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이 며칠 남지 않았고 바다 옆이어서 그런지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한다. 

쟈쟈가 운전하던 차가 팔렸다. 이제는 디젤 엔진으로 10톤을 실을 수 있는 새차를 사 가지고 물자 운수를 보장해야겠다면서 로따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차를 사는 일은 쟈쟈 아버지가 맡기로 했다. 

중국 쪽에서는 흉흉한 소식만 전해져올 뿐이었다. 연변 전 지역이 수재를 입었고 식량 감산은 정해놓은 거란다. 손기사가 슬레이트를 싣고 나진에 왔는데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2년째 나진항을 통해 중국의 목편을 일본에 수출하고 있다. 목편이라면 심산 속에서 찍어낸 나무를 작은 조각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수입한 후 다시 가루내고 가공을 거쳐 질 좋은 가구 재료를 만든다고 한다. 하루에 수십 대씩 차당 12톤 정도였으니 매일 수백 톤을 훈춘에서 나진항까지 나르고 있었는데 여기에 동원된 차량만 해도 백여 대가 되는 상 싶었다. 

요즘은 나진항에 부릴 자리마저 없고 일본에서 배가 와서 목편을 한번 실어간 후에야 다시 운반 작업이 계속될 거란다. 손기사도 그 백여 대 중의 한사람이었고 이미 등록되어 있는 백여 명의 기사들은 초청장을 따로 하지 않아도 원정을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물자를 싣는 우리한테도 더러 편리한 점이 있다. 목편 차량을 운전하던 기사들은 요즘 한가하기 짝이 없었고 초청장이 없이도 다닐 수 있는 편리한 조건때문에 다른 일감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일감을 못찾은 기사들은 카지노장을 찾지 않으면 여자를 찾는다. 비파도 쪽에 가서 돈을 수천 원(인민폐) 잃은 기사가 있는가 하면 오입질도 상당히 보편화되고 있는 모양이다. 

나진으로 다니는 기사들은 고생을 밥 먹듯이 한다. 눈이 많이 내린 후면 대반령과 저술령이 문제였고 아침 첫 시각에 국경을 통과하고 저녁 퇴근시간 전에 다시 훈춘에 돌아 가야만이 이튿날 일감을 받을 수 있었기에 나진에서 하차하는 시간에 점심 밥도 대충 먹고 다녔다. 

그러다가 어떤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저녁에 나진에서 묵기도 한다. 피곤하여 잠을 청하는 기사가 있는가 하면 자기네끼리 도박노는 사람들, 그리고 카지노장에 가는 사람 외의 나머지는 나진거리를 누비고 다닌다. 

꽃제비들로부터 여자를 소개받고 그렇잖으면 어떤 수단을 쓰던지 여자를 반드시 찾아내고야 만다. 어떤 기사는 파트너가 정해져 있는상 싶었다. 하루밤에 내화 천 원 정도라니 기사들은 값이 싸다고 했고 조선 여자들을 놓고 말할 때는 엄청난 돈이었으니 거래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떤 기사들은 조선 여자와 자던 일을 자랑스레 늘여놓기도 했다. 단속이 심한 데도 돈이 벌어지는 그 구석을 여자들은 용케 찾아냈고 기사들은 장소에 구애없이 차안에서도 일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기사는 현장에서 잡혀 벌금 외에도 여권에 검은 도장이 찍히고 3개월간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중국도 문제였다. 목편을 일본에 수출하는 자체가 나라 자원을 낭비하고 후세에 책임지지 않는 행위다. 일본은 자기 나라 자원을 아끼고 있었고 중국의 나무를 헐 값으로 사다가 자기네 장사를 하고 있다. 목편 수출을 종국적으로 따져 볼 때 중국은 현재 돈을 벌고 있는듯 하지만 앞으로 자원고갈로 엄청난 낭비와 손해를 볼 것이 뻔했고 일본은 값싼 원료수입으로 자기의 자원을 남기고도 돈을 벌 수 있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셈이다. 

