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마다 패치기였고 그러다가 《9.9》절을 맞이했다. 분주한 나진행에서 유일하게 명절이랍시고 지낸 공화국 창건의 날이었다. 춘일이의 215호에 종업원 가족까지 거의 50명이 타고 추진으로 갔다.
가까운 해상금에 먼저 갔는데 지난해에 조선 사람만을 들여놓던 것이 올해에는 누구도 들여놓지 않아 어쩔수 없이 입장료를 받는 그쪽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놀러 나와 있었고 우리는 그래도 운이 좋게 샘이 있는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바닷가의 키 높은 풀에 가리어진 샘물을 우리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사실은 남들이 그리 좋지 않은 자리라고 내놓은 거였다. 풀이 많은데서 바다 물까지의 거리가 가까웠기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놀기는 불편한 자리였으나 물을 잊고 가져가지 않은 우리한테는 그 이상 좋은 자리가 없었다.
식사시간 후에 혜영이가 아코디언을 타는데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놀고 있었지만 나는 식사 시간을 내놓고는 줄곧 바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잠수해서 바다밑의 성게를 잡아 그 자리에서 까 먹었다. 어부들한테서 조개를 산걸 가지고 그걸 미끼로 알방게 잡이도 했다. 바다 천렵 중에서 구운 조개의 맛이 제일 좋다. 섭죽은 그나마 맛있는 것이었고 해어를 구워도 조개처럼 맛있지는 못했다.
성게와 알방게는 생식하고 구운 조개를 더러 먹고 나니 배가 불러 밥과 떡을 먹을 수 없었다. 바다 옆에서 평생 살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서 늘 기대해왔던 동명동 산위에서 나진 시내를 배경으로 하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다들 지쳐 쓰러졌지만 나는 심부름을 하느라 밤거리를 나왔었다. 무슨 심부름을 했던 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는데 나진에 있던 2년 동안 그날 저녁 딱 한번 가로등이 켜져 있었던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추석이 당장이었지만 길이 끊어져 차들이 다니지 못했기에 다들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10일과 11일 이틀간 나는 외삼촌과 함께 대기실 서쪽 잔디밭에 40㎝ 높이의 울바자를 만들었고 연유탱크 쪽에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역시 울 바자를 만들어 놓았다. 일이 끝나지 않아 추석날 오전까지 해서야 끝을 볼 수 있었다.
아침부터 무더운 날씨였다. 관곡 고개 위의 부모님들 산소에 가는 나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간신히 일을 마치고 외삼촌과 같이 냇가에 가서 시원히 목욕을 했다. 추석도 명절이라 수산물이 오른 점심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나는 오랜만에 맥주 세컵을 마셔 보았다.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1년에 한두 번씩 마셔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날에 마시면 아무리 많이 마신다 해도 과민 증세가 나타나지 않고 취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무짐작으로 한량없이 마시는 일은 절대 없었다. 술과는 항상 담을 쌓고 살아온 나였으니 적당하게 마시는 원칙을 잃지않고 있었던 것이다.
더운 날이어서 그런지 다들 얼마 마시지도 못했고 음울한 기분 속에서 식사를 끝내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른 날 같으면 패치기를 하느라고 야단법석이겠는 데 말이다. 아마도 불효한 심정때문이리라.
주방에 외삼촌 내외, 로따 내외와 나만 남았다. 이모가 외숙모와 함께 설거지를 하면서 큰아들에 대해 자랑인지 푸념인지 모르게 늘여 놓고 있었다.
“내 보건대는 아재가 아를 너무 곱게 키운 것 같소. 머나 다 하자는 대로 하니…”
내가 한 마디 하였다. 학교에 가자마자 핸드폰을 사서 들고 다니는 애가 공부하면 얼마나 하랴 싶었다.
“그래 말이다. 그나저나 학교에 보냈으니 시름을 싹 놨다. 제 노릇 할 때 있겠지.”
“제 노릇을 할 지는 두고 봐야 하오. 대학을 마치는 건 제 노릇을 하는 첫 걸음인데 내가 보기엔 학교도 제대로 다닐 것 같잖소!”
“그렇게 보이던? 애비 에미가 기를 쓰고 벌어 대는데 머저리 아닌 이상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니?”
“건 아재가 버릇 잘못 굳혀주어 그렇지. 애들이 잘못되는 건 다 여자들 문제라니까.”
내가 시큰둥해 말하니 이모가 펄쩍했다.
