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월에 세 번 출입국을 했다.

그중 한 번은 반짐차(소형트럭)를 몰고 나갔었다. 신정 전에 동생과 주유소에서 싸움한 뒤에 내간 차였는데 구매자가 도장 작업을 해달라고 해서 중국에 몰고 갔다가 다시 내온 것이었다. 다른 이상은 없고 아침에 첫시동을 걸기 힘든 차였다. 구매자가 다시 차 가지러 왔는데 버스로 끌어당겨 시동을 걸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좀체로 걸리지 않았다.

두 차가 다 서있는 상태에서 걸쳐 놓은 와이어를 벗기려고 용철이가 차 사이로 들어갔을 때 내리막인데다가 반짐차의 파킹 브레이크가 고장나서 반짐차가 버스 뒤로 움직이었다. 급해난 용철이가 버스 뒤에 허리를 붙이고 반짐차를 두손으로 밀어 부쳤는데 거대한 힘을 이기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왼쪽 손목이 골절되고 말았다. 이날이 30일 오전이었고 용철이는 오후에 나진에 있던 식구 중의 몇 명과 함께 귀국했다.  

혼자 작업하는 위해성이 크다는 점은 그때 제일 절실히 느꼈었다. 그때 로얼, 나, 동생, 영철이 중에 한명만 더 붙어있어도 사고는 피면할 수 있었다.

로얼은 차를 잘 다루지 못했지만 반짐차의 운전석에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만 주면 되었는데 (유압식 브레이크 시스템) 지난해에 사장의 신분으로 된후 우리의 작업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차를 파는 문제에서 영철이는 돈을 받고 영수증을 주는 일외에 시동걸고 구매자가 떠날 때까지 지켜보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언제나 용철이와 내가 시동걸고 떠날 때까지 거들어주고 있었다.

동생은 아직도 나진의 일에 익숙하지 않았고 중고차 대부분은 내가 운전을 해보았기에 구매자들한테 차의 특징에 대해 아는 것만큼 설명해 줄 수도 있었고 그래서 이 부분의 일은 보통 내가 영철이한테서 키를 받아서 떠날 때까지 거들어주는 것으로 사실은 영철이의 일을 맡아할 따름이었다.

누구도 없을 때는 당연히 영철이가 할 일이었다. 그날따라 영철이 한명밖에 없었는데 중고차 타기 싫어했던 영철이가 용철이에게 일을 하라고 했던 것이고 사고를 치고말았다. 방학중이어서 회사 옆에 금방 이사온 춘일이만 불러서 버스 운전을 부탁했을뿐이었다.  

사고원인을 분석해 보면 첫째는 영철이의 책임이 컸고 수리를 철저히 하지 않은 용철이 자신한테도 더러 책임이 있었다. 중고차판매의 전 과정에서 영철이는 차가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봐야 했었다. 나보다 먼저 입사했고 또 식구들중 내 동생과 함께 중국 B종 면허증이 있는 둘중의 한사람이었고 운전경력과 경험이 풍부한 그가 당연히 나서서 해야 될 일이었다. 내가 나진에 있을 땐 언제나 나에게 맡겼고 내가 없으면 용철에게 맡긴다. 그 고약한 습관이 끝내 일을 저지르게 된것이다.  

추운날에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것은 중국 중고차의 고질병이었다. 용철이는 오랜 수리공으로서 차에 대해 잘 알고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얼마든지 사고를 내지 않고 적어도 피면할 수 있는 일을 그 자신의 실수로 저질렀다. 두 사람의 같지 않은 일태도때문에 끝내 사고가 발생했고 그 때문에 용철이는 한달 정도 집에 있게 되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모두들 음력설 쇠러 집에 간다고 야단이다. 먼저 용철이와 함께 몇 명이 떠났고 이모와 외숙모까지 2월 1일 날에 귀국해서 나진에는 로따 혼자만 남았다.

2월 2일 오후는 내가 나진에 다니면서 가장 큰 공포감으로 지낸 반나절이었다.

