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6》전의 어느 날이었다. 간밤에 세찬 바람이 불어 쳤다.  

1월 달의 어느 날 세찬 바람에 안화동 지붕에 씌웠던 슬레이트가 거의 다 벗겨져 나가 어제 차 두대로 2천 장의 질 좋은 슬레이트를 실어 내왔었다. 해동 후에 3월 달이면 아랫집 대기실 주변의 부대 건물을 짓게 되고 그 전에 윗집의 슬레이트 작업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일은 차영감이 맡아하게 된다. 윗집 마당에는 버스와 승용차, 그 외에 판매용 중고차들로 마당이 메워져있어 슬레이트를 실은 차는 아랫집 마당에 세워두었다.

로따 부부가 윗집에서 자고 나머지는 다 아랫집에서 잤다. 슬레이트를 실어온 기사 두 명이 나와 함께 잤었다. 바로 발전소의 파이프를 첫 번째로 실어 내왔던 손 기사와 관(關)기사였다. 관 기사는 밥 먹고 나서 내려오자 바람으로 잤지만 나는 손 기사와 밤 깊도록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다.  

아침에 시동을 걸려고 나갔던 손 기사가 놀란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 들어왔다.  

“배터리가 잃어졌다!”  

바로 옆방에서 방학중에 있던 기사 다섯 명이나 경비로 나와 있었고 엊저녁 초 불을 밝혀놓고 밤 깊게 주패(카드)를 놀았었다. 도둑은 세찬 바람 소리를 빌어 배터리 네 개를 한꺼번에 훔쳐간 거였다.  디젤차는 차당 고용량 배터리를 두개씩 쓴다. 어쩔 수 없이 매점에 있던 배터리 네 개를 내놓았다. 그 걸 두 차에 각각 장치하고 슬레이트를 윗집에다 부리 우고 나니 오전 시간이 다 지났다.  

이젠 나진의 좀 도둑질에 마비가 되어있다. 없었던 일로 치부하면서 그냥 지나쳐 버리면 그만이었다. 다만 도둑을 붙잡기만 하면 죽도록 패주고 싶은 마음만은 여전할 뿐이었다.  

2월 10일부터 6만 정전이 되었다. 온 나진시가 밤만 되면 쥐 죽은 듯 고요하다. 그 정전은 장장 3개월 간이나 지속되었다. 그전까지는 드문히 정전되었지만 이제부터 전기가 없는 생활을 해야 한다. 전기가 없는 생활을 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미칠 것만 같다는 말의 함의를 터득했었다.  

부대 건물을 지어야했고 늄창 작업도 해야한다. 전기가 있어야 했다. 로따는 아바이와 나를 불러놓고 의논했다. 출력이 얼마만큼이나 되는 발전기가 필요한 지를 검토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윗집에는 가전과 조명만 고려하면 되었고 아집은 가전 말고도 집 짓기에 필요한 전기 톱에다 늄창  작업때 쓰는 절단기, 조명 외에 용접기 등으로 최고 부하가 10㎾정도 되었다.

일반 적으로 발전기의 출력은 전기 부하의 3∼5배정도 되어야 한다. 그러니 아랫집에는 적어도 30㎾짜리 발전기가 수요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윗집에 필요한 5㎾짜리와 함께 두 대를 내오기로 결정했다.

우리 회사만 수요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회사들에서도 주문했으므로 우리는 한꺼번에 훈춘에다 여러 대를 주문해 놓았고 이 달에 훈춘에서 전부 다 해서 50대 정도의 발전기를 주문 받았다는 사실을 훗날 알게 되었다. 다 조선에 내갈 거였다.  

2월 15일 점심때부터 전기가 공급되었다. 《2. 16》명절 기간의 18일 점심때까지 옹근 사흘 간 나진에서 처음 정상 전압의 전기를 보았다. 그전의 전기는 정상인 220V에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전압에 민감한 가전들은 사용할 수 없었고 용접 작업도 겨우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밤거리에 가로등이 켜져 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난방 시설이 없는 나진의 모든 사무실 중에서 전기 온돌을 만들어놓은 것은 거의 쓰지 못하고 있었으며 우리 대기 실 옆에 세워진 중국 단독기업인 동명 주유소에서는 언녕 부터 자가 발전을 하여 주유기의 작동과 난방을 보장하고 있었다.  

자가 발전이 없으면 회사가 지탱하기 어렵다. 지어는 회사의 몰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기업소가 정전 때문에 생산이 중지되고 모든 생활이 뒤죽박죽이 된다. 나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습관 되어 온 듯 대수로와 하지 않았지만 우리한테는 또 하나의 가혹한 시련이었다.  

《2. 16》에는 추운 대기실 안에서 약 40분간의 공연을 보았다. 사람마다 가수요, 사람마다 악기 다루는 능수라고 해야 말이 된다. 아까운 인재가 썩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그들의 재주를 두고 걱정하게 된다. 배터리 사건 후 영철이와 위홍이네가 나왔고 내가 14일날 훈춘에 갔다가 15일날 다시 나와서 우리 식구 여덟 명이 공연을 보았다. 종업원들과 주변 주민들도 구경하러 왔었다.  

이튿날에는 종업원들 거의 다가 적위대 훈련을 갔다. 내가 첫 출국 때 갔었던 명호라는 마을에 훈련소가 있다고 한다. 로따는 버스 한대를 내주었고 1만원짜리 위임장을 주어서 식생활에 보태 쓰라고 했다. 명호 마을은 유현동 제일 끝 쪽에 있었는데 나진 닭 공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그 위임장으로 닭 공장에 가서 계란을 사올 수 있었다.

계란 사는 일은 닭 공장에 근무한 적이 있는 운전수 김중신이 맡게 되었고 그 때문에 닭 공장 옆에 있는 자기 집에서 자면서 훈련소에 나갈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훈련소에서 자야 했다.  

