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초에 로얼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을 다 볼 때까지 내가 훈춘에 있었다. 그 지긋지긋한 인수원의 작업은 지금 돌이켜봐도 신물이 난다. 그런데 이 달에는 황기사가 5회 밖에 싣지 않았고 로얼도 장례식이 끝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일에 뛰어들었으므로 나는 그 중 한번만 참여했을 뿐이었다.  

새 세기는 바야흐로 박근하고 있다. 나는 다른 식구들 먼저 훈춘에 돌아올 수 있었다. 방학 전에 있게 될 아들애의 학부모회의에 참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고유어로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를 한다는 말이 있다. 신사임당은 제일 대표적이고 모범적인 어머니라는 걸  독자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거다. 중국의 조선족 사회에서도 훌륭한 부모님들이 많이 출현했었다.

아들의 미래를 내 신앙처럼 알고 사는 나로서는 자식의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 모성애를 멀리 떨어진 애한테 나의 모든 사랑을 몰 부어 참다운 인간이 되도록 교육하고 싶었다. 훌륭한 아버지라는 말을 듣지 못해도 훌륭한 어린이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처신하리라고 마음 먹은 지 오래되었다.    

아들애의 담임 선생님은 29세의 중국어교사다. 괜히 내 마음속에 그립기만 한 원매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녀도 지금쯤은 이 나이겠고 계속 학교에서 근무한다면 중국어 교사로 있을 거였다. 오늘 담임 선생님과 물어보면 혹시 원매의 소식을 얻어들을 지도  모른다.  

애가 유치원에 다닐 때 아침에 데려가고 저녁에 데려오면서 학부모 회의에도 참가하고 운동경기에도 참가했었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는 아무것도 배운 기억이 없는데 지금 애들은 학교에 붙기 전에 우리말의 자모는 물론 중국어도 배우고 그 외 영어에다가 미술, 음악 등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었다.

아들애는 학교에 붙기 전에 벌서 신문을 줄줄 내리읽었고 그림을 잘 그렸는데 유치원에서 언제나 넘버 원이였다. 학교에 입학 한 뒤로 먼저 학급장을 시켜보았는데 나이가 제일 어린 축에 속했으므로 두 달만에 덩치가 크고 어머니가 학교 선생님인 다른 애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학급장은 곧바로 공부를 잘 한다는 일종 표현 형식이다. 공부를 잘 하고 총명한 애를 어느 선생님이나 다 귀여워해 주었다.

여태까지 동생네 부부와 거의 같이 살았으므로 늘 숙모와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했기에 중국어 발음이 정확했고 그래서 중국어 선생님이 잘 훈련시켜 중국어 이야기대회에서도 참가시켜 학교적으로 2위를 할 수 있었다.

아직 어려서 스포츠를 못 할 뿐 다른 공부는 막히는 데가 없었고 언제 한번 집에서 공부하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 할 정도로 자기 절로 알아서 해 주었기 때문에 집 식구들이 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영리한 애다.  

조선족 학교는 한족 학교보다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명목이 많아 일일이 기억하기 힘든 비용을 잘 걷어 가는데 그 때문에 조선족 학생이 한족 학교에 다니는 현상이 많아졌다. 어느 한족 학교에서는 조선족 학생이 1/3이나 된다고 한다.

게다가 많은 결혼 적령기 여자들이 국제 결혼으로 다른 나라에 갔기에 조선족 학생 수는 계속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1학년에 두 개 학급이 있는데 그것도 한 학급에 28명밖에 안 된다. 내가 다닐 때는 비록 학교가 지금보다 적었지만 한 학급에 50명 이상씩 다섯 개 학급이나 있어서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많은 편이였다. 시장에 가면 가게주인이 물건사는 사람보다 더 많아 보이는 것처럼 요즘 학교에 선생님이 학생보다 더 많아 보이는 게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오후에 교실에 찾아 들어갔다. 부모들 중 일방이 참가한 것은 절반 정도였고 나머지는 할아버지 아니면 할머니들이다. 아빠 엄마가 다 돈벌이로 외지거나 해외에 나가있고 부부 중 일방이 집에 없거나 나처럼 이혼한 가정이 더러 있었기에 부모 들 중 일방이 없거나 다 없는 학생이 절반 정도 되는 건 이미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었다. 그나마 교실에 벽시계, 냉온수기, 컴퓨터와 칼라TV, 녹음기와 책장이 있는 것이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내가 20여 년 전에 공부할 때는 지금처럼 스팀이 아니고 중간에 화로 한 개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때와 비교해 볼 때 지금 애들은 호강해도 너무 호강하고 있는 것이다.

