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에 굴포농장에서 큼직한 붕어 수십 키로를 보내준 적이 있다. 먹고 나머지를 냉장고에 넣었다가 드문히 꺼내 먹었고 요즘도 한번 먹게 되었는데 회를 쳤었다.
다른 사람은 아무 일 없는데 유독 로따가 식중독이 왔다. 며칠간 주사와 약을 들이댔고 그래도 잘 낫지를 않아 방에 누워서 사무를 보고있었다.
나는 부품 때문에 훈춘에 며칠 다녀왔는데 붕어회를 먹지 못했다. 이날 저녁에 나진에 도착한 내가 병문안을 들어갔었다. 며칠간을 앓고 난 로따는 얼굴이 초췌해 있었다. 이말 저말 하다가 로따가 엉뚱한 말을 하는거였다.
“내 병은 내가 안다. 요즘 바람기가 가득하다. 얼마 살 것 같지 못하다. 내가 죽으면 버스를 다 팔아 버리고 장사를 좀씩 하다가 훈춘에 다 돌아가도록 해라.”
그 당시 로따 옆에 있던 사람은 이모와 나 둘 뿐이었다. 이모가 피씩 웃더니
“이 나그내 지금 유언하고 있다.”
했고 나는 당황하여 할 말을 잊고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팡질팡할 때
“댔다(됐다). 나가 봐라.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고 로따가 나를 보면서 웃어주었다.
온 몸에 성한 데라고는 없이 병투성이인 로따는 약만 해도 수십 가지를 갖춰놓고 있다. 비상용으로 구심환은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오늘 내가 다른 비상약으로 안궁환을 비싼 걸로 여러 알 사왔다.
이모가 화장대로 쓰고있고 전화기를 놓아두는 그 자리 옆에 이름을 기억하기 힘든 갖가지 약들이 줄느런히 놓여있고 침대 머리와 침대 밑에도 약을 담는 큼직한 박스가 하나씩 있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소화 계통에 이상이 없는외 기타 장기는 어디라 할 것없이 약 신세를 지고있었다. 그래서 로따의 방에 가면 지독한 약 냄새가 항상 풍기고 있었고 로따의 몸 가까이에 가도 약 냄새를 맡을수 있었다. 다병한 몸에 많은 약을 투입하고 식성도 좋았기에 정력적으로 일을 할수 있었던 것 같다.
로얼의 친구인 김보스는 훈춘에서 수입 자동차 부품을 팔고 고급 승용차를 전문 수리하는 사영업소의 주인이다. 이번에 나진에 함께 왔고 호텔에서 묵었다. 이튿날 약속대로 그가 왔고 오자마자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내가 어제 타고 왔던 프린스를 운전하라고 맡기는 거였다.
뒤좌석에는 어제 같이왔던 김보스의 친구가 타고 있었고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둘이 함께 나진의 중고 승용차 시장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내가 안내하기로 했던 것이다. 먼저 청계동으로 갔다. 태풍때문에 청계강 다리가 뭉청 끊어져 있었는데 그때까지 복구하지 못했고 그래서 군마골의 성옥이네 집쪽으로 에돌아 나진 벽돌 공장옆의 청운산 사업소로 갔다.
거기에는 고금속(고철)사업소도 있었는데 나는 차 영감과 같이 여러번 필요한 자재 구하러 간적이 있고 벽돌 공장에도 심부름을 몇 번 다녔을 뿐만아니라 영철이와 함께 밀수차를 전문 팔고있는 청운산 사업소에도 가본 적이 있어 길에 익숙했었다. 통근차로 성옥이를 태워다 주었기에 에돌아 가는 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별의별 차들이 다 있었다. BMW, 럭섯스, AUDI A6, 벤츠와 같은 고급 승용차 외에도 중국에서 선호하는 고급 찦차도 있다. 두 사람은 혀를 내둘렀다. 새 럭섯스는 2만 2천 달러여서 같은 차종을 중국에서 사면 거의 3배나 되는 돈을 퍼 쓰게 되지만 흥정하면 가격이 더 싸질 수도 있었다.
