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차를 받아야 할 버스가 넉 대나 되었다. 용철의 요구대로 어느 부분이나 다 분해해 보았고 미타한 점이 있기만 하면 무조건 해결하고야 말았다.
일 년 넘어 되는 시간 동안 간고한 실천을 통해 기사들에게 정비의 중요성을 터득시켰고 부품이 모자라지 않는 형편에서 기사들은 일정하게 정비기능이 제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장 난 부품을 고쳐 쓰려는 생각을 점차 버리고 그냥 교체하는 쪽으로 신경을 더 많이 쓰고 있었다. 시간적으로 절약이 가능하고 하루라도 더 일찍 실동(운행으로 노선에 나가는 일) 하면 부품 값이 벌어지는 거라고 우리와 같은 인식을 가지게 되는 정도로 영활해져 있었고 생활도 눈에 뜨이게 펴이고 있었는데 때가 주덕주덕한 옷을 팽개치고 괜찮은 나들이옷들도 갖추어 입고 다녔다.
운전수로 새로 세 명이 왔다. 김용원과 이득권은 버스에 붙었고 김성호는 늄창조에 들어갔다. 차장은 김명희가 새로 왔고 매점의 판매원으로 아코디언을 잘 타던 김혜영이 뽑혔다. 강경순이 차장 반장으로 되었는데 그것은 종업원 대회 때 선포한 거였다.
회의 때 나는 훈춘에 가 있었는데 운전수 반장이었던 이장근이 술 먹고 대소동을 일으킨 사건이 터졌었고 다들 내가 있었더라면 이장근을 묵사발 만들었을 거라면서 당장에서 해고된 이장근을 조금도 가엽게 여겨주지 않았다. 그날따라 대단한 술꾼인 이장근이 어디서 마셨는지 인사불성이 되어 가지고 회의 장소에 나타났다. 기사들 중에서도 이장근이 체질이 좋은 데다 술도 잘 먹었는데 술 먹는 사람이 반장을 해서 자각적인 언행으로 다른 운전수들을 잘 이끌어 나가도록 고심해온 로따의 심사와는 달리 요즘 옛 버릇이 되살아나 술을 정신없이 마셔대고 음주운전을 하고 다녔다. 음주운전을 피면해야겠다는 로따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이장근이 벌떡 일어나면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무슨 개떡같은 음주운전이야! 그 좋은 술을 왜 먹지 말라는 거야!”
“지금 선포하지만 이장근 동무는 이 시각부터 해고되었음다!”
“뭐야! 해고고 떡대가리고 사람을 가지고 놀 거야?!”
술이 어느 정도 깬 것 같다. 그리고 이제까지 품어온 무엇인가를 속에서 꺼내려 드는 기미가 보였다. 폐회를 선포하고 나가는 로따를 따라 마당까지 나와서 벽돌 조각을 주어 들었다.
“야, 운전수들아! 오늘 나와 같이 저 개새끼를 죽여 버리자!”
한 사람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이장근은 기사 중에서도 김봉식 영감, 김종형, 김중신과 단짝이 되어가지고 늘 솔 놀이를 했으며 한날 한시에 회사를 떠나자고 결의한 적이 있다는 것도 서슴없이 드러내면서 다들 합세하기를 바라는 눈길을 주었지만 응대해 주는 사람이 없다. 술 먹은 사람 같지 않았다.
“좋다! 내 혼자 한다!”
“장그이 아저씨! 왜 이럼까?”
그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던 정화가 어느 결에 이장근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 쌍 개간 나야! 손을 놔라!”
정화는 어느새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지만 죽어라 하고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모두들 이장근의 소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 멍하니 서있기만 한다. 뒤늦게 나온 비서가 뒤 수습을 했다.
“이게 멉니까? 외국인을 존중하라는 당의 방침을 철저히 관철하겠다고 하던 반장 아저씨가 이런 일을 저지르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 그 벽돌을 놓으쇼!”
이장근은 제풀에 물안고 말았다. 새로 사입은 바지에 흙을 뭉개대더니 동료들에게 이끌려 집에 돌아갔었다.
종업원들은 일요일 아침마다 생활 총화를 한다. 지난 1주일간 잘 된 일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고 잘못된 것에 대해 자아 검토를 하고 자기비판을 하는 일종의 투쟁 대회라고 나는 이해를 해왔었다.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호기심에 끌려 생활총화 노트를 훔쳐본 적이 있기 때문에 대체로 어떤 내용이라는 걸 짐작했을 뿐이다. 처녀들도 동맹조직에서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가지는 생활 총화에 참가했었는데 내용도 비슷한 거였고 대체로 정책 침투에 자아 검토 두 가지 내용인 것 같았다.
또 비사회주의적인 현상들에 대해 토론하고 반박하고 견결히 배격해야 한다는 내용의 비판적인 것들도 종종 추가되는 듯했다. 늘 하는 고질적인 나쁜 습관, 이를테면 음주 운전, 상욕과 승객과의 싸움은 그칠 줄 몰랐고 언제나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것과 같은 문제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만큼 사람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식의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고 통일의 노래를 부르던 이장근이었지만 무식한 일면만은 감추지 못하고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청계 전쟁을 치렀다는 걸 나진시의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우리 회사와 거래하는 기업소들에서는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알고 있는 얼굴들은 회사에 오기만 하면
“왜 이장근이를 가만두었소?”
하고 물어왔고 이장근이 성해있는 게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하나 지금의 나는 청계 전쟁 때보다 많이 성숙되어 있었다. 우선 나진의 반말과 상스러운 말에 습관이 되어있었고 모르는 사람이 와서 반말로 지껄이면 못 알아들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대꾸를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무식한 사람과 싸움하는 나 자신도 무식하게 되어가는 느낌이 들어 나를 자꾸 괴롭혔기 때문에 웃음으로 지나쳐 버리군 했었다.
