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긴 휴가가 끝나고 식구들이 나진에 나왔다. 세포 비서가 로따와 말하는 품이 심상치 않았는데 그 결과는 내가 집에 갔다 온 다음 알게 되었으므로 뒤로 미루겠다.  

평양의 장사군 아낙이 샘플로 약 두 곽을 가져 왔는데 석암 약제국의 《우황청심원》과 《안궁우황환》이였다. 홍사장한테서 보았던 샘플과 똑 같은 것인지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약 자체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한가지를 한 박스(각기 50곽)씩 주문하고 가격도 흥정해 놓았다. 다음 번에 올 때가 약 20일 후라고 했다. 평양을 왕복으로 하려면 시일이 걸리겠고 조건부로 와크를 해결하라고 했다. 즉 수출문건을 포함해 달라는 거였다. 약을 산 후 수출 문건에 의해 원정세관을 통과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그만큼 걱정도 덜 수 있었다. 와크가 없으면 밀수로 넘겨 가는 방법밖에 없다.  

수리소 동쪽 새 도로 옆에 나진 종합검사장이 공사를 시작한지 반년 만에 지어지고 요즘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나진에 나오는 모든 차들은 수입품을 실은 채로(원정세관의 봉인이 붙어있다) 들어갔고 짐군들이 화물을 부리워 일일이 체크하고 나서 다시 실은 다음에는 아무데나 가서 부리든지 상관없다. 각 부문을 다니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서 태워오고 검사가 끝난 후 다시 실어가던 효율이 무지무지 낮은 사업방법이 철저히 개변되었다. 사용세와 짐군들의 삯으로 비용이 늘어났을 뿐이었고 시간이 단축되고 편리해졌다.  

구정 후에 첫 차로 슬레이트 한 차가 나왔는데 85호는 새 기사가 운전하고 나왔다. 성이 유씨였는데 서른 살이 안되었고 점잖은 스타일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85호는 내 차가 아니었고 역시 내가 추측하고 분석한 대로 로따네의 속심이 드러난 거였다.

유기사와 웃는 얼굴로 반갑게 인사했지만 똑 마치 파리를 삼킨 기분이었다. 한편 나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로따와 이모가 가엾게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이제부터 불필요한 사원이다. 로따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대뜸 느낄 수 있었다.

내 건강상태는 조금도 문의해 주지 않았고 새 기사를 찾은 건 잠시 85호를 수입하지 않는다는 것과 나를 기사로 쓰려 한다는 말이 전부 무효라는 걸 실증해주고 있다. 축구선수가 팀을 위해 주력으로 뛰다가 경기장에서의  작용이 점점 못해져 갈 때 팀으로부터 내쳐지는 맹랑함이라고 할 가, 존경을 받기는 하지만 쓸모 없이 되었을 때는 자연히 배척을 받는 게 축구 선수다.

나는 바로 그런 축구 선수에 지나지 않았다. 웬 일인지 한 회사에 4년이상 있어보지 못했고 그만큼 떠돌이 생활에 습관된 것 같은 내 습성도 고쳐지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로따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또 별렀다.

그러나 무언의 전쟁만은 계속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건 위홍이로부터 충격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일사건 후 어느 식사시간에 위홍이는  

“마작 놀지 못하게 하면 일도 못 하겠다!”  

하고 로따에게 대들면서 떠벌인 적 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걸 내 놓고는 주유소 일도 제대로 못 하는 위홍이는 맨날 경비실에서 잡담에만 파묻혀 있었고 규정 위반을 늘 저질러 댔는데 그때마다 로따는 성이 상투밑까지 치달아서 씩씩하면서도 욕을 절약해 두었었다.

위홍이는 로따가 한마디하면 열마디 대꾸하는 스타일이다. 항상 자기에게 일리가 있었고 로따가 참지 못해 가까스로 한 마디 욕해대면 협박으로 나오는 거다. 참으로 엉터리에다 뒤죽박죽이고 엉망진창이다. 그런데 잘못된 것을 잘된 것으로 설명하는 그의 말은 들을 만도 했다. 그 말재주는 로따를 찜 쪄먹을 지경이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잘못을 덮어 감추려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일리가 있다는 것으로 풀이되었었다. 그러는 그를 두고 로따는 속만 끙끙 앓았었다.  

나는 위홍의 말재주뿐만 아니라 말대꾸의 예술성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해 오던 터였다. 대꾸질도 할 만큼 해보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너무도 뒤늦게 알았던 것이다.  

85호에 앉아 귀국했다.

