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 이 사진이 리알토 다리야.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가장 오래된 다리.
– 근사하네.
– 예정대로 유학을 갔다면 아마 지금쯤은 봤을거야.
– 그렇구나.
– … 학교에서 선생님이 처음 알려줬을 때부터,

꼭 직접 보고 싶었어.

시간차를 두고 끝맺어진 말에 훈이 입가의 미소를 지운다. 곱씹을수록 아파지는 말이었다. 곧이어 순이의 눈이 긴 속눈썹과 함께 감긴다. 아픈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 순이는 여전히 가진 짐이 많았다.

– 아직도… 이탈리아에 가고 싶은거야?

훈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순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 말은 벽에 부딪쳐 다시 되돌아왔다. 순이는 대답없이 머리만 좌우로 한번 저었을 뿐이었다. 훈도 더이상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 이젠 가자.

한참의 침묵을 깨고, 복귀를 알리는 소리에 굳게 닫혀있던 순이의 입이 열렸다. 순이는 여느때처럼 책을 접었다. 그리고는 작업복을 정리하고, 제 자리로 달려갔다. 미싱기앞에 선 순이는 곧바로 남은 작업을 시작했다.  

– 순…

뒤늦게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본 훈이 순이의 이름을 반쯤 부르다 곧 포기하고 만다. 시끄러운 기계소리 속에서 제 목소리는 거의 묵음에 가까웠다. 이어 사진을 집어든 훈의 시야로 보이는 작은 글씨들. 훈은 그동안 배운 글자들로 그 글을 띄엄띄엄 읽어내려갔다.  

– 이…탈…리… 가… 고… 싶… 이… 태… 리… 어… 배… 우… 고…

이태리어.
작게 그 단어를 되뇌인 훈이 사진을 호주머니에 챙겨 넣는다. 또다시 지루한 일과의 시작이었다.

F.

추가수당을 받기 위해 훈은 밤샘작업을 신청했다. 그에 따라 여섯시간이던 수면시간은 이제 두시간여가 되였다. 그에 순이는 여전히 웃고 있지만 어쩐지 창백한 얼굴을 띠는 훈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돈이 많이 필요하냐며, 자신이 돕겠다는 말을 건넸다.

– 괜찮아.

세글자로 마무리 지어진 말을 전하며 훈은 여전히 속없이 웃었다. 환한 미소 뒤에는 지워지지 않은 피로가 엿보이고 있었다. 안쓰러운 얼굴로 설득하려던 순이의 말을 끊고 훈이 설명서 하나를 내민다. 영어가 섞인 설명서의 글자가 빼곡했다.  

– 새 기계가 들어왔는데, 도저히 뭐라고 쓴건지 모르겠어서 말이야.
– 야. 고훈.
– … 응?
– 오늘부터 숙제는 스무번이야.

설명서를 받아든 순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훈의 말에 답했다. 그러나 서서히 접혀지는 눈꼬리는 숨길 수 없었다.

– 너무해, 그런게 어딨어!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던 훈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반박을 하다 결국 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순이 쪽에서도 웃음이 터진다.

– 잘들어. 커서를 원하는 압력필드에 놓으면 포켓 계산기가 표시된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산술 명령문을 입력하는 거야. 그다음에는 …….

순이는 처음 본 설명서도 막힘없이 설명했다. 훈은 순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순이의 자세한 설명이 끝나자 훈에게서는 소소한 감탄이 터져나온다.

– 내가 너만큼 똑똑했으면 이 세상 삼만년은 살겠다.

또 무슨 헛소리냐는 듯 한심한 눈빛으로 훈을 바라본 순이가 곧 들리는 제 이름에 달려간다. 그런 순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훈은 설명서를 내려놓고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영어도 막힘없이 읽는 똑똑한 순이.
그러나 그런 순이도 모르는게 하나 있었다. 훈에게는 가족이 없다는 것.

G.

공장의 기계소리가 갑자기 멈춘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순이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이를 보자 순이가 방금까지도 들고있던 옷감이 바닥에 추락한다.

– 고훈.

회색의 작업복 위로 선홍빛 물감과도 같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손에서 흘러나왔다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양의 혈액. 워낙에도 하얗던 훈의 피부가 더욱 희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 흔한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곧게 서있는 훈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훈의 주위를 서성이던 작업반장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 이내 훈의 손에 제 손수건을 칭칭 감는다. 상처에 압박이 가해지자 훈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 이봐, 정씨. 여기 바닥 좀 닦아.

