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일요일이다. 하늘은 찌뿌둥한 채로 였고 비는 내리지 않았으나 또 내릴 것 같지도 않았다. 

햇볕이 있으면 춥지 않은 날씨겠지만 모두 든든한 옷차림을 하고 출발했다. 88호, 89호 두 대로 젊은 식구들이 비파도 관광을 떠났던 것이다. 영철이는 성능이 상대적으로 좋은 88호를 운전하고 비파도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바다를 메워 만든 약 백 미터의 돌다리를 지나 도내에 들어갔다. 아직 관광 시즌이 금방 시작된 시기라서 거의 관광객을 볼 수 없었다. 

비파도는 이름 그대로 비파처럼 생겼는데 처음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나진에 다니면서 지난해 청계 전쟁을 한 이튿날 로따 친구들과 한 번 와본 후로 두번째로 놀러 왔는데 날씨가 안 좋아 흥이 나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좀 떨어진 해변가에까지 차를 몰아갔고 갖고 온 물건들을 벌려 놓고나서 불도 지폈다. 일행으로는 로얼, 용철, 나, 영철 그리고 장송 부부와 위홍이 부부 8명이었다. 나만 혼자 권하는 술을 끝내 마셔주지 않고 콜라만 마셨으며 먹고 마신 뒤에 자동차의 오디오를 틀어 놓고 춤추고 노래하는 데까지는 괜찮았다. 

그 노래 중에 한국 노래도 있었다는 걸 고백하고 싶다.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한국 노래 테이프 때문에 차를 타던 종업원들이 긴장해 왔던 일과 차를 운전하다가 세울 때마다 노래를 스톱시키면서 함께 긴장했던 무수한 지난 일들, 그리고 88호 차로 군대에 보내는 지원 물자를 실어주었으면 하던 세포 비서와 성내면서 현철의 특집 테이프를 박살 냈던 지난 일도 상기하면서 미친 듯 춤을 추는 식구들을 떨어져 바다 옆의 바위에 앉아 잠수복을 입고 부들부들 떨면서 고기잡이하는 어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옅은 안개 속에서 이 나라 끝인 서수라 쪽도 보이였다. 거기서 머지않은 곳에서 두만강이 동해 바다에 흘러든다. 어쩌면 그 두만강 물이 내 옆에까지 흘러와 철썩일 지도 몰랐다. 두만강을 건너 여기로 다니던 할아버지네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나를 부르면서 솟구쳐 오르는듯한 환각에 잡히기도 했고 내 옆으로 다가와 힘내라고 격려해 주는듯했다. 오늘은 다만 몇 분간이라도 그네들과 따뜻한 만남을 이룰 수 있었기에 찌뿌둥한 날씨와 같이 침침하고 답답하던 속이 어느덧 풀리고 있었고 흥이 나서 사진 몇 장을 찍어 두기도 했다. 

도내에서 순라하던 군대 몇 명이 다가왔다. 아까부터 이상한 노래가 들릴 때는 가만있었는데 배경만 사진 찍는 걸 보고 가만있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필름을 몰수하겠다고 떠들어댔다. 관광지의 관리인들한테서 늘 보게 되는 생트집이고 집탈이다. 

