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건 영감이 완쾌되기 전까지 집이 가까운 이춘일이 수리소 경비를 섰다. 로따는 걱정 되어 나더러 하루에 몇 번씩 특히 저녁 시간에도 한두 번씩 살펴보고 오라고 시켰다. 하여 이춘일과 한담하는 시간을 더러 가지게 되었다.  

춘일은 지난해까지만도 처가에 얹혀 살았다. 한살 터울로 3형제 아들을 거느리고 청계동의 처가에서 살다가 지난해 연말에 수리소 옆의 집을 만 오천을 주고 샀는데 로따가 돈을 꾸어 주었었다.
로따가 비사때문에 심장병이 발작했던 그 날 두 번째 구명은인이었고 승용차수리에 장끼가 있었다. 운전을 잘 했는데 버스 정비도 김봉식, 이창주 다음으로 잘하는 재간둥이었으나 입이 헤프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까부는 경향이 있어 김중신에게 얻어맞은 적도 있다.

휴일 때면 자진해서 수리소 경비를 가끔 서주었고 이번에도 자진해 나왔는데 여름철에 벤츠 승용차 오디오를 도난 당했을 때 로따가 의심하는 상대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다들 그를 경계하고 있는 중이었다. 경비 설때는 가끔 아들 녀석을 보내 자기가 없는 동안 지켜보게 했고 학교에 잘 가주지 않는 둘째 놈을 단속하기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희떠운 소리에 가까운 면도 있었으나 좋은 언변때문에 듣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살살 구슬려서 회사의 승용차들을 빌려 쓰고 버스도 허락 없이 움직인 적이 있었다. 적위대 훈련 때 명호까지의 거리가 좀 멀었으므로 로따는 종이돈 1만을 준 외에 춘일이의 215호를 내어 실어 가게 했다.

명호에서 후창 세관까지는 한 개 역 거리밖에 안 되었다. 그 날 후창 손님을 싣고 돌아 왔는데 수익금을 바치지 않았다. 훈련이 끝났을 때 버스를 움직여도 된다는 허락이 없는 상태에서 손님을 싣고 후창에 갔고 돌아 올 때 종업원들을 실었는데 후창 왕복을 한 번 더 해서 나온 수익금까지 바치지 않았다. 먼저 번 수익금까지 근 1만 원을 가지고 어느 종업원네 집에 가서 술놀이를 하는데 탕진해 버렸다.

그때 당시 운전수 반장이었던 이장근에게 큰 책임이 있었고 그것은 후일 이장근이 해고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기사 중에서 박동혁과 둘이 술을 입에 대지 않아서 로따는 춘일이가 버스를 운전하는 것만은 걱정하지 않았었다.  

연속 이틀을 밤중에 수리소 경비실에 갔다가 한참씩 한담하고 돌아 왔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나에게 며칠 후 후창에까지 신세질 것을 청드는 거였다. 처남이 개성에서 오게 되는데 마중가야 한다면서 내가 차를 운전하고 함께 갔다와 주었으면 했다. 나는 그때 가서 보아야겠다고 말해 주고 내려 왔다.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완쾌된 석건 영감이 다시 출근하고 있었는데 11월 중순쯤으로 기억된다. 로따 내외가 훈춘에 갔고 그날 따라 쟈쟈의 차가 발전소의 파이프를 싣고 나와서 수속 때문에 선봉 쪽에 갔다 오고 보니 88호의 키가 내 손에 남게 되었다.  

아침부터 회사 쪽에 와서 기웃거리던 춘일이가 저녁때 에 다시 내려 왔는데 내가 후창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번째 눈이 내린 뒤 어서 조금 걱정했는데 가다보니 말끔히 눈을 친 도로여서 걱정을 덜게 되었고 개성 나그네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또 공부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개성 나그네는 춘일의 큰 처남이었다. 나이는 춘일이와 비슷한 사십대 초반이고 소아마비의 장애자로 아내는 이십대 후반의 처녀를 맞아 애까지 보았는데 전기에 장끼가 있다고 한다.    

