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이 전부 다 나진에 나왔다. 회사가 설립된 지 2년이 되는 날을 맞이하여 경축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 식구들뿐만 아니라 종업원들까지도 함께 즐겨야 할 또 하나의 《우리 명절》이었다.  

2년 전에 회사 설립을 신청했을 때 승인 받았던 업종 중에서 식당을 취소하는 신청과 함께 대기실과 늄창 가공을 새롭게 신청하면서 지난해 2월 22일에 새 《창설 승인서》를 받아 왔었다. 로따는 기어이 이날을 회사 설립의 날로 정해놓고 종업원들의 공연에다 경기도 조직하고 풍성한 회식을 마련하기로 했다.  

행사는 로따의 발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발언은 아주 간단하였다. 그 동안 종업원들이 노고를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일해 온 것에 감사했고 앞으로도 계속 일을 잘 해줄 것을 부탁했다. 지난해는 재작년에 비해 총 판매액을 4천만 더 올렸는데 금년에는 더 많이 올릴 것으로 예견된다는 말을 마치고나서 부부가 함께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불러 공연의 막을 열어 놓았다.  

종업원들의 대합창, 처녀들의 중창에다 김영화의 독창, 네명 처녀들의 기타병창에 이르기까지 혀를 내두르게 하는 재주를 보여 주었다. 남연숙도 질세라 독창을 했고 아코디언 반주를 하던 혜영이도 독주를 표현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양복을 입은 남자들과 한복을 입은 여자들마다 얼마나 끌끌하고 아리따운 지 눈이 부실 지경이다. 일년 치고 작업복 벗는 날이 며칠 안 되는 그들이다. 그야말로 의포단장이다.  

영철이가 독무를 추었고 나는 《반월가》를 독창했다. 우리 식구들은 언제나 공연에서 여지없이 뒤진다. 그만큼 조선의 종업원들은 예술감이 뛰어나 있다. 재작년 《5.1》절에 날에 있었던 경기와 비슷한 경기들을 오후 두시까지 치르고나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부기실, 무역조, 늄창조와 수리반은 각기 찍었고 로따, 로얼은 차영감과 함께 부기실 사원들과 찍었다. 나는 제일 방대한 그룹인 차대에 들어 찍었다. 이 속에는 유기사도 끼워 있었다.  

밥 먹고나니 배구경기를 새롭게 펼치는 그룹이 나졌고 술이 거나하여 방에서 주정하는 그룹도 나졌다. 로따가 옆에 있으면 다들 눈치만 살피고 제대로 놀려고 하지 않았기에 어느새 88호를 몰고 피신해 나갔었다.

왁자지껄 떠들면서 놀아대는 구내 안을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고 있었다. 돼지를 잡았고 수산물로 더러 사왔었다. 맘 놓고 술 마시고 먹고 나니 흥이 나서 다들 어쩔줄 모른다. 주정군들이 몰려나와 배구장에 끼워드는 바람에 마당은 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배구도 아니고 축구도 아닌 복새판을 이루었는데 그 판을 비집고 나는 유기사와 함께 85호를 몰고 나왔다.  

요즘 어디서 나졌는 지 주방에서 테입 하나가 뒹굴어 다녔다. 한국노래였다. 복새판이 이루어 질 때 85호 오디오로 배우고 싶었던 《네박자》와 《사랑하는 날까지》 두 곡을 듣게 되었고 마당을 멀리 떠나 잘 배워두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유기사는 나진에 서너번째로 나온 걸음이고 오늘 같이 시간이 충분할 때 한번 시내구경이라도 해볼 생각으로 같이 나온 거다.

차는 내가 운전했다. 유현동 바닷가로 나갔다. 작은 기차역 바로 앞에 주차시켜 놓고 줄 담배를 피우면서 가사를 베껴냈다. 열심히 노래 공부를 하는 나에게서 얻어들을 것이 없었던 유기사는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바다 가운데의 초도 저쪽 켠에 안주동의 해양이 있고 거기에 관광지 하나가 있다는 내 말을 듣고는 그 쪽으로 가보자면서 졸라대었다. 거무스레한 해조류가 넘실대는 유현동 앞바다와는 달리 건너쪽인 해양바다는 바다풀 한포기 볼수 없는 맑고 푸른 모습이다. 길옆의 정자에서 낙차 수십 미터의 수면을 내려다 보느라면 바다 밑까지 꿰뚫어 보이고 눈을 들면 방금 갔었던 유현동과 나진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계전쟁을 하기 전날에 로따의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온 적 있다. 정자에서 길 건너편의 약간 떨어진 곳에 기념비 하나가 있고 정자 아래쪽에는 샘바위가 있다. 샘바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전형적인 함북 8간집이 고래등 같은 기와지붕을 떠인 채 서있었는데 마당은 정결하게 꾸며져 있고 철따라 갖가지 꽃들이 향기를 뿜고 있다.