다 취하고 있어서 내가 구슬렸다. 필름 하나를 다 찍고 이미 빼내었었다. 취한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헛 곳을 찍는 것 같은 모양을 보여준 것 같다. 트집을 잡고 걸고들면 어떤 관광객들은 시끄러움을 덜기 위해 담배와 라이터 혹은 술 한 병씩 주었는데 거기에 재미를 붙이면 우려내는 방법과 수단 같은 것을 많이 터득하고 이용하게 된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을 때 사람이 크게 나오고 배경이 적게 나오게 사진을 찍어야 하며 배경만은 찍지 못한다는 규정을 가지고 들먹이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찍지도 않은 걸 가지고 걸고드는 것은 트집이고 뭔가 챙겨 먹으려는 수작이다. 건방지고 존대어를 다 망각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처럼 보였으나 꾹 참고 얼려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부가 떠나려는 우리 차에 앉아 생떼질을 부리는 거였다. 아까 고기잡이하던 어부였는데 차 안에서 그때까지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머리에는 아직도 바다 물이 묻어 있었는데 머리칼 끝으로 방울져 떨어지고 있다. 위홍이가 지나가던 그 어부에게서 3백 원을 주고 이름이 뭔지 모를 해어 한 마리를 샀는데 불에 구워 놓고는 먹지도 않고 버려두었다. 그 3백 원을 받은 일 없다고 떼질 쓰는 거다. 한창 싱갱 이질 하다가 위홍이가 다시 2백 원을 더 주어서야 겨우 차에서 내렸다. 

필름이 없는 카메라를 들고 어부와 사진 찍었는데 어부는 잠수복 차림으로 얼굴을 가렸으며 그 당시 순라하던 군대들이 숨어서 보다가 유령같이 나타난 거다. 카메라 뚜껑을 열어 군대들에게 필름이 없는 것을 확인시키고 나서 어부가 어디로 가는 것 같더니 다시 나타나 한창 애먹였던 것이다. 

다들 아직도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흥얼대고 있었다. 로얼과 위홍이네를 싣고 영철이가 먼저 출발하고 나도 나머지 식구들을 싣고 뒤따랐다. 

돌다리를 지나 입장료 내는 데까지 가니 앞 차의 식구들과 관리인들이 서로 밀치락 거리는 것이 보였다. 차를 세워놓고 내려서 물어서야 영철이가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섬 입구를 막아 놓은 차단봉을 밀어내면서 박살냈다는 것을 알았다. 장송의 아내가 카메라를 들고 시비 따지는 사람들을 사진 찍었다. 필름이 없는 거였지만 그 때문에 사태는 우리한테 더 불리하게 되었다. 

“개 같은 새끼들이 우리나라에 와 지랄하고 머이야!” 

비파도에는 조선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다. 외국인들 중에서도 중국인이 대부분이다.

“이 새끼들을 거저 대가리를 쪼개 놓고 말아라!” 

“쌍 간나들이 어디 와서 개 짓들이야!” 

이게 어디 《예의지국》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들어야 하는 소리인가?! 잘못한 데 대해 무조건 적대시하는 정경에 많이 맞띄웠지만 오늘처럼 경험하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한 사람이 잽싸게 카메라를 채 갔고 로얼과 내가 푹 취한 용철이와 위홍이가 시비 캐려는 걸 겨우 말려서 차에 앉혔다. 

30분 정도 줄 욕을 퍼붓던 사람들이 로얼의 여권과 카메라 그리고 차 두 대를 억류하고 여덟 명을 도보로 3키로쯤 떨어진 초소 앞에까지 데려갔다. 도로 옆에 앉아서 담배 피우려는 것도 제지당했다. 꼭 마치 죄인 다루듯 했다. 

초소장이 나올 때까지 앉게는 했으나 간단한 대화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로얼과 영철이가 초소장과 반갑게 인사했고 약 5분 후에 우리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초소장은 군수 물자 증표로 늘 우리 회사의 물자를 사가던 얼굴이었는데 거래를 오래 했던 연고로 꽤나 친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 키는 돌려주었으나 여권과 카메라는 끝내 주지 않았다. 나와 영철이가 식구들을 기다리게 하고 다시 섬 입구 쪽으로 걸어가 차를 몰아왔다. 술이 잘 된 식구들은 더 빠른 길인 선봉 쪽 도로 켠으로 움직이지 못했고 이왕이면 창진 쪽으로 해서 추진을 거쳐 동명동에 이르는 길로 한 번 가보자고 누가 제의해서 그쪽으로 출발했다. 