나진의 학생들이 무거운 나무 단을 지고 산을 내리는 것을 보면서 1년에 한번씩 산에 나무하러 사생이 다 동원되어 다니던 소학교 때 일을 기억해 냈는데 이제는 역사로 되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20여 년 전에는 상상도 못하게 컴퓨터 교실에다가 도서관까지 있다. 참으로 기막히게 좋은 세월이다.  

담임선생님은 한 학기동안 수업과 학생들의 정황에 대해 말씀하고 나서 학기말 성적을 발표했다.

1학년 때 애들은 비슷한 데가 많다. 아직 대뇌가 미발달한 애들을 내놓고는 거의 다 좋은 성적이다. 우열을 가늠하기 힘든 때이고 학년이 높아짐에 다라 좀씩 차이를 보이다가 그 중 몇 명만 뾰족하게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소학졸업 때까지도 성적이 수수하던 학생이 중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 하기 시작해서 유명한 대학에 붙게 되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습성적 하나로는 결정적으로 우열을 가늠하기 힘들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한 학생은 얼마든지 있었다. 학습성적이 우수한 12명 가운데서 제일 마음놓을 수 있는 학생이 3명이라고 했다. 학교 전체 학생들이 참가한 이야기대회에서 상을 받은 학생이 2명 이였는데 이 중에는 나의 아들애가 들어있었고, 학급회의 사회자 경연에서 4학년 학생 한 명과 우리 아들애가 우승을 따냈다고 했다. 또 학급의 《일기왕》으로 뽑혔는데 엉뚱하게 잘 써낸다는 것 이였다. 집에 오면 뭐나 닥치는 대로 읽기를 좋아하는 애가 뽑히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어쨌든 선생님이 칭찬하는 학생 중에 아들애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방학은 1,2월 2개월 간인데 주의사항도 말씀하셨다. PC방이나 비디오방 특히는 오락실에 보내지 말고 돈을 많이 주지 말라고 했다. 안전에 특히 주의하고 위생을 잘 지키게 단속하라고 했다. 교실에서 돈이 잃어지는 현상이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데 도둑질에 이골이 난 학생이 있다고 했고, 부모가 거두는 애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거두는 애들 보다 더 지저분하다고 했다. 어떤 부모들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지를 모르듯 밤새껏 패치기를 하고 나서 아침밥 대신 돈 10원을 주면서 사 먹으라고 하는 일도 있는데 이건 너무나도 한심한 일이라고 했다.

아침밥을 지어 먹이지 않는 부모는 옷도 빨아 입히지 않고 세수도 시키지 않은 채 애를 학교에 보낸단다. 애들 손에 많은 돈을 쥐어주어 고약한 버릇을 굳혀 준다면서 삼가하기를 재삼 강조하고 나서 회의를 끝내였다. 학부모회 주임으로 내가 당선되었는데 거절했으나 어쩔 수 없이 맡고 말았다. 떠돌이 때문에 학부모들의 행사에 다 참가하기도 어려운 처지여서 일단 맡은 후 적극적인 몇 몇 학부모들이 협조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교실 밖 복도에 내 보내고 집집이 돈을 거두었다. 많은 돈은 아니고 한 학기동안 수고한 선생님께 선물을 간단한 걸로 성의껏 사 드리려는 것이었고 이미 내려져 온 유행에 따르는 것이었다. 다들 이의 없이 돈을 내고는 돌아갔고 몇 몇 적극적인 학부모들은 담임선생님을 식당에 초대하게 되었다. 식당에서의 고역은 말 할 나위 없이 견디기 힘들다.