1년에 한번씩 적위대 훈련을 한다고 했다. 중국에서 어렸을 적에 적위대 훈련과 비슷한 민병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아왔던  일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일이었다. 방학중이어서 회사의 일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로따가 사경을 헤매던 2월 2일 날에 나진에 나왔고 그 뒤 3월 27일까지 사이에 2월 14일 하루 밤을 훈춘의 집에서 자고 15일에 다시 나진에 나와서 50여 일간을 지내게 되는 기록을 내게 되었는데 이 50여 일간 나는 처음 나진이 싫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먼저 2월 14일을 보기로 하자.

중고 반짐차 한대를 나진에 내가기로 했는데 웬일인지 이날 영철이가 나진에 나가면서도 몰고 나가지 않았고 기어이 나진에 있던 내가 훈춘에 와서 몰고 가라는 거였다. 힘든 일은 면허증이 없던 나에게만 차례 지는 것을 도저히 이해 못하면서도 꾸벅꾸벅 하기만 했던 나였다.

중고차마다 대반령과 저술령을 넘으면서 언제 한번 정상적으로 달려 본적이 없이 고장이 그칠 새 없었고 항상 공구를 갖고 다니는 내가 영철이 보다 현장에서 차 수리를 하는데 더 승산이 있었기 때문에 나한테 맡기는 거라고 좋게 생각했었다. 이때의 나는 이미 차 부품이나 수리 중 어느 면이나 수준이 영철이 보다 더 높아져 있었고 지식 면에서나 화술 모두가 영철이를 능가했지만 궂은 일과 힘든 일은 나에게만 차례 졌고 영철이는 엄연히 안화동의 로싼(세번째 보스)노릇을 하고 있었다.

회사 경력이 나보다 길어서 나진의 거래 상대들을 잘 알고 있는 것과 운전 경력이 긴 것이 나보다 우월할 뿐이었다. 게다가 3월 달에 방학이 끝나서 로얼과 내가 하는 일을 바꾸어서 로얼이 중국 쪽의 일을 보기 시작하고 내가 차대 대장을 맡은 후부터는 사실상 회사의 둘째 보스 역을 감당하는 거나 마찬 가지었다.

로따가 나를 차대 대장으로 써준 것 만해도 나에게는 사치하기만 할 뿐이었다. 영철이는 로싼으로 불리지는 않았지만 로얼이 하던 일 중에서 내가 차대만 인계받은 후로 사실상의 사장 노릇을 했다. 모든 결재권은 로따에게 있었고 몇 달간의 적응을 거쳐 나진의 일에 익숙해진 이모가 더러 결재하게 될 때까지 말수 적은 그가 사장 역할을 했던 것이다. 로얼은 명색이 사장이지만 하는 일을 따져놓고 보면 나와 같은 심부름 군일 따름이었다.  

오후에 나진에 나갈 모든 정비 작업을 끝마치고 집에 들어갔다. 여느 때 같으면 정신 없이 달려와서 목에 매달릴 아들애가 오늘따라 낯이 창백해서 올롱한 눈으로 맥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아빠가 왔다!”  

어머니가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애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신발을 벗고 곁에까지 가니 그제야  

“아버지 왔음까?”  

힘없이 인사했다.  

“왜 아빠가 아니고 아버지야?”  

내가 물으니  

“아빠는 쪼꼬말 때 부르는 거고 지금은 크니까 아버지지!”  

아들은 어느새 활발함을 찾는 것 같더니 이내 힘 없이 침대에 눕고 있었다. 애가 이상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아프니?”  

물으니까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연길에 갔다와서 이틀째 링게르 맞았다. 설기간 에미한테 한 주일 있다가 왔다.”  

어머니가 저녁에 상세한 이야기를 하겠다면서 식사하라고 독촉했다. 집 식구들이 식사를 마친 뒤여서 나는 혼자 금방 갖춰놓은 저녁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어머니는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밥 먹는 내 곁에 와서 그저께 일을 말씀해 주셨다.  

그저께 아내가 애를 데려다 주고 갔다. 둘 다 앓고 있어서 원래 계획대로 오래두지 못하고 데려왔다고 했다. 그 말만 남기고는 인사도 없이 떠나갔다.
어머니가 저녁에 전화를 걸었다.  

“애를 데려가는 문제를 생각해 보았소?”  

“예, 생각해 봤음다.”  

“그래, 어쩔 예산이요?”  

“내가 기르게 되면 부양비는 3백원을 줘야 겠음다. 그렇잖으면 1차 적으로 3만 원을 주든지…”  

“그 것두 말이라고 하오? 내가 부양비를 3백원 달라면 주겠소? 그게 싫으면 제가 1차 적으로 3만원을 내놓소. 내가 기르겠소. 내가 죽어도 영도 숙모나 이모가 있소. 얼마든지 기를 수 있소!”  

“나는 그렇게 많이 주지 못하겠음다.”  

“자기는 주지 못하겠다면서 왜 남보고 내 놓으라는 거요? 저는 그래도 공자(월급)가 나오는데 우리 영도는 직업도 없단 말이요!”  

“아무튼 나는 그렇게 많이 내놓지 못하겠음다.”  

“그 걸 보오! 결국은 기르지 못하겠다는 말이지 않소?”  

“나두 몸이 아프고 아이도 자꾸 앓지, 내 혼자 공자로는 될 것 같지 않아서 그럼다.”  

“결국에는 기르지 않겠다는 거구만, 그래 가지구 낳기는 왜 낳소?”  

“뚜, 뚜, 뚜…”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아내다. 그 버르장머리 실로 고약하다.  

