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절이 왔다. 김일성 주석의 탄생일이다. 벌써 며칠 전부터 종업원들이 매일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고 귀맛 좋은 아코디언과 기타 반주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로얼이 훈춘에서 꽃바구니를 만들어 보냈다. 크고 예쁜 바구니에다 생화를 가득 꽂았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를 쓴 빨간 띠가 드리워 있는 거였다.

태양절 날에 동명동에 있는 태양상 앞에 바칠 거다. 동명동 쪽에 새로 만든 선봉 도로와 추진으로 가는 도로 교차점에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고 가운데에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걸 가리켜 태양상이라 부르고 있다. 이날은 전국적인 국정 휴일이다. 아침에 제일 좋은 옷을 떨쳐입고 회사나 기업소 별로 줄지어 태양상까지 걸어가고 외국인 기업은 꽃바구니를 바치는데 대외 사업국 일군들이 어느 회사에서 가져오고 안 가져 왔는지를 옆에서 확인하고 있다.

남자들은 양복에 메달을 잔뜩 달고 여자들은 울긋불긋 한복을 입고 태양상 앞에 단정히 서 있다가 지휘에 따라 경례로 인사 올린 후 물러간다. 우리들도 나들이 옷을 입고 종업원들과 함께 서서 인사 드렸다. 이날 같이 명절이 오면 나는 꽃제비 신세를 면할 수 있었고 마음 편히 하루를 푹 휴식하고 명절 음식도 푸짐히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얼마 전부터 육류를 생걸로 통과시켜 주지 않아 주로 수산물로 명절 음식을 장만한다.

오전에 외국문 서점에서 전시회를 참관했다. 외국인만 들여 보내는 전시회-대부분은 수령님께서와 장군님께서 사업하시는 장면을 찍은 사진들이었고 빌딩이 우거진 평양 거리와 풍년이 등 평야를 볼 수도 있었다.

점심에 대외 사업국에서 주최하는 동석 식사에 초대되었다. 우리 식구들 중 로따, 로얼, 이모, 용철, 나, 영철 6명이 초대되었으나 로따 부부만 갔다. 로따는 돌아온 후 마작을 놀고 있는 우리에게 흥에 겨워 말했다.

-인민 위원회 위원장과 나란히 앉아서 식사했다. 위원장 오른 쪽에 중국의 H그룹 나진 지사장이 앉았고 나는 왼쪽에 앉았다.

나진에다 투자한 기업가운데서 이윤이 나고 있는 회사가 열 개 안 되었는데 우리가 있다. 다른 사장들은 질투의 눈길을 보냈다. 식사는 참 좋았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 투자자들이 모여 토론회를 가졌다. 나진에 외국인 투자자들의 협회를 내오자는 내용인데 나는 거절하고 나와 버렸다. 대부분이 중국 투자자들인데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

대개 그런 내용을 마작놀이 하면서 들어 주었다. 봄바람이 유난히 차서 어디 놀러 가기에도 안 좋은 날씨였었다. 

어머니한테서 소식이 왔다. 외갓집에 한번 다녀가라는 것이었다. 작은 외삼촌의 사위가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는데 한번 만나 보라는 내용이었다. 매제는 나와 동갑이었는데 내 외사촌 여동생보다 네 살 위였다. 매제의 여동생이 자기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고 나선다는 것이었다. 

모처럼 귀국 길에 올랐다. 상했던 손도 이젠 거의 나았고 얼마 동안은 푹 쉴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여자 만나러 간다면 로따 내외는 만사를 제쳐놓고 보내 주었다. 나의 결혼이라면 적극 지지한다고 했었다. 

“입 발린 말로만 하지 말고 내 연애 경비나 내 놓소.”

내가 농담으로 말하자 이모가 식사 중인 식구들을 둘러보며 묻는다. 

“너네 말해 바라. 줘야 되나?” 

“게야 줘야 되지므.” 

“주는 게 옳소!” 

“줘야 함다!” 

다들 대찬성이다.

사실 내 주머니 사정은 형편없었다. 일년 동안 월급은 거의 다 어머니한테로 전해졌고 나는 어머니한테서 얼마만큼의 용돈을 받아썼지만 담배 소비에도 모자랐다. 용돈을 받으면 거의 다 동생한테 주었고 나는 물자 구입하는 돈 중에서 조금씩 잘라내어 쓰고 있었는데 훈춘에 있을 때마다 사우나에 다니면서 발 마사지를 받았고 여자들한테도 적지 않은 돈을 썼었다. 

그냥 샤워만 하고 나면 피곤이 풀리지 않았고 그래서 발 마사지가 아니면 머리 마사지를 받는 것으로 억수로 몰리는 피곤을 쫓아 버렸고 여자를 찾아 하룻밤 욕정을 푸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물리쳐 버렸다. 게다가 싸움질에도 적지 않은 벌금을 냈고 동생이 2년 전에 차 사고를 내면서 빚진 2천 원도 물어 주었는데 회사의 빚이 벌써 4천 원에 치달아 오르고 있었으며 인수원을 하지 않는 지금엔 손에 돈을 쥐는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모한테 한 말은 사실 농담으로 된 진담이었다.

“그래! 떠나기 전에 나한테 왔다 가라!”

그렇게 되어 이모한테서 2백 원 받아 들고 나진을 떠났다. 나진에서 원정까지의 한시간 반 동안은 이모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모의 아버지는 나의 외할머니의 셋째 남동생이다. 작은 외할아버지는 어렵게나마 공부를 했고 그 덕으로 방천이란 곳에서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이 있게 되었다. 이 방천이란 곳은 중-러-조 3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러시아의 뽀드깔나야와 조선의 두만강리를 지척에 두고 있었고 동해 바다와의 거리도 15㎞밖에 안 되는 훈춘에서는 제일 구석진 곳이다. 

두만강 개발이라는 말이 있기 전에는 째지게 가난한 동네였고 중국 측에서 두만강 출해권을 다시 획득하기 전까지만 해도 생활이 펴이지 못했으나 요즘은 UNDP의 배려로 세인이 주목하는 곳으로 되었고 중국의 현임 국가 주석인 강택민 씨가 두 번이나 다녀간 뒤로 백두산과 더불어 연변에서 빠질 수 없는 관광지로 되어 다들 잘 살고 있다.

이모네 집은 그 동네에서 몇 해 살다가 후에 외갓집의 방 하나를 빌어 남하동(지금의 경신진)에 정착했었다. 외갓집은 전형적인 함북 8간 집이었고 그때 당시 이모네 집은 외갓집의 제일 끝 방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두 집 다 서발 막대를 휘둘러도 거미줄밖에 걸리지 않는 지독하게 가난한 살림이었고 그것이 오히려 두 집이 한집처럼 지내게 된 뉴대로 되었고 어머니와 이모네들은 친형제처럼 여러 해 동안 살게 되었던 것이다.