점심 때 우리 식구 몇명이 예란(후에 소개함)이의 산적점에서 꼬치구이를 먹고 있었다. 로얼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이 핸드폰은 로따, 로얼, 나 세사람 중 훈춘에 있는 사람이 갖고 있으면서 쓰는 것인데 오늘은 로얼이 쥐고 있었다.

원정통검에서는 핸드폰을 나진에 갖고 가지 못하게 했다. 원인을 물어보니 그 핸드폰으로 간첩 활동을 할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원정에 보관비로 50원을 내고 다시 돌아 올 때 찾을수 있게 규정해 놓았다. 불필요한 시끄러움을 피면하기 위해 갖고 있던 사람이 출국하면 권하 교두의 아는 사람에게 맡겨 두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찾군 했으며 시내 안에서는 보통 내가 제일 많이 썼다.  

통화를 끝낸 로얼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예란이더러 구급차 (앰불런스)를 부르라고 하고 나서야 우리한테 전화로 온 소식을 들려주었다.  

오늘 오전에 로따의 심장병이 발작했다. 지금은 정화가 간호중인데 방금 전의 전화는 로따가 겨우 정신을 차린 뒤에 정화한테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고 정화가 외국인 숙소에 가서 면목 아는 중국 사람을 보고 국제 전화를 해달라고 해서 걸어온 전화라고 한다.

말을 들어보니 아직도 위험기를 벗어난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로따는 225호에 앉아 온다고 한다. 나진에서 원정까지와 훈춘에서 권하교두까지 비슷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것이고 앰불런스가 오면 로얼과 내가 교두에 가기로 했다.

평소에 그렇게 맛있던 꼬치구이가 그날따라 영 맛이 없어보였다. 15분후에 앰블런스가 도착했다.
의사는 예란의 여동생 남편되는 사람이다. 교두에 가면서 이제까지 알고있던 로따의 병증세를 내가 설명해주었고 로얼은 전화로 교두의 변방 대대를 찾고 있었다.

대반령을 넘은 후에 핸드폰의 통화가 불가능하게 된다. 대반령 저쪽 경신에는 핸드폰 통화를 위한 안테나 가설이 그때까지 안되어있었다. 고개 넘기 전에 지금의 상황을 변방대대 책임자인 처장과 말했으며 처장은 도착한 후에 다시 보자며 전화를 끊더라고 로얼이 말했다.

그 뒤로부터 교두에 어떻게 도착했는 지 지금도 기억에 없다. 다만 로따의 생명 안전만을 걱정하고 또 걱정했을 뿐이다.  

사람의 출국 수속은 다 되었는데 앰불런스가 통행증이 없는 상태로 마음대로 건너지 못하기때문에 처장과 다시 한번 교섭했고 처장은 반신반의하면서 통과 명령을 하고난 뒤 환자를 보지 못하면 당장에서 앰불런스를 차압하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기사와 의사 두명에게 다 통행증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내가 앰불런스를 몰고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중국쪽은 통과되었으나 조선쪽이 문제였다. 그날 따라 화물 트럭이 많았는데 원정 종합검사장의 작은 마당에 먼저 도착한 차들이 꽉 차 있었고 늦게 도착한 차들은 다리 위에 줄느런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 위의 차는 적어도 열대정도 되는 것 같았고 중국 쪽으로 넘어 오는 차에게 길을 내주느라 한 쪽을 틔워놓고 있었다. 다리는 대형트럭 두대가 겨우 비집고 지나갈 수 있는 폭이었지만 트인 곳으로 앰불런스를 들이 몰아 원정마당까지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길이 틔어있었다.

다리목에서 인민군 병사 하나가 되돌아가라고 손짓하는것이 보였다. 로얼이 내려서 한바탕 설명하는것 같았고 이내 나보고 되돌아가라고 손짓해 보이고난 뒤 여권을 검열받고나서 바삐 청사 쪽으로 뛰어 가는 것이었다.  