어머니가 얘기한 부양비란 양육비를 말하는 것인데 이혼할 때 애를 가지지 않은 일방이 다른 일방에게 주는, 애를 양육하는데 필요한 일부의 비용을 분담하는 일이다. 이혼 합의서에는 애에게 100원의 부양비를 주겠다고 싸인 했고 보험 비로 넣어두어 애가 만 열여섯 살 때 전부 주기로 했으며 지금은 나한테 3배에 달하는 부양비를 불측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양육권을 다시 한번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혼 후 네 번째로 제 살점을 물리치고 있는 것이다. 여느 때 같으면 당장 달려가서 그 버르장머리 없는 불측한 말의 주인공을 속 시원히 콱 욕해주고 지어는 엉망진창이 되도록 패주고 싶은 기세였지만 지금은 많이 평온해져 있다. 나는 이미 그런 면에서 많이 단련되어 왔다.  

“어머니, 인젠 다시 그 말을 입밖에 내지 말도록 합시다. 애는 우리가 기릅시다!”  

고통과 아픔에 면역이 되어 있는 나의 심리 상태는 내가 나진을 다니면서 많고 많은 일을 겪고 여러 번 전쟁을 치른 후에야 연마된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모순이 있기 마련이고 모순이 커지다 보면 원쑤로까지 되는 세상, 세파에 부대끼는 인간은 정신적인 면에서 동물과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 먹고 살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동물 사회보다도 인간이 사는 세상이 그래도 아름다운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동물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인간이 아니다.

모순 속에서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면서 적극적인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 인간이다. 나는 그 방법을 찾지 못했지만 감내할 수 있는 면역력 정도까지는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분주한 나진 행에서 얻은 인생 경험이라고 함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내가 그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완전한 인간으로 될 수도 있겠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 나의 생활 중에 빠질 수 없는 일로 되었고 그 공부 때문에 불면의 밤을 자꾸 가지게 되는 지도 모른다.  

아들애는 어느새 나를 아버지로 부르는 정도로 커 있었다. 늘 떠돌이로 정처 없는 놈을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이 나에게는 제일 큰 재산이다. 그 아들의 미래를 신앙처럼 믿고 살지 않는다면 내가 어디 가서든지 무지막지하게 날강도 노릇도 하게 될지도 모르겠고 참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 고통과 아픔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냉혹하고 무감각한 인간으로 되려 하지도 않았겠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바보가 되어도 좋다. 아들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면 내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좋다. 내가 인생 공부를 잘해서 아들한테도 좋은 인생을 가르쳐줘야 하겠다고, 그것이 내 인생일 것이라고 굳게 믿어마지 않았었다.  

엄마한테 놀러갔다가 병을 얻어온 아들애는 그 뒤 열흘 간 줄곧 링게르 신세를 져서야 완쾌되었고 그 뒤로는 고맙게도 다시 큰 병을 하지 않아서 내가 걱정 없이 나진에 가 있을 수 있었다. 그 날 밤 영문모르게 오한을 떠는 아들애를 둘쳐 업고 평소 늘 다니는 우리 아파트 옆의 진료소에 갔었고 밤 깊도록 주사를 맞는 애를 지켜주다가 다시 업어 집에 데려 왔었다.

손자를 거두어 주는 부모님들의 노심초사가 못 견디게 안타까운 하루 밤이었다. 남들은 다  설맞이 기분인데 나는 나진의 6만 정전처럼 마음이 어둡기만 하다. 그나저나 이튿날인 15일에 별탈 없이 차를 나진에 도착시켰고 몸과 마음은 정전 속에서 스트레스만 쌓여간다.

그러던 중에 3월 달의 운행 전에 버스 정비 작업을 끝냈고 2월말에는 차대 대장을 인계 받게 되었다. 로얼이 하던 일 중의 일부만 인계 받은 거였는데 그 나머지는 이미 이모가 다 인계 받은 터였다. 이제 로얼은 집에서 내가 하던 인수 작업을 하게 되었고 사장이란 감투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말았다. 차영감은 나를 운수 지도원이라고 불러주었다.  

윗집과 아랫집에 각기 5㎾와 20㎾짜리 발전기를 장치했고 전기 작업은 차영감과 내가 맡아했다.
골절 사고로 집에서 치료 중이던 용철이 나진에 나가 잠시 아랫집 발전기를 관리하게 되었고 차대의 운행과 모든 수리 작업은 내가 맡아보기 시작했다.  

새 운전수로 김광현, 한영근, 박정준이 왔다. 김광현은 양덕고개 사건의 피해자로 둘째 딸이 그 차에 탔었는데 며칠 전에 청진에 가서 데려왔다고 한다. 목숨을 부지했으나 대퇴골이 탈절 되었다.
젊었을 때 분쇄기에 두 손을 잃은 아내 때문에 생활이 쪼들릴 대로 쪼여들어 그 살림살이를 도저히 말로서 표현 못할 형편이었다. 한영근과 박정준은 제대군인이었고 부대에서 운전경력이 꽤 오래된 운전수인데 한영근은 결혼했었고 박정준은 총각이었다.  

적위대 훈련도 끝나고 방학도 끝나 3월 1일에 새해에 들어 처음으로 노선에 버스를 내보냈다. 로따는 나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었다.  

-버스 운행에서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이제까지 버스 운행을 하면서 지난해 6월에 수입 지출이 평형을 잡은 후로 매월 30~40만 정도 적자를 보는 버스 운행이었다. 게다가 피로 운전과 음주 운전 때문에 사고 발생이 언제 있을 지 위험이 잠재했고 수익금 관리도 엉망이었다. 먼저 바로 잡을 것들을 로따와 의논했고 원래의 규정도 어느 정도 수정해 놓기로 했다.  

대장의 신분으로 운전수와 차장들을 모여 놓고 회의를 했다. 여객 수송을 보장하기 위해 나쁜 습관을 버릴 것을 호소하고 원래의 규정을 수정한 것을 발표했다.  