일행이 모두 12명인데 배갈을 한잔씩 돌리면 제일 적어도 열두 잔을 받아 마셔야 한다. 나는 넉잔 만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꼬꾸라지기 전에 선생님 옆에 앉았던 내가 조용히 이혼에 대해 얘기했었다. 선생님은 알고 있다고 했다. 애들의 호적을 확인하기 위해 호적부를 학교에 가져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알아낸 것이라고 한다. 선생님의 세심함에 놀랐고 그게 아니래도 아들애를 귀여워 해주는 선생님이 고마워서 목숨을 내 걸고 술 마시는 광경이 되어버렸다. 원매의 일은 적당한 시간이 나지지 않아 끝내 물어보지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나와서 토해버리고 들어앉아 또 두 잔을 마셨다. 다시 나와서 토한 후 또 두 잔을 마셨는데 이제는 인사 불성이 되어버렸다. 부실한 내 체질이 술을 받아주지 못 하는데는 나도 어쩔 방법이 없다. 그래도 넉 잔을 덜 마신 것까지는 생각해 낼 수 있었고 콜라 두 캔을 마셔서야 구역질을 누를 수 있었다.  

2차는 노래방이다. 한 학년의 다른 학급에서도 바로 옆방에 와 있었고 또 다른 방에 있던 교장선 생님이랑 두 학급의 방을 돌고 갔다. 우리 학급의 대표로 두 명이 옆방에 가고 그 쪽 방에서도 두 명이 이 쪽으로 와서 서로 어울려서 맥주를 마셨다.

조금 마시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나니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감이 들었다. 저 쪽 방에서 다른 학급 담임선생님이 오시더니 애를 나한테 줄 것이지 왜 다른 선생님한데 주었느냐면서 귀여운 투정을 했고 교장선생님도 애를 잘 키워주길 부탁하면서 같이 맥주를 건배해 주어서 나는 기분이 둥둥 뜨게 되었고 맥주도 어지간히 더 마실 것 같아졌다.  

3차는 꼬치 구이었다. 나는 들어서자마자 라면 한 그릇부터 시켰다. 배에는 물만  찼고 피곤한 몸은 휘청대기만 했었는데 라면이 들어가고 보니 그제야 속이 편해졌다. 잡담과 웃음으로 시간을 보내는 중 맥주도 축이 났고 꼬치도 잘 팔아 주었다.

자정이 다 지나가는 시간이다. 선생님을 보내 놓고 학부모들이 다시 발동이 걸렸다. 다른 노래방에 4차로 들어가 새벽 두시까지 놀고 얼음 방에 5차로 찾아갔다. 두 팀으로 갈라져 우리 팀은 우유와 커피를 시키고 저 쪽 팀은 아직도 술이 모자라는지 큰그릇에 얼음을 쏟아 넣고 3리터 짜리 포도주 두 병을 부어 넣고 나서 다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얼음 방의 주식인 아이스케이크는 잘 팔리지 않을 것이 당연한 일로 된다. 서로 모르던 얼굴들이 선생님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고 모여서는 5차까지 해야 하는 것도 요즘 유행이라니 따를 수밖에 없다. 새벽 세시까지 기억에 남길 만한 말을 하지도 못 하면서 고역을 치르고는 겨우 흩어졌다. 날이 밝으면 연길에 갔다 와야 했으므로 일찍 일어나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꿈나라로 하염없이 빠져들어 갔다.  

새벽녘에 눈이 좀 내렸다. 자동차의 경적소리에 잠을 깨고 커튼을 여니 눈이 덮인 북산이 보이고 산 위에서는 태어나서부터 이제까지 눈 익혀온 기념비가 붉은 오각별 하나를 인 채 눈 속에서 광채를 뿜고 있었다.  