기념비는 바로 이집 길 맞은켠 산비탈에 있었다. 안내양이 당년에 김정일 위원장이 열두살 어린 나이로 김일성 주석과 함께 이 집을 방문했던 것을 소개했고 샘터의 물을 맛 보게 했었다. 로따의 한족 친구들에게 기념비문과 안내양의 해설을 전부 다 통역해 주었다. 비문에는 김일성 주석이 어업과 농업을 같이 발전시킬 것을 현지지도한 내용이 적혀 있고 그 샘물은 김부자가 함께 맛보았던 거였다.

그때 보았던 여름 바다와 비교해 볼 때 지금의 봄 바다는 더없이 쓸쓸하고 고느적해 보였다. 더 맑고 푸른 여름바다를 볼 때까지 나진에 있게 되겠는 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었다. 나진시 주변 구석구석까지 지리에 환해진 나였지만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의 거리를 아직까지도 눈에 익히지 못한 채이다.

고향 떠나 타향살이 10여년에 훈춘이 몰라보게 변해 있다. 한번은 내가 소꿉시절 살았던 시병원 부근에 가서 너무 변한 모습을 보고 길에 선 채 얼떠름해 있은 적도 있다. 친구들도 훌훌 떠나버려 놀러 다니는 일도 없으니 나서 자란 고향이라 하더라도 못 알아볼 것은 당연한 일이다.  

2년동안 나진에도 변한 데가 더러 있었다. 동명동과 안주동 쪽에 아파트 몇채 짓는 것을 보아왔고 사람들의 생활도 눈에 뜨이게 좋아져가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거리에 나서면 외국인과 구별할 수 없게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예전보다 썩 많아졌다. 투자환경이 날따라 좋아져 가고있고 그보다도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변화되어 가는 것이 흐뭇한 일이었다. 산천도 변해가고 사람들도 변해간다. 비록 변화가 미약하다 할지라도 얼마든 지 보아낼 수 있었다.

일 없이 빈둥거리고 일하기 싫어 하는 사람이 적어졌다. 주유소 옆에서 《화기엄금》 혹은 《불조심》이란 빨간 글을 올려다 보면서도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담배를 피워대던 사람들도 적어졌다.
공동선언 이후로 미국 놈, 일본 놈, 중국 아덜이 어찌고 저찌고 하던 적대시한 말투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대신 공손하고 상냥하며 친절한 언행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강성한 나라로 되는 데는 든든한 경제가 뒤심이고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도리를 한사람 한 사람씩 터득하고 있는듯하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어떻게 일해야 하는 것인지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다. 다들 최소한도의 생존 권리때문에 분주히 돌아치는 것 같고 나라 일은 아예 뒤전인상 싶다.  

나도 이제까지 생존때문에 열심히 뛰어 왔다. 타락된 생활에 더러 파 묻혀 살기도 한 나였지만 요즘은 이상하게도 당치 않게 민족의 운명에 대해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형편없이 한심한 것 같은 나의 전생이 지금 우리 민족이 처한 한심한 처지와 같은 점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할아버지가 없던 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광복을 선후하여 태어났고 그 시기에 째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우리 3세는 2세의 후배들과 함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실질을 알지도 못하는 정치행사에 휩싸여 역시 가난한 동년을 보냈다. 중국이 세계에 문호를 활짝 열어 개방을 맞이했을 때 우리 3세는 청년기에 들어섰고 얼떠름하게 결혼도 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개방자체는 나쁜 것이 없겠지만 우리한테는 당혹스럽기만 한 그 자체였다. 왜냐 하면 개방과 같이 개혁이 뒤따랐고 개혁 함에 있어서 예전에 배워 두었던 거의 모든 것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세가 두만강을 건는 후로 오늘까지 4세에 걸친 이주민 생활을 거쳐 모든 것이 납득되었고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여 다들 열심히 뛰고있다. 다만 망향의 설음은 잊어진 지 오래되었고 그 대신 살아가기가 더 고달프고 힘들어졌을 뿐이다.  

그런데 나진은 어떠한가?  나진에서 보냈던 나날들은 나에게 인생의 새로운 도리를 깨우쳐 주었고 그보다도 우리 민족의 현 상태를 분석하고 앞날을 그려 보게 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내가 서있는 나진만을 보아도 그러했다. 개방 5년간이면 너무 적은 시간도 아니다. 훈춘에 이 같은 항구가 있었으면 유명한 무역항으로 된 것이 벌써 옛날 일인 지도 모른다. 천연적으로 우세하고 훌륭한 지리적 위치를 자랑하는 나진만에 세계 각국 무역선이 실북 나들듯 오고가야 할 테지만 지금은 너무도 조용해 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명물도 더러 있지만 관광객은 너무 적게 유치한다. 어쨌든 조심스러운 개방이고 그래서 의례 크게 벌 돈도 챙기지 못하는 실정이다. 너무도 안타깝고 안쓰러운 일이다. 정확한 길을 찾고 그 길을 걸어 마침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고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대체 언제나 올 것인고?  