1. 새로 짓는 대기실을 사용하기 전에 우선 순번제를 도입한다.

첫날은  213호가 1번 순이고 223호가 마지막 순이다. 앞으로 11대의 차가 윤번으로 1번이 되고 정비불량인 차는 마지막 순으로 밀린다.  

2. 저녁에 수익금 전부 바치던 것을 조정하여 운행이 1회 끝날 때마다 한번 바치는 것으로 한다.
바치는 장소는 아랫집 경비실.  

3. 매일 아침 7시에 차를 구내 밖에 내보내며 순번대로 검차 받은 후 노선에 나갈 수 있고 휘발유는 검차 후에 주며 회당 12㎏이다.  

4. 음주 운전을 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해고한다.  

대기실을 사용하게 되면 차는 어차피 순번으로 돌아야 한다. 그에 적응시키기 위해 순번제를 도입한 것이다. 정비 불량인 차를 제일 뒤 순번으로 밀어 놓으면 차를 잘 정비해야 되겠다는 사상을 수립해 줄 수 있었다. 운전수들 사이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아랫집은 시장 정류소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운행을 1회 하고 나면 다음 운행까지 오랜 시간 동안 정류소에서 기다리게 된다. 그 시간에 아랫집 경비실에 와서 수익금을 바치는데 시간이 충분하다.  

용철이와 내가 함께 검차하기로 했다. 휘발유는 새벽 운동 때문에 보통 전날 저녁에 주었으며(영철이와 위홍이가 아침 시간에 주기를 싫어했다.) 차는 휘발유 받은 후에 임의의 시간에 정류소 쪽에 나가버려 관리해내기 말째였었다. 정확히 7시(중국 시간 6시)에 검차를 시작하며 합격자에게만 휘발유를 주어 노선에 나가게 한다.

새벽 운동과 휘발유 낭비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차 사업소의 운전수들이 순번제에 호응해 주지 않아 처음 두 대가 일찍 나가는 것만 허용했을 뿐이었다. 음주 운전은 원래 첫 번째엔 천 원을 벌금, 두 번째엔 노임(월급) 전부 벌금, 세 번째가 해고였는데 큰 결심을 보여 주기 위해 첫 번째로 발견되면 즉시 해고하는 것으로 고쳤다.

이상의 조절을 거쳤는데 다들 순번제를 도입한 것에 대해 대찬성을 하는 거였다. 제일 큰 적인 피로 운전을 물리쳤고 간접적으로 술을 적게 찾게 되므로 음주 운전도 피면 할 수 있을 거였다.

그래도 제일 골치 아픈 것은 순번제였다. 우리 운전수들 사이에서는 진행하고 있었지만 정류소에서 경쟁 상대인 차 사업소와 첫 순번을 다퉈야 했는데 처음에는 차 두 대를 먼저 내보내는 것으로 타협했다. 후에는 비서와 이 일을 말했고 차 사업소에 직접 찾아가서 순번제에 호응해 줄 것을 부탁하였었다. 비서가 갔다 오고 나서 이 문제도 무난히 풀렸다.

후일 정류소에 가서 차 사업소의 운전수들과 물어 보았더니 나와 청계 전쟁을 했던 성춘근이 이렇게 말해주는 거였다.

“다 미친 노릇을 했지. 언녕 이렇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나?”  

다 같이 돈 버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므로 무난히 풀릴 수밖에 없다. 다 싫어하는 새벽 운동을 계속하면 녹아 나는 건 버스뿐이 아닌 운전수들이니 말이다. 새벽 운동 때문에 벌써 어떤 기사들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데 그 중에서 우리 회사의 김중신과 차 사업소의 김창환 영감(54세)의 몸이 제일 크게 영향 받았다.

그 여운으로 김창환 영감은 몇 달 후인 7월에 갑자기 뇌익혈로 사망했고 김중신도 시름시름 앓다가 11월에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생명의 대가로 얻은 교훈이라 함이 제일 적절한 표현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른 봄의 눈을 특히 조심했다. 눈이 조금만 내려도 하루 동안 운행을 중지했다. 차 사업소와 선봉 운수대의 차들은 우리 차가 노선에 나가지 않을 때 과부하로 허덕이었고 그 때문에 차의 수명은 우리 차보다 엄청 줄었다. 우리 차들은 과부하 방지와 사고 방지를 동시에 첫째로 놓고 운행했기에 수명이 길었고 성능도 상대적으로 좋았었다. 매일 아침 운행증을 검차 후에 내 주는 것으로 검차 받은 후라도 운행증 없이는 노선에 나가지 못하게 단속했다.

운행증은 원래 차영감이 내 주던 일인데 후에는 로얼이 했고 지금은 내가 한다. 내가 나진에 없을 때면 용철이 했고 둘 다 없으면 출납원인 차춘화에게 시켰다. 이제는 원래의 나쁜 습관이 하나하나 소멸되고 버스 운행의 질서가 좀은 잡힌 것 같았다. 이제 3월 달에 있은 충격적인 일들을 적어 보려 한다.  

3월 1일, 운행이 회복된 첫날, 평양-두만강행 열차가 나진에서 타절되었다.