친척 관계를 따져보면 내가 이모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녀한테는 나진의 안화동 식구들 중에서 제일 먼 친척이라 할 수 있었다. 훈춘의 사투리로 이모나 고모는 모두 아재로 통했고 그래서 나도 아재라고 불렀으며 중국어로 부르면 외이모이나 회사 내에서는 그냥 이모라 부르고 이모는 어머니를 친언니처럼 대해 주고 있다.

그 때문에 나도 이모에게서 친조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터였고 이모는 내 일에 대해서 많이 신경 써왔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지런히 새 마누라를 얻어 보라고 재촉하는 데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 이모부인 로따도 전처랑 화해하고 다시 합쳐 연길에서 살게 되면 어렵더라도 가게 하나를 차려서 나더러 관리하게 해 주겠다고 한 적이 있다.

로따는 나도 이젠 많이 늙었고 그 체면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서 언제 한번 연길에 가면 전처한테 얘기해 보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성정이 유난히 강한 아내가 아무리 입심이 세기로 유명한 로따가 얘기한다 해도 들어 주기 만무하다는 결론을 내린 지 오랬으므로 나는 그 일을 제지시켰었다. 그래도 자기 화술을 자신 있게 생각하는 이모부가 여러 번 고집스레 권고했었는데 나는 번마다 밀막아 버렸었다. 

괜히 욕을 치를 것이고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되었기 때문이다. 로따 부부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거는 필시 곡절이 있기 마련이다. 왜서 이제까지 내색을 않고 있다가 요즘 들어 많이 신경 쓰는 걸까? 그것이 참 궁금하다. 

그 시기에 내가 자존심을 세웠더라면 아예 나진에 가지도 않았을 거였다. 오직 내가 배운 것을 제대로 써먹을 만한 기능을 익히려고 순 노가다 판을 찾아 간 것이기에 지금도 안화동에서 근무한 그때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혹시 로따네는 내가 자존심 때문에 더는 안화동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내 뒷길을 생각해 주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안화동에서 나의 존재가 인제는 더는 필요 없다고 스스로 판단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두 가지 이유가 다 성립될 수 있는 조건이 있었다.

회사가 받은 업종 가운데 내가 능하지 않는 것이 없다. 아무 일이나 시키면 해내었다. 천성적으로 부지런해서 그랬는지 나는 자금 관리 하나만을 해 보지 못하고는 무엇에나 다 참견했었다. 차대 관리를 하는 외에 자금 관리를 제외한 다른 업무에 늘 개입하여 어떤 때는 로따 역할을 했고 어떤 때는 창고장을, 어떤 때는 주유소장 노릇을 했고 우리 식구들의 생활상 어려운 구석들도 지저분하고 힘들더라도 다 해결해 놓 군 했다. 침실의 온돌에 불이 잘 들지 않으면 직접 굴뚝 밑을 파헤쳤고 장작들을 패내었으며 식구들 중 눈꼴사나운 일을 목격하면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질책했다. 나진의 유행어로 《걱정 위원회 위원장》이 된 것이다.

그러는 나를 두고 로따는

“너는 말 그대로 간부이지 그런 일 하는 게 아니다.” 

혹은

“이건 네가 관계할 일이 아니다. 내가 알아서 하는 거다.”

등의 말로 경고하면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었다.

내가 걱정 위원장 노릇을 하면 누구나 다 체면이 서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느끼고 있으면서도 극복하기 어려워하는 노릇이었다. 특히 위홍이와는 수화상극이었고 용철이와는 호흡을 맞춰 일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게다가 내가 맡고 있는 차대도 용철이가 얼마든지 관리해 낼 수 있을 만큼 틀은 잡혀져 있었으므로 내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맡아 두고 할지라도 사실상 유명무실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자존심이라는 게 이런 거다. 나는 당당한 대졸생으로 노가다판이나 다름없는 일터에서 일할 수 없다. 인제는 나도 독립적으로 뭐나 할 수 있는 기능을 갖게 되었고 이 회사에서 나가서도 혼자 먹고 살 수는 있다. 이런 자존심을 버리고 회사에서 버텨낼 수 있었던 다른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인격 그것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일로 생각하고 일했고 돈이 벌어지면 내 일처럼 기뻐했었다.

그러나 나와 회사의 관계는 엄연히 피고용과 고용의 관계였고 피이용과 이용의 철두철미한 교역 놀음이라는 결론을 생각하게 하는 로따의 인정스럽지 못한 언행은 나의 인격을 여지없이 꺾어 놓고 있었다. 그까짓 자존심은 없어도 좋다. 그러나 인격은 꺾이지 말아야 했다. 인격이 꺾이면 사람이 아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인정도 사정없이 팽개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바로 인격이다. 내 생명이 일전 한푼 값 없을 수도 있지만 인격만은 죽어도 꺾이지 말아야 한다. 차 사고를 저지른 후로 내 인격이 일낙천장이 된 듯 했고 언젠가는 그 인격을 내세울 때가 있을 거라고 믿고 지금은 그 하나로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없는 회사는 과연 어떤 모습일가? 걱정 위원회 위원장이 없으니 다들 체면을 세워 일하게 되겠지.

그 시련 많던 초창기도 지나갔고 대기실도 잘 되어가고 있으니 한가한 사람이 나지게 되는 걱정도 없고 오히려 회사는 부담을 하나 덜게 되겠지. 정말로 내가 부담거리로 되어 버린 거나 아닐까? 좋은 일터가 나지면 언제라도 좋으니 떠나가도 된다던 입사 때의 로따 말이 생각났다. 

혹시 지금 이 시기에 떠나가도 된다고 암시하는 거나 아닌지? 내가 자존심만 내세운다면 이 회사는 내 적성에 맞는 것이 없었다. 다들 일을 잘 해 내고 있는 판에 유일한 대학생이 오히려 화근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선 것이 아닐까? 제일 먼 친척으로, 그것도 가장 강유력한 실력자로 회사의 높은 자리를 엿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이모부로서 처 조카에게 자기 기업을 내놓아 관리시킬 사람이 없다. 관리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돈벌이도 허락하지 않을 거였다. 영철이한테 중고차 판매를 여러 대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소개하는 차를 단 한 대도 받아 주지 않던 이모부의 태도로부터 가족 관념이 상당히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상술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기계처럼 분주히 돌아가면서 액 외의 수입을 꿈꾸어 오던 나에게 차례 지는 것이란 해도 해도 끝없는 일과 욕설뿐이었고 점잖게 앉아 한가로운 사람은 오히려 짭짤한 맛을 보고 있다. 

회사의 중견으로 될 수 없고 많은 휘황한 전과를 올린 사람이 인제는 필요 없는 사람으로 비참하게 버려지는 게 아닐까?

기능만 익힌다면 어차피 떠나야 할 몸이었지만 내 인격을 무시당하고는 못 참는다. 내 생명마저 초개같이 여기는 로따의 행실이 못 견디게 저주롭다. 내 깨끗한 인정마저도 받아주지 않아도 되고 내가 필요 없다고 느껴져 언젠가는 내가 스스로 물러나게 이런 저런 압력을 주어도 좋지만 인격 무시는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새 마누라를 얻어서 뭘 해? 돈이 있어야 찾아오는 여자들인데. 나에게는 현실적이 아닌 문제다. 그걸 자꾸 들먹이는 건 그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겠다.