집에 들어서니 아들애가 쏜살 같이 달려와 품에 덥썩 안겼다. 방학 동안에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가 부다. 매일 책만 들여다본다는 것도 말이 아니다. 요즘 자꾸 엄마 보고싶다고 해서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실 때 아들애가 반짝이는 눈으로 두 사람을 엇갈아 보더니 나에게 물어왔다.  

“아버지! 어머니한테 전화해도 됨까? 내 전화번호를 암다.”  

“너 어머니 보구 싶니?”  

아들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채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떠돌이 아빠보다 엄마한테 정이 더 많은 아들애였다.  

“음-, 지금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놀러가겠다고 말해 봐라.”  

“예, 내 혼자 전화 하겠음다.”  

이렇게 되어 내 의지와는 달리 아들애를 엄마한테 놀러 보내게 되었다. 애가 엄마한테 떼어버릴 수 없는 정을 갖고 있으니 그가 찾아가겠다는 데는 절대 막아서면 안된다고 순간에 생각을 고쳐먹은 거였다. 어머니도 동감을 표시하였다. 어차피 약 문제로 홍사장을 다시 만나야 했기에 가는 걸음에 데려다 주기로 하고 아내에게 알렸다.  

우리 가족은 거의 다 차멀미를 하지 않는다. 헌데 아들애만은 멀미를 심하게 했다. 차를 탄 시간이 한시간만 초과되면 무조건 멀미했고 먹었던 걸 다 토해낸다. 차 타기전에 멀미약 두 알을 먹였지만 차에 탄지 한시간 후에 멀미를 시작했고 도착했을 때엔 토할만큼을 다 토하고 나서 인사불성이 되어버렸다.  

밖에서 시원한 바람을 십여분 쐬어서야 정신이 들어가지고 엄마 집에 가자며 졸라댔다. 아직까지 아빠 엄마는 왜 떨어져 사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고 그게 다행스런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질문이 닥쳤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나는 무척 고민하고 있다.    

엄마 집이라고 하는 데에 택시를 타고 도착했다. 아들애는 어느새 생기발랄한 모습을 되찾아왔다. 골목에 들어선 후 3년 전만 해도 세 식구가 함께 살던 그 집을 냉큼 찾아냈다. 기억력이 뛰어나고 총명한 아들애를 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런 일인지를 깊이 느끼게 하는 정경이었다. 아직 헴이 덜든 것이 좋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시교의 줄집이다. 일곱 집이 붙어 있는 동쪽 세번째가 《엄마 집》이다. 지어진 지 10년쯤 된 헐망한 벽돌기와 단층집이다. 조선의 집들과 비교해 보면 겉은 별 차이가 없다. 문제는 집안이다. 조선처럼 3세대가 함께 살던 일은 아득한 옛날로 되어버렸다. 거의 다가 아이 하나 달린 젊은 부부가 살고 있고 집집마다 기본적으로 칼라TV, 냉장고, 가스레인지에다 비디오와 VCD도 있고 녹음기에 자전거 두 대 정도는 다 갖추고 산다.

물과 전기 걱정이 없고 (우리 회사 주변의 민가들에서는 옆에 흐르는 시내 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보험제도 때문에 화재나 도난에 대해 걱정할 것이 없으므로 열심히 출근하면서 맞벌이로 산다면 비록 빠듯하다 할지라도 일상 생활엔 보장이 따르고 있다. 나처럼 샐러리맨을 거부하거나 실업당한 사람들이 아내한테 얹혀 사는 가정이 많아졌을 뿐이고 그 때문에 생활이 어려워진 가정이 이전보다 수없이 많아졌다.  

3년 전의 이때, TV에서 한창 한국 드라마 《사랑이 뭐 길래》가 방송되고 있었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사랑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나의 결혼 생활은 철저히 끝을 보게 되었다.