두만강은 중-러-조 삼국 지대에 있는 조그마한 동네로서 중국의 방천, 러시아의 뽀드깔나야와 나란히 있는 조선 최북단 두만강리의 소재지이다. 양덕 고개 악성 사고도 이 열차가 빚어 낸 거라고 한다. 타절되었다는 것은 전기 사정 때문에 나진까지 오고는 더 가지 못해 승객들이 모두 나진 역에서 내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나진에서 차 타고 선봉에 가고, 다시 선봉에서 두만강 연안의 마을들로 가야 할 사람들이었기에 첫날 운행에서 적지 않은 수익금이 나올 수 있었다. 운전수와 차장들이 매일 열차가 타절됐으면 좋겠다고 떠들면서 흥분했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3월 초의 어느 날, 눈 때문에 운행을 중지했던 날이었다. 내가 나진 시장에 갔다가 돈지갑을 잃어 버렸다. 그 안에는 나의 신분을 증명하는 증명서가 다섯 가지나 있었다. 여권, 지대 거주증, 중국 신분증(주민 등록증), 건강증과 조선에서 받은 면허증 다섯 가지 말고도 2천 정도의 조선 원이 들어 있던 돈지갑이었다. 비서가 로따와 의논하는 것 같더니 순찰대로 가본다면서 나갔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조선 원 2천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돌아 왔다. 정말 기상천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이런 일이었다.  

순찰대에서 꽃제비 두목을 불러 놓고 요즘 갖고 있는 증명서들을 전부 갖다 바치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지대 안의 어느 곳에도 발 붙히지 못하게 하겠다고,  당장 찾아오라고 닥달했다고 한다.  

꽃제비들은 지대를 떠나서 살지 못한다. 지대 밖에서 들어온 꽃제비들을 이미 여러 번 되돌려 보냈고 돌려보낼 때마다 우리 버스를 써왔기에 그런 일이 확실히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꽃제비 두목은 자기 생존 무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기 부하들에게 증명서들을 찾아오라고 명령했고 그 사흘 동안만은 나진 시내에서 꽃제비들을 볼 수 없는 희한한 일까지 생겼었다. 내가 시장에 나갈 적마다 보아 오던 꽃제비들을 이틀 간 시장에서 지갑을 찾으면서 한 명도 못 보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꽃제비 중의 한 명이 내 지갑을 훔쳤다. 다섯 명이 증명서 하나씩 갖고 있다가 증명서의 임자한테서 돈을 받고 되돌려 주는 것은 꽃제비들의 상투적인 수단으로서 물건을 잃은 뒤에 돈주고 다시 사왔다는 얘기도 중국 기사들한테서 들어오던 터였다.

그 다섯 명을 찾느라고 꽃제비 모두가 동원되었던 것이다. 하여튼 잃었던 물건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나진밖에 더는 없는 줄로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일을 겪을 수 있었다.  

양덕 고개 사건 후 우리 회사도 좀 영향을 받았다. 운전수 김종형의 누이 동생이 나진역 출판물 발행 소장으로 일했었는데 이번 사고에 목숨을 잃었다. 그 집 장례식에 우리 버스를 한 대 주어 쓰게 했다.  

재판소장이 죽었고 체신운영국장도 사망했다. 체신국장은 우리 회사에 자주 다니던 평양 출생의 기사장 출신으로서 나진에서는 보기 드물게 태도가 온화하고 언제나 깍듯이 모든 사람을 대하는 성격이었다. 종래로 반말을 쓰지 않았고 우리 식구들한테는 연하라도 존대어를 써왔으며 그의 아내도 벽돌 공장 부기원으로 물자구입 때문에 늘 우리 회사에 왔었다.  

어떤 땐 부부가 약속 없이 안화동에서 만나는 때도 있었다. 참다운 태도로 일만을 꾸준히 하는 인간다운 인간이었으므로 인상이 자못 깊은 사람이었는데 이번 사고에서 딸과 함께 사망했었다.
정말 기억에 남길만한 사람이었는데 아까운 생명을 마쳤다.  

중순의 어느 날 내가 예란이 때문에 차 사고를 저질렀다. 예란이로 놓고 말하면 회사의 초창기를 위해 힘을 낸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서 원래 합작회사 때부터 인수원을 해왔고 그녀가 사직하고 난 뒤 그 자리에 내가 입사해서 들어간 거였다.

같은 경주 김가여서 친척 사이처럼 《아재》라고 부르면서 재냈고 예란이가 훈춘 시내에서 산적점을 하고 있는데 우리 식구들이 자주 다니면서 팔아 주고 예란이도 나진의 수산물을 실어 날라다가 그 것으로 꼬치를 만들어 장사하는 중이었으므로 드문히 나진에 다니기도 했다.  

그날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차를 잡지 못해 나보고 선봉까지만 태워다 달라고 청을 들었다. 역시 눈오는 날 버스는 운행중지 중이었고 나는 조금은 한가해 있었다. 그녀를 선봉까지 실어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관곡 고개를 타다가 길옆의 골짜기에다 차를 처박았다.

다져진 눈길 위에 눈이 내려서 아주 미끌었고 게다가 나의 86호 차는 타이어가 너무 달아 반들반들해져 있어서 사고 치기 한창이었다. 다행히도 골짜기 깊은 쪽으로 더 내려가지 않고 길 바로 옆의 웅덩이에 고스란히 떨어 졌기에 사람도 차도 다 상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안화동에 갔다. 한창 점심 식사 중이었다. 사고 쳤다는 말을 듣더니 로따가 펄쩍 뛰었다.  

“개 같은 새끼, 씨, 지금 차가 없어 다니기도 불편해 죽겠는데 그 빌어먹을 간나를 다 실어다 줘?”  

225호는 요즘 창주가 222호를 후진하면서 트렁크를 다쳐 놓아 작은 산처럼 솟아 있었고 89호도 타이어가 없어 세워두고 있었는데 쓸만한 차는 86호밖에 없었다. 그 차마저 처박혔다니 이 아니 성낼 일인가?

“너는 어째 시키지 않은 노릇을 그리 잘 하니?”  

이모가 한 마디 하는데  

“당신은 삐치지 마오! 너 지금 밥 먹구 아바이와 같이 기중기(크레인) 차 얻으러 가라.  이제부터 예란이 초청장 해 주지 말라.”  