작업반장의 말을 들은 정씨가 대걸레를 가지러 가고, 훈은 작업반장이 대충 동여맨 손수건을 바로잡았다. 그런 훈의 얼굴위로 한층 더 짙어진 곤핍이 스친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바꾼 훈이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순이와 눈을 마주친다.

– 걱정마.

걱정은 무슨.
대책없이 착한건지, 아니면 멍청한건지. 제발 둘 중 하나만 좀 해.
엉성하게 처치한 왼손을 뒤로 하고, 오른손으로 부품을 드는 훈을 바라보는 순이의 입꼬리가 내려앉았다.

– 구경났어요? 마감시간 맞추려면 시간 빠듯합니다. 다시 일 시작해요!

귀찮다는 얼굴을 하며 다시 기기를 재가동 시키려는 작업반장의 손이 순이에 의해 곧바로 막혀진다.

– 뭐야.
– 병원, 보내주세요.
– 지금 손해가 얼마인지 알기나 해? 쟤가 괜찮다는데 왜 네가 난리야.
– 피가 아직도 철철 나는데, 일을 다시 시작한다는게 말이 돼요?
–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
– 지난번에도 이런 일로 합의금 물어주셨다면서요. 같은 실수 반복하지는 마셔야죠. 게다가 지금 보고있는 눈이 몇개인데.

순이의 말에 작업반장의 눈이 주위에 서있는 이들에게 닿는다. 저를 바라보는 눈길과 마주친 작업반장의 입에서 욕짓거리가 새어나간다. 곧 인상을 구긴 그가 제자리에 서있던 훈의 어깨를 순이의 옆으로 떠민다.

– 병원비는 알아서 내.

다시 일 시작해요!
작업반장의 목소리와 함께 귀가 먹먹해지는 기계소리가 들렸다. 훈은 여전히 순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싸워줄수도 있다는 것을 훈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저를 위해 화를 내준 순이에게 더 고마웠다.

상처는 예상보다 꽤 깊었다. 스무바늘을 넘게 꿰맨 훈의 손이 만신창이였다. 순이는 글을 배우는 것을 그만두자는 말을 훈에게 건넸다. 그 손으로 무얼 하느냐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 어차피 나 악필이라, 오른손이나 왼손이나 큰 차이는 없을걸?

정말로 별뜻없이 내뱉은 듯한 훈의 말에 순이가 훈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는다.

– 뭐야. 환자한테 이래도 돼?
– 맞고 정신 좀 차려.

소독약 냄새와 함께 밤이 깊어져만 갔다.
훈은 그후로도 삼개월이나 밤샘을 했다.

H.

바야흐로 우울한 봄을 살해한 초여름의 도래였다. 탁한 진회색의 하늘에서는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순이는 여전히 모두가 떠난 공장에서 일기를 썼다. 순이가 기대앉은 벽 뒤로 얇은 벽돌에 부딪치는 빗소리가 묘한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굳게 닫혀져있던 문이 열리자 진한 비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 훈아.

문 너머에 선 이를 확인한 순이가 몸을 일으켰다. 연필이 바닥에 굴러떨어지며 튕겨낸 물 한방울이 순이의 하얀 양말에 스며들었다. 순이의 찰박이는 운동화소리가 빈 공간에서 크게 울려퍼졌다. 훈이 문을 닫자 어둠이 커튼처럼 창을 가렸다.  

– 이거.

뛰어온 것인지 조금은 가쁘게 말을 내뱉은 훈의 입꼬리가 올려진다.

– 헌책방에서 산거라 새책은 아니야. 미안해.

책 표지에 떨어진 빗방울이 순이의 손을 통해 훔쳐졌다. 훈의 몸에서는 소나기 냄새가 났다. 찬 비를 맞은 훈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그런 훈에게서 건네받은 이태리어 사전을 꾹 쥔 순이의 손가락 끝이 희게 물든다. 훈의 머리카락을 축축하게 적신 빗방울이 턱을 타고 바닥에 떨어지며 그 흔적을 깊게 남기고 있었다.

– … 고마워.

훈의 왼손에 여전히 남겨져 있는 흉터를 바라보던 순이가 감사의 뜻을 전한다. 그에 훈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 나도.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순이는 제게서도 비냄새가 난다는 생각을 했다. 훈은 이 뻔한 이야기 속에서 순이를 도려내야 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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