나의 집은 연길로 가는 길목의 아파트에 있다. 연길 방향으로 가는 차들의 엔진 소리와 경적은 어느 때든지 상관없이 나의 방 창문을 두드린다. 북쪽 베란다에 나가면 서쪽으로 조선 새별군의 산들이 보인다. 움직이는 차들을 따라 시선을 서쪽으로 곧게 뻗은 도로 쪽으로 주면 그 산들이 자연히 눈에 안겨드는 거다. 남쪽 창문 밖으로는 대반령이 한눈에 안겨오고 중, 러 두 나라 경계선으로 보이는 살초제를 뿌려놓은 넓은 폭의 방화띠도 보인다. 창문 가까이에 가면 백리 훈춘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먼 옛날 일제가 두 번 째 샹하이를 건설하려 했다는 곳, 동방의 암스테르담과 북국의 홍콩을 운운하는 내 고향이다. 가운데로 흐르는 저 훈춘하는 두만강과 만나서 태평양에로 흘러 들고 있는데 나는 동년의 여름을 그 물 속에서 보냈었다. 물고기 잡이를 수없이 다녔고 강 건너 대반령을 타고 외가 집에도 부지런히 다녔다. 훈춘하를 거슬러 올라가 러시아 경계선과 머지 않은 고모 할머니네 집에도 드문히 놀러 다녔었다. 그 곳에는 금광과 동광이 있었고 끝없이 넓은 원시 삼림이 펼쳐져 있다. 몇 년 후에는 고모 할머니네가 살던 동네에 대형 수력발전소가 세워진다고 한다.

시내 밑에는 석탄이 8억t이나 매장되어있고 서쪽 시교에 화력발전소도 세워진지 오래다. 조선의 전기를 수입해 쓰던 일은 영원히 역사로 남고 말았다. 자원이 풍부한 내 고향이 진짜로 개발될 날을 나는 자나깨나 그려본다. 이제는 떠돌이 생활과 고별하고 내 고향에 영원히 남고 싶어졌다. 외국 나들이 때문에 고향을 떠난 친구들 얼굴을 여기서는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듯 하다. 그래도 조용하고 청빈한 생활이 좋을 것 만 같이 느껴지는 것은 내 동년을 고이 품은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제 몇 시간 후 연길에 가면 외국 나들이 바람에 날리지 않은 몇 몇 고향 친구들과 대학교 때의 친구들을 보게 된다.  나진에서부터 계획해 오던 일이다. 1년에 두 번 만나는 것도 사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나진행 때문에 친구들과 담을 쌓고 살아 왔었다. 지어는 제일 친한 동호의 늦장가 결혼식에도 참가하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신정 전에 일부러 친구들을 만나려고 시간을 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차에 타고 앉으니 몰려드는 피곤에 눈뜨기도 싫었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어제 일을 생각해 보았다.

조선족은 이제 1세가 개척한 연변 땅을 떠나 뿔뿔이 세계 각 국으로 흩어져 가는 추세로 벌써 몇 해 전부터 인구 부정장을 겪고 있었다. 1세가 겪었던 대 이주를 다시 한번 겪는 과정이다. 다른 점이라면 1세는 고정적으로 연변 땅과 그 주변에 대량 이주한 것이고 지금의 3, 4세는 무대를 넓혀 세계 각 국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고향에 돌아오는 이는 극히 적다. 학생 수가 형편없이 줄어드는 것이 제일 좋은 근거로 된다.  

조선족은 이주민의 후예로 다민족 국가에 살면서 유난히 강한 승벽심과 자존심 그리고 동포애를 간직해 왔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지려고 하지 않았고 어디 가든지 친형제답게 서로 환대해주고 보살펴 주는 것이다. 내가 서안(西安) W대학에 유학 할 때 이 점을 심각히 느꼈다고 할 수 있었다.