하면서 죽음의 사선을 넘어 온 사람에게 안부를 물을 대신 욕질만 한다. 나는 마음이 6만 정전 속에 파묻힌 나진의 암흑과도 같은 깊은 어둠 속에 빠지는 듯한 감을 느꼈다.  

그 중고 찦차가 내 생명보다 더 값지다. 나는 이모부의 눈에 조카로 보이는 게 아니고 돈벌이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모도 어쩌면 저렇게 신통할까? 어쩌면 내가 그렇게도 하찮게 보인단 말인가?  
또 무슨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밥상에 둘러앉은 다른 식구들은 다 꿀 먹은 벙어리로 아무 말 없다. 욕은 듣는 사람이 먹는다고 했다. 다른 식구들을 욕하기 어려울 때 항상 나를 같이 욕해 버리는 로따의 성질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까짓 욕을 먹는 건 대수롭지 않았지만 지금 이 시각 사람의 생명보다 차를 더 아끼는 로따가 더는 돋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내에게서 그 더러운 욕을 먹고 나서 이혼을 결심했는데 이제 나는 로따를 떠나야겠다고 처음으로 마음먹게 되는 거다. 나의 인격을 무시하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건 죽어도 참을 것 같지 않았다.  

그 날 밥이 세상 제일 맛이 없는 밥이었다. 모래알 씹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 밥이 밥 같지 않으니 어찌 목에 넘어가겠는가? 뜨네 마네 하다가 끝내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이 얄궂은 눈은 내 신변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왕림해 주군 했었다. 오늘 내리는 눈은 무얼 의미하고 있는지? 뒤꽁무니가 산처럼 솟은 225호를 몰고 차영감을 태운 채 57호 지휘부로 가면서 나는 생각에 골몰했다.  

나는 내가 성격상 결함이 많은 사람이고 어떤 때 일 처리도 자기 주견대로 소홀히 해온 것도 인정한다. 경험도 적고 면허증이 없는 모든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면서 회사를 위해 정력적으로 일해 왔다. 그 동안 많은 욕에 시달리면서도 무감각해 진 것은 내가 기술을 배우기 위해 모든 걸 참고 견디리라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이번의 욕은 로따에 대한 나의 태도를 개변하기에 족했다. 내가 뭔데 인정머리 없는 욕을 처먹으면서 죽도록 일만 해야 하는가? 친척이라는 인정에 매여 일만 꾸준히 해 온 나, 어쩌다 저지른 실수 때문에 황당하고 더러운 욕을 먹는 나는 이제 이모부한테 더는 필요하지 않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예란이를 회사가 제일 어려운 시기에 뺑소니 쳤다면서 미워하던 로따였는데 초청장을 해 주지 말라고 한 것은 더는 나진에 다니는 예란의 모습을 보지 않겠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제 예란이처럼 내가 회사에 없어도 된다면 기어이 떠나 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중기 차를 부탁해 놓고 아바이를 안화동에 내려놓은 후 사고 지점으로 갔다. 도중에 89호를 만났는데 영철이가 운전하고 있었다. 오전에 타이어를 구해 왔고 지금 사고 지점까지 갔다 오는 길이라고 하면서  

“어디 다친 데 없소?”  

하고 문안해 왔다. 아까 밥 먹을 때 영철이가 빠졌나 부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 한마디에 내 가슴의 옹은 풀렸다. 영철이는 말수가 적은 편이나 드문히 말 한 마디로 남을 후덥게 해주는 남자다운 일면이 있었다.  

89호는 뒤 자리에 탔던 용철이가 몰고 안화동으로 갔고 나와 영철이는 225호로 사고 지점까지 갔다가 내가 내린 후에 영철이가 몰고 돌아갔다.

나는 웅덩이에 빠진 찦차에 앉아 기중기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눈은 멎었고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고 해서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 뒤의 햇살이 찬란해서 추운 감은 별로 없다.

문득 카세트 녹음기가 고장난 지 오래다는 생각을 했고 기다리는 동안 수리하면 시간을 보내기 좋겠다는 궁리를 했다. 녹음기가 다 수리되고 장치를 금방 끝냈는데 기중기가 도착했다.

잠깐 새에 찦차는 길 위에 올려 졌다. 차 밑을 살펴보니 다른 이상은 없고 왼쪽 앞바퀴쪽의 판 스프링이 석 장 끊어져 나간 것이 보이고 차가 달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기중기 운전수 이 영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안화동에 돌아 왔다. 이 영감이 안화동까지 따라 왔고 나한테 부탁할 일이 있다고 했다. 57호 지휘부에 낡은 중국산 반 짐차가 한대 있는데 그 차를 살리는데 필요한 부품을 해결해 달라는 거였다.

이미 소장과 로따 사이에 의논이 다 되어 있었는데 우리에게 기중기 작업을 해 준 대가로 연유가 아니면 부품을 주기로 했으며 그 일을 내가 맡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선선히 응낙했으며 시간이 나면 그 차를 한 번 보고 난 뒤 어떤 부품이 수요되는 지 명세를 만들고 명세 대로 부품을 내오겠다고 알려 주고 돌려보냈다.  

또 다른 사고가 있었다.

새로 온 김광현이 저지른 사고 아닌 사고였다. 선봉 정류소에서 나와 나진 쪽으로 오다가 첫 정류소인 명광에서 승객을 더 싣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스타트 모터는 며칠 전에 새것으로 교체했고 배터리도 새 배터리다.

문제가 있다면 배터리에서 차체로 연결되는 케이블이 어스가 잘 먹지 않는 거였다.  이런 경우에는 그 케이블 선을 잘 고정시켜 주면 문제가 쉽사리 풀린다. 그런데 나진의 기사들은 먼저 배터리에 매달리는데 습관 되어 있다. 두 단자 사이에 전기선으로 순간적인 접촉을 시켜 보아 센 불꽃이 이는 지를 확인하는 것인데 이 과정을 스파크 시킨다고 했다.

