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듯이 첫 눈이 내렸다.
눈이 얼마 내렸던지간에 버스 운행은 무조건 중지된다. 늄창조에서 요즘 마지막 작업을 거의 다 마무리한 뒤여서 회사 구내는 어쩌다가 조금 조용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방문객들 중에 물건 사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다 만들어 놓은 샤시 출입문과 샤시 창을 실어 가는 사람들도 섞여 매일 북적거렸고 영도들이 타고 들어온 승용차로 마당이 꽉 메여져 있는가 하면 발전기 디젤 엔진의 동음으로 마당은 조용할 새가 없었다.
지난해에도 겨울에 들어서면서부터 방문객이 적어지더니 올해도 역시 지금부터 한가하게 되나 부다. 수리소 쪽의 침실을 개조하는 작업을 차 영감이 며칠만에 끝내었다. 기사와 차장들은 버스를 세워둔 수리소 쪽에 가지 않고 회사 쪽의 경비실에 모여서 한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날 선봉에 현지 작업을 갔던 늄창조의 종업원들을 실어오고나니 저녁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한담한 것도 성 차지 않은지 그때까지도 차장들은 흩어지지 않고 있었고 그 중에 남연숙이도 끼워 있었다.
경비실 서쪽에 대기실과 붙은 방은 위홍이네 부부가 쓰는 거고 그 옆의 방은 위홍이네 방과 부엌을 공동으로 쓰는 온돌이 위홍이네 방 쪽 벽 아래 장의자처럼 길죽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밤 경비가 교대한 후 잠을 자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많을 때 10여 명이 앉을 수 있고 앉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닥에 설 수밖에 없는데 한담은 주로 이 방에서 한다. 그 옆으로 회사 입구 쪽에 경비실을 두 개 방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남쪽 방은 방문객들의 휴식실이다. 이 세 방에서도 그 특이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데 수리소 경비실보다는 덜하였다.
보경의 말은 언제나 재미있다. 차장 중에서도 보경이한테 화제가 제일 많았다.
“보경이 어머니, 보경이 왔음다!”
집에 들어서면서 퇴근 인사를 그렇게 한다고 했다. 이미 영화를 찍고 돌아간 제작진을 제일 많이 따라 다녀서 그 에피소드들도 제일 많이 들려주었었다. 지난 달 정류소에서 있었던 얘기를 했던 것이 인상적이다.
어떤 할머니가 선봉 운수대 차를 탔는데 그날따라 말짱 남자들이 차장으로 나왔다. 여자들이 무슨 행사에 참가하는데 하루 이틀만 대신해 주는 거다. 할머니가 남자 차장을 보고 이렇게 말했단다.
“외자 달린 버스에는 고운 처녀들이 차장으로 타던데 너네 차는 어째 맨 수캐들 뿐이야?”
그 말을 듣고난 차장들이 한참 동안이나 깔깔댔다. 같이 웃어주다가 보경의 옆 모습을 보았는데 귀지가 귀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보여서 귀를 잡고 손가락으로 파주었다. 남연숙이 기회를 놓칠세라 한 마디 했다.
“야, 야! 니 머 하니? 아무데나 구멍을 들이대면서, 응?”
처녀들은 짙은 농담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 중 알아들은 몇 명만 눈을 흘기고 그 장소에 있던 기혼자들 몇 명이 방이 떠나갈 듯이 웃어댔을 뿐이었다.
웬 일인지 처녀들은 시집갈 나이가 다 되었는데도 성 무지를 보여 주어서 답답하기만 했다. 여름철에 경비실에서 나옥분이 처음으로 생리를 겪었는데 바지가랭이까지 피가 흐르는 걸 두고도 자신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그러는 그녀를 피해 버렸었다. 후일 처녀들한테서 생리에 대한 걸 좀 얻어들었는지 몇 번 정면으로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붉히더니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았었다.
남연숙은 남을 웃겨 놓고 자기는 웃지 않는다. 입을 오무리고 다른 말 감을 찾다가 창 밖을 보더니
“저기 미친 간나 오는 걸 좀 바라.”
하였다.
경비실 앞으로 오른쪽에 말썽 많은 주민 한 집이 있고 왼쪽 냇가에 한 집이 또 있었는데 그 집 처녀를 두고 하는 소리였고 우리 차장들과는 비슷한 나이에 차장인 황성희랑은 친구 사이였다. 남연숙을 싣고 다니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오늘 처음 얼굴을 보게 되었다.
