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는 천문학은 시간과 공간 위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관측을 하는 학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천체물리학은 천문학을 위한 물리학이 아닌 물리학을 위한 천문학이라는 사실이…”

수연은 지긋이 아파오는 태양혈을 누르면서 항상 이론에 강한 정경원교수의 지루한 수강을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하는 중이였다. 만일 시간을 돌릴수 있다면 수연은 재수를 해서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문예창작학과를 선택하고 싶었다. 천체물리학…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오는 학과였다. 고등학교때 미적분이니 물리니 듣기만 해도 골치아픈 과목들을 제쳐두고 소설에만 집착을 한 것도 후회가 되는 순간이였다. 이렇게 나가서야 학점을 제대로 받을수나 있을지 그녀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종소리와 더불어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수연은 길게 한숨을 쉬면서 책상위의 책들을 정리했다. 막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눈앞에 한 실루엣이 드리워졌고 수연은 깜짝 놀라 머리를 쳐들었다. 학생들사이에 꽤 인기가 있는 젊은 교수의 눈길이 꽤 날카롭게 수연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가요?”

“네?”

“아까부터 머리를 부여잡고 있더군요.”

정교수의 말이 살짝 비꼬듯 들려왔고 수연은 머리를 떨구고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다음 수업부터 집중하겠습니다.”

“안와도 돼요.”

“네?”

수연은 번쩍 머리를 들었고 정교수는 쌀쌀하게 웃었다.

“학생은 이 수업 안와도 된다구요. 학점 그대로 줄 테니까.”

“저…교수님…”

수연은 뭔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교수는 바로 몸을 돌려 교실을 나갔고 그녀는 망연한 눈길로 정교수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야…사람 민망하게…”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급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딱친구 지은이 언젠가 알바로 일하던 집을 나왔다는 소문만 얼핏 들은 후 무려 두달동안이나 그녀의 근황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수업이 적은 대학 4학년이라 마침 오후 시간이 비여있었고 또 오늘 같은 날에는 편한 친구를 만나 커피나 마시면서 앞으로의 진로 얘기나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에 대해 수다를 떠는 것이 따분한 수업을 듣는 것보다 더 바람직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통화연결음이 꽤 오래 울렸지만 지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얘는 왜 또 전화를 안받는 거야.”

수연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은이 어떻게 사는지 보면서 자랐다. 특히 그해 가을 지은의 엄마가 불행하게 돌아간 때부터 그녀는 자신이 상처 많은 지은을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 비슷한 감정까지 가지고 있었다. 어쩐지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작은 바람에라도 훌 사라질 듯한 지은이였다. 그녀가 전화하지 않으면 한달이고 두달이고 소식도 없는 지은을 두고 인정머리 없는 계집애라고 욕한 적도 많았지만 또 그럴수록 더 걱정이 되어 꼭 주기적으로 얼굴을 봐야 시름을 놓군 했다.

“너무 가여워.”

수연은 휴우 한숨을 내쉬고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저쪽에서 지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너 어디야? 왜 두달동안 소식도 없어? 알바하는 집에서 나왔다며? 기숙사에도 돌아오지 않고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왜 이렇게 사람 애태워? 그리고 방금전 전화는 왜 안받았는데…”

수연은 연주포 쏘아대듯 말했고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지은의 가벼운 한숨소리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됐다. 대답 안해도 되니까 우리 만나. 지금 어딘데? 아니 그럴 것도 없이 학교앞 커피숍으로 와. 우리가 자주 다니는 거기 있잖아.”

통화를 끝낸 후 수연은 급히 교실을 빠져나와 기숙사쪽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면 지은이도 도착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종종걸음을 치던 수연은 문득 교실과 기숙사 중간의 나무숲 언저리에 서있는 눈에 익숙한 한 뒷모습에 발걸음을 늦췄다. 수풀과 나무의 모습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니 분명 정교수의 실루엣이었다. 뒤에서 본 정교수는 고개를 뒤로 젖혀 묵묵히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주위의 분위기를 감지한 듯 살짝 몸을 떨고 있었다. 수연은 그런 정교수의 모습에 잠깐 의혹이 들었다.

(참 여러모로 이상한 사람이야…)

수연은 잠시 멍해 서있다가 머리를 흔들면서 그 자리를 떴다. 지금 수연에게는 정교수의 이상한 행동보다는 딱친구 지은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옷을 갈아입고 커피숍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지은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 못된 기집애…”

수연은 밉지 않게 나무람하면서 지은의 맞은켠에 앉았다. 두어달 못본 사이 지은은 많이 초췌해있었다. 원래 작은 얼굴은 더 작아보였고 길고 까만 속눈섭은 약간 젖어있었다. 수연은 지은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울었어?”

지은은 대답대신 눈길을 창문밖으로 향했다. 그녀의 오똑 선 코날과 예쁜 턱선에 수연은 속으로 은은히 감탄했다. 슬픔에 젖은 지은의 모습은 평소의 냉담한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이였고 수연은 그녀를 슬프게 한 사람이 대체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아무리 기억을 훑어봐도 지은은 누구를 관심한 적이 없고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린 적도 없다. 딱 한번…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간 그해를 빼고는.

“아줌마…기일이야?”

수연은 조심스럽게 물었고 지은은 잠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대답이 적중했구나 하는 생각에 수연은 안도의 숨이 나왔다. 머리속으로 몇마디 위로의 말들이 떠오르려는 순간 지은이 문득 침묵을 깨뜨렸다.