그 목적이 다름 아닌 해고라면 직접적인 언어로 표달하면 될 일이 아닌가? 왜서 결혼 문제가 이때에야 심각해지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과연 로따 부부가 내 처지를 진정으로 동정하려고 관심 해 줘서 한 말이란 말인가? 그 진정이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내가 나진을 떠나는 것이 사실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진정 싫어하게 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내가 마누라를 얻으면 나진에 데리고 와도 괜찮다고 했다. 회사에 부담을 주려하지 않던 내가 그 일을 쉽게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오히려 나의 이런 마음은 로따네가 이용하기 좋은 조건으로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이용할 줄 아는 것이 로따의 재주였고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모든 이용할만한 것들을 다 이용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이미 이용 가치가 거의 없어져 있었다. 더우기 나 때문에 로따의 가족 내부의 위기는 더 우심해져 가고 있으니(주로 용철과 위홍) 위홍이를 내치지 못하는 이상 나를 제거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도 있었으므로 당연한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없으면 회사의 거의 모든 문제가 풀린다. 그것이 사실로 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아무 미련 없이 떠나리라. 그러나 아무런 담보도 없고 아직도 내가 할 일이 더러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시기가 됐다고 느껴지는 때에 떠나도 무방하겠지.

그때까지만 참고 있자.

내가 하고 저 하는 일은 그때 벌써 이 글을 쓸 계획이 섰던 것인데 나진에서 진정 지낸 시간이 불과 몇 달 정도밖에 안되었으므로 좀 더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좋은 글감들을 더 모아 보려는 것이었다. 내가 인정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내 인격을 다시 찾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어마지 않는 일이었다.

소개받은 여자들을 다 만나 보는 것, 타락된 생활을 해 보는 것-이를테면 싸움과 오입, 그리고 회사의 모든 일에 개입하는 것, 욕을 많이 더 먹어 보는 것, 살인을 내놓고는 닥치는 대로 뭐나 다 직접 많이 당해 보고 겪어 보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해온 인생 공부를 헛되이 할 수 없었고 그 참다운 경험을 내 아래 세대에 전해야 하겠다는 것을 신앙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같은 차에 장송의 와이프도 함께 앉았었다. 외숙모의 뛰어난 음식 솜씨에 습관된 로따는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은 이모가 한 것 외에 별로 입에 대지도 않는다. 외숙모가 없던 석 달 동안 로따는 눈에 알리게 축갔고 두 눈이 움푹 꺼져 들어 갔다. 로따는 생각다 못해 식모를 바꾸기로 했고 먼저 내 동생 처를 데려 와서 써보기로 했는데 그 때문에 장송의 아내는 나진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내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어 재잘대는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원정까지 한시간 이상을 자면서 왔다. 며칠 전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부부가 죽다 살아났다. 그녀가 나가지 않았던 2월 달에 로따 부부와 3월 달에 위홍의 부부도 중독된 적이 있었으나 무난했는데 그녀는 중독된 후 연 며칠 링게르 맞은 덕분에 중독 증세는 사라졌으나 그 후유증이 아직 남은 것 같다.

다 윗집의 그 몹쓸 온돌방 때문이었다. 이제 며칠 후면 아랫집 숙소가 다 지어진다. 그러면 식사 칸도 아랫집으로 옮기게 되는데 윗집의 침실은 다시 손질해서 사고를 피면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원정에 대였고 이내 다리를 건넜다. 권하 교두에서 외갓집까지는 11키로를 가면 되었다. 거기서 장송의 와이프랑 작별하고 나는 외갓집에 들어가는거다.

매제는 얼마 전부터 경신진에서 식당을 하고 있다.

1층은 식당이고 2층은 여관을 하는 보스로 경신에서는 위망이 있는 사람이다. 나진에 다니면서 이 식당에서도 점심 식사를 많이 했었다. 내가 피곤한 몸을 눕히고 쪽 잠을 자는 곳이기도 했고 오후에 국경 통과가 가능하지 않거나 무면허 운전의 단속을 피해 저녁에 차를 몰고 와서 하룻밤 묵어 가는 곳이기도 했는데 많이는 외갓집 형님네 집에서 잤었다. 매제의 여동생은 벌써 와 있었고 내가 도착하자 바람으로 친정에 와 있는 자기 친구를 불러다 주었다. 그 여자와는 2층의 여관방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 예쁘지 않은 얼굴에 실팍한 몸매였으나 복스럽게 생긴 여자였다. 남편은 내 외갓집 형님의 친구였는데 이름 모를 병으로 2년 전에 사망했고 여섯 살 되는 딸애가 있다고 했다. 말수가 적은 편이었는데 자기를 많이 생각해 주고 아껴주는 남편을 만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오전에 농민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면 내 자존심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던 로따의 말을 상기했으나 이미 순박하고 어진 그녀한테 마음이 쏠리게 되었다. 그런데 떠돌이 생활에 습관된 나는 이 여자를 옆에다 두고 아껴줄 자신이 없었고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줄 자신이 더욱 없었다.

만난 시간 동안 장황설을 늘여 놓은 나였지만 친구로 사귀어 보자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나면 장가 가겠음까?”

“가야지, 좋은 여자 만날 수도 있을 거요.”

명랑하던 그녀 얼굴이 순식간에 구름이 많은 날씨로 변해 버렸다. 내 솔직한 얘기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 분명하다.

“연분이 있으면 우리 다시 만나게 될 거요. 먼저 항주에 갔다 오오. 바람을 쏘이고 나면 기분이 많이 좋아질 게요.” 

천하 명승 항주(杭州)에 있는 한국 기업에 일자리를 얻어 놓았고 내일 떠나게 된단다.

며칠 전 남편의 3년제를 지냈고 이제 그녀에게는 지나간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새 생활을 맞이해야 할 마음의 자세가 필요했으며 그것은 또 시간을 수요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마시지 않은 스프라이트를 애한테 갖고 가라며 기어이 손에 쥐어 주었다. 매제의 여동생과 함께 걸어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뒤 모습이 식당 저쪽 켠으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어둠 속에서 지켜봐 주었다. 

그녀가 지나간 어두운 길에 내가 평생 잊지 못할 사랑스러운 한 여자가 내 쪽으로 걸어오는 듯한 환각이 생겨난 것이 바로 그때였다.

“오빠!”

바로 그녀였다.

방금 만났던 농민의 여자가 아니고 분명 10년 전에 만났던 그 아릿다운 소녀였다.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의 매력적인 여자, 금방 부르고 있는 듯 하더니 또 어디 갔을까? 10년 동안이나 나를 울리던 그 소녀,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어느 누구랑 살고 있는지?

나는 이제까지 세 여자를 사랑했었다.

첫사랑으로 만났던 그 죽마고우의 여자는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손목 한번 잡아 보지 못한 채 나의 거절을 당했고 춘향의 얼굴을 한 아내는 착한 마음씨로 나를 휘 잡아 대학을 무난히 마칠 수 있게 도와줬고 결혼까지 했었다.