새 차 가격이 엄청 싸니 중고차는 더 쌀 수밖에 없다. 밀수꾼들에게 인민폐 5만정도의 도강비(두만강을 건네주는 비용)를 주고 중국에서 번호 받는 데에 필요한 비용까지 넣어도 중국에서 사기보다 적어도 인민폐 10만정도 싸다. 그러니 밀수가 창궐해 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중국에서 번호를 받을수 있다는 자체가 밀수에 부채질 해주고 있었다. 참으로 된다던 일이 안되고 안된다던 일도 쉽게 풀리는 게 요즘 중국의 사정이다.
중국에서 산아 제한을 하면서 계획 외의 생육은 벌금을 하게 되고 호적을 올릴 수 없게 규정이 세워졌다. 먼 옛날부터 남존여비의 유교사상 뿌리가 제일 깊은 나라가 중국인데 계획 외 생육은 줄곧 골칫거리이고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산아제한을 실행한 20년동안 매년 얼마만큼의 계획 외 생육이 발생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한살부터 스무살 사이의 호적에 없는 인구가 더러 있다는 거다. 그러니 중국의 사실상 인구는 13억을 많이 초과할 거라는 것이다. 호적이 없으면 의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며 일반적으로 호적이 있는 애들보다 더 많은 교육 비용을 지불해야 정상적인 수업을 받을 수 있고 늘 놀림을 당할 뿐만아니라 앞으로 결혼 신고도 할 수 없는 《검은 인구》라는 뜻으로 《흑인(黑人)》으로 불리운다.
중국에 20세 미만의 《흑인》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는 그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지만 어떤 전문가들은 2억 이상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견해도 내놓고 있다. 돈많은 집에서는 계획 외의 생육으로 벌금을 하고 난뒤 더 큰 돈을 써가면서 호적을 올려놓는데 그걸 보고 호적을 산다고 한다. 사는 사람이 있으면 파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그건 다름 아닌 나라 자체였다. 집행 기관이 호적을 관리하는 공안국일따름이다. 이렇게 호적도 팔고 사는 마당에 밀수차 번호판이 나올 수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들 두 사람은 시장 조사를 할뿐이지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코스로 역전동에 가 보았다. 기업소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억되지 않고 전운선이 근무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고있고 우리 닛산을 최영복이 다른 차로 바꿔낼 수 있다고 해서 나와 영철이가 두번 가본 적이 있어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때 닛산을 바꿔내지 못했고 사람이 구내에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이번에도 들여놓지 않았다. 전문 거래하는 사람만 들여놓는 모양이다. 입구에서 마당에 세워진 수십 대의 승용차들을 들여다보다가 다음 코스로 갔다.
안주동을 지나 해변가의 비포장도로로 나진반도의 끝에 가면 해양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거기에는 군부대에서 직접 운영하는 차 판매소가 있다. 지난 여름 중국에서 밀수차 추적 조사로 나진에 온 적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진행하는 코스의 세 기업소에 모두 다녀보고 갔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다.
중국에서 밀수차 때문에 추적 조사를 한건 처음인지는 모르나 두만강 쪽의 밀수차는 압녹강 쪽의 밀수차에 비하면 그 수량이나 차종이 비교도 안되게 짝진다는 말들도 심심찮게 많이 들어 왔었다. 중국에서 조선에 항의를 했었고 그래서 그런지 즘즉해 지는 듯 하더니 겨울철이 다가오니 또 활기를 띄는 모양으로 보였다.
어제 나진에 나오는 길에서 수십 대의 승용차가 두만강변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만났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여름철에는 중국쪽에 권양기를 만들어 놓고 와이어 줄을 두만강 건너까지 가져 간 후 물위에 승용차를 띄워놓고 중국 쪽에 끌어당겨온다는 풍월도 들은 적이 있다. 겨울에는 얼음위로 그냥 몰면 되었다.