어디서 어떻게 벌어들이는지 돈을 집에 갖고 왔고 부모들은 어떻게 생긴 돈인지를 잘 확인하지도 않고 가전을 정신 없이 사들였다. 칼라 TV로 단색 TV를 바꾸고 선풍기, 카세트 녹음기에다 냉장고도 사 놓았다. 자전거도 두 대 갖추고 TV 안테나도 새것으로 보란 듯이 내걸었다.
그런데 그것이 연애를 미끼로 군대 총각의 돈을 사기친 것이라는 것이 들통났다. 장사 자금으로 쓰겠다고 군대를 얼려서 돈을 낚았고 그 돈을 아버지에게 준 것이다. 군대네 가족이 와서 가전과 자전거를 다 들어간 후 아버지는 다 큰 딸을 가전을 살 때처럼 정신 없이 때려 주었다고 한다. 사기 친 것은 그 돈뿐이 아니었다.
앞집 처녀가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후부터 빚꾼들이 부지런히 다니는 모습과 다투는 모습도 더러 보았었다. 내 한가운데서 세차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얻어들은 거다. 빚꾼들 속에 성희도 끼워 있었는데 봄철에 꾸어준 2만을 지금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저 간나 생긴 즛쌀을 좀 바라! 저런 간나에게 어느 총각이 미쳤다고 따라 다녔을까?”
남연숙의 넉두리 비슷한 말을 들으면서 못생긴 앞집 처녀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안테나가 없어진 지붕도 한참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창문 옆에 앉은 김영화와 남연숙 사이에 비집고 들어앉았다. 처녀들은 성 무지를 잘 나타냈고 안아주면 부끄러움을 잘 타면서 몸을 빼지 못해 안달아 하고 가까이에 몸을 붙여 앉아도 꺼리는 눈치다. 기사들한테 많이 단련 받고 있었지만 외국인인 우리 식구들에게는 조심스런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원래 비좁은 자리라 바싹 붙어 앉게 되니
“야-아! 영도 선새임! 좀 이러지 마쇼!”
하면서 나를 밀쳐내는 시늉을 하고
“뭐라구? 어째 달라구?”
하고 내가 아닌 보살을 하니까 처녀들이 웃는데 남연숙은 짐짓 깜찍한 모습을 하고
“총각이 옆에 앉으니까 기분이 좋-다!”
비명 비슷한 말을 해서 또 좌우를 웃기었다.
“영화야! 여기 내 어깨를 주물러 달라!”
내가 이제까지 있어본 적 없던 맛사지를 청구하자 성격이 활달한 영화가
“이거 하면 무슨 상품이라도 있음까?”
하고 익살을 부려서 또 한바탕 웃음 바다가 되었다.
“하는 솜씨에 따라 상품이 결정된다.”
내가 눈을 감고 침착하게 말하니 영화가 제꺽 두 손을 내 어깨에 올려놓았다.
영화는 노래도 잘하고 차장도 잘했다. 늄창조에서 김성호와 함께 유리 베는 능수로도 일을 잘 했고 힘든 일과 지저분한 일도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하는 처녀다. 손은 다른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터실터실한데 힘이 어찌도 센지 맛사지하는 동안 내가 여러 번 비명을 질러 대어 좌중을 한바탕 웃기기도 했다.
10분쯤 지나서 어깨가 풀리는 듯한 감각이 전해 오고 너무 시원해서 피곤도 다 가셔지는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지간한 남자의 손보다도 더 큰 힘을 갖고 있는 그 손이 매워서 내가 투항했다.
여름철에 정류소에 나가서 드문히 차장들께 50원 혹은 100원을 주면서 얼음을 사먹으라고 했었다. 차장들은 나의 돈맛을 다 알고 있고 영화도 드문히 차장을 하면서 내 얼음을 받아먹은 적이 있는지라 이번에도 돈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눈길을 나에게 주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50원을 꺼내 주었더니
“내 수고했음다. 내 집에 잘 감다. 예!”
하고 혼자 작별 인사를 하고 재촉하는 영옥이와 함께 퇴근 길에 오르는 거였다.
“야-아, 그거야 해 볼만 하다야, 내 주물러 주면 얼마 주개?”
남연숙이 입을 오무리고 턱을 높이 쳐들자 남은 처녀들이 죽겠다고 웃어댔다. 집이 가까이에 있는 처녀들은 늦게 퇴근하는데 습관이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좀체로 떠나려하지 않고 있다.