내가 아내와 연애 중이던 대졸 2개 월 만에 그 열아홉의 소녀를 우연히 만났었다. 그 때가 바로 10년 전 9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중국의 건국일인 10월 1일은 국정 휴가로 1일밖에 허락되어 있지 않았지만 내가 근무하던 공장은 닷새 동안의 휴가를 주고 있었다. 연길에서 훈춘의 부모 집으로 돌아 와서 휴가를 보내기로 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연길-훈춘 버스는 1일에 6회 정도밖에 없었고 다니는 사람이 엄청 많아 아침 일찍 역에 나가 표를 끊어야 버스를 탈 수 있었고 그렇잖으면 기차 타고 50키로 가서 도문이란 곳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60키로 더 가야하는 시끄러움을 겪어야 했다.

지금처럼 좋은 차와 고속 도로에 1일 80회 정도 운행하고 시간도 한시간 반 안으로 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110키로를 헐망한 버스에서 세 시간 반 동안 부대껴야 하는 일이었으나 갈아타는 시끄러움 때문에 버스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았고 표를 구하기가 말째였다. 아침 5시 반에 이튿날 이후 3일 내의 표를 팔기 시작하는데 그전에 나가 줄을 서야 끊을 수 있었다.

그날 따라 아침에 5시 반이 되어서야 역에 도착했고 이미 숱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상례대로라면 표 사기를 포기했어야 했다. 요행을 바라는 심리가 발동해 앞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두루 살펴보니까 거의 다 나이 어린 학생들 같았다. 훈춘 매표구 쪽엔 훈춘 적의 학생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에라, 운수 놀음 해보자.

손을 매표구에 넣고 있는 제일 앞의 여학생과 말하고 있는 그 옆의 학생인 듯한 여자를 물고 늘어 졌다. 같은 고향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지 않느냐, 밖에 나와 있으면 서로 도와주기 해야지, 밖에 나오면 다 친구가 되고 친구 사이엔 서로 돕는 것이 옳은 일이지, 한번 도와주지 그래-대체로 그런 거였다. 한번 힐끔 곁눈 질 하던 그 여자가 말없이 내 돈을 받아 들더니 제일 앞의 여학생한테 넘겨주었고 잠깐 후에는 나한테 거스름돈과 표가 전해졌다.

“정말 감사하오,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B공장 연구소의 김영도를 찾소, 내 꼭 도와 주겠소.”

자기 표를 끊지 못했다면서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면서 나지막이

“예.”

하였다.

그때에야 그녀가 너무나도 예쁜 얼굴의 소녀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예쁠 수가 있담? 세상 살다 처음 제일 예쁜 여자를 만나기라도 한 듯 한참이나 넋을 잃고 들여다보았다. 무안했던지 이내 얼굴을 돌린 그녀가 

“나 어쩌면 좋니? 표 안 팔면 기차를 타고 가야겠다.”

하고 앞의 여자와 말하고 있었고 그러는 그녀를 일별하고 나서 나는 기숙사로 돌아 왔었다.

이튿날, 은근히 기대했었던 그녀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쁜 소녀와 더는 만나지 못하는구나 하고 며칠 동안을 잊어 버렸었다. 기묘한 일은 며칠 후에 발생했었다. 휴가를 마치고 연길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훈춘을 떠나 대략 30분 후에 중간 역인 밀강(密江)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 미모의 소녀가 짐을 잔뜩 꾸린 채 차에 탔다. 이미 자리는 다 찼었고 다행히도 이날은 사람이 많지 않아 선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앉아 있을 수 없다. 도움을 받았으면 갚아야 한다. 자리를 권하는 나를 그녀도 알아보았고 아무런 사양함이 없이 제꺽 내 자리에 앉았다.

보통 경우에 이 구간의 버스를 타면 자리가 없는 사람이 끝까지 서서 가게 되었으나 이날은 운수가 억수로 좋아 원래 내 자리의 바로 뒷자리 승객이 13키로 떨어진 다음 역에서 내려주어 나는 불과 20분만에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것도 바로 그녀 뒤에 앉게 되었다.

헐망한 버스가 좋지 않은 도로를 달리면서 많은 소음을 내었으나 우리의 대화에는 영향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 소녀는 내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대졸 후에 연길에서 내 동생 벌되는 동갑내기 친척한테서 소개받은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 친구의 여동생이었고 지금은 어느 단과대학 3학년생인데 집은 방금 차에 오르던 그 역 마을에 있었다. 그 날 연길 역에서 종착역인 훈춘 표만 팔고 중간 역에서 내리는 사람들에게 표를 팔지 않았기 때문에 기차를 탔고 버스를 갈아타는 시끄러움을 겪었다고 했다. 

묘한 일치로 이루어진 재회를 그녀도 무척 반가워하는 눈치를 보여 주었으나 연길에 도착할 때까지 이름을 끝내 알려 주지 않았다. 나의 호감을 사기에는 참으로 분별 있는 언행을 보여 주는 소녀다. 일이 그쯤까지라도 나는 오늘까지 그녀를 기억해 두지 않았을 거고 더우기 사랑하기에 이르지 않았을 거였다.

우리의 연분은 차에서 내린 후부터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 쪽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연길에 도착한 후 다른 승객들은 다 떠나갔으나 우리 둘만 운명적으로 남게 되었다. 나는 독신 생활에 필요한 살림 기구들을 수태 지고 왔었고 아까 차에 오를 때 많이 갖고 온 그녀의 짐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큼직한 칼도마와 50키로 짜리 쌀 마대, 그리고 감자 한 마대와 그리 크지 않은 장독 하나가 있었고 그녀에게는 크고 작은 보따리 여러 개에다 무엇을 포장했는지 꽤나 무거운 종이 함 하나도 있었는데 학교까지 혼자 가기엔 너무 많은 짐이었다. 걱정스러운 듯이 자꾸 내 눈치만 보고 있었고 선뜻이 도와 달라는 말을 못하는 수집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택시 하나를 불렀다. 흥정하고 나서 둘의 짐을 다 실었다. 택시 안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알아 내지 못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내 마음을 잡는 챤스가 되었다. 

매운 맛을 풍기는 예쁜 소녀를 하늘이 점지해 준거로다.  어쩔 수없이 황홀경에 빠져 버렸고 이왕이면 호감을 발전시켜 친구로 사귀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택시를 학교 대문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무거운 짐을 내가 들어다 주었다. 그것은 조선에서 들여온 고체 알콜이라는 거다. 학교 식당의 요리가 안 좋아서 그걸로 불을 지피고 별도로 요리를 해 먹는다고 한다. 여자 숙소에까지 들어다 주고 나니 땀동이가 쏟아져 내렸다. 땀을 훔칠 새도 없이 오래 있기 불편한 여자 숙소를 나와버렸다. 학교 대문까지 따라 나온 그녀가 택시를 타는 나를 향해 한 마디 했다.

“내 이름이 원맴다.”