남들처럼 갖춰놓고 살았고 쓸 만큼의 돈도 벌어 놓고 있었다. 많은 젊은 부부들이 애를 데리고 셋방살이하는 세월에 자기 집도 갖출 수 있었지만 그 집이 내 집같지 않게 느껴지는 감정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내가 3년 전에 떠날 때만 해도 지저분한 꼴 그대로였다. 호적 문제로 찾아갔을 때 집안은 잘 장식되어 있었고 깔끔하게 거두어 져 있었다. 형편없는 가옥구조와 질 때문에 내가 한사코 반대하던 일을 아내는 나와 헤어진 그 해 가을에 끝내 해냈고 돈을 먹여 한 것이라는 걸 자랑스레 말 해주었다. 마치도 나는 이렇게 살기를 원했는데 당신이 자꾸 이사하기만 바라고 내 의사를 거역하고 샐러리맨이 되어주지 않아 이 지경이 되었잖아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커피 드시겠냐고 묻는 어투는 시뚝해서 으시대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당신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하고 야유하는 것 같았다. 가옥 구조와 질이 훌륭한 집을 사서 잘 꾸려보자는 내 제의를 한사코 반대하면서 이사하기를 거절했던 아내다. 셋째 처형 네가 살았던 그 집을 처형이 한국으로 가면서 헐값으로 넘겨 준거였는데 지붕이 점점 내려앉아 대보수를 기다리고 있었고, 온돌이 꺼져 내려가고 벽이 부서져 내렸는데 진흙으로 쌓아 올린 벽돌이 하나 하나 드러나고 있었다.
이미 지붕이 다 내려앉은 창고(별로 쓰지 않았다)를 손질하는 데까지 무척 많은 돈이 들어야겠는데 그 집을 헐값에라도 팔아 버리고 수리와 장식에 필요한 돈까지 보태 깔끔한 집을 사려 한 것이 내 속타산이었다. 주변의 위생조건도 형편없이 차한 그 집에 한시도 살고 싶지 않았었는데 겨울에는 옆집에서 불을 지펴도 굴내가 심하게 났었다.

그런 집에 이사한 지 몇 달만에 아들애가 태어났고 몇 해를 키웠었다. 연탄가스 때문에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에도 문을 열고 살았는데 그 때문인 지도 몰라도 아들애는 추위를 별로 타지 않는다. 돈을 넣어 수리하고 장식을 하려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치고 낭비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아직 아파트 장만할 계제가 되지 못한 형편이었고 그 때 벌써 아내는 내 능력을 의심하고 불신한 나머지 경멸의 언사도 거리낌없이 던져왔다. 사랑이 결여해 지는데다가 집을 지저분한 채로 놔두고 나를 생면부지의 사람을 대하듯 취급하는 그 생활이 버겁기만 했었다.  

마침내 그 집을 홀가분히 떠난 것이다. 어제일 같은데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날로 늘어가는 내 재주와 겨끔 내기라도 하는 듯이 아들애도 무럭무럭 잘 자랐다. 1년 전에 연속 10여 일간 링게르 주사를 맞고난 뒤 크게 앓은 적이 없지만 목 밑의 림파선이 부어나고 알맹이 생기는 병이 새롭게 나타났다. 애가 겨릅대 같이 여위고 밥도 잘 먹지 않았는데 항상 지친 모양을 하고있는 것이 요즘 일이 아니다. 위생이 불결한 그 동네에서 살아 왔기 때문이라는 걸 썩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이사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아내의 동의를 받아내지 못 했었다.

몇 년 동안의 떠돌이 생활로 크게 벌지도 못한 나에게 대한 반발이라고도 생각된다. 집터가 안 좋다는 말로 넌지시 도전해 보았지만 지저분한 동네와 지저분한 집을 끝내 떠나지 않고 오늘날에는 겉이 초라한 그 집안에 크게 잘 사는 것처럼 차려놓고 있다.

아직까지도 전기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수동펌프를 쓰던 것을 양수기를 장치해 놓고 물을 끌어 올리는 그 집에 아들애의 병 근원이 있다면 바로 식수 문제 그것이다. 온갖 더러운 물과 오줌까지 섞인 것이 하수도로 흘러들고 그것을 다시 땅의 여과를 거친 후 박아 넣은 파이프로 끌어 올려 먹는 물이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할까?  

먼저 문 앞에 당도한 애가 여린 손으로 문을 두드려댔다. 장갑을 낀 힘없는 손이 큰 소리를 내지 못한다. 내가 더 크게 두어번 두드리니 아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택시에서 내린 후 도착했다는 걸 이미 알렸었다.

“야-, 왔구나! 빨리 들어 오라!… 아버지 빠이빠이 해라!”  

아내는 나에게 곁눈 하나 주지 않으면서 아들애의 손을 잡고 허둥댔다. 말을 하지 않고 손만 저어대는 아들애한테  

“빠이빠이!”  

하고 내가 손을 저어 보인 다음  

“쾅!”  

하는 문소리가 나와 아들애를 갈라 놓았다.  