정화가 지난해 마라톤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한 정성옥 선수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 대표단은 우승 희망을 다른 선수에게 걸었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정성옥이 우승했다. 정성옥이 집을 떠나가기 전날 남편이 손목 시계를 채워 주면서 잘 하라고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남편의 성원에 힘입어 정성옥 선수는 마침내 우승을 할 수 있었다. 벤츠 승용차와 아파트를 상으로 탄 것도 자랑스런 어조로 말했다.
나는 유고를 공습한 일을 두고 정화에게 물어서야 공습한 나라들의 조직을 《나토》라고 부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어 푸틴을 《뿌찐》으로 부른다는 것도 알아냈고 무슨 단어나 강한 악센트로 표기하거나 말하는 언어 습관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소련을 《쏘련》, 러시아를 《로씨야》, 새차를 《쌔차》, 벤츠를 《뻰쯔》로 발음하는 것을 썩 오래 전부터 들어왔던 것이다.
《공동선언》말이 나오자 평양의 수십만 시민이 공항으로부터 시내까지 연도에서 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환영했다는 얘기를 하고 나서 역사적인 《6.15》후부터 조선에서 《미국놈》, 《일본놈》, 《중국 아덜》과 같은 적대시 언어를 쓰지 못하게 방침이 떨어 졌다는 얘기도 했다.
내가 이제까지 궁금했던 혼인 신고와 이혼에 대해 질문했더니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 약혼식을 하고 결혼식을 올리면 일단 부부로 되었다는 걸 인정해 준다. 주변의 사람들이 다 인정해 주는데는 부부가 아니라고 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고 많이는 애가 태어난 후 출생 신고와 함께 혼인 신고를 한다. 결혼식을 올리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혼인 신고를 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결혼 전에 혼인 신고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요즘 와서 이혼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재판소의 재판을 받아야 한다.
나도 겨들었다.
– 중국에서는 사돈 보기(약혼식-중국에서는 작은 잔치라고도 한다.)를 하면 앞으로 결혼할 언약을 맺을 연인으로 인정할 뿐 백년가약을 맹세한 부부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결혼 전에 거의 다가 혼인 신고를 한다. 결혼 예식장에서 사회자가 부부 사이에 결혼증을 교환하는 절차를 진행하는데 혼인 신고를 하지 않으면 결혼증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붉은 가위로 된 결혼증을 받아야 만이 부부라는 걸 인정해 준다.
간혹 혼인 신고를 하지 않고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부부로 인정을 받기 위한 형식적인 것이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무조건 혼인 신고를 해서 결혼증을 받아 두어야 한다. 산아 제한을 하는 중국에서 결혼증을 갖고 있어야 만이 생육증도 받을 수 있고 생육증이 있어야 아이를 낳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하고 호적을 올리지 못하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흑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남녀가 호텔에 같이 한 방에 드는 경우 결혼증을 보여 주어야 하고 그래야 만이 부부라는 걸 인정하면서 방을 내 주는데 그렇잖으면 숙박을 거절한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매음을 막는 수단의 하나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혼은 법원(조선의 재판소와 같은 기관)에서 판결(재판)하는 소송 이혼과 합의 이혼 두 가지가 있다. 법원의 이혼 판결은 처음에 화해 작업을 하다가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에 있을 수 있는 일이고 합의 이혼은 부부 사이에 일종의 계약이 맺어지고 법원을 찾지 않아도 결혼증을 발급하는 기관인 혼인 등록처에서 그 계약이 합리하다고 인정되면 푸른 가위의 이혼증에 계약을 써넣고 두 사람의 수표(사인)를 받은 후 도장을 찍고 나서 한 사람에게 하나씩 발급하고나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막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다 합의 이혼을 선택한다. 죄 아닌 죄로 법원의 재판석에 올라서기 싫은 것과 떠들썩한 분쟁과 공개적인 장소가 싫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겠다.
두 나라의 문화와 정책면에서의 원인 때문인 지는 몰라도 어쨌든 다른 점이 있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 중국은 연애 결혼이 많고 조선은 중매 결혼이 많은 것 같다. 연애 시간은 중국이 더 긴 것 같고 조선은 연애 시간이 짧은 것 같아 보였는데 중매쟁이가 소개한 후부터 불과 몇 달 사이에 결혼에 이르는 자체가 조금은 문제되어 보이기도 했다.
회사의 차장이었던 오선희의 경우를 놓고봐도 그랬다. 그녀를 내놓고는 아직까지 어느 처녀가 연애한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고 그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오선희는 그 남자를 만나 넉 달 만인가에 결혼을 했고 요즘은 임신한 몸이어서 집에 들어 앉고 말았는데 드문히 어머니를 도와 장마당 매대를 돌보고 있었고 정화랑 속심의 얘기를 나누는 듯 싶었다.