나와 사귀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미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정도로 되어 있다. 일단 소녀의 신분을 확인했고 언젠가는 다시 재회가 이루어 질 것 같고 재회에 재회를 거듭하다보면 깊이 사귀어질 것 같은 미묘한 감정 때문에 들떠 있었던 것이고 약간 웃어 주는 것으로 답례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음다.”

“그래, 우리 후에 만나기오. 우리 공장에 놀러 오오.”

어떻게 내 기숙사까지 도착했는지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다만 연애중인 남자를 들뜨게 만들고 그녀와 사귀어지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춘향이면 그녀와 비기랴 싶었다. 

그로부터 한달 후 그녀의 편지를 받았다. 겨우 한번 말했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 주소대로 편지는 정확히 나한테 전달되었다. 같은 연길 시내에서, 그것도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편지를 보냈다는 자체가 그 무엇인가 설명하고 있었다.

편지 거래는 연말까지 계속 되다가 연하장을 보낸 뒤로 감감 무소식이 되어 버렸다. 이미 내 마음은 완전히 그녀에게 쏠려 있었고 동시에 연인이 있다는 것을 은근한 마음 비치고 있는 그녀에게 알리지 않은 것으로 하여 무척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고민하는 자체가 바로 사랑에 빠진 거였다. 이제까지 연애를 한답시고 연인을 두 번이나 만났지만 그런 격정과 흥분은 종래로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고 대학 3학년생이었던 나를 깊이 사랑하는 아내를 차마 버리지 못했기에 방황하고 고민하면서 두통증을 얻었고 늘 불면에 시달렸다.

이상하게 끊어졌던 편지가 이듬해 11월에 다시 이어지기 시작하기까지 다른 여자들도 더러 만났었고 하마터면 여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어쩔 수 없는 내키지 않은 결혼을 할 번했고 그런 경험을 얻은 뒤에는 아내만 사랑하리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소녀의 편지 세 통이 연통 날아들면서 사랑공세를 들이대는 데는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솔직한 내 마음을 고백하면서 연인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 인제는 소녀가 달아났다. 원매는 사랑하는 연인들을 헤어지게 만드는 몹쓸 여자가 되고 싶지 않고 자기가 몹쓸 여자가 된다면 평생을 마음에 멍에를 지고 사는 것이 더 괴롭다면서 차라리 마음 아픈 헤어짐을 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마지막 편지를 보내 주고는 다시 편지하지 않았었다.

나는 후회막급이었으나 이미 내친 물을 다시 걷어들일 수는 없었고 안녕히란 말도 변변히 못한 채 사라진 그녀를 더욱 사랑하기에 이르렀다. 낭만적이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참한 모습, 다정다감하고 천진한 것 같으면서도 의리 있는 소녀, 나이와 학력을 초월한 비범하면서도 어른다운 면, 이해력이 뛰어나고 솔직하며 정확한 도덕관과 인생관을 갖춘 예쁘고 강한 여자-하늘이 내려준 그런 여자를 바보같이 놓치고 말았다.

겨우 한번 졸업 때 만나 보았지만 철 같은 그녀 마음을 깨지 못하였고 나의 가족문제 때문에 여의치 않은 결혼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 편지로 그녀를 그리는 마음을 적어 보냈다. 오히려 그녀와 연애하지 않은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여자를 결혼이란 무덤 속에서 평생 괴롭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안정이 되었고 나를 깊이 사랑했던 아내와 헤어질 때도 아내를 괴롭히게 되는 일이 끝나는 것을 마음 편히 받아들이고 동시에 슬프기만 했던 원매와의 사랑을 두고 속으로 눈물을 흘렸었다.

편지 몇 통으로 주고받은 애닲은 사랑을 몇 년 동안 티각태각했던 아내와의 결혼 생활 속에서도 고이 간직했었고 국경을 넘나드는 동안까지도 언제나 그녀를 가슴속에 묻고 다녔다. 비몽사몽간이거나 피곤으로 정신이 몽롱할 때면 언제나 내 앞에 나타나

“오빠!”

하고 불러주는 원매였다. 10년 동안 꿈속에까지 나타나서 나를 격려해 주던 사랑하는 원매를 나는 그런 식으로 만나는 거였다. 

“뭘 생각하오?”

매제가 내 어깨를 잡는 바람에 깜짝 놀라 상념에서 깨어났다.

“내 이 여자를 만나고 다른 여자를 생각하게 되는구만.”

나는 농담하나 변변히 못하고 언제나 속에 있는 그대로 솔직한 말을 하지만 남들은 언제나 그것을 농담으로 알고 받아들인다.

“형님은 참 욕심도 많소. 하나면 댔지, 몇이나 요구돼서 그러는 거요? 그래 이 여자는 어떻소?”

“항주에 갔다 오라고 했소. 친구로 사귀자고 그랬지.”

“세상에 이런 재간 없는 남자가 다 있나? 남들은 만나자 바람으로 같이 잔다는데. 다 들어 온 고기를 내 뱉다니! 에-, 쯧쯧쯧! 들어가서 저녁이나 먹기오!”

“오빠는 안되겠다. 평생 홀아비로 보낼 팔자 같소.”

어느새 외사촌 여동생도 곁에 와 있었다.

“오빠는 그 알뜰한 여자까지 놓치고 언제 다시 그런 여자 만난다고 그러오? 오늘 저녁엔 우리 집에서 못 잘 줄 아오!”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는 끝내 내쫓았다. 그러는 외사촌 여동생이 귀엽기만 했고 어차피 아까 오는 차에서 외사촌 형님에게로 가려고 계획했던 일도 있었으므로 쫓겨나는 척 했다.

“그래 간다. 가고 말고! 장가가게 될 거다!”

매제 부부의 악의 없는 웃음을 남기고 경신진 뒷골목인 남하동으로 갔다.

중고차를 몇 대나 나진에 몰고 나갔는지 나도 정확한 기억은 없다. 수량이 엄청난 것은 아니지만 신차를 포함해서 2년동안 40여 대 정도는 되는 것 같았고 외갓집도 지나가는 길에 있었으므로 외갓집에서 구매한 물자들도 그 덕에 적지 않게 실어다 주었다. 새 집을 지을 때 필요한 건축 자재는 몽땅 내가 실어다 주었고 밤차를 몰고 와서는 넓은 팔간 집 마당에 세워두고 바로 옆의 형님 네 집에서 잠을 잤었다.

팔간 집 부엌에는 지금도 이전처럼 대형 솥이 걸려 있고 장작불에 지은 밥이 감칠맛을 돋구는 것은 물론 가마치(누룽지)도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그야말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지경이다. 시내의 아파트 생활 때문에 전기밥솥 밥을 먹고 있어서 어쩌다가 외갓집에 오면 먼저 누룽지부터 찾는다. 째지게 가난하던 시절은 옛날로 되었으나 재래식의 주방은 변함이 없었고 나진에서도 누룽지 뺏기를 잘하지만 아직까지 외갓집 누룽지만큼 맛있는 누룽지는 먹어 보지 못했다. 그 대형 솥은 그 부엌에 걸려 있은 지 30년이 거의 되간다. 지난 겨울에는 중고차를 밖에 세워놓고 이튿날 아침에 엔진에 넣을 물을 그 솥에 끓였었다. 수십 명이 먹을 밥을 한꺼번에 지을 수 있는 밥 짓는 솥 중에서 최고로 큰 솥이다.