“엄마가, 보고싶어.”

수연은 저도 모르게 큰 숨을 들이켰다.

……

지은은 눈앞의 젊은 여인의 말이 차마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저씨네 집을 나오면서 갖고 나온 책 한권을 발견했고 그것을 되돌려주려고 아저씨의 와이프를 연락한 지은은 연락받고 나온 여인에게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었다. 지은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그럴수 없어요…아저씨가 어떻게…”

“내가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할거 같아?”

여인의 눈확에서 굵은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지은은 비로소 자신이 들은 사실이 진실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이 콱 막히며 눈의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꽤 오래되었는데 숨기고 있었어.”

“제가, 가보면 안될까요?”

여인은 고개를 옆으로 탈았고 지은은 그런 여인을 바라보았다.

“저한테 그 어떤 선입견이 있더라도…한번 가보게 해주세요. 아저씨랑 저는, 결백해요.”

“알어.”

“그러면 왜…”

지은은 말끝을 흐렸고 여인은 머리를 들고 허탈하게 웃었다.

“니 얼굴이 문제야.”

“네?”

지은은 고개를 들어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또 한번 서글프게 웃었다.

“그사람…니 얼굴을 보고 옛사랑을 떠올린거 같아서, 항상 그게 찝찝했어.”

“…”

“정략결혼이었어. 나는 그 사람이 원하는 상대가 아니였어. 내가 일방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고…그 사람 전처를 잃고 아들 하나를 데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어. 그 사람 집안이 몰락해서, 내가 그 사람이 사랑했던 여자를 찾아갔어. 뭐, 흔히 있는 뻔한 얘기지…”

여인은 고개를 떨구고 잠깐 침묵했다.

“그 여자는 내 말을 잘 알아들었어. 너처럼. 그 여자는 빠른 시간내에 딴 사람에게 시집을 갔고, 그 사람은 실의를 못견뎌 나한테로 오게 되었지. 서로에 대한 요해가 없었던지 우리도 행복하진 못했지만 그 여자랑 결혼한 남자는…일년만에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어. 그 여자는 내내 혼자 살았어.”

“그 여자분이…”

뭔가 짚이는데가 있어서 지은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여인은 시선을 들어 이윽토록 지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마전 그 사람, 너를 만나게 되었고 난 니 얼굴이 그 여자를 닮았다는 걸 발견했어. 성씨도 같았고…그다음엔 지금 들은 그대로야. 그 사람…시간이 한달밖에 남지 않았어. 그래서 그렇게라도 널 곁에 두었던 거야.”

“아저씨…”

“그 사람도…가여운 사람이야. 전처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토록 아껴왔던 큰아들도 실종되고…이젠 그 사람한테 남은 거란 평생 마음을 나누지 못한 와이프와 둘째아들이겠지. 그 사람, 그래도 내곁에 착한 아들 하나가 남아있어서 시름 놓인다는 바보 같은 말을 하네. 니가 가보겠다면 막지 않을 께. 다만 그 사람 병이 더 중해지지 않게…조심해줘.”

여인의 눈물젖은 부탁이였다.

“그래서? 그래서 가봤어?”

수연의 다급한 물음에 지은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수연은 눈을 크게 떴다.

“아직 안가고 뭐하는 거야?지금이 언젠데? 너 그게 한달전 일이라며?”

“늦었어.”

“…”

“내가 수업이 없는 날을 타서 가보려고 했을 때, 아저씨 부고가 들려왔어. 난 항상 이렇게 한발 늦더라고…”

지은은 머리를 숙이고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아저씨 옛사랑이 우리 엄마가 맞는지, 내 성씨는 왜 하필 엄마 성을 따라야 했는지…그리고 아저씨의 와이프가 헛짚지 않았다면, 우리 아버진 왜 엄마를 떠났는지…이 모든 것이 미스테리야.”

지은은 머리를 들고 수연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또 한번 쓸쓸하게 웃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의혹을 가졌어. 아버지에 대해서 엄마는 항상 함구했었어…하지만 난 알아. 엄만 아버지를 기다렸다는 거. 난 그걸 알수 있었어.”

“…”

“그래서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난 너무 허탈했어. 어릴때부터 난 아버지가 궁금했어. 엄마를 떠난 아버진 엄마의 일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난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면 엄마가 아버지에 대해 얘기해주실 줄 알았어. 난 그걸 믿고 오래돌안 기다렸는데…엄만 그만 그 비밀을 혼자 안고 가버렸어.”

“지은아…”

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4년전 지은을 위로했던 그때처럼 지은의 앞에 쪼크리고 앉아서 지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슬픈 이야기를 이토록 덤덤하게 말하는 그녀가 안쓰러워 견딜수 없었다. 지은의 눈물은 4년전 그때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수연을 더 괴롭게 했다.

“어떡하냐…내가 뭘 도와줄수 있겠니…”

“엄마를…찾아가서 따지고 싶어. 아버진 대체 어디 있냐고, 왜 이 세상에 날 혼자 버려뒀냐고.”

굵은 눈물방울이 수연의 눈에서 손등으로 굴러떨어졌고 지은은 자기 대신 눈물 흘려주는 수연을 바라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한마디를 끄집어냈다.

“아니면, 내게 시간을 돌릴수 있게 해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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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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