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필히 요동 총병이 되어달라는 서은의 요구는 끝내 이여백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봉선각에서 사람이 와서 청하는 바람에 그는 그대로 가버렸고 그후부터 왠지 그녀를 은근히 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총병부에 머물러있는 니칸외란과 나치야도 별다른 동정이 없었다. 이성량이 몸져 누웠으니 이런 때에 혼사를 아퀴짓는 일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총병부 상하 식솔중에서 초조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역사에 기재된 운명을 바꿔보려는 그녀의 의지가 단단해지기 시작한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존재가 역사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이 시대 인물들의 운명과 그녀 자신의 목숨도 명부에 맡겨야 한다는 것에 그녀는 사실 오래전부터 화가 치밀어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드디어 결심을 내리고 명부에 대항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그녀 눈앞의 모든 상황은 오히려 이런 그녀의 생각과 멀리 빗나가 있었다. 특히 이여백의 무심한 반응이 그러했다.

“요동 총병이 될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어. 역사에 기재된 내용에는 총병이 된 적 없지만…역사에 영향을 줘서 기록을 바꾸려면 이것부터 변화를 가져와야 해.”

그녀는 이런 착잡한 마음을 억누르고 처소에서 나와 앞채쪽으로 향했다. 연일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는 이성량에게 문안을 가기 위해서였다. 앞채 본채에서 이성량의 수하 군졸이 그녀를 맞아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둘째아씨님…”
“쉿, 소리를 낮추십시오. 아버님의 환후는 어떠십니까.”
“의원이 다녀갔는데 전혀 차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군졸의 대답에 그녀는 조용히 문안으로 들어섰다. 이성량이 눈을 감고 침상에 누워있었고, 그녀는 침상옆에 시립하고있는 군졸에게 가만히 손짓을 했다. 군졸이 소리없이 물러나가자 그녀는 침상옆에 앉아 가만히 부채를 집어들었다.

“아직 덥지 않으니 그냥 앉아 계십시오.”

이성량이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전혀 병색이 섞이지 않은 이성량의 목소리에 그녀는 영문을 알아차리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환병지책이십니까.”
“공주님의 눈은 속이지 못할 것이라 알고있습니다.”

이성량은 눈을 뜨고 그녀에게 가볍게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베개에 등을 기댔다.

"천만에요…의원까지 속일수 있다면 아버님의 연기는 훌륭하십니다."
"니칸외란이 경거망동하지 않게 하기 위해 어쩔수없이 꾀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긴 어인 일로…"
"실은 형님께서 연일 집에 계시지 않기로…"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이 대답하는 말에, 이성량은 미간이 구기고 말했다.

"총병부에 처리할 일이 산더미인데 그놈은 어딜 갔답니까."
"형님을 꾸짖어줍시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급히 이성량을 눅잦혔다.

"다만 형님의 일로 긴히 아뢸 것이 있어…"
"그놈의 불효자식을 감싸주지 마십시오. 공주님께서 어찌 그런 불효막심한 놈을 마음에 두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님…어찌 갑자기 그런 말씀을…”
“일전에 찾아왔더이다. 공주님의 심명대의를 저버리고, 그놈이 절대 나치야를 취할수 없다고 하더이다.”

이성량의 대답에 그녀는 실망인지 안심인지 모를 착잡한 심경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모든게 제 탓입니다. 제가 아직 형님을 설득하지 못하여…”
"아닙니다. 또 사실 어찌 그놈을 탓하겠습니까. 어쩌면 아비된 저의 무능함을 탓해야 하오리다…”

그녀는 이성량의 말에서 그의 회한을 가려들을수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 아직 누르하치나 니칸외란은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몽고나 조정에는…”
“조정의 의논은 두렵지 않으나 몽고와 여진이 손을 잡는 일은 제가 항상 우려하는 일입니다.”

이성량은 깊숙히 미간을 구긴 채 그녀를 주시했다.

"선황(융경제)께서 몽고와 여진으로부터 요동을 지키라는 어명을 내리신 후로, 저는 자나깨나 요동 방위에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습니다. 몽고는 알탄칸이 경성까지 쳐들어온 경술지변 이후로는 비록 만주까지 물러서긴 했으나 항상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만일 니칸외란의 요구에 응하지 않아 그가 만주국주 이름으로 몽고에 서찰을 띄운다면, 몽고가 필히 요동을 침범하여 요동의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릴 것입니다."
"…"
"제가 지금은 꾀병을 하고있지만 더이상 대처할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진짜 병이 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성량의 탄식섞인 말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님, 시름 놓으십시오. 제가 이번엔 꼭 형님을 설득하여 아버님의 번민을 덜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머리를 들고 이성량을 보면서 다시 말했다.

“다만 제게 두가지 부탁이 있으니…아버님께서 들어주시겠습니까.”
“황공합니다. 공주님께서 부탁이라니요…어서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이성량이 급히 하는 대답에 그녀는 빙긋이 웃었다.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저의 첫번째 부탁입니다. 저는 더이상 공주가 아니니 아버님께서는 물론 총병부 모든 식솔들도 저를 식구처럼 편히 대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말씀도 낮추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 또한 총병부에 편히 있을수 없습니다. 저를 식구로 생각하신다면 말입니다.”
“그래, 알겠…다.”