언젠가 두 사람이 길에서 만났는데 선희가 정화 앞에서 속상한 말을 하면서 눈물도 보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선희의 결혼이 여의치 않은 결혼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했다. 그 몇 달 동안에 감정 교류라는 것이 얼마나 있었겠으며 서로에 대해 얼마나 깊은 정도로 알아보았는지는 그들 부부만이 알고 있을 거였다.
날마다 밤늦게 퇴근하고 아침 일찍 출근하는 처녀가 연애를 참답게 해 보았을까? 그런 사람들한테 결혼을 할 정도로 사랑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관념과 의식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러고 보면 중국의 이혼은 많이는 돈 때문이고 조선의 이혼은 많이는 감정 때문일 거라고 판단이 서게 되었다. 게다가 조선의 이혼은 꽤 까다로운 것 같았고 유언비어도 이혼자를 많이 괴롭히고 있는 듯 했다. 박동혁의 홀아비 생활을 두고도 그 점을 좀 알 것 같았다.
유언비어보다도 사회적인 기시가 사람을 못살게 굴고하니 많은 사람들이 지긋지긋한 결혼 생활을 억지로 지탱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원정리 여자와 같이 아름다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아주 적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어쨌든 조선의 결혼과 이혼은 다 같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랑이 무르익어 하는 결혼인지가 의심되고 새끼가 달리고 헤어진 다음의 정신적인 압력 때문에 꼭 이혼을 포기하는 것인지도 의심이 갔다. 내가 나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그 의심을 떨쳐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문제는 이 정도에서 더는 풀려지지 않았다.
예술 영화의 주제가 가사를 잊은 것을 물었는데 처녀들은 나보다도 더 모르고 있었다. 금방 들어 온 창주가 듣더니 하나하나 잘 알려 주었다. 《이름 없는 영웅들》은 70년대에 나온 영화여서 처녀들 나이보다 더 나이를 먹었고 후에 많이 방송되지 않았는지 더러는 곡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노래들도 같은 이유로 처녀들이 거의 모르고 있었으나 나보다 두 살 위인 창주는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고 나와는 비슷한 영화팬이어서 후일 잊은 노래 가사를 그에게서 많이 알아냈었다. 노래 가사 공부를 다시 하는 동안에 창주도 아직 퇴근하지 않은 기사들, 그리고 최영복과 함께 한담에 끼어 들었는데 그 중에서 그 날 들은 이야기 두 개를 소개하기로 한다.
이때 차장들은 들어온 남자들 때문에 다 빠져 나갔었다. 누가 했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이야기 줄거리만은 기억하고 있다.
가구 공장의 지금 공장장은 원래의 노동국 국장이고 사실상 혁명화를 내려 간 것이지만 직무가 있어 지배인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원래의 지배인은 처형당했다. 다음 이야기는 처형당한 지배인에 대한 것이다. 그 지배인은 생활이 사치했고 아들 몇 명도 아비 덕을 입어 각기 다른 기업소에서 중요한 책임자로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한 시기에 나진의 한 처녀가 실종되었다. 그 처녀를 찾아냈을 때 갇혀 있던 밀실은 지배인이 갖고 쓰는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밀실은 쓰다 버린 컨테이너였고 처녀는 결박된 채로 입에 수건이 틀어 막혀져 있었다.
조사 결과는 나진시를 들썽케 했다. 지배인의 집에서 내화 수백만 원에 미화 수만 달러가 사출되어 나왔다. 숱한 비디오 테이프도 사출되어 나왔는데 그 중에는 포르노도 있었다.
어마어마한 숫자로 나온 돈으로도 나진을 놀래우고도 남음이 있는데 포르노를 보았다는 것은 원자탄을 터친 것과 마찬가지다. 내화 수백만이라면 지대 밖의 사람이 지금 생활비 수준으로 수천 년을 벌어서 쓰지 않고 모아 두어야 있을 수 있는 돈이다. 그것만으로도 졸도하게 생겨 먹었는데 포르노라니?!