나진항을 이용했기에 조선에서도 돈을 벌 수 있는 노릇이고 러시아의 항구를 이용하여 일본에 수출하고 있기에 중국의 목재 자원은 더 많은 낭비를 초래하고 있었다. 손기사도 이 일을 못내 안타까워하고 있다. 목편을 나진항에 실어 날랐고 러시아쪽으로도 실어간적 있는 그였으니 말이다. 일본인은 지금도 중국에 대한 자원 약탈은 멈추지 않았다면서 분개하여 말했고 수출을 끊지 않는 데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지난해 5월 원정 국제무역시장이 문을 닫고 난 뒤 원정으로 다니던 중국 장사꾼들이 적어지고 나진으로 다니던 중국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적어졌다. 창주의 222호는 원래 중국 장사꾼들을 실을 목적으로 노선을 개척한 것인데 목편을 실은 차가 많이 다녔기에 손님을 뺏겼으므로 부득이 취소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식구들도 목편차를 많이 이용했었다. 어떤 기사들은 밤에 우리 회사 앞마당에다 차를 세워두고 우리 숙소에서 발편잠을 자고 가기도 했다. 원정까지는 도착했으나 퇴근시간이 지나버려 여관이 없는 그 곳에서 운전실안의 침대에 누어 하루밤을 지내고 이튿날에 국경을 넘는 일도 수없이 겪고 있다. 어쨌든 목편 운반차는 두 나라 국경에서 볼수 있는 또 하나의 풍경으로 나의 기억속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철이가 외삼촌을 보고 창고바닥에 판자를 펴달라고 청들었고 곁들여 부품을 진열할수 있게 시렁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재료는 걱정 없었다. 늄창일로 적지 않은 유리가 나갔고 유리를 포장했던 판자와 건설에서 쓰고 남은 못이면 재료는 충분했으나 톱이 없었다. 장마당에 다녀온 외삼촌이 톱을 사가지고 왔는데 잘 갈아서 쓸수 있게 만들었다. 이틀동안 시렁을 네개 만들고 바닥도 잘 펴놓았다. 조수로 내가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외삼촌이 장마당에 갔을 때 이상한 일을 당했다면서 말해 주어서 나도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정화의 일이 너무 많아져 요즘 강경순이 새로 신고원이 되었다. 마침 살 것도 있고 해서 경순이와 함께 장마당에 걸어 내려갔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허름한 작업복 차림이었고 어찌보면 나진 사람의 옷차림이었는데 셔츠의 단추도 채우지 않고 다녔다. 장마당 입구에서 경순이는 순찰대 쪽으로 에돌아 가고 나는 그냥 들어갔다. 학생인 듯한 두 명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단추를 채우시오. 빠찌를 달고 들어가시오.” 

알고 보니 빠찌 검열이었다. 초상화 검열을 한다는 걸 이미전에 알았고 여름에 여자들이 바지 입고 자전거 타는 것을 단속하는 일도 알고 있었는데 빠찌 검열에는 내가 직접 걸려들고만 것이다. 

사람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초상이 있는 빠찌를 가슴에 달고 다녔지만 우리한테는 차례지지 않았고 빠찌를 달고 있지 않는 나를 두 학생이 내국인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중국어로 몇마디 의아하다는 말을 번져대자 그제야 두 학생은 나를 놓아주었다. 옷 단추를 잘 채워두라는 말을 잊지 않고 하면서. 좀 더 들어가서 이미 들어와 있는 경순이를 만났다. 오늘 옷을 갈아입으면서 깜박 잊고 달지 않았는데 그래서 에돌아 들어왔다는 거였다. 일을 다 보고나서 아예 정화네 집 쪽으로 에돌아 오는 길을 택했다. 

8일 날, 나는 외삼촌네 식구 네 명과 비파도 관광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물개 가족이 아무 걱정없이 살고있는 모습을 보았고 맛있는 섭죽을 먹었다. 관광시즌이라 관광객이 많이 몰려와 있었고 어떤 관광객은 바다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낚시질 구경도 하고 잠수하면서 고기잡는 조선 어부의 모습도 보았다. 나진에 있던 시간동안 유일하게 순 관광으로 보낸 하루였다. 

아침부터 잔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원정 종합검사장의 새 청사를 봄철부터 짓기 시작하여 지금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는데 굴삭기와 불도저 같은 중기계들이 쓰는 연료로 디젤유가 떨어졌다면서 원정세관에서 지원을 요청해 왔다. 우리한테 유조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저 이미 사놓은 경유를 원정까지 실어다 달라는 부탁뿐이었다. 