밀수차가 들어가는 도경이 있다는 걸 이날 김보스한테서 많이 얻어들었다. 해양쪽에도 들여보내지 않아 그냥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드라이브를 즐기던 해안 도로여서 여간 눈에 익은 것이 아니다. 질풍같이 달리는 차안에서 김보스는 청운산 하나라도 잘 다녀왔으니 이번이 헛걸음이 아니라는 걸 강조했고 우리 회사를 평판하기 시작했다.
뭐 로얼이 정신나간 것처럼 돌아다녀서 별 할만한 일도 다 있다싶었는데 회사 구내와 수리소를 돌아보고 난 뒤에 생각이 달라졌다나? 나는 오늘 프린스를 제일 첫코스로 수리소에 대여 원래의 안화동 회사 자리까지 구경시켜 주었는데 지금의 대기실 쪽은 어제 도착하자마자 한 바퀴 돌면서 참관시켰던 것이다.
– 너희들 로얼뿐이 아니고 로따도 그래. 너무 피곤하게 산단 말이다. 사람이 일생이 얼마인데 맨날 저렇게 피곤하게만 살겠니? 난 그렇게 못살겠다.
아내가 한국에 드나든 지 수년이 되었고 국적도 한국 국적으로 고쳤다. 집에서 부품가게에 자동차 정비도 하면서 중국과 한국 두 나라에서 돈을 버는 가족이다. 그가 보건대는 조건이 열악한 조선에서 돈을 버는 것이 자기 가족이 이제까지 돈을 벌어온 역사에 비해서 너무나도 힘들다는 거였다.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 우리 로따는 지금 현재 나진의 고정 재산이 60만 달러가 되였소. 그것도 손에 자기 돈 일전 한푼 없이 3년 만에 이루어 진건데 1년에 20만 달러가 어디서 오는 거요?
이건 로따가 밀수 쪽이 제일 돈을 많이 버는 것 같다고 하는 나의 견해에 반박하면서 들려준 얘기였다. 김보스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래졌다. 경악하는 그를 일별하면서 약간 좁은 길목에 들어서는데 앞에 나타난 광경을 두고 차를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안주동의 개가 다 쓸어 나왔는지 수십마리가 길이 메워져라 몰켜있고 그중 몇 쌍은 한창 섹스중이었다. 나진의 개들은 보기에 그리 크지않고 새끼로부터 얼마간 더 큰 상태여서 오래전부터 의아해 왔는데 얼마전에야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아까 갈 때는 못 보았는데 오는 길에 맞띄운 거다. 나진거리를 다니면서 늘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우리 회사 대문을 빠져 나온 후 경비실 앞의 주민 집 앞을 지날 때도 그 집 암캐가 동네 집 수캐를 불러 와서 길 가운데서 섹스를 해대어 차를 세워 놓고 기다려 준 적이 몇 번 되었고 수리소 앞마당에서 주변의 개들이 10여 마리 몰려와 그룹 섹스하는 장면도 무수히 보아 왔다.
최영복이와 집을 함께 지은 친구가 선봉 집에서 기르던 개를 우리한테 주었고 그 개가 수리소 경비를 섰었는데 《주의! 개 조심!》하고 붙여 놓은 패말을 보지 못한 동네 집 아줌마를 물어 놓은 적이 있고 수리소 입구에 계속 매둔 채로 있어 동네 집 암캐들이 풍채가 늠름한 그 잡종 풍산개한테 반해 봄과 여름철에 늘 수리소 마당을 기웃거리고 기회만 있으면 두 놈이 섹스를 해대었는데 수리소에 있으면서 더러 보았었다.