그 경험은 내가 위홍이와 마작상을 엎어놓으면서 말싸움을 한 후부터 얻은 거였고 다시는 네 절로 자기 얼굴에 먹칠하지 말아야겠다고 단단히 다짐해두고 있는 터였다. 그날 그 장소에 있었다 해도 그냥 이장근을 말리기만 했을 거였다. 며칠 후 침울한 표정으로 나타난 이장근이와 이렇게 말했었다.
“왜 그런 못난 짓을 했을까?”
"나도 무슨 정신에 그랬는지 모르겠소. 영도 동무가 어떻게 총경리와 말해서 내가 버스를 몰 수 있게 해주오.”
이장근의 담당 차장이던 김성옥이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김정숙 사범대학에 붙어서 몇 달 만에 생활난으로 퇴학할 수밖에 없었던 성옥이는 회사의 처녀들 중 상업 전문학교를 나온 이영숙, 차춘화, 문은실네 보다도 학력이 더 높았으며 예의범절이 밝고 인물 좋은 처녀이다.
정말 나무랄 데 없는 귀여운 여자다. 집이 나진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인 군마골에 있었다. 그곳은 청계동에 속해있는 곳이지만 57호 지휘부로 들어가는 길목의 군마 부대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여서 나진에서는 군마 골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원래 근무했던 비누회사도 그 동네에 있었는데 중간에 1킬로가 넘는 밭길을 꿰질러야 집에 들어갈 수 있다.
내가 수십 번을 통근시켜 주었으므로 회사 종업원들의 집 위치를 잘 알고 있는 것은 물론 나진의 지리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나진에 오래 살던 사람도 놀라 마지않았었다. 이장근이 해고된 후에 내가 다시 나진에 갔던 날 저녁 통근차로 성옥이를 마지막으로 실어다 주었는데 마치 그런 시각을 기대했던 것처럼 청계에서 되돌아 나와 군마골로 가는 동안 이장근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나서 내가 모따에게 청들어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잠자코 운전만 했는데 비누 공장 자리를 지나 그 앞의 다리를 건너자 그녀가 엉뚱한 말을 꺼내는 거였다.
-재작년에 저 비누 공장에 다닐 때의 일임다. 저녁에 퇴근해서 다리를 건너 여기까지 왔을 때 누군지 뒤에서 쫓아옵디다.
“이 간나야, 거기 서라!”
너무 놀라 뒤를 돌아다보니 군복 입은 사람 두 명이 보였고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곧추 집으로 달려갔는데 한참 만에야 정신이 좀 듭디다. 이 밭길을 다닐 때마다 얼마나 무서운지 모름다. 지금은 그래도 이렇게 통근차가 있고 영도 선새임이 수고해 주시니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음다.
헤드라이트 빛에 주민구가 보이기 시작할 때 내가 말했다.
“장그이 아저씨 일은 우리가 옆에서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그건 장그이 아저씨가 자기 절로 해결해야 할 일이다. 나한테 그 어떤 기대도 품지 말아라…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교육받은 경력이 있고 각자 문제를 보는 관점이 똑같다고 할 수 없다. 네가 지금은 실망하겠지만 언젠가는 금방 한 내 말이 이해될 거다. 아무 잡생각 말고 잠이나 잘 자 둬라. 그래야 내일 더 잘 일하지?”
“영도 선새임, 수고 많았습니다!"
곱게 인사한 그녀가 집 앞에서 내렸고 나는 습관대로 경적을 한번 울리고 차를 돌려 몰아왔었다. 아마도 담당 차장이 얘기를 하면 들어줄 것 같아서 이장근이 부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보았다. 며칠간 아무런 소식도 없으니 이장근이 오늘 로따가 없는 수리소에 도둑고양이처럼 나타난 거였다. 대기실 쪽에 가서 직접 대면하기가 무안했던 모양인 것 같다.
이날따라 낮 시간에 내가 수리소 쪽에 어쩌다 갔고 이장근과 맞띄웠지만 뭐라 말하기 극히 어려운 감정을 겪었다. 소동만 피우지 않으면 평소엔 점잖고 일 잘하는 아저씨였다. 두 달 동안 손을 맞춰 일하면서 차대를 변모시켰고 종업원들의 적극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져 있었는데 이장근의 공로도 한몫 들어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나 한번 내친 말을 쉽게 걷어들이지 않는 로따의 불같은 성미를 아저씨도 잘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아저씨는 자기가 운전하던 213호를 만지면서 떠나기 아쉬워했다. 요즘 판 스프링이 끊어지면서 정상적인 노선 운행을 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은 것을 이상한 방법으로 끄려 한 아저씨의 행실이 추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하여튼 이 지경이면 어차피 떠나야 했다.
“다른 기업소에 가서도 여기서 일하던 것처럼 잘 하십시오!”
나는 위안의 말을 던져주고 침실로 달려들어갔다. 자동차 검차 서류를 찾아보아야 했던 것이다. 버스 넉 대를 한꺼번에 검차 받아야 했는데 다음 달 초에 검차 받으려면 이번 달에 신청서를 만들어야 한다.
신청서는 종이에다가 양식대로 줄을 긋고 글을 써넣어 자체로 만들었는데 출납 원인 차춘화가 할 줄 알았고 내가 그녀를 데리고 군수 동원부의 가서 도장을 찍어온 다음 다시 보험 회사에 가서 보험비를 내고 보험 도장을 찍어야 했고 우리 회사 도장까지 세 개의 도장이 찍혀 있어야만 차감독소에서 접수했고 매주 목요일에 우리 회사 차를 검차 받게 시간적으로도 규정이 되어있었다.