나는 막무가내로 후진하는수밖에 없었다. 그 병사가 군관의 지시가 있기 전에는 절대 들여놓지 않을 거였고 중국에 되돌아가는 차에게도 길을 내줘야 했었다. 다리위의 마지막 트럭뒤에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차를 세웠고 초조한 마음으로 로얼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제 로얼이 통검 소장을 만나 얘기할거고 소장이 지시하면 나는 트인 길로 청사 옆까지 가서 로따가 탄 차를 기다려야 한다.

오늘처럼 차가 많은 날을 여러번 만났었다. 차가 제일 많을 때 다리 중간까지 서있었다. 300미터 채되지 않는 낡아빠진 두만강 다리 위에 수십 대의 차가 서있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다. 도로따라 교두까지 오는 길에서 이 다리가 멀리 보이는데 교두에 도착하기 전에 다리 위에 차가 많은 지 적은 지를 확인하는 것이 이미 내 습관으로 되어있었다.

특히 늦은 시간에 차가 많으면 교두까지 가지 않고 차 머리를 돌려 경신으로 돌아갔으며 외갓집에서 하루밤 묵고 이튿날 오전에 다시 출국했었다. 너무 오랜 다리어서 차가 많이 서있을 때 위험을 느끼기도 했으며 점심 시간에는 두나라 병사들이 다 통과시켜주지 않았으므로 한시간 반동안 다리 위에 갇혀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점심 한끼를 굶는것은 보통 일이었고 먹을 것이 있을 때는 먹고 나서 다리 위에 큰 대자로 누워 한잠 자기도 했었다. 저녁시간 후에는 차를 세워 놓고 사람만 되돌아온다. 이튿날에 다시 출국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미처 길에서 다리 쪽을 확인하지 못했었다. 다리 위에서 굶던 일과 자던 일들이 엇갈려 떠오르면서 로따가 심장병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가게 되면 그 개고생한 보람이 없어진다고 생각했고 회사의 운영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려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자꾸 생각이 갔다.  

마침내 다리 목에서 로얼이 오라고 손짓하는것이 보였다. 기다리는 앞차들을 앞질러 나갔다. 중국 쪽으로 건너오려는 차를 막고 있는 병사에게 나의 여권을 보이고나서 바삐 마당에 들어섰다.  

중국 기사들은 모두 의아한 눈길로 나를 보고있었다. 다들 길에서 면목을 익힌 사이어서 만나면 인사 수작을 하느라고 법석했지만 내가 앰불런스를 몰고있는 모습을 보고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걸치면 운전수인 그 마당에서 나한테 면허증이 없다는 것을 그네들은 알지 못했고 중고차를 쉴새없이 몰아대던 사람이 오늘은 웬 구급차냐 하는 눈길을 주고있을뿐 다들 내 굳어진 얼굴을 보고 인사치례를 잊은 것 같았다.  

마당에 갑자기 나타난 앰불런스가 많은 사람들을 불러왔다. 다들 사연을 듣고는 모두 로따의 생명을 두고 걱정해주었다. 청사안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손을 놓고 나와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고 귀국하려던 중국 기사들도 수속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225호가 나타날 길쪽을 주시하면서 떠날 념을 하지 않았다.  

좋이 한시간을 기다려서야 225호와 89호가 나타났다. 225호는 춘일이가 운전하고 있었고 조수석에 로따가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는데 뒤자리에 정화가 탔었다. 89호에는 창주와 전은선이 탔다. 춘일이와 정화가 내리고 로얼이 운전석에 타서야 병사가 225호를 통과시켜 주었다. 내가 춘일이와 정화를 보고 총경리를 중국 쪽에 호송하고나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한 다음 청사 안에 들어가서 로따의 출국 수속을 하기 시작했다.  

심장병으로 사경에 처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금물이다. 다행히도 225호는 중국에 드나들 수 있게 며칠 전에 수속이 다 되어있었다. 정신이 희미한 로따를 움직여 앰불런스에 옮겨싣지 않고 차에 앉은 채로 중국에 이송하면 되었다.  