박동혁이 금방 충전을 끝낸 배터리를 스파크 시켜 폭발 사고를 낸 적이 있어서 그 후부터 스파크 시키는 일이 없도록 운전수들에 말해 주었지만 이 새로 온 운전수는 안전 조작 기율을 무시하고 사람을 꽉 박아 실은 버스 안에서 아무런 이상도 없는 배터리를 스파크 시켰던 것이다.

순간적인 센 불꽃을 보고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군대 몇 명이 창을 부수고 뛰어 내렸고 그 다음 버스는 성한 창이 하나도 남지 않게 다 깨지고 사람들이 연이어 뛰어 내렸다. 명광 정류소에는 순식간에 유리 조각이 무수히 널렸고 당금 불이 일어 날 듯 하던 버스는 멀쩡히 서있었다. 그 버스가 멀쩡할 수밖에 없다. 배터리가 폭발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창 유리가 전부 깨진 버스를 보면서 이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중고차에 시달렸으면 불꽃 하나에 그다지도 민감한 지에 대해서 알 것 같았고 차를 20여 년이나 다루었다는 운전수가 그다지도 무식한데 대해서 가소로운 웃음밖에 나가지 않았다.  

이런 운전수는 계속 두고 쓸 수 없었다. 김광현은 내가 대장을 한 이래 처음 직접 해고한 사람으로 되었다. 가정 살림이 억수로 구차한 사람이었지만 기능이 약한 운전수를 쓰다가 더 큰 사고를 낼 수도 있다는 로따의 말에 따라 내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혼자 안고 사는 사람같이 50세도 안 된 나이에 이도 다 빠져 버리고 얼굴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던 김광현은 입사한지 20일만에  

“이 회사가 어디 잘 되는가 두고 보자.”  

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안화동을 떠나 갔었다. 키를 두고 가지 않아 스위치를 통채로 교환해 버리는 작업을 추가로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며칠 후에 나는 노동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담당 지도원인데 왜서 노동국의 비준도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해고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왔다. 바로 김광현의 해고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대뜸 알 수 있었다.  

“우리 회사는 기능이 약한 종업원을 두고 쓰지 못합니다.”  

그 말을 여섯 번이나 해서야 마침내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무슨 도리를 설명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고 전화를 잡으면 끝도 없이 말을 하는 나진 사람들의 사업 방법에 신물이 났지만 상대가 전화를 끊기 전에는 예절 상 내가 먼저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진에서 외국인 기업을 운영하는데 위에서 내리미는 압력이 크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한 차례의 통화였다. 그 후에도 김광현의 일을 두고 전화로 여러 번 들먹이고 그 담당 지도원이라는 사람이 직접 회사까지 찾아 왔지만 기어이 해고하려는 우리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회사가 잘 되는가 두고 보자.”  

그렇게 말하던 김광현이 과연 관계 부문의 힘을 빌어 자기의 해고 문제를 계기로 우리 회사를 파멸에로 끌어가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도 의심했지만 그런 근거가 없다.

중국인 투자자들이 많이 실패했던 원인이 바로 정책을 무시했기 때문에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깬 거나 마찬가지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정책으로 압력을 가하는 관계 부문의 태도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고 우리는 정책을 어기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회사 처녀들 중에서 오선희가 처음으로 시집가게 되었다. 한달 전에 내가 회사의 대표로 약혼식에 참가했었는데 중매 결혼이라 한다. 내가 선희보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 총각 마음에 드니?”  

한참 고개를 갸우뚱하고 생각하는 것 같더니

“모르겠음다.”  

했고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었다. 나를 《부인접촉 갈망증》에 걸렸다던 처녀다. 회사의 차장들 중에서도 제일 뛰어나게 일하는 종업원이라고 할 수 있는 처녀다. 조선에서는 시집가면 출근시키지 않는다. 로따는 아까운 애가 간다면서 늄 재료로 경대를 만들어 주라고 했었다.

나진에서는 가구 중에서도 경대를 제일 선호했는데 삼면이 거울이고 밑에 서랍이 어려 개 달린 여자들의 화장대라고 이해하면 되는 물건이다. 나무로 하던 재래식의 경대를 샤시 재료로 만들어 가구 시장을 열어 보려는 광고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늄 경대는 공화국이래 처음이라고 했고 그 일을 계기로 나진의 늄 가구는 거의 다 우리가 맡아 가공하게 되었었다.

로따는 시집가더라도 임신하기 전까지는 출근하라고 했다. 그녀의 결혼식 날에 이미 수리해 놓은 225호 차를 보내 주었고 용철이가 운전했다. 장마당 정류소까지 와 가지고 회사의 차장과 다른 종업원들을 불러서 기념 사진을 찍었고 이튿날에는 간소한 음식을 들고 신랑과 함께 로따한테 인사하러 왔었다.  

나는 차장들과 매일 얼굴을 맞대고 있어서 장난도 잘 쳤었다. 저녁에 차장들이 수익금 바칠 때면 사무성적인 말 몇 마디 외에 전부 다 농담이었다. 이날도 많은 차장들 앞에서 중국에서 유행되는 말을 했었다.  

“처녀 한 명이 또 소멸됐다!”  

차장들은 이젠 어지간한 농담을 대수로와 하지 않는다. 그저 약간 웃기만 하고 눈을 흘길 뿐이었다.  

“처녀 사냥을 못했나?”  

남연숙이 장난기가 발동하여 맞장구 쳐왔다.  

“요즈음엔 유치원에 가야 처녀를 찾아 볼 수 있답니다.”  

“그램 처녀 장가 들지 못하겠다? 유치원생을 데려다 한 20년 키우면 몰라도.”  

말해 놓고 자기 절로도 우스운지 돋보기를 올리 추고 입을 오무리면서 이상하게 웃었다. 말보다도 그 웃는 모습이 더 우스웠던지 그제야 차장들이 떠나갈듯 웃어댔다.  