“뭐이라구, 어디 두고 보자. 내 새끼가 잘 되나, 네 새끼가 잘 되나! 니가 이렇게 싸다니니 니 새끼도 잘 되긴 다 글렀다.”
“두고 보기요. 가(그 애)처럼 만들진 않을 거요!”
이모의 큰 아들애는 재수 1년 간 책을 얼마 들여다보지 않았고 아글타글 번 돈을 뭉청뭉청 생각나는 대로 잘라쓰고 있었다. 그 좋은 일본 유학도 포기하고 수속에 넣은 몇만원이 허망 날아나게 만들어 놓았다. 북경 F 대학 입학때문에 로따가 비행기를 왕복으로 타고 북경에 다녀 왔는데 그 학교가 아니거나 북경 아닌 다른 곳의 대학은 절대 가지 않는다고 했었다.
손바닥만한 훈춘시내에서 어디로 가든지 택시를 타고 다니는가 하면 북경 E 대학에 먼저 붙어간 여자 친구를 만나러 두 번이나 갔다 왔고 군대에 간 친구도 만나 보고 왔었다. 재수 1년 동안에 한 일이란 돈을 물쓰듯 한 것과 지난해 겨울에 사놓은 컴퓨터로 거의 매일 게임을 논 것뿐이었다. 나는 입사해서부터 고생을 밥먹듯 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겪었기에 걔의 행실이 영 못마땅했다.
“아새끼, 오늘은 술 처먹었다고 나와 걸고드는 거냐?”
“내가 걸고들든 말든 아재는 아들 문제로 잘 반성해야 하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잘 교육하오. 그렇잖으면 전도 망친다니까.”
“제 코도 씻지 못하면서 남의 코 닦아주겠다는 게 정말 우습다야, 니 주제나 잘 건사해라.”
“예! 알겠음다! 내 주제는 보다시피 멀쩡함다!”
그리고 나서 꼬부랑 할머니가 걷는 흉내를 냈더니 두 여자는 부엌에서 허리가 끊어져라 웃어댔고 외삼촌과 로따도 덩달아 웃어 주었다.
“영도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새끼들을 잘 건사하지 못한 건 다 여자들 탓이다!”
로따가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면서 부엌 쪽을 흘끔했다.
“에씨, 개좆 같다야. 노톨(중국어-발음 그대로인데 요즘 연변에서는 영감 혹은 부친을 그렇게 부르고 말한다.)의 산소를 잘못 썼나, 어쨌나? 추석 날에 비판 투쟁을 다 받니, 이거?”
이모는 당신 아버지의 산소에 가지 못하는 걸 안타깝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요즘 부모님들을 두고 우리집 노톨, 우리집 노친이라고 곧잘 부르고 있다. 이모는 가끔 신경질을 잘 부렸고 그럴 때마다 입에서 별의별 욕이 다 쏟아져 나왔다.
잠자리에 누운 후 로따네 방에서 부부가 격렬하게 다투는 것도 간혹 들어 왔다. 로따는 이모의 드센 입심을 당하지 못하는 때가 있었고 그럴 때면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다들 깊은 잠이 든 후에 조용히 돌아오군 했다. 그런데 로따의 입심은 이모보다 더 세었고 그의 일리 있는 말을 이모가 이내 알아 들었으므로 이튿날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웃고 떠들었고 절대 조선 종업원들 앞에서만은 다투는 일을 삼가했다.
그런데 이모가 조금은 이상할 때도 있었다. 뻔한 도리를 가지고 남편에게 지지 않겠다는 승벽심이 아닌 마구잡이로 로따한테 걸고 들고 신경질을 부리기가 일쑤였는데 이튿날 잠을 깨고 나면 곧 후회하는 거였다. 자기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했고 일이 있은 후 반드시 후회했으나 고치지 못했다. 로따가 너무 안타까워 어느날 아침 식사 때 나에게 이런 말을 물은 적이 있다.
“니 아재는 어째 저런다니?”
“갱년기 증세요.”
나는 더 생각지도 않고 말했었다.
“그걸 보고 갱년기 종합증이라고 한답데.”
내가 보충하는 걸 듣던 위홍이가
“갱년기 복잡증, 갱년기 복잡증이요!”
하고 말해서 좌중을 웃겼었다.
“그런데 너 아재는 이 나이에 벌써 갱년기니?”
“그거는 아즈바이가 할 탓에 달렸지.”
내가 깊이 생각지도 않고 마구 주어대는 데도 로따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식사했었다.
오늘 같은 경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다. 그저 조카에게서 핀잔을 듣는 것만으로도 심란한데 남편까지 부채질하니 그만 밸이 꼬인 거였다. 그런데 이때 로따가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가화만사흥(家和萬事興)이라.”