이런 일에는 무조건 내가 《당선》된다. 유조차를 내 전용차로 만들어놓은 듯한 기분이 드는 일이 한두 번만이 아니다. 경유 2t을 싣고 원정까지 갔고 돌아올 때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금방 원정 고개 정상쪽에 도착했는데 차사업소의 버스 한대가 서있는 것이 보이고 손짓하는 기사도 보였다. 관광차로 동원 되었는데 휘발유가 떨어져 나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 유조차는 휘발유 엔진이었는데 왕복만 생각하고 조금 넣고 왔으므로 빌려 주기에는 양이 많지 못했다. 겨우 한 바게쯔(7키로 정도) 뽑아 주고는 길을 재촉했다. 

저술령을 지나니 천둥이 치고 우뢰가 울면서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장마철인 6∼7월에는 크게 내리지 않던 비가 요즘 부지런히 내리고 며칠에 한 번씩 소낙비도 퍼붓는 거다. 선봉읍을 지나 선봉 변두리인 연유상사쪽에 가까스로 도착했을 때였다. 앞에 숱한 차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처음엔 무슨 사고가 생긴 모양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교통 안전원이 아닌 안전부 사람들이 차 단속을 나온 거였다. 이 유조차는 쟈쟈가 운전할 때 어느 한번 동명동 태양상 앞에서 연유가 떨어져 세워 둔적이 있다. 그날 같이 온 중고차(판매용) 한대가 몇미터 사이 두고 같이 세워져 있었는데 거기서 휘발유를 뽑아 유조차의 연유탱크에 넣는 동안 유조차에 두었던 쟈쟈의 손가방을 도둑 맞혔다. 그 안에는 쟈쟈의 모든 증명서와 얼마간의 돈 그리고 유조차의 행차증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유조차는 번호판만 달려 있을 뿐 내가 무면허로 운전하는 불법차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유조차를 선봉 안전부에 세워두고 선봉호텔까지 걸어가서 나진에 전화를 걸었다. 약 30분후 영철이가 89호를 몰고 왔고 그 차에 앉아 나진에 돌아왔다. 며칠 후에야 유조차를 찾아가라는 기별이 왔다. 나는 운전면허가 B급인데 행차증과 함께 몇달 전에 나진에서 잃어버렸고 지금 수속 중이라고 둘러 대고 차를 몰아내왔다. 

이번에는 다행히 있을 것이 다 있었다. 갔던 걸음에 선봉 연유상사에 들려 휘발유를 사서 싣고 돌아왔었다. 나진에 있으면서 생각지도 않던 일을 겪은 적이 부지기수로 많았는데 쟈쟈가 갖고 다니던 손가방을 도둑 맞힌 후로 로얼도 한번 도둑 맞혔던 일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모르는 사이에 도난 당한 쟈쟈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강탈당했다고 함이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 날 쟈쟈의 차에 배터리와 자동차 부품을 만재하고 청학 고개를 넘고 있었다. 청학 고개는 원정으로부터 나진에 이르는 다섯 고개 가운데서 습격조의 세례를 가장 많이 받는 곳이었다. 컨테이너의 자물쇠를 박살내고 천을 필채로 훔치는가 하면 아무 차에나 올라타고 닥치는 대로 부리었는데 지어는 오일을 만재한 차에 올라 큰 도람통을 여러개 부린 적도 있다. 습격조는 만만치 않은 사람들 10여명으로 조직된 것 같았다. 비포장이고 오불꼬불한 청학 고개의 굽이마다에 망을 보는 사람이 있었고 기회만 있으면 반드시 성사하여 나진으로 다니는 중국 기사들을 무던히도 괴롭혔다. 