그런데 그 잡종 풍산개는 언제나 성공하지 못했다. 올라탔다가 한창 헐떡댄 뒤 그냥 무너져 내리고는 자기 얼굴을 땅바닥에 메쳐 대면서 괴롭게 우는 것을 보고 남수남이 옆에서 깔깔댔는데 저놈이 안타까워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모양이라고 했었다. 보다보다 저런 등신 개는 처음 보아 온다면서 비비보다도 못하다는 것이었다. 봄철에 이미 발육된 비비가 《연애》하러 밖에 돌아다니는 걸 보았고 아주 작아 보이는 나진의 황둥개가 성숙이 유난히 빠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늘은 마침내 시내 길바닥에서 그룹 섹스하는 장면을 처음 목격하게 되었다. 그만큼 시내도로라 하더라도 차가 적게 다니는 나진의 차 보유량을 짐작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또한 시내거리에서 개들의 섹스 장면을 볼수 있는 건 나에게는 희한한 일이 아니었지만 김보스네는 더 희한한 그룹 섹스까지 볼 수 있었고 핸들 쪽에 손을 뻗어 경적을 울리면서 기괴한 소리까지 질러대어 개들이 흩어지게 했다.
한번은 장로다리 부근에서 섹스중인 한 마리를 미처 피하지 못해 다리를 깔아뭉갠 적이 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거리였는데 개 두마리가 붙은 채로 갑자기 길에 뛰어들었기에 그 중 한마리가 88호의 뒤바퀴에 깔려 버린 거였고 나는 백미러로 깽깽거리는 개를 보면서 세우지 않고 그냥 나진에 왔었다.
시내 개와 시골 개한테 공통한 특점이 있다는 걸 느꼈었다. 한참 지나서야 개무리가 흩어졌다. 담배 두 대를 태울만한 시간이었다.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는 걸 사양하면서 곧추 회사 앞에까지 왔고 내가 내린 후 김 보스는 수고했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시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진에 며칠 못 있고 또 훈춘에 왔다.
이번에는 부포농장에서 주문한 새 차를 몰아 내가야 했다. 새차 수출 수속은 다 되어 있었는데 슬레이트를 실은 위에 비닐 파이프를 더 얹어 싣고 천용이와 함께 권하 교두로 출발했다. 천용이는 우리의 수출품때문에 번마다 권하에 따라갔고 교두에서 수속을 다 해준 후에 집에 돌아가군 했었다.
대리 업무를 하는 중국쪽 신고원으로 반드시 교두 현장에 있어야 했기때문이다. 훈춘 교외의 수금소를 지나 갈림길에서 우회전을 한 다음 새로 만든 포장 도로를 따라 신나게 몰아댔다. 얼마 가지 못했는데 뒤에서 경찰차가 신호주면서 따라오다가 앞에 와서 멈춰서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이 길 옆에 주차시켰다.
천용이한테서 수출문건을 찾아 들고 경찰차에 다가갔다. 조선에 다니면서 세 번째로 받는 단속이었다. 조선에 다니기 전에 단속을 한번 받은 적이 있다. 창주의 222호를 수리할 때인데 용철이가 근무하던 수리소에서 손을 대지않아 다른 수리소에 가던 중 단속당해 무면허 운전으로 벌금 170원을 했고 로따가 결제해 주었었다.
지난 봄에 최영감과 함께 늄창 재료를 싣고 나진으로 가던 중 훈춘 교외 10키로 지점에 도착했을 때 단속나온 운수관리소의 사람들에게 걸려든 적이 있었지만 그중 한 사람이 안면있는 사람이어서 그냥 보내주었었다.
그때의 차는 아무 번호 판이나 달고 나가던 판매용 중고차였었다. 운수관리소에서는 영업운수증이라는 것을 발급하고 운수시장을 관리하는 부문인데 이 증명서가 없으면 무조건 벌금 시키거나 차를 몰수했었다.