포르노를 중국에서는 황색 테이프라고 부른다. 조선에서는 적당한 말이 없어서 중국인이 일러준 그대로 황색편, 생활편 혹은 연변의 요즘 유행어로 색깔편이나 동물 세계로 부른다. 포르노의 출처를 보면 중국인이 갖다준 것이 아니면 해외 방문을 자주 다니는 선원들 손에서 나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 지배인은 중국인들과 거래가 잦고 해외 관계도 복잡했는데 《황색》에 완전히 물 젖어 버린 거였다. 계집질을 해댔고 계집과 함께 발가벗은 채로 포르노를 보다가 그 처녀한테 들킨 것이다. 우연하게 그 방의 창문을 지나다가 막지 않은 커튼 사이로 보게 된 것이다. 하마터면 처녀가 목숨을 잃을 번했고 지배인의 정체가 드러나지 못할 번했다.
공개 재판을 할 때 나진시민들이 많이 가서 보았다. 수년 전에 있은 일이라고 한다.
다음은 직매점 인수원 아낙에 관한 이야기다. 직매점 인수원이라면 상점에서 판매할 물자들을 구입해 오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가까이로는 청진, 멀리로는 평양과 개성까지도 출장이 잦은 아낙이 집을 비울 때가 많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인수원 아낙은 기업소 일은 잘 해제꼈지만 집일에는 너무 등한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 댔고 저쪽 여자와 아이까지 보았다. 남편은 어느 택시 회사의 기사로 일한다고 했다. 이 가정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부부가 아이 셋을 낳으면 방이 세 개 짜리 아파트를 지급한다는 새로운 방침이 떨어진 뒤여서 사생아 양육 문제는 걱정될 것이 없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원래 무 세금의 나라라 의료 부담이 없고 의무 교육 제도가 있으므로 교육비용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다.
중국 사람들처럼 맞벌이를 하면서도 교육비 때문에 두 번째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다. 12월에 해고당한 남수남은 나보다 두 살 어렸지만 여름철에 두 번째 아이를 보았다.
첫 아이가 딸이고 두 번째가 아들이었는데 역시 수천 년 뿌리내린 《남존여비》가 많이 작용한 결과라고 보아야겠다.
중국의 조선족은 원래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으면 백 점, 아들과 딸을 차례로 낳으면 90점, 딸 두 명과 아들 두 명을 두었을 때는 다같이 70점을 주었었다. 요즘은 돈을 더 잘 벌어들이는 딸이 인기가 높아져 딸 두 명에 백 점, 딸 한 명에 90점, 아들 한 명은 70점인데 아들 두 명은 합격 점수인 60점도 아깝단다. 아직까지도 남존여비가 잔존해 있으면서 여자들의 인기와 사회적 지위가 형편없는 조선 사회가 서서히 여자들을 선호하는 쪽으로 시대가 바뀌어질 거라고 예감이 들기도 한다. 경쟁 사회가 부단히 사람들을 자극하고 여자들이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도 그렇고 평화 시대가 도래하면 군대에 가는 남자가 적어지고 병역도 몇 년으로 짧아져 여자가 지금처럼 너무 많아 보이는 현상이 불가피적으로 소실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녀 비례가 기형적으로 실조 되어 있는 현황이 언젠가는 개변될 날이 올 것이니 말이다. 중국 여자들이 수십 년 사이에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 것처럼 조선도 같은 길을 걷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외에 생육 문제는 누가 제한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자기 조절을 할 수 있게 개명해질 거라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최영복도 말참견을 했다.
연말의 이산 가족 방문단에 선봉의 한 가족이 뽑혔다는 것, 중국에 탈출하여 삯일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다시 조국에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는 방침이 떨어 졌다는 것, 칠보산은 조국 해방 전쟁(6.25사변)이 언제 일어나고 언제 끝났는지도 몰랐던 깊은 동네라는 것, 나진 시내에서 여름철 한때 보이다가 자취를 감춘 여자 교통 경찰들은 선봉 안전부에서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고 있고 공화국 북반부에서는 평양 한 개 도시만 지휘봉을 들고 네거리에서 근무하는 여자 교통 경찰을 쓴다는 것 등등 희한한 얘기를 줄줄 잘도 토해냈다.
《이름 없는 영웅》이라는 첩보 영화의 극본을 썼던 이가 처형당했는데 후에 시정 받았다는 놀라운 말도 했다. 서울에서 첩보원으로 있던 사람들의 생활을 그려낸 그 영화를 만드느라고 나라의 정보 부문에 많이 드나들었는데 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억울한 누명이라는 것이 확실히 밝혀진 뒤 가족이 전부 다 평양에 가게 되었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퇴폐적인 가요를 듣고 남녀 관계가 문란한 단련대 대장이 나떨어지고 새 대장이 온 일도 얘기했다.