어느 한번은 로따가 쟈쟈와 같이 나진으로 오던 중 차에 올라 부품을 부리는 습격조와 맞다 들었다. 차를 세우자마자 부린 것을 안고 산쪽으로 정신 없이 도망치더란다. 로따가 불러 세우고 중국 돈 10원을 주면서 도로 찾았다고 한다. 처음엔 서너 명밖에 보이지 않더니 나중에는 10여명이 숲속 여기 저기에서 머리를 내밀더라고 했다. 쟈쟈와 약속하고 때려서 버릇 고쳐주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날도 쟈쟈가 운전하고 있었는데 로얼이 습격조를 발견했다. 차를 세우고 둘이 다 내려서 부품을 안고 뛰는 습격조를 추격했다. 힘만 빼고 붙잡지 못한 채 되돌아왔다. 떨어진 부품 중에 배터리 두 개는 박산나고 헤드라이트 몇개는 파손된 흔적이 없어 다 주어 싣고 출발했다. 그런데 그때에야 로얼의 손가방을 잃어버린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인민폐 천여원에다가 모든 증명 서류를 도둑 맞힌 것이다. 차를 잠깐 비워놓은 사이에 가까이에 대기하고 있던 습격조 성원이 채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연고로 우리 차가 원정에서 나진까지 운행하는 때 적지 않은 횟수로 승용차로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일을 해왔었다. 승용차가 뒤따르지 않을 때는 사람이 적재함에 타고 다니면서 감시했는데 추운 겨울에 나도 여러번 감시원으로 당선되어 나진에 도착한 후 꽁꽁 얼어든 몸을 오래동안 녹여주는 시간도 가져 보았었다. 그러다가 밤길에 관곡고개에서 타일을 만재한 트럭을 습격하려는 도둑놈을 만난 적도 있다. 내가 이미 올라온 자에게 몽둥이를 휘둘러 대니 그자가 

“에씨, 오늘은 재수 없다.” 

고 씨벌여 대고는 날래게 뛰어 내렸었다. 

그나저나 습격조에게 당한 물건들을 죽 살펴보면 타이어, 자전거, 배터리, 칼라 TV, VCD 기계와 라디에이터(신품)를 비롯한 수많은 자동차 부품, 그리고 담배와 부식품도 있다. 손가방까지도 채가는 습격조의 행실을 두고 나진 인민 위원회에서도 속수무책이었고 우리는 그냥 당하기만 했었다. 

내가 차사업소 버스에 빌려 준 휘발유 한 바게쯔는 후일 장마당 정류소에서 받아 내어 박동혁의 차에 넣어주었고 이튿날 주유때 그만큼 덜 주었다. 그러나 그 일로 로따의 꾸중을 들어보기도 했다. 

합작회사 때부터 모순이 유난히 컸었고 단독회사로 된후에 거래를 거의 끊다시피 했다. 차사업소의 행표를 들고 물건사러 오면 한개도 팔지 않았고 길에서 사람을 만나서도 모른체 지나치는 로따와 영철이를 여러번 보아왔다. 구정때 차사업소 사람들한테 내가 부품을 판 적이 있는데 꾸중을 들은 건 당연하고 기름 문제로 꾸중을 듣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호기심때문에 말했던 것이다. 길에서 고생하는 기사를 도와 주는 것이 나쁠 것이 없건마는 고생하는 사람이 차사업소 사람일 때 절대 도와주지 말아야 한다는 로따의 심리를 조금은 이해할만하기도 하다. 

로따가 조선 밀방으로 관절염을 치료한다면서 약을 너무 많이 써 두 무릎 주위가 화상을 입는 사고를 쳤다. 고추나물로 된 밀방이었는데 띠모양으로 덴 흔적이 알렸고 진물이 흐르고 물집도 생겨 걸어 다니기도 말째였다. 중국에서 화상약을 내다가 발라 보았으나 효험이 없어 귀국한 후 입원 치료를 받아서야 나아졌다. 

평양 견학,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인다. TV가 보급된 후의 20년간 공원처럼 꾸며진 평양의 거리들을 화면을 통해 많이 보아왔고 꿈결에도 가고 싶은 곳 – 그 곳이 평양이었다. 그런데 외국인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평양행이 불가능했다. 회사에서 세포 비서와 최영복, 김봉식과 김영옥이 견학 대표로 평양에 가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언제쯤에나 가게 되겠는지… 

요즘 시 인민위원회에서 외국인들의 관광을 조직해 준다고 들었는데 백두산과 칠보산 두곳 중에서 선택하라고 한다. 관광이 끝난 후 그 효과가 좋으면 평양 관광도 가능하다고 한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가고싶던 평양에 가보고 평생 소원을 풀게 될는 지도 모른다. 다른 방법도 있는데 중국에서 여행사를 통해 관광으로 가보는 것이다. 적당한 기회에 8도 강산 명물들을 두루 돌아보고 그 소감을 글로 써보는 것도 괜찮은 일인 것 같다. 