쟈쟈와 함께 몰고왔던 형타공장의 새차 수출 수속을 다 마치고 집에 들렸다가 다시 출발하려 할 때도 교통경찰에 단속된 적이 있다. 수출 문건을 보여 주고 새 차라는 걸 확인시킨 후 지금 당장 나진에 내갈거라고 거듭 설명해서야 번호판이 달려있지 않은 새 차를 놓아주었는데 다행히 벌금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벌금 400원을 내라고 한다. 무면허 운전에 200원, 새차 화물적재로 200원 해서 400원이었다. 흥정해서 300원내고 영수증을 받아 넣었다. 오늘 단속으로 새차에 화물을 실으면 규정위반이고 단속된다는 걸 알았다.
나진에 판매할 차들은 새차든 중고차든 그냥 빈차가 나가는 것이 우리한테는 하나의 엄청난 손실이다. 그걸 피면하려고 새차는 무조건 화물을 실었고 대부분의 중고차에도 닥치는 대로 실어 내갔었다. 다만 시간이 급한 중고차 몇대에만은 싣지 않았었다. 교통경찰들 중 벌금을 받아 넣던 이가
“당신이 오늘 운수 나쁘게 되었소. 화물만 싣지 않았더라도 단속되지 않았을 걸. 그리고 임시 번호판에 있는 유효 기일도 지났고 도착 지점이 훈춘이 아니고 연길이어서 그 한 가지로도 벌금이 200원, 혹은 몰수 처벌이 내려지는데 300원 벌금이 오히려 적은 거요.”
라고 말해 주어서 내가 감지덕지했다. 자그마한 시골 동네에서 앞으로 만날 날이 또 있겠는데 기사들과 척지지 않기 위해 수단을 부리는 게 교통경찰들에게서 늘 보는 현상이다. 기사들과 척진 일이 유난히 많은 교통경찰 하나가 칼에 찍혀 죽은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어 교통 경찰들은 될수록 벌금을 적게 받는 체 했고 상냥한 어조로 말을 해주었다.
북경 가이드 할 때 교통규칙 위반차를 발길질하고 기사한테 줄욕을 퍼붓는 교통경찰을 내가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일개 나라의 수도에 그런 무지막지한 경찰이 있다는 걸 내가 보기에도 안됐는데 그날따라 내가 안내하던 한국 관광팀이 함께 목격하게 될줄이야.
지금은 전에 없이 좋아졌다. 북경 경찰은 차단속을 할 때 거수 경례를 했고 지방 경찰은 거수 경례를 별로 안하지만 말투를 부드럽고 상냥하게 고쳐가고 있다. 벌금을 내더라도 기분 잡치는 일이 없어지고 오히려 규정위반을 한 자책에다가 감지덕지하게까지 되는 것이다.
교두에서 나진까지는 무난히 갔다. 원정에서 다른 기사들부터 오전에 H그룹 컨테이너차를 운전하던 기사가 운전 도중에 사망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H그룹 나진 지사장이 종합검사청사에 있었고 구원차로 중국의 50t급 크레인차도 원정에 나와있었다.
저술령의 檜嶺橋를 지나 약수터에 내려오던 중 90도 굽이를 오른쪽으로 꺾다가 뒤의 컨테이너가 밀려 운전 칸의 기사 쪽을 납작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옆에 탔던 중국 아줌마는 다리뼈만 끊어졌고 기절했는데 죽지 않은 것을 중국에 호송했다고 한다.
이날 점심 퇴근시간인 11시 30분을 맞춰 속도를 너무 냈던 것인데 길 옆의 전봇대를 밀어버린 흔적을 볼 수 있었고 전화선이 여기저기 얼기설기 널려져 있었는데 사고 차는 보이지 않고 길 옆에 떨어진 컨테이너만 보였다.
중국의 휘발유는 가격이 오르고 오르다가 지금은 약간씩 떨어지는 기미를 보여 주고 있는데 훈춘의 여러 주유소에서는 옥탄가가 단일한 90호 한가지밖에 팔지 않고 있었다. 그전에는 70호와 93호도 있었다. 대 도시들에서는 93호와 97호도 쓰고 있고 지방에서는 보통 90호와 93호를 쓴다. 승용차에 90호 이하를 쓰면 500키로도 못 가서 일부 부품이 고장나 버리고 조선의 모든 승용차들은 다 이 고장으로 엔진 작동이 정상적인 게 한 대도 없다.