군수 동원부는 무슨 부문인지 모른다. 아마도 차량을 장악하고 있다가 전쟁 시기에 어떻게 유용하게 쓰겠는지를 연구하는 부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맞겠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여기 도장만 찍으면 되었다. 외국인을 들여놓지 않아 춘화가 들어갔다가 나왔고 보초 서는 사람에게 공민증을 검열 받았었다. 어떤 때는 일을 보는 지도원이 없어 이튿날 다시 가서야 도장을 찍어올 수 있었다. 연속 사흘간을 다녀도 도장을 못 찍을 때도 있었다.
보험 도장이 필요 없을 때 그것만으로 신청서를 차감독소에 가져가면 되었는데 요즘부터는 차량마다 보험비를 내야 하였고 보험비를 내야만이 도장을 찍어주었으며 그 도장이 없으면 차감 독소에서 신청서를 접수하지 않았다. 로따가 보험비 무는 것을 뒤로 미루자고 했기 때문에 도장 하나만 찍고는 춘화의 서랍 속에 처박아 두었다.
지난해 인명사고를 쳤던 조경화가 요즘 드문이 보였다. 사고친 지는 반년이 거의 되어가고 단련대에 들어간 지는 5개 월이 되었다. 군수동원부에 가서 도장을 찍어가지고 돌아오니 대기실 마당에 그가 서있는 것이 보였고 단련대에 가 있는 동안에 그리 야윈 것 같지 않았다.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해 왔다. 이제 한 달 정도 더 있으면 나오게 된다면서 수염이 꺼칠한 얼굴에 웃음을 담고 있었다. 그가 친 사고로 10만의 보험금이 나왔는데 전부 다 사망자 가족에게 주었고 버스도 한 달 동안 선봉 안전부에 억류되어 있다가 다른 운전수가 몰아 회사에 돌려왔었다.
2층 사무실과 늄창작업장 건설로 회사 마당은 뒤죽박죽이었고 건설자들이 70명 정도에다 회사 종업원들과 방문객들로 백여 명이 오락가락했으므로 시장판을 방불케 했다. 2층 사무실은 1층 벽체가 다 올라가고 있었고 늄창 작업장은 굴삭기가 와서 지하 3미터 정도를 파내고 있었다. 대기실 안에서는 늄창 제작이 한창이었고 석 달 동안 사람을 미치게 하던 정전도 결속되어 발전기 엔진의 요란한 동음을 듣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며칠 가지 않았다. 드문이 몇 시간 동안은 발전기를 돌려야 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돌리던 일은 지나간 옛말같이 되었다. 선봉 화력발전소에 요즘 중유가 도착해서 발전할 수 있게 되었으나 24시간 전부 다 공급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주방에 들어가니 역겨운 술 냄새가 풍기어 낯을 찡그렸다. 술 마시는 사람은 없고 차 영감이 온돌에 앉아 두 손을 사발에 담갔다 꺼냈다 한다. 알고 보니 수리소 쪽의 전기 개폐기를 다루다가 두 손을 다 데여 지금 술로 소독하는 거란다.
“참, 영감도, 어쩌다가 그런 실수까지 다 합니까?”
"글쎄…, 이번 전기는 전압이 세여-”
개폐기는 형편없는 재질의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여태까지 본 것 중에서 제일 추하게 생겼고 중국 같으면 오작이라고 아예 쓰지도 않을 거였다. 내가 수리소 작업과 발전기를 다룰 때 늘 개폐기를 만졌었는데 안전할 것 같지 않아 로따에게 바꾸자고 건의한 적 있지만 아직까지 바꾸지 않고 있었다.
수리소의 발전기는 하여평 농장에서 사갔고 늘여 놓았던 전기선을 차 영감이 수습했었다. 그런데 개폐기가 고장 나는 그때에 그 옆에 서 있었으니 사고를 안 치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 손만 데였으니 사고가 그리 큰 건 아니었지만 며칠간 아바이를 휴식하게 해야 했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는데 정화가 달려왔다.
“영도 선새임, 나 좀 봅시다!”
“뭐, 연애하자고? 오늘 연애할 시간까지는 없는데…”
“야-, 그러지 말고 빨리 좀 나오쇼-!”
약간 응석이 섞인 목소리로 안타깝게 불러댄다. 차 영감이
“허허허!”
하고 웃는 소리를 뒤에 남기고
“오늘은 어떻게 연애하자는 거야?”
하면서 나갔다.
“총경리 선새임과 말했음다. 우리 청계에 갔다 오기쇼!”
“음-, 조금 기다려라!”
차 몰고 나갈 때 꼭 한번 여쭈는 것이 습관으로 되었다. 그리고 정화가 하는 말이 진실인가를 확인하는 것도 버릇처럼 되었다. 정화는 믿을만 했지만 다른 종업원들은 거짓말을 잘 했으므로 이 시기에 이미 당사자와는 물론 지시자와 꼭 확인을 하는 것이 나의 굳어진 습관으로 되었던 것이다.
“저번에 갔던 의사 아바이네 집으로 갑시다. 또 모셔 와야겠음다!”
“아버지가 더한 모양이구나.”
“예, 간밤 한잠도 쉬지 못했음다. 빨리 가기쇼!”