차 두대가 중국쪽으로 넘어왔다. 의사가 225호에 탔고 나는 앰불런스를 운전수에게 넘겨주고나서 로얼에게 나진에 간다고 말한 다음 다시 다리를 건넜다. 수속을 마치고나서 저녁 다섯시(겨울철 퇴근시간)어서 이제는 차도 사람도 다 통과할수 없는 시간이 되어있었다.

마지막 사람으로 병사에게 여권을 검열받고 나서 마당밖에 서있을 89호를 찾았으나 온데간데 없었다. 어쩔수 없이 금방 같이 빠져나온 중국차를 잡아탔는데 선봉까지 간다고 했다. 선봉까지 가느라면 89호를 따라잡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사에게 말했고 그 다음엔 한마디 말도 번지지 못하는 로따를 걱정하는 시간이 되었다.  

길에서 89호를 추월했고 그런대로 선봉까지 가서 내린 후 다시 89호를 세워 탔다. 정화가 자초지종을 들려 줘서야 오늘 일을 알게 되었다.  

나진에 비사(非社) 조사조가 내려왔다. 비사란 비사회주의의 줄인 말이고 말 그대로 사회주의가 아닌 현상을 가리켜 이르는 말인데 그 조사조가 오늘 총경리를 불러갔다.  

점심 시간이 거의 되어갈 때 우리 식구들이 없었으므로 정화가 식사 준비하느라고 침실에 있었다. 회사 구내에 차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리더니 이내 총경리가 춘일이에게 업혀 들어왔다. 인사불성의 상태였고 따뜻한 온돌에 20분 누워 있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방금전에 보위부 담당지도원인 강순주가 회사에 왔다가 내려가는 길에서 회사와 그리 멀지않은 길에 서있는 225호를 보았고 지나치려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되돌아와서 차안을 들여다보았다. 운전석에 총경리가 앉아있었는데 자고 있는 듯했고 창을 두드려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이 차는 출발해서 시속이 20키로 초과되면 도어가 자동적으로 잠가진다. 도어를 열수 없고 아무리 두드려도 깨어나지 못한다. 한참만에야 겨우 눈을 뜬 총경리가 가까스로 도어 스위치를 다쳐서야 열 수 있었다.

왼손에는 약병이 들려 있었고 말을 못하는 상태에서 왼손을 약간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약은 심장병 비상약인 구심환이었다. 강순주가 중국산 구심환을 알고있는 것이 천만다행스런 일이라고 해야겠다. 그 약병을 받아 약알을 꺼내 입에 넣어 주었다. 총경리를 조수석에 겨우 옮겨놓고 요즘 금방 익힌 운전술로 천천히 회사 구내까지 225호를 움직여왔다.

강순주는 원래의 담당지도원을 대체하여 새로운 담당지도원으로 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구심환이 비상약이라는 걸 아는 것과 운전을 조금 익혀둔 것으로 총경리의 구명은인이 된 것이다. 경비실에 있던 춘일이가 급한 소리를 듣고 나와서 막 업고 들어온 길이었다.  

조선사람들은 국외에 마음대로 전화하지 못한다. 외국 방송을 듣지 못하는 것과 같은 규정이다. 정화에게 핸드폰의 번호를 겨우 불러주었고 중국 사람이 많이 들어있는 외국인 숙소(호텔)에 가서 중국 사람을 찾아 전화를 걸어 달라고 청을 들면 된다면서 주머니의 돈도 꺼내게 했다. 우리는 그때 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외국인 숙소가 아니면 남산호텔에 가서 훈춘에 국제 전화를 했었다. 분당 12.5원씩 하는 비싼 전화요금을 내면서 말이다.  

강순주가 때에 맞춰 그 장소에 나타났으니 말이지 그렇잖으면 생명이 위험했다면서 정화는 총경리가 심장병이 발작한 건 비사에 갔다온 것과 상관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춘일이와 같이 외국인 숙소에 갔다가 오는 길에 사람을 부르느라고(전은선, 이창주) 지체했으며 대외 사업국에 가서 우리 식구들의 새 초청장을 받아가지고 출발한 데다가 하여평에서 눈구덩이에 빠져 한창 싱갱이질 했다면서 늦어진 이유를 말해주었다.