휘발유를 90호 이상을 써도 일어나는 고장인데 조선에서 수입해 쓰는 러시아 휘발유는 76호 정도여서 역시 승용차에 쓰기 적합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쓰게 되어있었다. 우리 승용차들도 70호와 76호를 많이 써왔고 오늘 같이 판매용 차들에서 좀씩 받아 내어 쓰는 것은 오래 전부터 굳어온 버릇이고 습관이다.
새 차에 90호를 만탱크 했었는데 20키로 쯤 남기고 받아낸 후 88호와 89호에 갈라 넣었다. 닛산은 이런 호강을 하지 못한다. 러시아 휘발유를 쓰다가 90호를 넣으니 자동차는 대뜸 고르로운 소리를 회복하고 출력도 눈에 띄게 높아져 원래의 성능을 거의 회복하는 듯 했다.
10월 18일은 나의 생일이었다. 용철이의 생일이 나흘 먼저여서 16일 날에 두 사람의 생일을 같이 쇠게 되었다. 17세에 집을 떠나 떠돌이로 정처 없는 타향살이 속에서 생일이라고는 이날 쇠는 것 같이 쇠었다. 영철이는 내가 좋아하는 코카 콜라를 사다 주었고 상다리 부러지게 수산물이 많이 올랐다. 중국에서 사내간 야생 포도술도 적지 않게 마셨던 걸 잊을 수가 없다.
진짜 생일날과 그 전날 이틀간은 도로보수 작업을 했다. 나진시내 안에서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길목까지는 포장도로인데 길목에는 굵은 철통이 묻혀 있고 선봉으로 나가는 길옆의 배수구로 내려오는 물이 그 속을 빠져 회사 앞을 흘러지나 동쪽의 내로 흘러들었다.
수리소까지의 천미터는 지난해 보수한 후 이번 태풍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쓸 수 있었고 다만 길목의 굵은 철통이 통 채로 노출될 정도로 파괴되어 있어서 그 주변을 함께 정리해 주어야 했다.
이 며칠동안 영문모르게 로따가 갑자기 버스 운행을 중지시켰는데 나는 외삼촌과 함께 기사와 차장들을 이끌고 대기실 주변의 건설때문에 빠져나온 돌과 흙을 날라다가 다리 보수를 했다. 회사 입구 쪽의 주민집에 물이 들어갔었는데 그 집 앞의 길도 깊이 패어져 있어서 거기에도 흙을 날라다 펴놓았다. 마침 판매용 중고 반짐차 한대가 있었는데 삽은 종업원들이 집에서 가져오게 해서 이틀 간 도로 정비를 훌륭히 끝낼 수 있었다. 첫날 우리 작업을 보고 간 주환 아바이가 이튿날에 10t급 덤프 트럭으로 흙을 한차 실어다 주어서 일을 빨리 끝낼 수 있었다.
경비실 밖의 그 주민집과는 회사에 드나드는 차가 울바자를 넘어뜨려 시비가 많았고 컨테이너 차가 다니면서 내 저쪽으로부터 건너온 낮다란 전기선을 여러번 끊어놓아 차영감이 이어 주곤 했는데 로따는 덩치 큰 회사건물 앞에 있는 그 초라한 집이 보기싫어 인민 위원회에 이사시킬 것을 제의했고 이사 조건으로 주유소 동쪽 내에다가 정화네 집 쪽으로 다리 하나를 무료로 놓겠다고 까지 했으나 아직 해결보지 못한 상태다.
회사 건물의 앞모습을 흐리는 그 헐망한 집을 로따는 언젠가는 꼭 허물어 버릴 결심을 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나진을 떠나기 전까지는 해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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