오랜만에 숱한 소식을 얻어듣고 괜히 흥분이 되었다. 종업원들이 다 퇴근한 뒤에도 혼자 앉아서 이제까지 들은 얘기들을 음미해 보았다. 장송이 기웃거리더니 어디 갔다가 다시 위홍이와 함께 들어 와서 이제는 우리 끼리 야담을 하기 시작했다.
무척 많은 작업양의 일을 하던 늄창조는 겨울에 들어서면서부터 일감이 떨어졌고 한가하게 둘 수 없는 종업원들에게 방학을 주었는데 장걸이도 집에 돌아갔었다. 요즘은 《세계 1등》이 없는 그 방에서 나는 충분한 수면을 확보하고 있다.
장송이는 샤시 작업을 하면서 조선 각지의 사람들을 만난다. 제일 멀리로는 사리원에서 온 사람들도 만났고 거의 20명되는 종업원들을 거느린 반장으로 일을 잘하고 있다. 작업의 여가에 방문객들과 함께 종업원들이 가끔씩 야담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어느 정도인지는 오늘 알게 되었다.
젊은 농장원 부부가 밭 김을 매다가 밭머리에서 휴식하게 되었다. 더워서 옷 단추를 끌고 부채를 휘두르는 아내를 보던 남편이 춘정이 발동하여 아내에게 그 일을 할 것을 제의했다. 퍼런 대낮에 남들 눈을 살피면서 서둘렀는데 남자가 그만 밖에다 사정하게 되었다.
남자의 정액이 신문의 《노동신문》이라는 글자 위에 흘러 있는 것이 아까워서 버리지 말고 다시 넣어 버리자는 남자의 말대로 여자가 모아서 자기 몸 속에 넣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여자가 몸을 풀었는데 아이의 이마빼기에 《노동신문》이라는 네 글자가 박혀 있지 않겠는가?
위홍이는 휘발유 지급을 하면서 지대 안의 괜찮은 인물들과 늘 만난다. 많은 지배인들과 군대 참모도 있고 보위부와 안전부의 인물들도 수태 상대해 왔었다. 경비실에서 대부분의 낮 시간을 보내는 그에게 화제도 많다. 내가 위홍이와 일을 바꾸어 했더라면 이 글에 내용이 더 풍부해 질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다음은 위홍의 말이다.
중국에서 기업인으로 활동하는 캐나다 적 한국인이 있다. 나진이 개방된 뒤로 몇 번 다녀갔는데 마지막에 나진에 나온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간첩 혐의를 받고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갔다는 거다.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게 되자 풀려 나왔고 활동 무대인 중국으로 갔으며 계속 중국에서 기업을 운영한다.
《아래 동네》는 나진 사람들이 한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위홍이의 입에서도 《아래 동네》가 곧잘 튀어 나왔다. 아래 동네의 스낵 상품은 중국에서 많이 볼 수 있고 설화도 잘 먹고 있었는데 어느 한 번 한 트렁크 갖고 나오다가 원정 세관에서 단속하여 내용물을 빼고 나서 포장을 전부 뜯어 태운 적이 있다고 했다. 습기 많은 나진에서 하루를 지나고 나니 스낵이 전부 습기 들어 더러는 비비에게 먹였다.
한국 상품은 배척하면서도 한국산 승용차를 잘 타고 다니는 현상이 있었다. 《라선-외-XXX》번호를 달고 다니는 외국인 기업소의 한국산 승용차를 더러 본 외에도 조선 국내 기업에서 한국산 승용차와 굴삭기를 쓰는 것을 더러 보아 왔었다. 한 번은 디젤 엔진의 한국 찦차 한 대를 본 적이 있는데 인위적으로 고장을 낸 차였다.
조선에는 덕천에 자동차 공장이 있다. 《승리 58》을 생산한 역사는 꽤 오래 된 것 같았는데 지금도 나진 거리에서 드문히 보이고 《자주》호라 부르는 디젤 엔진 트럭도 만들었는데 요즘엔 생산한다는 소식을 얻어듣지 못했다.
《승리 58》은 휘발유 엔진인데 직류 발전기를 쓰기 때문에 배터리의 《+》 단자를 차체에 어스 시킨다. 자동차 특히는 트럭 대부분을 디젤차로 사용하는 조선에서는 휘발유차의 전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었다. 내가 그 찦차를 보니까 《승리 58》을 사용하던 습관대로 《+》 단자를 차체에 어스 시켰었다.
너무도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지만 조선에서는 있을만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내가 다루어온 차종 중에 직류 발전기를 쓰는 차는 조선의 《승리 58》을 제외하고는 단 한 대도 본 적이 없다. 전부 교류 발전기를 쓰고 있으며 배터리의 《-》 단자를 차체에 어스 시킨다. 그러니 인위적인 고장일 수밖에 없었다.