오늘은 그 맛있는 누룽지보다도 형님의 이야기가 더 기대된다. 밤잠을 자고 나서 아침에 팔간 집에 달려가면 내 몫으로 누룽지를 남겨 둔 것을 큰외숙모가 주게 되기에 먹지 못할 가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걱정이라면 농망기에 들어서서 일이 바쁜 형님을 피곤하더라도 저녁 늦게까지 나한테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게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외갓집은 지금 세 집으로 분가했다. 팔간 집에는 큰 외삼촌, 뒷 집에는 작은 외삼촌, 팔간 집 옆에 외사촌 형님 이렇게 세 집인데 《어미지향(魚米之鄕)》으로 불리는 경신에서 주로 논농사를 한다. 

이상하게도 야채 농사는 잘 안되고 가축과 가금이 무리로 죽는 동네라서 개를 찾아 볼 수 없고 병으로 닭이 무리 죽음을 당하고 있어서 게사니와 오리가 많고 다른 동네처럼 돼지나 양은 구경하기 힘들었으나 엄청 큰 자연 호수가 많고 오염이 적어 양어업이 발달되었고 그 덕으로 논농사 외에 고기잡이가 주되는 부업이고 그밖에 겨울철 나무 장사와 부림 소 키우기도 괜찮은 부업이다. 

두만강 하류 지역이고 해발이 낮아 장마철만 무사히 지내면 풍년은 떼 놓은 당상이다. 해마다 세 집에서 나라에 바치는 벼만도 2만키로 정도 된다고 나진의 종업원들과 말한 적이 있는데 그네들은 눈을 화잔 등이 되게 뜨고 입을 딱 벌린 채 반나절이나 멍하니 있었었다. 먹을 것도 충분히 남겨 두고 있으나 벼 값이 형편 없어 비용을 빼고 나면 일년 동안의 소득이 얼마 되지 않았고 그래도 그 땅에 의지해 소작 짓는 것이 시내에서 실업을 밥먹듯이 당하는 우리보다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 모른다.

보통 장마철에 두만강 물이 경신 평야로 넘쳐흘러 들어서 논을 먹어 버리고 여기 저기에 널려져 있는 큼직큼직한 담수호 여러 개를 이어 놓아 바다를 방불케 하는데 갈매기들이 다 날아든다. 그래서

《갈매기가 보이는 해는 흉년 해》

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하늘이 잘 해 주지 않으면 벼이삭 패는 시간을 조절해 주지 못해 흉년 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풍년은 어쨌든 더 많았다. 흉년 해에 나라에서 구제 금을 내 주었으므로 흉년도 걱정 할 필요가 없다.

정말 살만한 때를 만났고 이제 두만강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척되면 머지 않은 앞날 경신진은 50만 인구의 국제화의 신형 도시로 될 거라고 예언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때가 오면 농민들이 땅을 내놓고 더 잘 살게 되겠는 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두만강변에서 살고 있는 형님에게서 조선의 소식을 더 많이 들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진에 가 있지만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형님에게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벌써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찾아서 들으려고 마음먹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고 충분히 기대되었다. 

형님 내외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늦장가를 들어 나의 아들애보다 한살 어린 아들애를 하나 두고 있고 부지런한 덕분에 해마다 살림살이가 윤택해지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문뜩 들어서는 나였기에 이미 습관 되어 당혹해 하지 않았고 부모님들과 나진을 문안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는 찾아 온 용의를 말했고 형님은 서두르지 않고 구수한 사투리로 말문을 열어 만족할 만큼의 이야기를 흔쾌히 들려주었다.

그 중에서 일부만 추려서 적기로 한다.

경신은 대반령을 넘어야 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는 일이 가능하다. 겨우내 한가한 농민들은 패 치기를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고개를 넘어 다니면서 적은 자금이 드는 장사를 한다. 눈에 대반령이 막혔을 때는 다니지 않지만 눈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조선과의 강변 밀수는 수십 년을 내려오면서 거의 끊어진 적이 없었다.

경신에서 두만강 위로부터 아래로 백석(白石), 서가산(西伽山), 조양(朝阳), 벌리동(玻璃洞), 회용봉(回龍峯), 구사평(九沙坪), 권하(圈河), 방천(防川) 등 마을이 강 건너 조선의 마을들을 넘겨다보고 있었고 겨울에 두 나라 어린이들이 얼음지치기에다 썰매놀이로 두만강에서 만날 때도 있었다.

형님은 지금은 두만강변으로 거의 다니지 않는다. 결혼전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휩쓸려 술도 적지않게 마셨고 가난한 살림에 술 돈이 나올 데라곤 없어서 두만강 변으로 자주 다니면서 술 돈을 마련했는데 그것도 친구들이 돈을 대어 이루어진 장사여서 남은 돈으로 술을 마시고서는 자기 앞으로 챙기는 돈도 없었다.

이제까지 농사일로 굳어진 몸이었고 체질이 좋아서 많이 마실 때 한꺼번에 50°의 술을 2리터 정도로 마실 수 있었고 병맥주도 한 박스(24병) 정도를 어렵지 않게 마시군 했다. 굉장한 술꾼이었지만 취하는 법을 몰랐고 그 엄청난 주량 때문에 고민할 때도 있었고 나중에는 위병을 얻어 지금은 한방울도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 결혼한 후로 점점 친구들과 상종이 뜸해졌으나 아직도 두만강 변을 떠나지 않은 몇몇 친구들과 드문히 만나고 있고 그들한테서 두만강변의 일들을 전해듣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20세기 50년대말 60년대초에 조선은 중국보다 더 잘 살았다. 중국에서는 옥수수대를 가루내어 만든 씹기 힘들고 잘 소화되지 않는 대식품(代食品)을 먹고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먹는 것이 걱정 없었고 두 나라가 다 배급제였지만 조선은 뭐나 다 더 풍부해져 있었다. 우리 안화동 훈춘 식구중의 최영감도 이 시기에 떡을 먹고 싶을 때마다 조선에 다녔다고 종업원들과 얘기한 적 있었다. 그 시기에는 두 나라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다녀도 단속하지 않았으며 중국의 조선족은 적지않게 조선에 나가 국적도 고쳤는데 19세기말에 황폐한 북간도에로의 1차 이주에 걸쳐 2차로 되는 이주를 한셈이다. 

조선에서는 그 윤택한 생활이 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것 같다. 2차 이주후로 국경쪽의 단속이 심해지면서 동네집 나들이 식이던 조선행이 뜸해졌고 70년대부터는 조선의 공민들이 중국에 많이 다녀갔고 중국 사람들은 생활난으로 거의 다니지 못했었다. 밀수는 그때부터 우심해졌다.