정화 아버지는 원래 대외사업국 부국장이었다. 사업의 특수성으로 늘 외국인들과 만났고 출국도 자주 했는데 전공은 러시아어였다. 로따와는 오랜 친구로 사귀어 왔다. 그 때문에 의심을 받아 멀리 혁명화를 갔다 왔고 간암을 확진 받기 전에 청계동 사무장으로 몇 달간 근무한 적이 있고 약이 없어 정화가 원산 쪽으로 약 구하러 한 번 갔다온 적이 있었지만 이미 골수에 든 병을 치료해 낼 수 없었다. 지난해에 러시아에서 팩스가 왔을 때 정화 아버지가 번역해 주었고 내가 인수원을 할 때 약도 조금씩 사서 보내주군 했었다.
정화 아버지는 나진의 령도들 가운데서 보기 드문 청렴파였다. 원칙을 지키면서 외국인들과 사이좋게 지냈고 청계동에 있을 때는 수년간 해결하지 못하던 인민들의 문제도 풀어 주어 애대를 받는 청렴한 관리였다. 임시 건물에서 살 때 하루 저녁 《춘향전》을 구경하러 온 정화 아버지를 처음 만났었는데 미남형이었고 나진의 령도들 몸에서 늘 풍기는 거드름 같은 것을 좀처럼 보아낼 수 없었다.
일심 정력으로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일하는 충신형의 사람이었는데 후일 조선에 정화 아버지 같은 사람이 10%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기간에 사망한 정화 아버지 장례식에 청계동 전체 인민들이 줄을 지어 참가하고 산소도 청계동 뒷산에 정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던 데로부터 보아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존경받을 만한 분이 혁명화를 내려갔다 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한 거다. 틀림없이 사업을 잘하는 정화 아버지가 무함하는 자들의 손에 걸린 거였다. 조선에서는 운명적으로 팔자가 고쳐지는 일들이 수두룩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중에서 정화 아버지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정화는 지난해 4월에 함께 원정 차장을 하면서부터 나랑 호흡을 맞춰가면서 일해 왔다. 중국식의 요리를 잘 했고 세관 신고원의 일에다가 초청장 서류 만들기, 청년동맹 비서의 일까지 깐지게 했고 처녀들을 이끌고 하차 작업(회사에 도착한 수입품들을 부리는 일)도 잘 해냈다.
신고원 일을 볼라치면 매달 수입 계획과 수입 신고서를 작성한 후 수출입 지도국, 세관, 세관 지도 분국, 대외 상품 검사 사업소, 나진항 통행검사소, 동식물 검역소들을 뻔질나게 다니면서 서류들을 보내주고 수입품 검사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했었다. 물론 이런 일들을 하려면 승용차가 필요했는데 정화의 일이 회사의 흥망성쇠에 관계되는 일이었으므로 무조건 승차를 보장해 주었으며 내가 제일 많이 태우고 다녔다. 그런 연고로 컴퓨터 재봉사소와 인쇄 공장에도 같이 잘 다녔고(양식을 구하고 복사하기 위해) 나는 나진의 지리에 대해 누구보다도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정화가 신고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 또 있다면 수입품들의 판매 확인서와 관세지불 확인서를 작성하고 모든 서류들을 잘 보관하는 것이다. 초청장은 정말 까다로운 물건이다. 우선 신청서를 만들고 각 부서들에 보내 줘야 했는데 대외 사업국, 담당 지도원, 15호실의 사인을 받아야 하고 나중에 대외 사업국에서 내주었는데 적어도 이틀 시간이 걸렸다.
대표단 초청식으로 만드는 것인데 일행이 함께 가거나 몇 명씩 떨어져 가는 건 상관없었으나 유효 기일이 지나면 다시 만들어야 한다. 기일이 다 되었을 때 영접보고를 써서 바치는 일도 정화 몫이었다. 나에게는 형식적인 것으로 보였으나 정화는 밤을 패 가면서 열심히 쓰는 것이었다. 회사의 이름으로 늘 40명의 사람(우리 식구 포함)들이 초청장을 수요했으므로 정화의 초청장 서류 만드는 일도 작업량이 무척 많았다. 이미 여권이 나온 사람 중의 로따, 로얼, 용철, 나, 영철 5명이 《나진-선봉시 경제무역지대 거주증》을 발급받아 초청장이 필요 없이 유효기간 1년 사이의 임의의 시간에 다닐 수 있게 되어 정화의 일이 좀 덜어져 있었다.
청년동맹 비서는 지난해 여름철부터 했다. 늘 나진시 청년동맹으로 회의하러 다녔고 그 때문에 신고원 일을 세포 비서가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목요일 생활 총화를 사회했고 명절 때마다 있게 되는 공연 연습을 조직하기도 했으며 시적으로 있게 되는 청년동맹의 의무노동에 처녀들을 이끌고 참가하기도 했는데 자동차가 필요하면 내가 트럭을 몰고 나가 주었고 서비스업체 자체여서 의무 노동에 참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면 휘발유 수십 키로씩 내는 것으로 노동을 대체했는데 그것은 회사에서 무료로 지원하는 거나 다름없다.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규정 위반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외국인 차(중국 번호판이나 《외》자 달린 차)를 타고 다니는 일이었다. 단속이 아무리 심해도 교통 공구가 부족한 현실에서 부득이한 일일 수밖에 없다. 이달에 정화에게 자전거 한 대를 사주어 쓰게 했는데 3일 만의 퍼런 대낮에 인민위원회 앞의 자전거 주차장에서 도둑 맞힌 후로 막무가내로 계속 88호와 89호를 타는 수밖에 없었다.
수입품 속에는 연유 외에도 건축 재료, 자동차 부품, 늄창 재료, 가전 등이 있었는데 연유와 유리를 제외한 모든 수입품은 검사가 끝난 후에 정화가 동맹원들을 거느리고 하차 작업을 조직해 줄 때도 있었다. 힘든 것으로 슬레이트, 시멘트, 페인트, 판 스프링, 배터리, 타이어, 칼라 TV, 6m 길이의 늄 재료, 쌀 마대 등을 힘든 줄 모르고 부리고 날랐으며 하차 작업할 때 종업원들이 없으면 장마당 부근에 가서 삯 짐꾼들을 불러왔었다.