기사더러 단자를 바꾸어 달면 된다고 하고 혼자 작업하라고 시켰더니 머리를 갸우뚱하고 이해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는 거였다.
“배터리 단자가 바뀐 것이 아니고 어느 선이 어스된 것 같은데?”
시동은 걸렸으나 릴레이들은 대부분 타 버렸고 창문 유리가 오르내리는 것을 조절하는 스위치는 원래와 정 반대로 작동했고 헤드라이트와 램프, 와이퍼도 작동이 정상적이 아니었다. 게다가 배터리를 연결하는 터미널에 분명히 《+》와 《-》가 씌어져 있는데도 자기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당신의 고집을 나는 꺾으려고 하지 않겠소. 이 차를 생산한 회사는 1년에 자동차를 백만 대도 넘어 생산하고 있소. 당신의 말대로 터미널을 다 바꿔 달아보지 그래?”
많은 경우에 무지를 보여주는 조선 기사들에게 나는 무료 강습을 얼마나 해 주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그네들의 고집을 꺾어 놓는 것도 신물이 날 지경이 됐다. 고집통 기사들에겐 첫 마디에 먹혀들지 않으면 아예 보닛을 닫아 버리고 아무 말 없이 차 곁을 떠나 버리는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 기사는 나의 말에 수긍한다는 뜻인지 모를 말을 했었다.
“체, 아무리 많아도 어떻게 한 개 회사에서 백만 대나 만듬까?”
“그러지 말고 당신이 직접 정주영 아바이한테 물어 보고 나서 이 차를 수리하오!”
한국의 역대 대통령과 같이 정주영 회장을 잘 알고는 있지만 《아래 동네》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누구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번에는 엉뚱하게 화제를 돌려 대었다.
“아침에 시동이 잘 안 걸리는데 배터리를 하나 다른 걸로 하면 어떻음까?”
배터리는 새것이었다. 바꾸어 달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게 되었다. 얼마 전에 우리 매점에서 산 거였는데 이미 거의 천 개 정도 팔았지만 오작이 두 개밖에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이 차는 모빌유(엔진 오일)를 바꾸면 아무 이상도 없는 차요!”
차를 다루는 기사가 엔진 오일을 교환하려는 생각을 아니하고 생뚱 같은 궁리만 한다. 나는 오일 게이지를 뽑아본 후 결론을 내린 거다. 지난해에 장로의 채종 농장에서 사갔던 중국의 새차는 1년 반이 지나서야 엔진 오일을 교환했었다. 오일 필터가 완전히 막혀버리고 필터 자체가 큰 압력을 받아 파손되면서 누유 고장이 났던 것이다. 다행히 시동을 금방 꺼버렸으니 망정이지 엔진을 대보수할뻔 했다. 돈도 돈이겠지만 차를 그렇게 다루어서야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조선의 차들은 오일을 보충만 하고 일정한 시간에 교환하는 작업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엔진을 대수리하더라도 캠은 거의 바꾸지 않는데 조선의 차들은 이상하게 캠을 자꾸 교체하기에 그 원인을 분석해 본 결과 역시 오일 문제였었다.
게다가 필터도 제때에 교환해 주지 않았고 오일은 추운 날 아침에 걸직한 콜타르나 마찬가지다.
그런 차가 배터리가 아무리 좋은들 시동이 걸리겠는가?
그 기사는 후일 길에서 만나 게면적은 웃음을 짓고 고장이 제거되었다고 알렸다. 배터리 단자를 바꾸어 달고 오일을 교환한 후 지금 잘 뛰고 있다는 말을 했다. 나는 보닛 뚜껑을 열어 배터리와 오일 게이지를 한 번 확인해 본 후 아무 말 없이 떠나 버렸다.
《아래 동네》는 가깝고도 먼 동네이다. 이것은 위홍이의 말을 듣기 썩 전부터 내가 느끼고 있던 거였다. 중국에 사는 우리들한테는 점점 가까운 거리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조선 사람들한테는 언제나 멀고 먼 존재로 그네들한테 잊혀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될 지경이다.
“카이판라-!”
주방 쪽에서 이모의 높은 소리가 들려 왔다. 이 말은 중국어인데
《식사시간이 됐다!》
는 말과 같은 뜻이다.