단속이 심해졌지만 두만강의 썰매 타기는 두 나라에서 다 허용했으므로 두만강은 밀수의 좋은 장소로 되었다. 서로 간단한 말을 주고 받는 일은 아무리 단속한다해도 곧잘 이루어졌다. 그 대화는 어느날 몇시에 어느 장소에서 다시 만나되 각자 준비할 물건에 대해 명세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시간에 맞춰 약속된 장소에서 썰매타기 할 때 거래가 이루어진다. 겉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는 교묘한 물물교환은 한때 제일 성행했다고 한다. 썰매를 타면서 넘어지는체 하다가 이쪽 썰매를 저쪽에 밀어보내면 저쪽 썰매가 같은 방법으로 넘어온다. 두 나라 어린이들이 갈라져 놀았기에 겉보기에는 장난치는 것 같았으나 썰매를 교환하는 것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리라고는 처음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다.

썰매는 특제한 것으로서 일반 썰매보다 두터웠는데 서랍식으로 되어 있다. 그 썰매를 집에 갖고 와서 잘 박은 못을 빼고 서랍을 열어 보면 그 안에 이미 약속한 물건들이 들어 있다. 중국에서 보내는 물건들은 주로 후래시, 건전지, 볼펜, 연필과 그밖에 빈침, 성냥, 실, 바늘 등도 있었고 중국으로 오는 물건은 주로 마른 명태와 마른 낙지였다. 그것을 중국 장사꾼들에게 되넘겼고 다음에 보낼 물건을 사고도 조금 남기게 되면 한차례의 거래가 이루어 진 것이다. 

보내는 물건과 보내 온 물건은 약속과 하나의 차이도 없이 정확히 전달 되었고 후에는 중국의 라이터와 라이터용 가스, 전기선, 전구, 비누, 사탕, 과자, 술, 담배 등과 조선의 섬유천, 숟가락과 젓가락, 고체 알콜 지어는 일제 손목시계와 일제 카세트 녹음기도 전달 되군 했다. 형님의 친구들 중 농사를 제쳐놓고 전문적으로 작은 밀수를 하는 사람도 있게 되었고 국경 지역의 어느 곳이든지 넘어가서

“아무개야, 강 건너 아무개가 왔다!”

하고 소리치면 조선의 어느 초소에서든지 다 반갑게 맞아주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조선의 군대들과 하는 밀수는 더 우심해지는 쪽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어졌다.

중국이 개방을 맞이해서 살림들이 펴이기 시작하고 조선은 반대로 의식주의 부족으로 이전보다 생활이 더 어렵게 되면서부터 이런 조그마한 밀수는 단속하지 않아도 자연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중국에는 상품이 풍부해 졌지만 조선에는 먹고 사는데 필요한 배급마저 부족한 형편으로 되었으니 말이다. 

개인적인 밀수는 자연히 근절되어가고 있었으나 국가적인 밀수는 더 큰 쪽으로 발전되어 국경 지역은 철에 따라 송이버섯, 승용차, 수산물 등이 넘어 오고 중고 트럭과 부품, 의류, 식품, 신발과 그 밖의 경공업 상품이 넘어가면서 분주해졌다. 가을철의 송이버섯과 겨울철의 승용차 밀수는 단속이 심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창궐해지기만 한다. 

특히 승용차는 내가 나진에 다니면서 길에서 몇대씩, 지어는 수십대씩 흘러다니는 걸 보았고 그 차들은 분명히 두만강쪽으로 움직였고 어떤 루트을 통해 중국에 넘어와서 팔리는 것 같았다. 우리 종업원들 중에서 전은선이 입사전에 그런 차들을 몰아주고 돈을 잘 벌었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차종을 보아도 일반차가 아닌 벤츠, 럭섯스, BMW, 고급 찦차 등으로 상당히 비싼 쪽으로 선택되어 있는 걸로 보아 장사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걸 쉽게 보아낼 수 있었다.

대반령의 샘터에서 타서 껍대기밖에 남지 않은 벤츠 차를 본 적이 있는데 지난해 여름에 추격당하다가 스스로 태워버린 거라는 소문을 들었고 넘어온 차들을 그냥 몰고 다니면 몰수당하는 것은 열에 둘째치고 지겨운 옥살이도 겪게 되므로 분해하여 콘테이너에 싣고 다른 곳으로 옮긴 후 다시 조립하여 구매자에게 넘긴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어 왔었다. 

밀수차때문에 차 수리업이 호황을 맞았는데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는 소리도 가끔 듣군 했었다. 그밖에 굴삭기도 밀수했었다. 훈춘 쪽은 두만강 하류지역이어서 강이 넓고 깊다. 이곳은 겨울철에만 차가 넘어다닐 수 있지만 두만강 상류 쪽은 바지가랭이를 걷고서도 다닐 수 있을 만큼 물이 옅었으므로 계절의 영향을 받지 않고 밀수가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중국의 중고트럭 몇대로 값진 승용차를 교환하는 큰 장사가 있는가 하면 부품과 의류, 식품 따위로 수산물을 교환하는 작은 장사도 있다고 한다. 조선 쪽에서는 주로 군대가 동원되어 국경 쪽의 밀수를 독점하다시피 했으므로 나라적으로 밀수를 하는 셈이었고 중국 쪽은 일에 익숙한 사람들만 은밀히 진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밀수가 전혀 없어진건 아니었다. 시기에 따라 상품의 밀수가 조금 있는것 외에도 가장 치를 떨게 하는 장사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처녀 장사였다.

조선의 여자를 데려다가 소개비로 3천 정도를 받고 넘겨 준다. 후에는 값이 떨어져 천원 정도로 되었고 나중엔 자연히 없어졌지만 한시기 노총각이 욱실대는 연변의 국경 마을에 큰 유혹을 갖다 주었고 새로운 사회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중국에 넘어온 조선 여자들은 겉보기엔 먹고 살기 위해 온 것이지만 사실 대부분은 놀고 먹기 좋아하는 여자 건달들이다.

중국에 가서 아무 남자에게나 의지하고 있으면 먹는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할 필요없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밀항해 들어오고 그중 대부분은 자체로 구석진 시골에 정착하지만 일부분은 사람을 넘기는 거간꾼들에게 운명을 맡긴다. 젊은 여자가 없는 조선족 시골 마을에 같은 민족의 여자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큰 유혹일까? 몇년동안 벌어 모은 돈을 다 헤쳐 여자를 산다.

내가 북경에서 가이드 할 때 식당에서 연변의 가이드 여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소학교 교사였던 그녀한테서 같이 식사하면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사촌 오빠가 돈 3천을 내고 태권도 3단의 조선 여자를 샀음다. 나이 차이도 열살 이상이고 풍속 습관이 같은 것을 내놓고 어울리는 데가 없음다. 잠자리를 같이 하는 걸 내놓고 태권도 연습을 가끔 하는 외에 집일을 전혀 하지 않으며 먹고 자기만 해서 몸이 실팍해지고 무거워져 후에는 태권도도 집어 치웠지 멈니까! 몸도 씻지 않아 집에 들어가면 이상한 냄새가 나고 오히려 오빠 혼자 살 때보다 더 더럽고 지저분해서 나는 불과 몇 분 후면 그 집에서 나와 버림다.