왜서 심장병이 발작했는 지는 본인이 없는 이상 그때 상황을 알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심장병이 발작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추측만 할 수 있을뿐이었다. 이제 내일 아침 첫 작업으로 국제전화를 해서 로따가 어찌 되었는지를 확인해보아야 했다.  

나진에 다닌 뒤로 안화동 윗집 침실에서 처음 혼자 잤다. 오늘 저녁에는 로따가 무사하기만 하면 회사의 모든 물건이 다 잃어져도 걱정이 없을것 같다. 경비실에도 몇번 나갔다 왔는지 모른다.걱정이 많을 때면 불면증으로 유난히 고생해 왔었다. 비비는 내 신경질적인 발길에 몇번 채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들낙날낙하다가 새벽녘에야 잠들었는데 정화가 와서 노크해서야 잠을 깰 수 있었고 그때는 이미 중국 시간으로 여덟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바삐 일어나 옷만 껴입고 나와서 89호에 시동을 걸었고 엔진이 더워지기도 전에 출발시켰다. 운전기사가 엔진이 더워지기 전에 차를 출발시키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차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주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날만은 그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빨리 전화를 해봐야 했다.  

핸드폰은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다시 로따네 집에 전화했다. 놀랍게도 로따가 직접 전화를 받는것이었다. 아침까지 열한 시간동안 링게르를 맞았고 위험기가 지나 집에 와 있는거라고 했다. 안도의 숨이 나가는 순간이다. 로얼이 이미 출발했고 오전 중으로 원정을 통과할 것이라 했다.

사두었던 꿩을 가지고 원정에 도착하면 로얼이 그 꿩을 중국쪽에 돌아가는 기사들에게 부탁하여 훈춘에 도착할 수 있게 할것이며 이번 설은 로얼과 내가 나진에서 쇠야 한다면서 설 잘 쇠라는 말까지 하고 전화를 끊는 것이었다.  

전화를 놓고 나서 다시 한번 들숨과 날숨을 쉬어보았다. 무시무시했던 그 반나절이 드디어 지나가고 다시 원 상태를 회복하는 순간이다. 안화동에 다시 와서 창고에 두었던 꿩을 꺼내 싣고 밥을 먹고 가라는 정화의 말을 등뒤에 남긴 채 둥둥 뜨는 기분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내일은 음력설-중국의 전통 명절이다. 길에는 집에 돌아가는 중국 차들이 경기라도 하는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는 두만강다리를 차단한다. 점심 전에 원정에 도착해야만 설을 집에서 쇨수 있고 그래서 빨리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급히 몰다가 길옆 배수구에 빠진 차들도 더러 있었다.  

저술령을 넘고 청학기차역을 지나 청학고개를 금방 넘은 후 마지막 커브를 돌 때 로얼이 운전하는 225호를 만났다. 뒤 좌석에 얼굴 모르는 조선사람 두명이 타고 있어서 중국어로 말을 주고받았다. 꿩을 가져갈 필요없다고 한다. 이제 원정까지 갔다가 언제 다시 돌아오겠냐면서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중국과 조선 두 나라에서는 똑같이 야생 동물을 잡지 못한다는 법령이 있었다. 죽은 꿩이지만 국경을 통과하는데 감추어 가지고 가는 방법 외에 원정세관과 통검에 통과시켜 달라고 미리 말해두어 간혹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지만 꼭 통과시킨다는 보장이 없어 걱정하는 중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 나진에서 설 음식으로 배를 두드리며 먹어 줘야지.  