요즘 외숙모가 잠시 귀국해서 이모와 설화가 주방을 맡고 있다. 용철이가 닛산을 몰고 회사 구내에 들어서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외숙모의 음식 솜씨는 정말로 뛰어 났고 항상 적은 투입으로 풍성한 식사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음식 맛도 기막히게 좋다. 이모나 설화가 《주방장》을 맡는 날이면 맛부터 시작하여 요리와 종류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었다. 외숙모가 없는 동안에는 주방에 투정이 그치지 않는다.
“이 식당 로반을 바꾸지 않으면 다시 밥 먹으러 오지 않겠다. 이래 가지구서야 장사를 어떻게 해 먹겠나? 장사를 망치겠다!”
로반이란 주방을 책임진 사람을 두고 하는 농담의 말이다. 중국어로 보스 혹은 가게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모는 일도 일이겠지만 나진에 온 후 많이 게을러져 있었다. 외숙모가 있으니 아침 늦잠을 잤고 음식 솜씨는 괜찮았지만 그전처럼 알뜰하게 품을 먹여 하는 현상이 없어졌다. 될수록 간단히 하는 쪽으로 했고 휴일 날 아침에는 늦잠을 자다가도
“자리 페구 자자 – !”
는 소리만 들리면 정신 없이 달려 나왔었다. 갱년기 증세로 잠이 딸리는 듯 항상 얼굴에 피곤을 싣고 다녔다.
“야, 야! 모르겠다. 대충 먹고 잠이나 자자.”
우리가 투정부릴 때 이모는 늘 이런 말로 위기를 풀 군 했다. 그러나 이모가 말하는 《잠을 자자》는 패 치기가 아니고 진짜 잠을 잔다는 소리였다. 식사가 끝난 후 이모는 진짜로 꿈나라에 갔고 우리는 우리대로 한밤중까지 카드놀이를 했다.
바야흐로 자정이 넘어 가고 있는데 갑자기 용철이가 나타났다.
“석건 영감이 중독됐다. 지금 막 병원에 실어다 놓고 오는 길인데 집에 알려야겠다.”
수리소 경비실에서 교대 시간까지 잠을 자던 석건 영감이 굴내 (연탄가스) 를 먹고 중독되었고 남수남이 교대하려고 깨웠는데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아 용철이와 얘기하고 지금 둘이 닛산으로 병원에 실어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용철이더러 수리소 경비실에 돌아가서 보게 하고 나는 영철이에게서 88호 키를 받아 들고 수남이를 태운 채 동명동으로 줄달음쳤다.
석건 영감은 군부대에서 차를 오래 운전했는데 자기 말로는 배터리 하나를 13년이나 사용해서 표창을 받기도 했단다. 그런데 운전술은 그닥잖았고 전기 방면을 거의 몰랐으며 기계 방면도 대충 알고 있어 정비 작업은 언제나 엉망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있어 반응이 늦고 시력도 안 좋아 로따가 지난해 연말부터 수리소 경비를 서게 했다. 오누이 자식을 두고 있었는데 아직 취직 전이어서 영감의 생활비로 네 식구가 째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명년 4월이면 연로 보장을 받는다고 한다. 나는 나이 60에 퇴직하고 그냥 기업소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중업원들 중에서 집이 제일 먼 곳에 있었는데 배급을 실어다 준 적이 있어 내가 집을 알고 있다. 외국인이 민가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기에 수남이를 태우고 갔던 것이다.
노친을 태우고 병원에 갔다. 내가 가스 중독 사고를 치고나서 실려 갔을 때 치료를 거부하던 인민 병원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영감을 안고 울음을 터뜨린 노친은 아예 다른 사람의 존재를 잊은 듯 했다. 의사가 거듭 위험기를 벗어났다고 해서야 안심이 되는지 울음을 그치고 우리한테도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영감은 추운 구급실에 누워서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의사는 주사를 놓을 염을 하지 않고 아침까지 푹 자두면 될 거라면서 웃옷을 내의까지 벗겨냈고 노친이 갖고 온 이불을 덮어주지 못하게 했다. 차게 굴면 정신을 빨리 차릴 거라면서 담요도 빼냈고 정신을 추게 되면 이불을 덮어주라고 했다. 추운 병실에 오래 있질 못하겠다. 노친에게 인사하고 나와서 수남이를 수리소에까지 태워 주고 다시 회사에 돌아 왔다.
날 밝은 후 수리소 경비실에 가 보았더니 온돌에 큰 사발만큼한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수남이는 그 후 얼마 안되어 소리 없이 해고되었다.
온돌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많이 일어났는데 우리 훈춘 식구 다음으로 경비실에서 사고나기는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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