창진에는 조선 최대의 물고기 가공 단지가 한창 건설 중이다. 초소 쪽에서 조금 더 가니 건물이 많이 보였고 이내 오불꼬불한 해안 도로에 접어들었다. 약간 경사진 고갯길같이 기억되는데 그때 굽이를 돌면서 비파도 쪽을 다시 보니 거기에서 보이는 비파도가 정말로 바다 쪽에 좁은 끝을 두고 누워 있는 비파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초여름이어서 앙상한 나무 가지들로 살벌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여름의 비파도가 관광지로서는 훌륭한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진에 돌아왔다. 차체가 안 좋아서 88호보다 한 10분 정도 늦게 도착한 것 같은데 동명동 산 위에서 나진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필름이 없어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비파도 관광 후의 이튿날 여권을 먼저 찾고 카메라는 그로부터 3일 후에 찾아왔었다. 일제 니콘이었는데 교통지대 사고 지도원 길영에게서 로얼이 빌려 온 거였다. 일본에 있는 친척이 500$짜리로 보내 준 거였는데 비싼 물건을 빌려줄 정도로 버스 운행 업종 때문에 사이좋게 보내고 있는 터이다. 지난해 88호를 달았던 도요다가 비파도 가는 길에 사고 친 것을 알려 주었고 우리 회사에서 적지 않은 부품들을 공짜로 많이 가져간 이었다. 

지난 겨울에 내가 스케이트를 사다 준 적이 있다. 길영 지도원의 작은 딸이 경기에 참가하는 데 좋은 스케이트가 없어 로따에게 부탁했었고 자연히 인수원이었던 내가 주문해서 샀었다. 그런데 그때 그 스케이트를 잃어버릴 번 했었다. 회사 식구들에게 준비한 500원어치의 약과 스케이트를 택시에 두고 내렸던 것이다. 그날 그 택시로 장령자 통상구에 러시아 유조차 마중을 갔고 거기서 짐을 옮겨 싣고 나진까지 오려고 계획했었는데 택시에서 내리면서 깜박했고 나진에 도착한 후에야 발견했었다. 

인구가 20만이 안되는 자그마한 훈춘시에 2천 대 넘어 되는 택시가 있다. 내가 탔던 택시는 그 시기에 택시로는 서너 대밖에 남지 않은 체코제 스코다였는데 찾기 쉬웠다. 택시를 한 적이 있는 내 동생이 수소문하여 택시 주인을 찾았고 직접 집까지 방문 가서야 잃었던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로따가 사다 주라고 한 걸 내 손으로 직접 길영에게 전해 주니 그 인사를 내가 받았고 로따에게 인사하라고 하는 나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면서 그 후부터는 나만 찾아다녔다. 

교통 지대는 안전부 소속이었는데 안전부 차들에 필요한 부품과 휘발유를 내 손을 거쳐 얻어 가려고 한 것이다. 성화에 못 이겨 로따의 허락을 받은 뒤 라이닝과 엔진 부품 그리고 휘발유도 더러 주었다. 

비파도 사건이 있은 후부터 로따는 일체 공짜 공사를 중지하려 했고 첫 번째 수단으로 보위부와 안전부에 매달 100키로짜리 휘발유 전표를 무상으로 주고 그 100키로 외는 전부 다 돈을 받기로 했다. 공짜로 가져가는 휘발유가 횟수가 많으면 매달 한 집에 200킬로도 넘어갔으므로 회사로 놓고 말할 때 이 같은 조치는 오히려 더 많은 낭비를 막을 수 있었으나 보위부와 안전부에서는 그 내속을 모르고 감사하다는 말까지 전해 왔었다. 그 뒤로는 부품과 건축 자재의 공짜 놀이를 견결히 막을 기세를 보여 주었는데 식구들이 다 합심했기 때문에 초창기 때 달마다 인민폐 수천 원씩 나가던 부품의 손실도 없어지게 되었다. 