후창에 도착한 후 어스름한 달빛 아래에서 한시간이나 기다렸으나 개성 나그네는 나타나지 않았다. 틀림없이 오후 제일 늦은 시간이라고 기별이 전해왔다면서 춘일이 더 기다리자고 해서 또 30분을 기다렸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 흩어진 한적한 후창 세관쪽에 좀체로 나타나주지 않았다.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워 히터를 틀어놓았다. 음악을 듣고 있다가 춘일이 돌아가자고 얘기해서 귀로에 오르고 말았다. 명호에 거의 도착할 때 절름거리는 사람이 저 앞에 나타났다.  

“저 사람이다!”  

춘일이가 반갑다는 듯 소리쳤다.  

개성 나그네는 얼굴이 미남 형이었다. 장애자인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알고 보니 여행증을 받지 않았고 후창 세관에서 좀 떨어진 철조망 밑을 기여 들어 왔었다. 여행증 없이 지대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늘 쓰는 방법의 하나이고 철조망이 망가진 곳이 몇 곳 된다는 것이였다.

일부러 망가뜨린 그 곳으로 여행증이 필요없이 통과할 수 있다는 걸 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있는 모양이다. 전기 사정이 안 좋으니 감전 사고가 날 가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개성 쪽에서 불빛이 환한 곳은 남조선이고 새까만 곳은 공화국 북반부로 확연히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을 나진항 쪽에 거의 도착하면서 들을 수 있었다.  

먼저 신흥동 입구에 있는 춘일의 작은 처남 집에 갔다.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인사 수작이 어찌도 오랜 지 반시간을 기다려서야 큰 처남식구들이 다 내려왔다. 애까지 4명을 싣고 역전동의 어느 골목에 가서 춘일이만 남고 개성식구 3명이 내렸다.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 하더니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전기수도 파이프를 묻으려고 그러는지 골목길을 파헤쳐 놓은 쪽을 헤드라이트로 한참 비춰주어 불편한 몸을 잘 가누면서 걸어 들어가게 해주었다. 한창 걸어 들어가다가 저 멀리서 손짓하는 모습을 보고난 뒤 차 머리를 돌렸다.  

개성 나그네는 이번 길에 나진에 정착할 계획으로 먼저 아내와 아이를 보내고 자기는 떨어져 온 거였다. 나진에서는 손재간이 있으면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었고 애가 큰 다음 여자가 장사에 손대면 한 가족이 잘 살 수도 있었다.

나진이 전국적으로 장사의 무대가 되고 재간둥이들도 마음껏 재주를 써먹을 수 있다는 점이 흡인력이 있었다. 로따가 조선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 나에게 집을 지어주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나진에서 사는 것도 괜찮은 일 일거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해 내였다.

나의 현재 재간으로 나진에서 1위를 확보하지 못해도 3위 내에 들수 있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그 재주로 조선에서는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다. 아직도 순수한 면이 그대로 있는 나진 처녀들이 그저 좋기만 하다. 결혼하면 먹고 사는 데는 걱정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결혼 후 가족을 데리고 중국에 다녀오지 못하고 나 혼자만 귀국이 가능하다. 영원히 나진에서 살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화교인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었고 중국 국적으로는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난다해도 안타깝게도 결혼이 허락되지 않고 결국은 조선에서의 결혼이 불가능한 일이다. 거의 2년 동안 사랑스런 여자들을 많이 보아왔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이고 조선 여자와의 결혼은 념두에 두지 않고 나의 실패한 결혼 생활에 대해 참답게 정리할 시간도 가져보았다. 사랑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고 인생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였었다.    

춘일이는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처남에게 말해서 개성 고려인삼이나 인삼주를 갖다주랴, 니가 좋아하는 꼴랴(춘일이는 콜라를 이렇게 말했다)를 사주랴, 아니면 언제 집에 들어갈 때 수산물을 사주랴 하면서 고마움을 꼭 표시하겠다고 했다.  

물건이 손에 오고 나한테 넘겨준 후 다시 말하든지 그게 아니면 지금 듣지 않은 걸로 하겠다고 내가 말해서야 입을 다물었다. 말은 번드르르 하지만 아직까지 로따의 빚을 물지 못했고 마누라도 집에서 솥 뚜껑 운전이나 하다 보니 정말 나한테 줄만한 무엇이 있는 지도 의심스럽다.