일을 잘했을 분만 아니라 남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영리한 처녀이기도 했다. 늘 나진 시내를 함께 돌았으므로 이야기할 시간이 많았었는데 순진하고 어리숙한 일면에다가 조선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다른 면도 보여 주어 나를 경악케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초창기 때
“이 총각이 허락하는 경우에만 정화 동문 연애할 수 있소.”
하고 농담하면
“그럼 영도 선새임한테 시집가야지, 책임져 줄 수 있음까?”
하고 담찬 말을 해서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고
“영도 선새임은 어째서 이혼했음까?”
하고 궁금한 것을 에돌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왔으며
“아마 이상이 맞지 않아 헤어졌겠지.”
하는 나의 대꾸에
“중국에서 사는 분들은 다 똑같이 대답을 하네.”
하고 먼저 번에 근무했던 회사의 젊은 중국 사장도 같은 대답을 하더라면서 궁금증을 풀었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기도 했었다.
“이상이 맞지 않는 사람과 산다는 것도 고통인데 애를 위해 그 고통을 계속한다는 건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고 어리석은 짓임다. 행복할 수 있다는 보장은 더 없고 예?”
하고 다시 아내와 화해할 의향을 비추는 나에게 충고 비슷한 말도 해 주었다.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상대마저 없는 나에게 정화와의 대화는 평상시에 늘 기대하는 하나의 일로 되었고 즐거운 시간으로 되었다.
내가 적어도 몇 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 속에 묻혀 버리게 하는 그녀와의 대화는 깊어지기만 하여 두 나라 청년들의 연애관, 혼인관에다 인생관을 담론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었다. 통상적인 경우에 조선 사람들은 조선족의 모든 관념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지만 정화는 이해하는 정도만이 아니었고 자기의 소박한 관념으로 부인하고 긍정하는 판단력과 인정하고 반박하는 분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게다가 불행한 사람을 동정하고 사회의 모든 불량한 현상들을 비난하는 구석까지 보여 줘 마음의 지기로 된 듯한 착각을 갖게 하는 인정 많은 여인이기도 했다.
회사의 일로 하루에 몇 시간 안 되는 수면만 보장할 뿐이면서도 집일에도 많이 신경 써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병이 이미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기어이 치료해 내겠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고집스러운 일면도 있어 그녀한테 기적이 생겨나 주었으면 하는 황당한 기대를 품어보기도 했다.
청계동 제일 구석 쪽에 있는 의사의 집은 내가 몇 번 가보아서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일제 때 지은 건물이 줄줄이 늘어선 제일 뒤쪽에 있었는데 앞으로 첫째 줄에 이미 해고당한 송정이네 집이 있고 두 번째 줄에 김영화 차장, 중간쯤에 광수네 집과 이미 해고당한 김옥화네 집이 있었고 의사네 집 바로 앞집이면 늄창조의 유영실네 집이었다. 일 년 내내 전기 공급이 거의 되지 않는 《까막동》이란 별명이 붙어 있는 동네가 바로 여기 청계동이다. 가운데의 대통로 오른쪽으로 군부대 옆에 청계동 사무실이 있고 그 옆에 김영옥 차장(이 시기에 이미 늄창조에서 일했다.)의 집이 있었는데 의사네 집은 대통로 왼쪽의 줄 집 중의 제일 뒤쪽에 있었다. 그쪽으로 들어가려면 조그마한 다리 하나를 건너야 하는데 그 다리 옆에서 내가 차 사업소의 성춘근과 대판 싸움을 했고 그것이 바로 나진을 들썽케 한 제2차 전쟁-청계 전쟁이었다.
마침 의사 영감은 집에 있었다. 《동의보감》을 열심히 읽고 자약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다면서 자기 손에서 치료받은 후의 사람은 아직까지 한 명도 죽은 이가 없으며 정화 아버지의 병도 어렵잖게 치료할 수 있다고 장담하던 의사였다. 확실히 반년 전부터 뜸을 놓기 시작해서 정화 아버지 병은 차도가 있었는데 회사의 초창기 때 몸 검사를 받아 보라는 로따의 말을 듣고 그때부터 치료를 들이댔더라면 한 달 후에 사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병원의 제한된 약으로 무료 치료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자기 절로 약을 사서 쓰고 민간에서 이름난 의사한테서 치료를 받는 것이 조선 사람들이 보통 쓰는 치료 방법인듯했다.
왕진 가방을 메고 나온 의사 영감이 차에 탔고 곧추 회사와 장마당 사이에 있는 정화 집으로 갔다. 내친 걸음이어서 빈손이지만 병문안을 해야겠기에 따라 들어갔다.
정화 아버지는 이미 글러 먹었다. 눈이 우묵하게 꺼져 들어갔고 온몸이 노랗게 된 데다가 배만 불룩하게 솟아 있었고 말에 힘이 없었다. 아까운 사람이 죽어 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워졌다. 차마 더 볼 수가 없어 나와버렸다. 의사 영감을 집에까지 태워다 줄 것을 정화와 약속하고 내를 건너 회사에 돌아왔다.
불과 백 미터 정도 되는 거리다. 로따와 정화 아버지 얘기를 했다.
“그 영감이 내 말 듣지 않더니 끝내 갈 때를 맞았구나.”
로따도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점심밥을 맛을 잃은 채 먹었다.