어느 날, 굳은 비가 그치지 않고 하루 종일 내렸다. 어쩌다가 남연숙을 싣고 은행에 가는데 교통 안전원들이 단속하고 있었다. 남산 호텔로부터 기차역에 이르는 직선거리 양켠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고 자동차를 통과시키지 않았다. 나라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늘 보아오던 광경이었는데 오늘은 웬 일인지 명절이 아닌데도 분위기가 명절 분위기였다. 안화동 뒷골목으로 은행 옆에까지 가서 남연숙이 일을 마칠 때까지 차안에서 사람으로 출렁대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수십 대의 차에 나눠 타고 가족과 시민들의 전송을 받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군대 가는 날이라는 걸 알았다. 입대 기간은 12년이고 17세부터 간다고 하니 나진에서 젊은 친구들을 적게 보아오고 상대적으로 여자들의 수가 많아 시집가기 어려운 현상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게다가 나이 많은 여자를 꺼리는 세속 편견까지 있어 26세 이후의 노처녀들은 시집가기 더없이 힘든 상황인 것 같다. 군대 갔다 온 친구들은 29∼32세었지만 23∼24세의 처녀를 골랐고 운전 면허까지 있으면 제일 인기 있는 신랑감이었다. 

나진 현지에서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따기 어려운 면허를 제대 군인이 가지고 있다면 처녀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형편이다. 선군정치여서 제대 군인들도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었고 괜찮은 일자리도 차례지는 상 싶었다. 여자들은 처녀 때부터 빼어난 데가 없으면 따돌리거나 나이를 먹어 갖고 결혼하면 직장에서 내보내는 것이 통상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말할나위없이 낮아져 있었다. 아내와 《야, 자》하는 말투는 보편화되어 있고 노친들도 《쌍 개 간나》라는 욕을 먹고 있었으며 지어 짐승과 기계도 여자들을 빗대고 욕한다. 

중국의 강남지역에 가면 집 일은 거의 다 남자들이 본다. 아직까지는 맞벌이로 사는 중국 사회에서 요즘 남자들이 할 일이 적어져 여자들이 우쭐하는 세월이 되고 여자들은 출퇴근만 고이 하고 가무는 남자가 도맡는다. 경쟁 사회에 진입하면서 남자들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여자들보다 많이 낮아졌다. 여자들의 입에서 욕이 떠날줄 모르고 지어는 남편의 볼기짝 하나 때리는 것쯤은 예사로운 일이다. 어쩌면 두나라 여자들의 지위로부터 두나라 형편도 대충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가 설립된 이래 수동식 교환 전화로 적지 않은 불편을 겪었다. 로따는 마침내 결심을 내리고 자동 전화 두대를 놓았다. 그 이전에는 중국에서 자동 전화가 있는 나진의 다른 회사에 전화해서 다시 전갈을 받은 우리 식구들이 남산 호텔이나 외국인 숙소에 가서 국제 전화를 걸군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남에게 신세지던 일이 없어지고 양쪽에서 다 편리하게 직접 통화할 수 있어 엄청나게 불편하던 역사를 끝내고야 말았다. 그러나 조선의 국제 전화 비용이 분당 인민폐 12.5원이어서 많은 경우에 중국에서 나진의 회사에 전화를 걸었는데 그러면 통화 비용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수리 공구를 아예 회사 쪽에 옮겨왔다. 하루 종일 회사 쪽에 있는 시간이 수리소 쪽에 있는 시간보다 더 많았고 저녁에 잠자는 횟수도 늘어났다. 버스 수리와 대외 수리는 전부 다 회사쪽에서 했던 것이다. 배터리와 전기부품 판매에서 문제되는 걸 전부 해결했고 자가 발전하는 것도 아침 저녁으로 들낙거리면서 보아왔다. 

그러다보니 매일 제일 먼저 깨어나 발전기를 돌리고 제일 늦게 발전기를 세우고 잠자는 사람으로 바삐 보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짬짬이 세탁기와 카세트녹음기 그리고 다른 전기기구들도 수리했다. 기름돈을 넣고 기다리는 기업소와 여러 농장들, 그리고 군대들의 아우성이 높아만 갔다. 돈은 이미 받아 놓았고 러시아 연유는 어찌된 판국인지 좀체로 나와 주지 않았다. 중국 연유는 값이 올라가고 러시아 연유도 값이 올라가는 모양인지 러시아쪽에서 튼다는 것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몰아내기도 했다. 

신용있는 장사여서 결코 돈을 빼먹는 것은 아니라는 걸 다들 알고있고 이해해 주었지만 시간적으로 너무 지체되는 걸 기다린다는 게 양쪽 다 불편한 일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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