기사들 가운데서 몇 명은 로따가 아끼면서 쓰는 사람들이었는데 춘일이가 그 중의 한사람이어서 내가 그의 일을 도와 나선 것이지 절대로 생활난으로 쪼들리는 그들한테서 그 어떤 보수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그 동안 자그마한 선물이나마 여러 명한테 주었지만 아직까지 단 하나라도 받아본 적이 없다. 오늘 일을 소문내지 않기로 춘일이와 약속하고 집에까지 실어다주었다.

로따에게도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나와 춘일이 그리고 당사자인 개성나그네 가족들만 알고 있을 뿐이다. 드라이브를 즐기는 나였기에 우리 식구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노선 운행이 회복되고 춘일이는 중대한 교통 사고를 빚어냈다.

춘일이는 올 초여름에 관곡 정류소에서 손님을 싣고 선봉으로 가던 중 석유정제공장 정문 앞에서 한번 사고 친 적이 있었다.  

석유정제공장 정문은 바로 도로 옆에서 3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도로 양켠을 잘 관찰할 수 있게 광장처럼 확 트여져 있었고 정문 건너 편에 태양상이 있었는데 잘 다듬어진 소나무 몇 그루에 둘러싸이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춘일이의 말로는 그 날의 시속이 약 60키로였다고 한다. 공장 정문으로 승용차 한대가 나오는 것이 보이고 버스가 지나가는 동안에는 도로에 들어설 것 같지 않아 경적을 울리면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버스가 정문 가까이에 거의 접근하는데 승용차가 갑자기 좌회전하면서 도로에 들어섰다. 그 속도 그 거리에 도저히 접촉사고를 피면 할 수 없었다.  

거대한 충격에 승용차는 180도 머리를 돌리고 멈춰서 버렸으나 버스는 계속 앞으로 나갔다. 215호는 엔진이 후런트 장착이고 승객 문도 역시 앞에 있는 거였는데 승용차와 접촉하면서 문틀이 일그러져 들어와 오른쪽 앞바퀴가 오른쪽으로 돌지 못하게 막아 버리었다.

접촉할 때 관능적으로 왼쪽으로 꺾은 핸들이 오른쪽으로 돌아와 주지 않아 버스는 왼쪽으로 도로를 벗어나게 되었다. 다행히 태양상 앞을 지나 도로 옆으로 떨어졌고 마주 오는 차가 없었던 것도 큰 다행이었다. 도로가 강냉이 밭보다 1.5미터 정도 높았는데 버스가 강냉이 밭에 들어가기 전 경사 진 곳에서 멈추어 서게 되어 자연히 밭쪽으로 넘어지게 되었다.

선 자리에서 넘어졌기에 구을지 않았고 경상자 몇 명이 생겼을 뿐 이였다. 석유정제공장의 클레인차가 도로상에 끌어올렸을 때는 오른쪽 앞 유리가 한 장 깨진 외에는 옆 창은 하나도 깨진 것이 없었다. 휘발유 수십키로를 흘린 뒤 였는데 그런 대로 다른 곳은 이상이 없어 휘여 든 승객문틀을 앞으로 제끼고 난 뒤 춘일이가 몰고 회사에 돌아왔었다.  

그 날, 사고현장에 갔던 나는 승객들이 말하는 걸 엿들을 수 있었다.

양덕 고개 기차사고도 이렇게 생겼겠다, 기여 나오고 보니 살았구나 하고 장탄식 했다는 것, 사고를 당해보니 그저 그런거로구나 뭐 어쩌고 저쩌고 저들끼리 금방 있었던 사고를 두로 깔깔했었다. 담당차장이였던 보경이는 수익금을 넣은 가방을 잘 껴안고 있었고 사고 당시 승객들더러 깨진 윈도우 글라스 구멍으로 나오게 했고 옆 창이 깨지지 않게 밟지 말라고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난리 판에도 춘일이의 수리공구 몇 개는 끝내 잃어졌다. 승객 70여명 중에 물건 잃은 이는 없었고 사고 때문에 회사를 찾아다니면서까지 애 먹이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석유정제공장 클레인 기사는 고약하기 이를데 없었다.

승용차기사(후일 알았지만 그는 면허가 없이 그 승용차를 운전했다)한테 전부의 책임이 있어서 후에 수리비로 6만원을 받아냈지만 그 당시 작업을 마치기 전에 승용차와 기사를 빼돌려서 현장에 간 교통경찰들한테 불편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버스를 노상에 끌어올리는 작업을 끝낸 후에(작업에 3-4명이 참가했다) 술 소비를 내라고 보경이를 물고 늘어졌다.