“지금은 여자 구경하기조차 힘든 세월입니다. 여자라곤 그림자도 찾아보지 못합니다. 나이든 총각들만 욱실거리고.”  

내가 말하면서 가슴을 툭툭 쳤다.  

“총각 행세를 해보겠으믄 여기서 아무거나 채 봐라. 중국의 쑈제들보다는 좋을 거다.”  

중국의 노래방과 사우나는 벌써 나진에 알려진지 오래다. 쑈제(小姐-아가씨)는 술 배동 아가씨나 몸 파는 여자들이라는 것을 더러 알고 있었다.  

“나진 처녀 챘으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중국에 가면 매일 장가듭니다. 전 번에는 목욕탕에 갔는데 여자가 벗고 들어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진에도 그런 목욕탕이 있었으믄 좋겠음다.”  

겪은 일 그대로 말하면 농담으로 알고 받아들인다.  

“처녀들 앞에서 아무 소리나 하면서, 쯧쯧, 나가라!”  

이제는 나와 반말하는 것이 습관 됐다.  

“매일 바꿔대는 게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댔다. 댔어! 얘들아, 저 영도 선새임을 쫓아내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진짜 쫓아내는 사람은 없다.  

“으~음, 저런 데로 무시게 시집오겠다 하겠노? 처녀들아, 절대 저 굶은 총각에게 넘어가지 말아라!”  

그 정도 되면 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일전에 로따가 나한테 이상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날도 오늘의 장소였는데 이모와 비서도 있었다.  

“영도 여기서 장가들 수 있다면 집까지 지어 줄텐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화교인 경우 결혼이 가능했지만 외국인과의 결혼이 엄금되어 있었던 것이다. 화교도 결혼하면 가족까지 데리고 중국에 다닐 수 없었고 영원히 가족과 함께 이민할 수 없었다. 다만 화교 한사람만 다닐 수 있고 이민도 할 수 있었고 가족 문제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조선 여자와의 결혼은 유혹적인데 많았지만 생각도 하지 말아야 했었다.  

이모는 훈춘의 사업터를 버릴 수 없었다. 훈춘과 나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작업을 자주 해야 했다. 외숙모가 웬일인지 나진에 나오는 것을 거부해서 지금 이모가 밥을 한다. 밤늦게 하는 부기작업 때문에 식사가 큰 골치 거리다. 또 아침에 늦잠꾸러기로 유명한 이모니깐.  

장송의 처가 식모 일을 하기로 했다.  3월 말에 사파리(찦차) 한대와 롱구방(봉고차) 한대를 샀다.
사파리에 88호, 롱구방에 89호를 옮겨 달게 되었다. 원래의 88호는 세워둔 지 오래 되었고 89호를 달았던 닛산은 안화동 윗집에서 대기실 사이에만 다니기로 했다.  

우리 윗집 침실에 일제 중고 세탁기가 한대 있었다. 110V의 전기를 썼기에 변압기가 있어야 했고 나 외에는 누구도 쓸 줄을 몰랐다. 아침과 저녁에 부엌에 불을 지필 때 늘 연기가 거꾸로 나왔고 그 때문에 굴뚝 위에 연기를 빼는 인풍기(전동기에 프로펠러를 장치한 것)를 올려놓고 썼는데 그것도 전기가 있어야 돈다. 가전과 인풍기를 쓰기 위해 자가 발전을 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발전기를 돌렸다.  

6마력 짜리 디젤 엔진을 수동으로 돌려서 시동을 걸고 엔진 회전 속도를 일정하게 올려 놓으면 220V의 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디젤 엔진은 추운 날에 첫 시동을 걸기 말째다. 여러 번을 돌리고 나면 기진맥진해 버리는데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시동액이라는 걸 뿜어서 몇 번 쉽게 걸어 보기도 했지만 장구지책이 아니다.

아랫집 발전기는 실린더 두개 짜리 디젤 엔진으로 돌렸는데 스타트 모터가 달려 있어 배터리에 이상이 없으면 시동 거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고 두 발전기는 항상 사람이 옆에서 듣기 싫은  엔진 소리를 들으면서 살펴야 하는 것이 제일 골치 거리였고 물 보충도 경상적으로 해 주어야 했다. 그런 대로 전기 문제는 기본적으로 풀려 있었다.  

나진의 도로 보수 작업은 전문 업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기간에 한번씩 기관, 기업소에서 사람들이 동원되어 하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의료 봉사 기관이나 여객 수송 업체 같은 데서만 일 보게 되는데 급히 은행에 일 보러 가서는 그냥 돌아오는 때도 있었고 도로 보수 작업을 하는 현장에 가서 사람을 불러다가 일을 볼 때도 있었다.

나도 한때 나진-청진 도로의 나진 구간 보수 작업에 참가하여 중국 번호판을 단 반 짐차로 돌을 실어 날랐고 요즘은 내 동생이 트럭을 가지고 부기 검증소의 종업원들과 함께 나진-선봉 구간 보수 작업을 연 며칠 하고있었다. 비포장이어서 일년에 적어도 몇 번씩 보수 작업을 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일 보기가 참 말째였다.  

그 날은 3월 27일이었다.

집에 전화를 한다고 갔던 로따가 돌아 와서 우리 형제를 오후에 다 돌아가라고 말해 주었다. 아버지가 차 사고 당했는데 골절되었고 수술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날까지 연속 50여 일째 나진에 《갇혀》있었다. 아버지의 차 사고가 아니었더라면 언제 집에 돌아 올 지 모른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동생더러 병원에 있게 하고 나는 또 바쁜 일에 나섰다.

러시아의 유조차가 들어 와서 장령자 통상구로 달려갔고 그 차를 나진까지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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