비파도 사건으로부터 길영 지도원의 스케이트를 생각해 냈고 또 소학교 때 유난히 스케이트 타기를 즐겼던 내가 비싼 중국제를 사지 못하고 밀수로 들어온 값싼 조선산  스케이트를 사서 타던 일도 기억해 내었다. 경기 연습장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강이나 호수에서 혼자 연습해서 경기에 참가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지만 질 좋은 중국산 스케이트를 끝내 사지 못했고 조선 스케이트를 타고 경기에 참가하긴 했지만 재질이 안 좋은 날이 아무리 잘 갈아도 서지 않아서 미끌어 넘어지는 바람에 등수에 오르지 못했었다. 

내가 사다 준 스케이트로 길영의 작은 딸은 나진시 적으로 2등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조선의 새 세대는 나의 20년 전보다 호강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외에 친척이 있는 사람 중에서 일본의 친척이 물건 보내주는 집은 잘살고 있었고 그다음으로 중국에 친척이 있거나 중국 투자자들과 거래가 있어 공짜가 생기는 집이 잘 살고 있다. 

길영 지도원은 행운스럽게도 이 두 가지를 겸비하고 있었다. 잘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 중에는 또 비사회주의 현상이라면서 죽어라 하고 막는 개인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챙기기를 잘하는 관리들도 더러 있다. 개인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 보위부와 안전부에 크나큰 빽이 있어 들어 내놓고는 하지 않아도 어느 회사의 이름을 내걸고 무난히 돈을 벌고 있었고 어떤 관리들은 투자자들의 기름을 짜내고 있는 듯했다. 

여기서 박정희 암살조 일행으로 태국에 나간 적이 있는 제씨를 소개한다. 

제씨가 박정희 암살조에 들어 태국까지 갔다 왔다는 걸 누구한테서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4천 불 내고 중국 트럭을 사 가지고 지대 밖에서 닥치는 대로 물건을 실어다가 지대 안의 중국 사람들에게 넘겼는데 빽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았다. 로따와는 오래전부터 거래해 온 것 같았고 봄날의 어느 날 내가 그 차를 수리해 주면서 참으로 인간다운 사람이고 어지간한 사람들을 전율케 하는 단단한 몸매의 사람이라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 

그날은 눈이 조금씩 내리고 내리자마자 녹아 버리던 봄날로 기억된다. 겉포장이 형편없는 5톤 급 중국산 트럭이 《함북-XX-XXX 》번호를 달고 대기실 마당에 들어섰다. 저녁때였는데 차도 고장이 있고 어디 주차할 데가 없어 왔다고 하면서 제씨는 로따와 반갑게 인사했고 로따는 내일 첫 시간에 차를 수리해 주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때는 대기실 부대 건물들을 금방 짓기 시작했을 때였는데 처음에 복잡한 마당에 들어오려는 그 차를 내가 막았고 제씨가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로따한테로 찾아 들어갔었다. 

잘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진 사람들처럼 첫 마디에 건방진 욕지거리도 없는 예절스러운 인물이다. 차에서 내리는 동작도 날래였는데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튿날 차 수리에 달라붙은 나랑 아침 술을 마신 취김으로 여러 가지 얘기들을 했다. 

로따를 몇 년 전부터 형님이라고 불러왔는데 두 사람이 거래하면서 다 같이 잘 벌었다, 엊저녁 주정꾼들이 싸움했는데 그까짓 싸움엔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싣고 온 잣을 어디 팔 데가 없다, 이 차를 팔고 새 차를 사야겠다, 나진까지 와서 돈이 떨어질 때가 있으면 형님한테서 얼마라도 받아서 쓴다 등등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다. 

엊저녁에 이미 어떤 인물이라는 걸 들어서 알고 있었고 박정희 암살조의 일이 궁금해서 얘기해 주었으면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고, 한 자동차나 되는 잣을 싣고 후창 세관을 어떻게 통과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보위부 리스트에 적혀 있을 그의 이름으로 후창 세관을 쉽게 통과할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해보았었다. 많이 다녀서 경험도 물론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품이 당장 없어서 수리는 시원치 않았지만 예의 있는 인사치레를 잊지 않고 했다. 