자그마한 땅덩이에서 가족과 형제가 헤어져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사는 기막힌 사연, 서로가 죄인이고 그 죄책감으로 마음 편히 살지 못한다. 그 세월이 흘러 흐르고 이어져 세기를 뛰어 넘었다. 도대체 그런 세월이 언제가지 계속 될는지?  

내가 상념에 묻혀 있을 때 물이 난 군복을 입은 수십명의 청년들이 줄을 지어 씩씩하게 행진해왔다. 아마도 기념비 쪽에 사적지답사를 가는 모양이다. 우리 회사에서도 해마다 몇번식 답사를 조직했었고 내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조직했던 답사보다는 횟수가 많은 것 같아 보였는데 수십년간 끊기지 않고 진행되어 온 답사가 형식적인 데가 많고 정상적인 생산노동에 일정한 영향이 있는 것으로 하여 속이 바질바질 탈 때도 있었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유기사는 오늘 참 재수없는 가이드를 만났다. 답사팀이 왔으니 말이지 그렇잖으면 나의 입을 거의 열어보지 못할 번했다. 나진만과 나진항에 대해서, 나진의 주변에 대해서 알아듣건 말건 나의 해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답사팀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정자 아래에 있었다. 두서 없이 엮어댄 해설이었지만 그 안내말을 다 하고나서는 나진에서 제일 훌륭한 관광 가이드로 될수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백두산과 북경의 현지 가이드로 각각 3년과 2년의 경력을 갖고있는 나다. 시골과 현대화의 도시 두곳에서의 가이드 경력이 총 5년으로 세계 어느 곳이든지 가이드 공부 1-2개월 정도면 훌륭히 할수 있는 자신이 있다. 나진은 지역적으로 나의 고향과 가까울뿐만아니라 2년동안 보고 들은 것과 겪은 것과 느낀 것이 너무 많아 간단한 역사 지식까지 곁들인다면 훌륭한 해설로 자상한 안내를 할수 있는 여건이 얼마든지 있다.

이미 나진의 가이드 수준이 별로 탐탁치 않다는걸 보아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재수없게도 실습을 금방 끝낸 가이드를 만났었다. 까다로운 한국 관광객들한테 단련받은 지 몇년씩 되는 고참가이드 무리가 나진의 신참 가이드를 닥달하는 정경을 재밌게 구경했었다.

비파도의 저녁식사 때 남자 두명과 여자 한명이 나진 가이드를 식탁 옆에 세워놓은 채 현지 강습을 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언어로부터 몸짓, 손짓에다가 여러가지 요령과 융통성 이용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옆에 앉았던 친구들마저 너 한마디, 나 한마디 곁드는 판에 조선 가이드가 어리둥절해 하는 당혹한 표정으로 서있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처음 가이드생활을 시작했던 1991년을 떠올리기도 했었다.

나는 4년이란 많은 시간을 들여서야 기본적으로 요령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천부가 모자랐고 시간도 많이 소모했다. 나진 가이드들한테 중국의 가이드들처럼 모든 재주를 다 부릴 수 있는 조건이나 환경이 다 마련되어 있는 지는 잘 모르고 있지만 어쨌든 시간이 많이 들어야 관광객들한테 만족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것을 느낄수 있었던 것이다.

칠보산 관광을 할 때 차장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동행 가이드(사실은 전문 가이드가 아니었다)의 딱딱한 해설에 눈이 감겼고 칠보산 현지에서 아바이 가이드의 해설도 미흡한 데가 있었다. 그 영감은 칠보산에 대한 설명을 아주그럴듯하게 해주었지만 첫 인사를 아예 하지도 않았었다. 가이드가 손님들한테 주는 첫 인상은 자못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인사마저 생략해버리는 것은 손님에 대한 무례임에 틀림없지만 어디까지나 조선 북부 지역의 언어와 예의, 습관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나진에 있는 동안 깍뜻이 하는 인사는 거의 받아보지 못했고 반말과 상말을 늘 하는 언어 습관에다가 인사가 불성인 예의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알게 되었기에 나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관광객이다. 관광객들이 불친절을 감수하고 다녀갔다면 아무리 천하명승에 절승경개라 할지라도 누가 다시 찾아 오겠는가?

이건 나진에서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느껴졌다. 나는 중국에서 살아왔고 중국 관광객들의 심리를 알고있을 뿐더러(나진의 관광객은 거의 다가 중국인이다.) 경험도 경험이라서 이 면에서도 누구라도 제쳐놓고 단연 1위를 할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 거다. 그런 자호감을 만끽하면서 유기사와 함께 나진만에서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회사설립의 날은 바다가에서 오후시간을 보낸 셈이 되었다.

노래를 배워 내고 가이드 실습도 했다. 오전에 종업원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고 경기도 치르고 밥도 같이 먹었던 것은 먼 훗날까지도 기억에 남길만한 것들이었다.

내 차가 될 번했던 85호를 마음 놓고 운전해 본 것도 이날 종업원들과의 동석 식사와 함께 마지막으로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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