이 지나서까지 먹고 마시다가 4차로 임씨 형제와 얼음집(아이스크림을 빵처럼 만들어서 나이프와 포크로 먹을 수 있고 커피와 간단한 맥주 정도를 파는 집)을 들리고 난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새해의 첫날은 서서히 내 곁으로 다고오고 있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동방영도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응원합니다 응원합니다
5
응원합니다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