고향에서 3천키로나 떨어진 그 곳에서 우리 학교의 조선족 학생들은 서로 친형제처럼 보냈었다.  
자랑거리가 많던 조선족이 인구 부정장을 하고 있다면 조선족 사회의 기본바탕이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조치로 생육을 지지하고 널리 선전도 하지만 두 번째 아이를 낳는 가정은 가물에 콩 나는 격으로 너무 적고 하나라도 키우기 힘든 현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현상은 당분간 해결하기 힘든 일이다. 왜냐 하면 출국 수속을 해 준다는 미명을 내건 불법브로커들에게 사기 당한 가정이 부단히 늘어나고 외국 나들이로 돈을 벌어 온 가정도 생육의 적당한 시기를 다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골에 가면 총각들이 욱실거리는 속에 여자는 보고 죽자 해도 없다. 학교에 학생이 너무 적어 두 학교가 합치는 현상도 발생한다.

재학 중의 절반 정도 되는 학생들은 부모 중 일방이 없거나 부모가 없는 사랑이 결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설상가상이다. 우리 세대와 아래 세대가 도대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혼잡한 생각을 하는 동안 연길에 도착했고 여행사의 홍사장을 찾았다. 올해 백두산 관광객을 만여 명 받아 들여 연변의 여행 업계에서 한다 하는 인물로 부상한  친구다. 비파도 관광 후에 처음 만났고 알아 볼 일이 있었다.    

나진의 수리소 쪽에 강성회사가 빌어든 지 한참 되었고 그 중의 일부 종업원과 좀은 친해져 가고 있었다. 어느 하루는 경비실에서 인수원 박씨가 약장사를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 왔다. 《우황청심원》과 《안궁우황환》, 이 두 약 이름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었다.  

북경에서 가이드 할 때 손님들로부터 조선의 청심원이 기막히게 좋다는 데 구해줄 수 없느냐고 질문을 수태 받았었는데 그 때 당시는 구할 길이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내였다. 가격과 생산지를 잘 알아 낼 수 있었는데 관광객들 뿐 만 아니라 한국 쪽에 거래가 많은 홍사장이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아 물어보기로 했던 것이다.    

물어보고 나서 깜짝 놀랐다. 연변에서 한국 관광객들에게 팔리기 시작한 지 2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생산지는 평양의 석암 약제국이고 요즘은 청심원보다 효과가 5배나 더 좋은 안궁환이 더 인기 있다는 거였다.

강성회사의 박씨한테서 청심원은 《동의보감》처방으로 만든 것이고 김일성 주석이 애용하던 약인데 한국의 정주영씨가 높은 가격으로 한국에 내 간다고 들었었다. 마침 홍사장도 이 약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약장사 계획도 세워 놓은 터였다. 가격이 합리하면 같이 손잡고 할 것을 약속하고 나서 식당에 갔다. 대학교 때 친구인 우림을 부르고 소꿉친구인 용수와 동호도 불러왔다. 서로 인사 수작이 오가고 나서 즐거운 식사시간을 가졌다.  

축구에 대한 것이 제일 많은 화제였다. 중국의 많은 민족 중에 유독 조선족이 자기 프로 축구팀을 가지고 있다. 갖은 풍상고초와 세파에 부대낀 조선족에게 축구는 새로운 신앙으로, 정신적 기둥으로 되었다. 인구가 40만이 안 되는 연길의 홈 장에서 최고로 6만명이상이 경기를 관람한 기록을 내여 인구가 천만이상인 상해나 북경 홈 장을 뺨 칠 지경이다.

선수들 대부분이 연변 적인 조선족이고 일부만 국내 이적과 국제 이적으로 들어 온 선수다. 그런데 머나먼 절강성(浙江省)으로 팀 전체가 팔려가게 되었단다. 지난 해 원정 경기에서 상해 팀과 후반 44분까지 1대 0으로 앞섰다가 양심 없는 심판이 상해 팀에 핸드볼을 불어 주어 페넬티킥으로 꼴을 허락해 아쉽게 1대1로 빅 은 적이 있다. 그 때 연길 거리는 심보가 나쁜 심판을 몰아내자는 구호로 온 시내가 떠나갈 듯 한 데모도 있었다. 핸드볼이 아닌걸 불어 댔으니 팬들의 격분은 하늘에 치 닿을 수밖에 없다.