어느덧 담배도 피우지 않는 그와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 뒤로는 다시 보지 못했다. 로따와 약간 풋 면목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거의 다가 우리 밥상에 끼어들어 주지 않는 술도 찾아 마시고 밥도 배 터지게 먹고 떠나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로따의 침실에 잠간 들렸을 뿐이고 차 수리도 마당밖에 나와서 하면서 얼굴 자랑을 하지 않았다. 

차 정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 주었을 때 그런 말을 처음 들어 본다면서 고맙게 잘 들어두고 차를 잘 관리해야겠는데 많이 도와 달라는 청도 들었었다. 지금은 그 얼굴이 잘 기억되지 않지만 로따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처지라면 박정희 암살조에 뽑혔을 때의 나이가 열몇 살 때였겠다는 계산을 하면서 그 얼굴을 그려본다. 

워터 펌프 리테이너 고장으로 물이 좀 씩 새는 차에 앉아 떠나면서 손을 저어 주던 얼굴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희미한 제씨의 이야기가 나에게는 물론 독자 여러분들께도 충격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파도 사건 이후부터 식구들과 함께 하는 관광이 기대되지 않았다. 용철이와 장송이, 위홍이는 체질이 점점 못해져 가는지 조금의 음주로도 곧잘 취했고, 취하고 나면 일을 치기 쉽기 때문이었다. 장송이는 취한 후 조금 주정을 부린 후에 이내 잠들었지만 용철이와 위홍이는 시한 작탄이나 다름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과연 내 추측대로 이 두 사람이 한 건씩 저질렀는데 그걸 보기로 하자. 

용철이는 앞에서 언급한 적 있는 음주 운전으로 또 한 번 단속되어 면허증을 몰수당했고 며칠 후에 찾아왔다. 다행히도 몰수당한 차도 면허증과 함께 찾아왔다. 자기 통제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내가 하고 있는 차대 대장을 하지 못해 시샘을 하고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일이 이해되지 않는 사건이다. 술 취한 후 항상 나와 걸고들까 하려는 것도 그한테는 있을만한 일이겠다고 생각되었다. 

위홍이는 쟈쟈와 함께 노래방에 갔다. 호텔 중에서 남산 호텔과 나진 호텔에 노래방이 있었고 한국 노래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 노래들은 다 갖추어져 있는 외에 팁 받지 않는 아가씨들이 있었다. 로따가 밤 깊도록 돌아오지 않는 두 사람 때문에 속 태우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남산 호텔 노래방에 와서 두 사람을 데려가라는 전화였다. 두 사람은 녹초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술값은 6천으로 나와 있었는데 할인해 달라고 시비 붙었다가 돈이 모자라서 전화번호를 댄 모양이었다.로따 몸에 지니고 간 돈이 없어 여권을 저당 잡히고 사람을 먼저 데려오고 나서 영철이가 다시 가서 여권을 찾아왔다. 

이 사건은 내가 나진에 없을 때 생긴 거였는데 누구한테서 얻어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두 철부지가 저지른 일 때문에 로따 얼굴에 먹칠이 마를 새 없었고 사업하는 데도 일정한 영향이 있었지만 그러는 위홍이를 좀처럼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이 로따의 입장이라면 입장이겠다. 사업 때문에 부부 동반으로 나진에 나가 있으니 로모와 아들 둘은 위홍의 어머니가 보고 있었고 결국은 두 집에서 애들을 바꿔 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경비실을 쓰기 시작한 후로 거기서 차장 처녀들과 치근거리는 위홍이를 두고 설화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고 로따는 차장 처녀들과 비슷한 나이에 병으로 죽은 여동생 때문에 위홍이가 아픈 마음을 자기 절로 위안하는 것이라며 내버려 둔 것 같다. 패치기로 딴 돈으로 차장들에게 먹거리를 사주고 저녁에 새로 온 경비와 맥주도 마시는 차원으로 위홍의 행실이 승급했으나 이미 말려 내기는 다 글러 먹었다. 