간신들이 욱실대는 이 나라에서 충신은 하나하나 죽어 간다. 체신국장 다음으로 내 마음을 괴롭히는 사건을 하나 또 겪고 있었다. 며칠 전 아직도 수리소 쪽에서 연유를 지급하는 위홍이와 함께 경비실에서 농업상이 남조선 간첩인데 나라적으로 불량종 강냉이를 보급시켜 양식 산량을 크게 감산시킨 사건과 그 농업상이 체포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었는데 그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다. 단일 민족이 사는 조그마한 땅이 두 나라로 분열되어 사는 것만 해도 해외에 사는 우리 동포들을 울리고 괴롭게 하는데 충신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이 아니 기막힌 일인가?!
밥을 먹고 나서 뒤숭숭한 마음을 안은 채 용철이와 함께 수리소에 갔다.
경비실 앞에 당금 도장작업을 할 모양 승용차 한 대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용철이가 침실에 들어간 후 허은희와 물어보니 아까 조경화가 어디서 몰고 왔는데 용철이가 오그라든 철판들을 펴주고 빠대(퍼티) 작업까지 해 놓았다고 했다. 어디 차를 몰아왔는데, 혹시 공짜 공사가 아닌지 의심되었지만 조경화가 오기 전까지 기다려 봐야 했다.
우리 회사를 관리하는 부문이 아주 많았었는데 그것을 턱 대고 차 수리를 무료로 해가는 현상이 비일비재로 많아서 언제나 로따에게 확인받고서야 수리해 주었는데 그것이 공짜 공사였다. 오전에 대기실 쪽에서 조경화가 로따와 얘기하는 장면도 보았으므로 아마 차 수리 얘기도 했을 거라고 짐작했으며 지금쯤은 낮잠을 자는 로따를 깨워서까지 확인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노래를 틀어놓고 운전석의 시트를 번져놓은 후 드러누웠다. 창유리를 조금 내려놓고 따뜻한 햇볕 속에 세워진 차 안에서 한잠 자들 수도 있었으나 나는 낮잠을 잘 생각은 없었고 그냥 눈을 감고 노래 감상을 했다.
몸이 떨리고 추운 감각에 눈을 떠보니 한잠 자고 났고 수리반에서는 오후 일을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종래로 낮잠을 자지 않던 나였는데 웬일인지 요즘 자꾸 피곤하기만 하고 잠이 부족해 승용차 안에서도 잠을 잘 잤고 점심밥을 먹은 뒤 등을 온돌에 붙여 놓기만 하면 깊은 잠에 빠져버리군 했다. 심상치 않았지만 잠을 깨고 보면 별 탈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었으므로 개의치 않았다. 먼저 회사 쪽에 전화를 했다.
“여보시오. 여객 수송 회사 대기실에 갑시다.”
통화 중이란다. 수동식 교환 전화는 교환원을 통해야만 걸려진다.
“여보시오. 여객 수송 회사 대기실을 좀 주우.”
한참 후 또 통화 중이란다. 경비실에서 나와서 몰고 온 승용차를 다른 곳에 옮기는 조경화에게 말을 건넸다.
“경화 아저씨, 그 차는 어디 찹니까?”
“예, 영도 선생이구먼, 차 감독소의 찹니다.”
조경화는 기사들 중에서 존대어를 제일 많이 쓰는 사람이다.
“아저씨, 차 수리는 허락 받았음까?"
“예, 예? 저…”
얼버무리고 있었고 용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형님, 저 차는 공짜 아니요?”
내가 용철이에게 물었다.
“일없다(괜찮다). 자꾸 오는 찬데…”
좀 이상한 데가 있어서 다시 수화기를 들었지만 이번에는 교환에서 받아 주지 않았다. 한창 싱갱이질 하다가 점심에 잠을 잤던 닛산을 몰고 회사에 갔다.
로따는 외근 나가고 없었다. 이모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오늘 전기가 있었으므로 저녁 전에 조경화의 도장 작업이 끝나겠지만 그전에 로따한테 확인받을 수 있을는 지가 걱정이었다. 집식구 중에서 누구든지 외근을 나가면 회사에 전화를 하지 않았고 또 전화할만한 데라곤 거의 없었으므로 로따가 중간에 전화 오리라고 기대할 수까지는 없다. 로따의 확인을 받지 못하는 형편에서 용철이가 계속하는 일을 내가 말려야 하는지 말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궁리해 보았으나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마침 이모가 환전하러 가자고 하는 바람에 89호를 몰고 창평동에 갔다. 거기에 가서 노래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정화 아버지 병치료를 하는 의사 영감을 실어다 주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창평동에서 나와 인민위원회 맞은켠의 역전 여관에도 들렸다. 다시 창평동에 갔다가 회사에 돌아오니 그때도 로따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화가 왔다 갔는지 다 물어보아도 못 보았다고 한다.
이 시간이면 조경화가 작업을 다 끝내고 돌아갔을 거였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나 버스들이 돌아오고 있었고 버스가 다 오면 용철이를 실으러 수리소에 갔다 와야 했다. 그때 마침 정화가 달려들어 왔다.
“영도 선새임-!”
이모에게 청계동에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닛산의 키를 영철이에게 주고 나서 다시 89호에 탔다. 내가 늦게 오면 영철이가 수리소에 가서 용철이를 태워 가야 했었다. 88호는 내를 건너는데 지장이 없었지만 차체가 낮은 89호는 남산 여관 쪽의 네거리에서 좌회전하고 약 100미터 정도 간 다음 다시 좌회전해서 회사에서 시내 방향으로의 반대 방향으로 장마당을 지나서야 도착하는 에돌아가는 길을 가야 한다.