중국어로 했는데 가정이 화목해야 만사가 흥한다는 뜻이다.
“우리 부부가 싸우는 것도 그래. 싸우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고 적당히 싸우는 게 화목인거지. 그 싸움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하는 가에 달렸다. 새끼 문제는 어렸을 때의 일이지 지금은 이미 늦었다. 《가화만사흥(家和萬事興)》만 잊지 않으면 되는 거다.”
이 말은 나를 철저히 각성하게 만들었다. 우선 성질이 날카로운 이모와 같이 살면서 잘 조화를 이루는 결혼 생활이라는 것을 은근히 보여주면서 부부 싸움이 체면이 서게 하는 말이었다. 다음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이혼을 한 나를 두고 한 안타까운 절규 비슷한 거였다. 나를 걱정해주고 생각해주는 면이 그래도 자상한 이모부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가정문제를 해결 못하는 사람이 사업의 성공을 맞이할 수 없고 바랄 수도 없는 일이라는 걸 중국의 오랜 속담으로 일깨워 주고 충고하는 거였다. 나를 내놓고 다른 식구들한테는 이만한 얘기를 해줄 상대도 없는 형편이었는데 로따는 그야말로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말을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낮잠 자러 가겠다면서 문을 나서는 로따의 뒤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로따는 너를 고와한다. 여기 나와 있는 애들 가운데서 너를 제일 고와 한다.”
이모가 수다를 떨어 주었다. 손에 묻은 물을 털면서 로따를 따라나간 이모를 일별하면서 외삼촌 내외가 허구픈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말-《가화만사흥(家和萬事興)》을 음미하는 동안 약간 알딸딸하던 정신이 대번에 맑아졌고 이제까지 외삼촌 내외가 한 마디도 말참견하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소?”
내가 여러 번 물어서야 외숙모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한 마디 하는 거였다.
“신경질 난다. 쪼꼬만 애들 생일에 개까지 잡으면서 나그내 생일을 쇠 주지 않으니?”
“뭐라구? 그럼 아즈바이 생일이란 말이요?”
“응, 어제가 생일날이다.”
나는 수첩에 우리 식구들의 생년월일을 다 적어가지고 다녔다. 통행증 수속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이었기때문에. 그런데 3월부터 차대대장을 하면서 통행증 수속과 교두에서의 화물수입 수속을 해본지 오래되고 수첩을 뒤져보는 시간이 자연히 적어지게 되어 식구들의 생일을 소홀히 해왔다.
그러나 이모만은 이번에 큰 실수를 했다. 어쩌면 해마다 다니던 사촌 오빠의 생일날마저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음력으로 추석 전날이면 얼마나 기억하기 쉬운 일인데!
이건 갱년기 증세로도 해석이 되지 않는 문제였다. 이제까지 침묵하고 묵묵히 우리 얘기만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외삼촌 내외를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식구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외삼촌의 생일이 빠질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재에게 말하겠소. 이건 그저 지나칠 문제 아니오.”
내가 후닥닥 일어나자 외삼촌이 말렸다.
“일없다(괜찮다). 그까짓 생일 못 쇠믄 말지 머. 넌 가만 있어라!”
“쇱시다! 아덜(아이들)이 다 쇠는 데 좌상이 안 쇤다는 게 말이 됩니까?”
“당신은 가만 있소! 명년에 집에서 잘 쇠면 될 게 아니요?”
내가 걱정위원장 노릇을 하지 않으니 별 해괴한 일이 다 생기나 싶었다. 나진에 나와 처음으로 맞는 생일을 지나쳐버렸으니 외삼촌 내외의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가만히 생각해 보니 6월 초에 외숙모는 집에가서 생일을 쇠고 왔었다. 그때 부부 동반해서 출국한 지 한달 만에 집에 간다고 해서 감쪽같이 생일을 쇴기에 이모네가 이번에 중시를 돌리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고 판단이 되었다.
그런데 로따가 그렇게 심하게 걱정하던 외삼촌은 매일 가타부타 말 없이 일만 수걱수걱 해 주어 로따 내외는 퍽 안심하는 모양이었고 나도 몇달 동안은 다른 사람의 일에 거의 개입하지 않아서 그런지 로따의 욕을 적게 먹어 왔다.
괜히 밸만 꼬이고 생일에 비비를 잡아 먹은 위홍이를 언제 한번 혼내 주고 골려 주리라 든든히 벼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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