하루 종일 보이지 않다가도 거래하는 기업소의 차에 녹초로 돌아온 적도 몇 번 있었는데 보나 마나 금지되어 있는 조선 사람들과의 동석 식사를 하고 주정을 하지 않아도 취해서 형편없이 된 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이 30이 된 사람이 외삼촌의 체면도 알아봐 줘야 하겠는데 이건 너무 철없는 행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위홍이를 아껴주는 로따 때문에 나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경험을 하기까지 했다. 

요즘 들어 늘 피곤해 하고 깊은 낮잠을 자는 나를 두고 외숙모는 뭔가 몸보신해 줘야겠다고 로따와 청들었었는데 오래도록 아무런 기미도 보여주지 않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장마당에서 어른의 손바닥 두 개 크기만 한 거북이 몇 마리를 사온 적이 있었는데 그 피를 받아서 다 위홍에게 먹이는 것이었다. 

외숙모는 그날 저녁 잠잘 때까지도 속이 내려가지 않는지 계속 나를 위안해 주었다. 그날 주방에서 외삼촌 부부와 처음 같이 잤었다. 식사 후에 얘기를 하다 보니까 늦어지고 늦은 시간에 수리소 쪽에 가는 일이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거북이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외숙모는 나에게 먹이고 싶었지만 로따가 옆에 있어서 그러지 못했고 일없이 빈둥거리는 위홍이 먹은 것을 두고 아까워하는 눈치였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피를 받아먹고 난 뒤의 거북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기억이 남지 않은 걸로 보아 그 문제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너무 신경질적으로 문제를 보는 외숙모를 도리어 내가 위안하느라고 대학 다닐 때 있었던 불가사의한 옛일들을 새벽까지 들려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그 일을 다시 돌이켜보면 위홍의 철부지 같은 행실을 묵과하면서도 지극한 외삼촌의 사랑을 몰부은 로따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그 사랑을 일 잘하고 말썽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보답해야 할 위홍이었으나 웬 영문인지 나의 기억에는 외삼촌을 무던히 속 태운 외조카로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로따는 능란한 재주를 부리는 좋은 찬스를 창조해냈다. 

비파도 사건 때문에 오히려 불필요한 낭비를 막는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었다. 이건 옆에서 보는 우리 식구들이 다 같이 느끼고 있는 점이었지만 로따는 의식적으로 잘 된 일이라는 것을 심어주고 있는 듯했다. 비파도 사건의 도화선을 당긴 영철이를 자기 자신이 욕하지 않고 간접적인 에돌림으로 칭찬까지 해주고 있다는 것을 다른 식구들은 느끼지 못해도 나한테만은 알아들으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으며 수일이 되도록 계속한 그런 말투는 나에게 위홍이까지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이 들렸다. 

내가 너무 신경질적이 아닌가 하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기도 하였지만 나를 해고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까지 죽 이어놓고 분석해 보면 나의 추측도 거의 맞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그런 눈총과 등쌀을 받으면서 용케도 이듬해 3월까지 버틴 내가 로따한테는 더없이 큰 부담거리였다는 것을 지금 새삼스레 느끼고 있다. 

나에게도 새 아이디어가 생겼다. 위홍이를 건드려서 로따의 눈치가 어떻겠는지 한 번 보려는 것이었다. 참으로 유혹이 짙은 아이디어였는데 독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워할지 모르나 나는 진짜로 그런 기회를 만들었고 나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아직 이용해야만 하는 로따의 처지를 읽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지 아니했고 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보험비 사건과 중독 사건, 그리고 내가 계획적으로 진행한 오일 사건과 주유기 사건은 이 점을 설명해 줄 것이다. 

그러나 사업 상의 일에 가족 관념의 개인적인 감정까지 개입시킨 로따의 본의를 오늘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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