의사 영감은 밖에 나와 있었다. 병이 천천히 나아질 거라면서 조수석에 탔다. 중국이나 조선이나 다 조수석을 상석으로 치부한다. 영감의 말은 어이없이 들렸다. 다 글러먹은 사람을 놓고 살려낸다니? 골려주고 싶었다.
"아바이, 밀방이 많으실 테지만 저의 밀방을 소개해 드릴가요?"
“자네 밀방이 있다고? 어디 좀 들어 봅세!”
“예, 위병과 결석을 치료하는 밀방을 드리겠습니다.”
위병 밀방은 다음과 같은 거였다. 생강, 밀가루, 콩기름, 사탕가루(설탕) 각기 200g을 준비하되 생강을 전부 잘게 썰어 둔다. 콩기름을 닦다가 먼저 생강을 넣어 닦고 밀가루와 설탕을 넣어 반죽한다. 충분히 닦은 후 꺼내서 떡처럼 된 것을 7등분 하여 매일 아침 공복에 한 알씩 먹고 아침밥을 먹지 않는다. 병이 나을 때까지 계속 만들어 먹는다.
결석 밀방은 다음과 같다. 첫서리를 맞은 감태나무 잎을 뜯어다가 말린 후 더운물에 담그고 그 물을 결석이 빠질 때까지 마신다.
“어떻습니까?”
“참 좋은 밀방을 들었네. 그래 효과는 어떤가?”
“위병을 치료해낸 친구가 있습니다. 결석은 아직까지 들어 보지 못했고요."
“음-”
“의사 아바이! 아바이 밀방을 하나 들어 보고 싶습니다. 약물 유산 밀방이 있습니까?”
“있고말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금지되어 있네. 내가 말한 후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지 말게.”
“예! 알겠습니다.”
보리 싹 한 되를 말리어 가루 낸 다음 꿀 한 병과 섞어 마신다 – 꿀 한 병이 도량형으로 얼마나 되는지를 알려 주지 않았다.
“두 분은 참 별 이야기 다 함다.”
정화가 뒤에서 말하고 있을 때 의사 영감네 집에 당도했다.
“정화야, 아버지 병은 고치지 못해. 내가 저 영감을 골려 주느라고 했던 말이니 다르게 생각 말아. 허풍쟁이잖니?”
의술은 좀 있는 듯 싶었지만 지나치게 자기 자랑을 한다. 그리고 정화 아버지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건 허풍치는 것으로밖에 받아지질 않았다. 청계동을 빠지면서 한마디 더 했다.
“안된 일이지만 아버지 뒷일 처리할 준비를 해야겠다.”
정화는 어느새 흐느끼고 있었다. 아버지가 혁명화를 내려간 뒤로 집의 세대주 역할을 해온 정화다. 자꾸 앓기만 하는 언니가 있었으나 이미 시집간 몸이고 남편이 병역 중이어서 친정에 와 있으나 집일은 나 몰라라 하였다. 어머니는 냉면을 잘 만들었는데 지난해 식당에 다니면서 우리한테도 국수를 몇 번 해 준 적이 있었고 얼마 안 되어 남편이 돌아오자 식당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남편과 정화 그리고 남동생 세 식구를 돌보고 있었다.
다른 국장들 집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나 정화네 집은 청렴한 관리의 집이어서 그런지 잘 산다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받아 보지 못했다. 정화네 가족으로부터 제일 깊은 인정미를 느끼면서 지내온 터이고 도와주고 싶었으나 그저 마음뿐이었다.
“맘껏 소리 내어 울어라. 그럼 속이 좀 풀릴 거다.”
남연숙이 소리 없이 눈물 흘리는 걸 보아 왔으나 헉헉 소리 내어 우는 조선 사람을 오늘 처음 보았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고 어느새 안주동에까지 갔다. 차 밖에서 어둠이 깔리는 밤바다를 보면서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다시 운전석에 오를 때까지도 정화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이젠 그만해라. 사람은 누구나 갈 때가 되면 가는 거다.”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오열하던 정화가 점점 울음을 그쳐가고 있었다. 그동안에 담배 한 대를 더 태웠고 연기를 빼느라 창유리를 내렸다.
저쪽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고 철썩이는 파도 소리도 들렸다. 갑자기 오래잖아 장마철에 들어선다던 차 영감의 말이 생각났다. 지난해 장마철엔 잘 해 줬는데 올해엔 어떠할는지 지내봐야 할 노릇이었다.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영도 선새임, 그냥 대기실까지 가기쇼! 거기서 집까지 걸어가겠음다!”
“그러자!”
아침에 만나면
“굿모닝!”
하고 영어로 인사하고 퇴근 때도 서로 인사치레를 잊지 않았지만 오늘만은 아무 인사 없이 회사 문 앞에서 헤어졌다. 정화네 집 앞날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발동을 끄지 않은 채로 차 안에 한참 앉아 있다가 방에서 나오던 로따가 손짓해서야 내렸다. 저녁밥을 맛있게 먹겠는지 걱정이었다. 오늘은 누룽지나 먹고 말자.
주방에서는 식사가 한창이었다. 아무 말 없이 손을 씻고 누룽지가 담긴 그릇을 찾아 들고 구석 쪽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출입문 쪽의 상에서는 술잔이 오가고 있었고 부엌과 가까운 쪽의 상은 술 마시지 않는 아낙들과 로따, 나 등 몇이 앉는 것이 습관 됐는데 누구도 나더러 밥 먹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좀 이상했다. 로따는
“어, 좋다! 어–, 좋다!”
를 연발하면서 소고기 국을 마시고 있었는데 식사가 끝날 때까지도 누룽지를 먹는 나에게 곁눈 하나 팔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나는 화면에 눈길을 주고 있을 뿐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이쪽 상은 식사가 끝나 가고 있는데 저쪽 상은 술이 계속 돌아간다.