이 집을 떠난 후로 두 번째로 온 걸음이다. 내 손때가 묻어 있는 집을 여겨 보았다. 아연도 철판으로 도어를 감싸놓은 것과 창문에 넣은 쇠창살은 내가 해놓은 거였다. 커튼을 열기 싫어하는 아내가 감옥 같은 방에 애를 가둬 놓고 바깥출입을 시키지 않으면 애의 병이 중해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이미 전화로 애의 병이 가능하게 림파 결핵이라는 병원의 진단이 나왔다는 걸 알려줬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놀러 왔던 애가 훈춘에 다시 돌아갈 때면 언제나 해쓱한 얼굴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번에는 더 걱정이 되었다. 금방 병색이 짙은 아내의 얼굴을 보았고 모자간이 함께 있을 때 아들애의 병이 평소보다 더 심했던 이전 일이 나를 자꾸 자극하고 있다.  

예견했던 바와 같이 아내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돌아서서 남이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 아내는 그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다른 이혼 부부들은 명절 때 애를 데리고 공원놀이도 하고 외식도 함께 한다. 나도 은근히 바라고 속  마음을 비쳐 보였지만 아내는 언제나 요지부동이고 자기 나름대로 나와 애를 대해주는 거다.  

혹시 아내는 나를 마음과 몸이 다 지저분한 사람으로 보고있는 지도 모른다. 아내는 결벽증에 가까운 정조관념이 깊이 뿌리내린 사람이다. 그런 아내의 맘속에 나의 존재는 사라진 지 오래 되었겠고 남아있다 해도 보잘것없고 지저분한 인간으로 밖에 낙인이 찍혀 있을 거였다. 그런 사람과 어찌 애가 있다고 해서 같이 외식도 하고 공원 놀이를 생각이나 하랴? 그걸 왜서 이제야 느끼게 되는 건지?  

내 심신에 문제가 있다!  이건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강렬하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깊이 반성하고 검토해 볼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자아를 알 수 있는 일이 이다지도 힘들고 간난 신고가 많은 것에 대해 이제까지 마음에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 없이 살았으니 기막히게 한심할 수밖에 없다. 자기가 어떤 인간이지는 모르는 사람이 무슨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는가?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에 와서야 진정 자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 일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허나 지금도 늦지 않다. 나의 미래,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자아개조를 열심히 해 보리라!  

이 날은 아들애한테 억수로 고마운 하루였다. 하마터면 그 아들애보다 내가 더 늦게 철 들 번했다.
조선족사회에서 《남자는 마흔 살이 되어야 헴이 든다》는 말이 오래도록 유행되어 왔는데 내가 그 꼴을 당하고 만 것이다. 헴이 들기 시작한 것 같으니 다행이었고 자기 자신이 느낄수 있었다는 것이 조금은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나는 이제 몇 년의 노력을 거쳐 떳떳한 사회인이 되리라. 이제까지는 재주를 익히고 경험을 쌓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본으로 될 수 있다. 이제 나는 아들애의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 의젓한 사회인으로 될 수 있는 길에 나서게 된다. 오늘 그 스타트를 맞는 첫 날이라고 생각하니 3년 전 눈앞의 이 집을 떠날 때보다 몸이 더 홀가분해졌다.  

홍사장을 만나고 확인할 것을 다 확인했다. 친구들을 불러 홍사장의 집에 모이게 했다. 대졸 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기학이를 모처럼 만날 수 있었다. 정말로 오랜만의 재회였다. 다들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있고 사업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모두가 열심히 살아 온 덕이었다. 그 중에서도 기학이를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수 있게 된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같은 대학을 한 해에 졸업한 기학이는 군부대의 건설 병으로 가게 되었다. 대졸이면 일단 중위의 대우를 받는다. 군부대에 가면 최저한 8년을 복역해야 한다. 놓아주지 않아 10년 만에 제대하여 처자와 단란히 모여 살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였다. 요즘은 취직 때문에 열심히 뛰고 있다고 한다.  

여하튼 대학 때의 친구들을 오랜 만에 다 볼 수 있었다. 북경과 나진을 거쳐 5-6년은 잘 되는 것 같았다.그 중의 한 두 명과는 자주 보아 왔는데도 더 많이 모이는 오늘 같은 날이 기대 되고 학교 때처럼 다정하게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밥 먹고 나서 시대에 떨어진 2, 3차를 취소하고 마작 상을 벌여놓았다. 요즘은 명절이라는 게 따로 없다. 잘 먹으면 명절이요, 잘 놀아주면 또한 명절이다.

어렸을 때 설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일이 지금 세대에 와서는 우스운 일로 되어 버렸다. 밤을 패면서 노는 명절 기분, 따분하던 나진의 분위기보다 너무 차이가 났다.

밤을 패면서 겨울을 보내고 나니 봄은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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