225호는 차체가 너무 낮아 한사람이 더 타더라도 눈길을 달리기 말째였다. 그 두 사람이 나의 89호에 옮겨 탄후 두 차가 함께 출발해서 함께 나진에 도착했다. 정화가 점심을 다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점심 식사가 이튿날 설날 식사보다 더 좋았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중국에서는 구정에 1주일 간을 휴식한다. 국정으로 3일이고 앞뒤로 두 주일의 토, 일요일을 이틀씩 당겨서 한꺼번에 놀아준다. 교두는 한가할 새가 크게 없었으므로 정월 초엿새부터 출근하므로 그날부터 출입국이 가능하다. 남들보다 이틀 앞당겨 출근하는 것, 그 동안은 로얼과 둘이서 안화동에서 지낸다.  

오후에는 밀렸던 잠을 실컷 잤다. 로얼이 저녁밥상을 다 갖추어 놓아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다가 아무런 부담없고 편한 잠을 자보았다. 그것도 밤잠이 아니고 낮잠을.  

엊 저녁에 한숨도 못잤다면서 저녁 상을 치우기 바쁘게 자리를 펴는 로얼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피곤해서 당장 자야겠다는 사람에게 계속 칭얼댔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로따는 어제 오전 비사에 불리워갔다. 규정상 외국인 조회시 출입국 사업처에서 먼저 호출하는데 외국인은 이 호출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비사는 외국인을 직접 호출할 권한이 없다. 비사에서 외국인과 조회할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출입국 사업처에 호출을 의뢰해야 하며 외국인이 출입국 사업처에 도착한 후 다시 비사에 넘겨져야 한다. 비사에서 직접 로따를 불러간 것은 벌써 첫번째 절차에서 무례를 범한 것이었다.  

비사 조사조는 지난해 12월부터 내려와서 업무를 보고있었다. 나는 비사를 옛날의 암행 어사와 비슷한 성질이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비사가 내려온 후로 많은 령도들이 벌벌 떨고 있고 어떤 령도들은 벌써 파직 당하고 단련대로 들어갔거나 갇힌 몸으로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먹을 물을 주지 않아 벽으로 흘러 내리는 물방울을 혀로 핥아먹는다는 것과 같은 쉬쉬한 소문을 들어온 터였다.

나라적으로도 처음 개방한 도시에 여러가지 불량한 현상들이 존재하고 특히나 령도들이 파렴치하고 부화 방탕해지는 것과 직무의 편리로 나라에 해를 끼치면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실례가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이 발생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부패현상으로 곤혹스런 중국에서 우리는《전문 안건 조사조》라고 부르는 사업조가 탐관 오리들을 조사하고 법정에 넘겨 재판받게 하는 일을 신문 잡지에서나 TV 혹은 라디오 방송으로 많이 보고 들어왔었다. 자그마한 시골에서도 농민들의 피땀을 짜내는 좀도둑이 있는가 하면 바다를 끼고있는 연해의 도시들과 내륙의 대도시들에는 비법적인 수단으로 돈과 재물을 정신없이 끌어모으는 창궐한 《후적》들이 살판치고 있다. 이론적으로 순결해야만 하는 정계인이나 기업 거두(거의 다 국영임)들 가운데 사회주의사회의 사업관을 구중천에 팽개친 이들이 너무 많다.

모택동 시기에는《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는 순결한 사업관으로 일했었지만 80년대초의 개방 뒤에 월급만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아파트 구매에다가 너무도 사치한 생활을 창출해낸 관리들이 매우 많이 나타났고 조선도 그 길을 꺼리낌없이 걷고있는듯 했으며 중국과 비슷한 방법으로 부패를 다스리려는 목적밑에 《비사 조사조》도 중국과 비슷한 배경에서 생겨난 것 같다.  

로따는 몇번 호출을 받았지만 출입국 사업처의 통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회를 거절해 왔는데 이번에는 무슨 영문인지 불리워갔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반말이었고 존대어를 쓰는 로따에게 《개새끼》, 《쇠(소)새끼》같은 욕도 거침없이 해댔다.  

“이 새끼 개좆같이 논다.”  

하고 상말까지 하는 연하의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할말이 없음다.”  

하고 로따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 다음 침묵을 지키다가  

“할 말을 다 했으면 이젠 가보겠음다.”  

를 남기고 곧추 나왔다고 한다.  