당시의 팀 코치는 한국의 저명한 학자이신 최은택 교수님이셨다. 나는 축구를 즐겨 할뿐더러 열광적인 축구 팬이기도 하다. 대학 때는 축구팀선수로도 있었고 유럽 여러 나라들의 프로 축구경기와  월드컵, 그리고 올해에 있었던 유럽 컵도 더러 보아왔는데 다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안타까울 지경이다.

중국의 축구는 수준이 형편없지만 우리 연변 팀이 있는 것으로 하여 일요일날의 경기를 빼 놓지 않고 보아 왔었다. 연길의 홈 장에 직접 들어 가 보는 것과 TV로 보는 두 가지 방법을 다 써 왔다.
올해에는 주일마다 기사들한테서 축구소식을 들었고 연변 팀의 운명을 두고 가슴을 조였다. 수년 동안 중국의 프로축구무대에서 용맹을 떨치던 연변 팀은 계속되는 경제난으로 위기를 겪다 못 해 끝내 팔려 가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로 인해 연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재미가 슬해질 것은 말 할 나위도 없다.

홈 장 경기에서 승패는 막론하고 매상이 부쩍 올라가던 식당의 경기도 떨어질 거였고 사람들의 정신도 한 동안은 허탈상태에 빠질 거였다. 사랑하는 팀이 멀리 타향살이를 떠난다. 이것은 중국의 조선족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경치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보다도 어 충격적인 축구 화제가 있었다. 독일의 유명한 축구스타 크린스만은 유태인 묘지에서 깊이 머리 숙여 숙연히 애도했다. 그 행동자체가 유태인에게 지은 역사적인 잘못을 사죄하는 것이라고 봐야겠다.  

그런데 일본 선수들은 그게 아니었다. 중국기자들의 질문에 애매한 대답만 하는 거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역사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런걸 배운 적이 없다고 떠 벌였다. 또 알고 싶지 않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요즘 일본의 축구는 눈에 뜨이게 진보했고 축구 스타들도 많이 솟아 나왔다. 그 스타들의 입에서 조상의 잘못을 덮어 버리고 감추어 보려는 기미가 보이는 건 아무리 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크린스만의 행동으로 위대한 독일 민족이 돋보이게 되고 일본 선수의 모습으로부터 간악한 일제의 지난 형체가 보이게 된다. 두 나라 선수들의 서로 다른 이미지로부터 그 나라와 민족을 대강 알 수 있다. 이 일은 나한테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렇다면 한국과 조선의 축구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가 있겠는가? 가령 중국 팀과 한국 팀 혹은 중국 팀과 조선 팀이 경기 할 대 우리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또한 한국 팀과 조선 팀이 경기장에서 서로 만나 격렬한 경기를 치를 때는? 이것은 독자 여러분들께서 판단해 주시길 바란다.  

축구에서도 가장 큰 자랑거리라면 조선 팀이 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단계의 8강에 진입한 것이다. 그 때 조선 팀은 박두일 선수의 꼴 하나로 이태리 팀을 꺾고 8강에 들었고 이제까지 월드컵에서 8강에 진입한 유일한 아시아 팀으로 되고 있다. 포르투갈 팀에게 지지 않았더라면 4강에도 들 수 있었다. 전반전에 꼴 세 개를 넣어 앞서다가 후반 들어 맹랑하게도 꼴 다섯 개나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이제 연변은 축구와 멀어지게 되었다. 축구로 하여 울고 웃던 지난 일이 결국 역사로 남고 말았고 축구가 없는 조선족의 생활은 황페하기만 하다. 한국 팀이 여러번 월드컵에 참가하고 다음 회 월드컵이 한국에 유치된 것으로 약간 위안이 될 뿐이다.  

우리의 화제는 이렇게 축구가 단연 1위였다. 식사가 끝나고 난 뒤 홍사장은 새로 개업한 안마 방에 일행을 끌고 갔다. 전신 마사지를 두 시간이나 받고 나니 1년 동안의 피곤이 다 빠져버리는 감이 들어 얼마나 개운한 지 모르겠다.

용수네 집에 도착해서 얼마 안되어 포근한 잠을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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