그래도 오빠는 어쩌다 생긴 그 색시감을 잃을 가봐 걱정하는 외에도 얼마나 지극히 보살피는 지 모름다. 마을의 파출소에서 비법으로 넘어온 그 여자를 자기 나라에 돌려 보내려고 나서면 동네 사람들이 길을 막고 그 집에 들여놓지 않는다고 함다. 어쩌다가 얻은 색신데 그 색시를 돌려 보내려면 먼저 당신들이 색시 감을 얻어 놓고 다시 오라, 그때면 내놓겠다, 그런다고 함다. 동네 사람들의 기세에 눌려 동정심까지 작용하고 보면 자기 직책을 망각한 채 되돌아간다고 함다. 몇 번 그런 일이 있었고 후에 오빠가 어디서 구해 왔는지 호적 천입증을 구해 와서 당당한 중국 호적까지 올려놓고 아들까지 낳아 가지고 살고 있지 멈니까!

그 여자의 얘기와 비슷한 일도 형님한테서 듣게 되었다. 요즘 친구한테 돈 천 원만 주기로 하고 나이든 처남의 색시 감을 얻어 주기로 했는데 여자가 며칠 내로 온다고 한다.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시골의 노총각들은 여자들의 대도시와 국외에로의 대이동으로 하여 때 이르게 늙은 얼굴이 되어가고 있었고 이제는 결혼이라는 사치를 떠나 가장 본능적인 섹스의 상대만 있게 되어도 사랑이라고 착각할 만한 지경이 되어 있고 그런 사랑이 다만 며칠이라도 유지되면 세상 더 없는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얼굴의 때 이른 주름을 펴고 다니기도 했다.

또한 조선 여자의 경우는 사랑이 없는 섹스의 대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받고 조국의 친인들을 망각한 채 본능적인 의식주에만 만족해 있는 것 같다. 애를 낳았다 해서 여자가 계속 붙어 살아갈 거라는 보장도 없는 가냘픈 인연이라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흩어져 날려 가는 짚 무더기와 같은 가족 살림을 오래 동안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상례였고 여자가 훌쩍 떠나 버리면 더군다나 야단이다.

남자의 가슴에 한이 되고 어린애로 인해 사회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그래서 국경과 가까운 두만강 옆에 정착하려는 여자들이 점점 적어지고 그까짓 돈 몇 푼 쓰는 것이 아깝지 않더라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더 큰 골치 거리가 생기게 되어 더는 조선 여자에 신경을 쓰지 않더니 요즘에는 이 장사도 거의 종적을 감추게 된 것이었다. 

그보다도 더 한심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독품 매매였다. 마약과 헤로인이 한때 말밥에 올랐었다. 보통 연길에서 장사 거래가 되는 것 같고 매매 자들은 거의 다 연길에서 잡혔고 독품의 출처를 훑어보면 대부분이 조선에 다니는 사람들한테서 나지는 거였다. 웬 영문인지 요즘 와서는 즘즉해지고 그 대신 중국에 와서 살고 있는 조선 공민이 도둑질과 살인 방화하는 소문만이 사람들을 전율케 하고 있다.

한밤중에 조선 여자가 살고 있는 노총각의 집에 찾아 들어가 파출소 행세를 하면서 여자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데려가는 사람이 나졌는가 하면 조선 공민이라는것을 뻔히 알면서도 셋방을 내주는 사람이 있고 도박판에서 소문 놓는 조선 공민에다가 살인을 저지르는 조선 공민도 나지기 시작한다. 어떤 동네에는 겨울에만 건너와 살다가 다시 돌아가면서 몇해동안 견우 직녀 생활을 하는 국제 부부도 나졌다. 연명을 위해 새끼들을 팽개치고 자기 몸만 넘어온 인간들에게서 이제 인성도 찾아볼수 없었으니 살인도 가히 이해할 만한 일이겠다.

요즘의 비법적인 월경인들로 두만강변의 단속은 더 심해져 개인적인 밀수 활동은 거의 없다시피 되어버렸고 중국의 밀수인들은 거의 다니지 않지만 강변의 중국 동네들에서는 한해동안 애 떨어지게 지어놓은 농사를 하루 밤사이에 다 잃어버리는 현상이 비일비재로 많아지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도둑은 벼 마대가 산더미처럼 쌓아져 있어도 그까짓 몇푼 안되는 물건때문에 힘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조선사람들이 밤에 강을 넘어와 훔쳐간 것으로 점찍고 있었다. 몸이 여위고 키도 작은 조선 사람들이 거의 백키로되는 벼 마대를 쥐도 새도 무르게 하루 밤에 수백수천키로 훔쳐가는 일은 이미 두만강 연안의 제일 큰 골칫거리로 되어 있다.

지난해에 두만강에서 건진 무명 시체가 몇구 되는 것을 강옆의 모래톱에 묻어 주었고 그것은 보나마나 조선 사람의 시신이다. 올해 들어 소병이 돌아 죽은 소를 두만강에 더러 처넣었는데 조선 사람들은 죽은 소고기를 베어 가져 간다. 죽은 소가 강 이쪽에 있으면 갖은 방법을 다해 가져간다고 한다. 개방의 바람을 맞아 나진에 매춘부가 적지 않게 나타난 것보다 더 엄중한 문제가 두만강 변에서 일어 나고 있는 것이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 일에 지친 형님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잠이 들어 어느새 코를 골고 있었다. 농민의 여자를 소개받아 달려온 걸음이고 그 여자에 대한 어떤 기대든지 가져본 것은 아니라지만 다른 놀라운 수확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나였다.

엄연히 세 나라가 이웃하고 있는 곳이었지만 그 중의 두 나라는 국경이라는 개념이 똑똑치 못하게 어리둥절한 래왕으로 지내고 많은 것을 생각해 주게 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두만강은 몇 번이나 우리 민족의 대 이동을 견증하게 될는지? 이미 두 번이다. 두 번 다 역사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언제부터였는지, 원인이 뭔지 모르게 또 많은 사람들이 대 이동의 거동을 보이고 있고 지금 진행하고 있다.

언제 가야 우리 민족은 이 같은 대 이동을 결속 짓겠는지…그게 언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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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사합니다. 방금전 36회까지 작업했는데, 딱 절반을 연재했네요. 실은 나진을 떠나기전에 이 글을 쓰려고 작심했고, 나진을 떠난 후 1년의 품을 들여 완성했습니다. 6년전에 다시 한번 나진에 가서 8개월간 근무하면서 다시 한번 느끼고, 지인들한테서 지금이나 20년전이나 겉모양외에는 크게 변화가 없는 나진이라고 전해들어서 다시 끄적여보는겁니다. 재주가 너무 부족하다는걸 절감하면서도 나진과 조선족을 세상에 알리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여 완결하려고 맘먹었습니다. 졸작을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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