중국어는 존대어가 거의 없는 언어다. 중국에서 오래동안 사업하면서 여러 가지 경우를 수많이 당해보았고 러시아와 루마니아, 체코, 필리핀 등 나라들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풍상고초를 많이 겪어보았지만《예의지국》이라 자랑하는 조상의 나라에 와서 박대를 받아보기를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거래하는 부문이 많아서 숱한 사람들을 상대해 오면서 가끔씩 튀어나오는 반말에도 습관 되어온 터이지만 그래도 거의 공손하고 예절스런 분위기속에서 담화가 이루어 졌으며 존대어가 없는 중국어와 친절한 느낌이 더 드는 우리말을 수십년동안 해 오면서도 상담 상대가 불손하게 던지는 상욕을 먹어 본적이 없다.  

상대가 누구든지를 막론하고 항상 반말을 쓰는 나진 사람들에게서 언어 단련을 무수히 받아왔다.
존대어를 쓰는 우리들을 고개를 갸우뚱하고 보는 나진 사람들이다. 나의 청계 전쟁도 그 불손과 행패때문에 일어난거였고 청진 보위부에서는 그 때문에 휘발유를 사가지 못했다.

로따는 회사의 보스로서 체신을 지켜야 했으므로 나처럼 분통이 터질 때 시원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한다. 극상해서 욕지거리를 몇마디 하는 정도에 그치었다. 그런데 이번 일에서 비사 조사조는 똑 마치 국내의 죄인을 다루듯 했으며 인격을 함부로 모욕하는 그들의 언행은 사람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아무리 분통이 터지더라도 비사조의 사람들한테 욕까지 하는 예의스럽지 못한 소행을 저지를 로따가 아니었다. 투자자로서의 깨끗한 양심을 간직하고 있을뿐이지 조상의 나라에 미안한 일을 꼬물도 한 적이 없다. 의심하고 조사하는 데까지는 이해할수 있지만 연상 연하 구별도 팽개친 무례한들에게 죄인 취급을 당하면서 상욕까지 먹었지만 어디에다 분풀이할 데가 없다.

조회 중에서부터 울분이 터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고 차를 출발시킨 다음에는 분통이 터져 뭐든지 잡히는 대로 박살내고 싶은 지경에까지 이르러 몇년 동안 잠자고 있던 심장병을 재발시키고만 것이다.  

평소에도 로따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걸핏하면 성냈던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입에 담지 못할 상욕도 늘 해댔는데 우리 식구중에서 영문도 모르게 욕먹는 사람들은 주로 로얼과 나, 둘뿐이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칭찬을 많이 받아왔지만 욕지거리를 별로 들어보지 못했는데 가이드 할 때부터 한국손님들에게서 된욕을 많이 먹어보면서 처음엔 기분이 영 안좋았었다. 후에는 사람의 성장과정 중에 욕을 먹을 일도 더러 있다고 생각하면서 일부러 욕을 찾아 얻어먹었으며 그러고 나서 기분 상태가 어떤지를 자기 절로 많이 체험해 왔었다.

나진에 다니면서 거의 1년동안 로따한테서 욕을 무수히 많이 먹어왔었다. 로얼은 본시 평화스런 성격이기에 욕을 개의치 않았지만 나는 어떤 욕에 대해서는 정말 불만이었다. 왜냐하면 자기 친조카들에게 할 욕까지도 나에게 하기 때문이었다. 종업원들이 많은 마당에서도 중국어로 사정없이 욕해댔고 그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았지만 욕이란 욕은 죄다 나에게 차례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많이 참아왔다. 오히려 다행스런 일인지도 모른다. 비사를 겪고나서 내가 참아온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되기까지 했다. 내 인격이 손상 받고 자존심이 형편없이 구겨지더라도 회사가 잘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그때의 일이었다.

로따가 건강하고 회사가 잘되는 일-그것을 위해 나는 마음에 불쾌한 모든 일들을 모두 묵새겨버렸으며 부지런히 일만 하는 바보로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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