“야! 넌 밥 안 먹니?”
이모가 물어 왔다.
“먹고 싶지 않소!”
누룽지 그릇은 다 비었다. 쟈쟈가 소고기를 도어에 감추어 가지고 나왔었는데 오랜만에 모처럼 소고기 국이었으나 입맛이 없었다.
“먹고 싶을 때 혼자 먹을게.”
그러고 나서 식사를 끝낸 로따에게 낮일을 말했다.
“너를 왜 대장을 하라 했니? 오? 수리소 쪽의 일도 네가 다 관리해야 되는 건데, 답답하다야. 그건 내놓고 하는 도둑질인데 네가 말리지 않고 누가 말리니? 엉?”
로따가 술 마시는 용철이가 들으라는 듯 높은 소리로 말하고 있었고 이모가 새침해져서 한 마디 하려는 것을 로따가 눈치 하니 이내 목구멍까지 나오는 말을 삼키는 거였다.
아아, 결국 그렇고 그런 일이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할 것도 없었다. 시집살이란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하는 생각만 했다. 용철이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뭐가 어떻든 지간에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장걸이 방에 와서 누워 버렸다. 하루 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용철이의 거동을 봐서는 로따의 지시를 받고 수리해 준 것 같았으나 로따는 그런 내색이 아니었고 오히려 나를 책망하고 있다. 나한테 지시하지 않고 용철이한테 일을 시킨 후 나와 용철이 사이에 오해가 생기게 일부러 만들어 놓은 거나 아닌지? 진정 그렇다면 로따는 지금 나에게 고험을 주고 있는 거였다. 책망하는 말투가 썩 부드러워졌지만 그보다도 더 혹독한 고험을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나의 괴팍한 성질을 고쳐주려고, 용철이와의 관계를 개선해 주려고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이라면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로따 부부가 나를 싫어하는 눈치가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아서 심히 불쾌해졌다.
그러다가 이내 내가 바라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고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제부터는 불쾌한 일을 많이 겪더라도 오히려 나에게는 더 유리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불쾌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어떤 수단과 방법 같은 것을 강구해야 하겠다는 계획이 섰고 그런 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는 더 성숙될 터지만 로따에게는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는 로따 쪽에서 더 빨리 폭발할 거라는 추측이 섰다.
나는 나대로 사회 경험을 많이 늘이고 쌓아 갈 테지만 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로따는 오히려 점점 불안해지다가 끝내는 나를 해고하고 말 테지. 내색을 내지 말고 나도 일부러 드문이 애먹이는 일도 하고 매일 일기도 적으면서 글감을 수집하려는 결심이 이날 굳어졌다.
용철은 너무 취해서 쓰러져 자고 있었다. 아직까지 식모가 나오지 않아 주방에서 얼마든지 잘 수 있었다. 혼자 닛산을 몰고 수리소에 갔고 침실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노트에 하루 일을 적기 시작했다. 로따의 눈에 적게 나기 위해서라도 이 침실에서 자는 걸 견지해야 했고 시키는 일 외에는 다른 사람의 일에도 적게 참견하고 적게 개입하려고 계획했다.
우선 하차 작업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바보스럽게 땀 동이를 쏟으면서 슬레이트 따위를 부리지 말기로 마음먹었고 특수한 일 없이는 회사 쪽에 가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다들 나진에 도착한 후 입국 도장을 찍는데 그리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난해 숙모가 한 달 동안 입국 도장을 찍지 않고 있다가 귀국할 때 벌금 문제가 발생했던 후로 내가 옆에서 다 귀띔하던 일도 이제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수리소 쪽에 파묻혀서 여러 가지 일을 만들어 하면서 차 정비와 운행만을 잘 관리해 내기로 마음먹었다. 드문 이 목욕탕에도 다니고 회사의 기사와 수리하러 오는 기사들과도 되도록이면 딱딱하게 굴지 않고 사이좋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수원을 할 때 거의 다가 외상 놀음이었다. 사회 경험이 적고 술 마시지 못했던 나는 인간관계의 처리에서 이상적이 되지 못했고 회사의 일이 더러 지장을 받을 때도 있었다. 물건을 실을 때 한 푼이라도 절약하려고 나 혼자 땀을 흘렸고 점심밥도 대충 에때우는 경우가 많았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다 하면서도 융통성 있고 영활성 있게 일하는 걸 피했었다. 이를테면 외상으로 물건 잡기를 엄청 힘들어 하고, 교두에서 두 나라 세관을 통과할 때 규정대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에 애먹는 경우가 많았다.
로얼과 자리바꿈을 한 후부터 중국 쪽이나 조선 쪽이나 일이 다 잘 풀렸는데 그건 로따가 사람을 쓸 줄 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각자 자기의 특장에 맞게 일을 했기에 거의 빈틈이 없었고 회사는 전례 없는 호황을 맞았던 것이다. 비록 자금난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잠시적인 문제였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로따가 능란한 재주를 부리기도 했기에 초창기 때보다 더 어렵던 대기실 건설 시기를 무난히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거래하는 건설업체들과 같이 종이돈 놀음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곁에서 보기만 하고 내게 차례진 일만 꾸준히 하기로 했다. 책도 꾸준히 읽기로 했다. 중국 기사들이 보다가 두고 간 것과 조선 소설들도 더러 볼만한 것이 있었다. 김일성 주석의 회억록인 《세기와 더불어》도 보았고 자동차 전기학 책도 날마다 보았다.
내가 소원하는 일이 한 가지 더 늘어나 이제는 자동차 공부와 소설 쓰기 공부를 같이 하게 되었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소원성취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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