사고현장이 다 수습되여 가는 판에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서 내가 주머니에 있던 3백원을 뿌려주었다. 무지막지한 그네들과 시비 캐기 싫었고 시간만 낭비할수 없었다. 시비를 캐기 시작하면 일하는 팔다리보다 혀가 더 발달한 그네들과 오래동안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그러다가 혹시 상욕이 터지기 시작하면 싸움을 피면하기도 어려웠던지라 일거리가 많은 나에게는 3백원을 주고 시간을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번 사고는 춘일이한테 조그만치도 책임이 없는 사고였고 이번 사고도 역시 책임이 없는 사고였지만 사고 중에서도 제일 골치 아픈 인명사고였다. 게다가 위치도 인민위원회와 가까운 인민병원 길목 이여서 노선외 운행까지 겹치면 처리 결과가 엄중한 쪽이란 걸 대뜸 짐작할 수 있는 큰 사고였다.  

나진 시내 안의 주요 도로는 대체로 영문자모 《X》모양으로 되어있다. 선봉쪽으로 가는 북동쪽 길이 남산호텔 부근의 동명다리를 통해 남동쪽 안주동까지 연결되였고 북서쪽 청계동에서 내려온 길이 인민위원회 앞의 다리(이름을 모른다)를 지나 기차역을 경과한 후 남서쪽의 창평동까지 갔는데 대체로 남북방향인 이 두 도로는 중간 부분이 남산호텔에서부터 인민위원회까지 동서방향의 직선으로 된 도로에 의해 이어졌었고 사고는 인민위원회와 은행사이의 병원길목 T형 도로가운데서 일어난 거다.  

우리 버스는 장마당에서 청계동으로 가는 시내버스 노선에도 나갈 수 있었다. 그 노선은 나진시장-남산호텔-인민병원-신흥동-청계동이다. 인민병원 길목을 지나 약 50미터면 인민위원회앞 다리이고 다리를 건느기 전에 우회전하면 곧바로 신흥동 입구로서 청계동과 준마골로 갈 수 있다.

그러니 이번 사고 때의 운행을 노선외 운행으로 볼 수 없었다. 춘일이와 차장(누구였던지 기억나지 않는다)은 청계동으로 짐을 실어주고 돌아오는 길이였다고 했다. 일단 노선외 운행은 아니었지만 사고 자체가 황당하기 짝 없기도 했다.

왜냐 하면 사망자는 주정뱅이였고 215호가 다리 목에서 좌회전해서 직선 도로에 진입한 후 속도가 올라가는 중이였는데 그 주정뱅이가 북쪽의 병원 길목으로부터 갑자기 남쪽의 차도에 쏜살같이 뛰어 들었고 바로 춘일이의 운전석 앞에서 윈도우 글라스 밑의 딴딴한 차체에 머리와 몸을 들이 밀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이 대였던 부분은 철판이 오그라 들어갔고 주정뱅이는 즉사했다. 병원이 가까이에 있어 바로 들어갔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 사고 현장을 보고 난 교통지대에서는 자살 같다고 판단을 내려버렸고 춘일이와 215호는 안전부로 직행하고 말았다.

종전대로 며칠 후 버스는 돌아 왔고 춘일이는 회사가 설립된 이래 여섯 번째로 단련대로 간 사람이 되었다. 사망자 가족에게는 보험회사에서 지불한 현금 10만이 조달되였고 세포비서와 용철이가 뒤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히 오가고 나서야 일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운전수와 차장회의 때 내가 음주 운전과 같이 노선외 운행을 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짐실이를 아예 절대 하지 못하게 말해 두었었다. 하지만 역시 그 챙겨먹는 수익금으로 탐욕에 눈이 어두운 일면이 사고의 장본인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조선 전국적으로 매년 5월과 11월을 사고방지 대책월간으로 규정했음에도 이상하게도 그 2개월 간과 그 가까운 시간에 사고를 피면하지 못하는 우리 회사의 버스였다.

사고 때문에 지난해에는 전운선, 김용구와 조경화가 버스에서 내렸고 금년에는 최광수와 한영근의 뒤를 이어 춘일이가 사랑하는 버스와 이별을 하게 되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동방영도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응원합니다 응원합니다
1
응원합니다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