이성량의 대답에 그녀는 미소를 거두고 숙연한 표정으로 다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두번째…아버님의 이 병은 좀 더 오래 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어찌하여…”
“머지 않아 총병직에서 사퇴하실 명분이 되기때문입니다.”

이성량이 놀란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자, 그녀는 뒤로 물러서서 그에게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소녀 또한 알고있사옵니다. 저의 이런 요구가 아버님께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임을…하지만 요동을 안정을 위해, 명나라의 기반을 위해, 누르하치의 세력을 감소시키기 위해…또 형님께서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필히 그리 하셔야 합니다. 하여 부탁드립니다.”

이성량은 놀란 기색을 거두고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여백 그 아이가…”
"우선 솔직히 말씀 드리면…소녀 일찍 형님의 관상을 보니 공명에 뜻이 없고 학을 타고 세간을 벗어난 신선의 상(相)을 하고있사옵니다."
"…"
"팔자는 피하기 어렵다고 하나 하필이면 저는 그것을 믿고싶지 않사옵니다. 형님께선 평생 청운에 오르실 팔자가 아니고, 부인, 소실 지어는 슬하에 자식까지도 없을 운명이라도 저는 감히 그것을 바꾸고 싶습니다."
"…"
"그 첫걸음이 바로 나치야를 취하는 일과 요동총병이 되는 길이니 부디 아버님께서 이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부인이라면 네가 있지 않느냐. 관상이란 한낱 미신이니 어찌 그런것으로 운명을 결정한단 말인가.”

이성량이 담담히 하는 말에, 그녀는 처연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아버님께선 그 내막을 모르시옵니다. 저는 공주의 신분으로 광명정대하게 출가하는 것이 아니니, 저의 내력으로는 아드님의 정실부인으로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건…"
"아시겠지만 지금쯤 경성에 계신 금상께서는, 서안공주가 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세간에 반포하셨을 것입니다."
“…”
“또한 제가 다복하지 못하여 수를 다하지 못하고 단명이라도 한다면 어떡하겠습니까. 하오니 만일 나치야를 정실로 들이면 요동의 당면 위기도 극복할수 있고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옵니까.”
“…”
“총병직에 한해서는 아버님께서 총병직을 사퇴하시되 요동 영원백으로서 모든 권리는 포기하지 마시옵소서. 여기에는 지금 소지하고 계신 아버님의 병권도 포함되어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 내놓으시는 건 다만 요동 총병이라는 명분일뿐입니다.”
“…”
“솔직히 이는 단지 누르하치와 몽고를 속이자는 계책일뿐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아버님의 위망으로 주변 민족을 아우르고 있었고, 이제 그들은 아버님께서 쇠퇴하시기만을 노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형님께서 아버님의 자리를 세습한다고 알려지게 되면, 그들에게는 비단 아버님뿐만이 아닌 형님이라는 강력한 적수가 하나 더 생기게 되는 것이니 분란을 일으키려 해도 재고하게 될 것입니다.”
“네 말이 틀림이 없다.”

이성량은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미 이지러진 달이나 여백은 한창 떠오르는 초생달이려니."
"아버님…"
"지난 세월동안, 나는 다만 내 뒤를 이을 사람이 없기로…지금까지 이 모든것을 혼자 감당해왔다."
"…"
"만일 여백이 이제라도 정신을 차린다면 나 또한 무엇이 두렵겠느냐. 허나…"

이성량은 말을 멈추고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치야의 일처럼…이 역시 기필코 여백 스스로 원해야 하는 일이거늘.”
“해서 형님께선 지금 저를 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허락을 받았은즉 저 또한 형님을 설득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래…그리하거라."

그녀의 결연한 태도에 이성량의 눈빛에는 안도감과 더불어 쓸쓸한 기색이 잠깐 스쳤다. 그런 이성량에게 작별을 고하고 문밖을 나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님…설사 요동 총병이 아니여도 역사에 기재된 아버님은 요동 영원백으로 남아 90세 고령까지 경성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것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서글픈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그러니 부디…형님의 안위를 위한 이런 제 이기심을…용서하여 주세요…"

……

등촉이 휘황한 봉선각 누대에서 기녀들이 풍악소리에 맞춰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 속으로 서은이 들어갔을 때에는, 검은 망사로 얼굴을 가린 봉선이 이여백의 귓가에 대고 한창 무엇을 속살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이여백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눈처럼 하얀 미소를. 그 미소는 비수처럼 그녀의 마음에 꽂혔다.

“형님…”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발견한 그는 꼭 마치 무슨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네가 어떻게…”
“연일 뵈옵지 못하였기에 외람되이 걸음하였습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총병부를 나서면서 몇백번, 몇천번은 그런것이 아닐 거라고 애써 자기 자신을 위안해봤지만, 막상 눈앞의 정경을 보자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잠깐 마음을 추스린 후, 그녀는 시선을 들고 담담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아버님께서 급히 상의할것이 있으니 집으로 오시라고 합니다.”
"둘째아씨가 어찌 여기까지…"

주위 사람을 의식했는지 봉선이 입을 열었다. 망사에 가려 그녀의 표정을 볼수는 없지만 그녀의 목소리도 침착하지만은 않았다.

“저어…아씨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봉선…”

이여백이 봉선을 제지시켰다. 머리를 돌려보니 그는 어느새 흐트러진 기색을 거두고 차분한 태도로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알았으니 먼저 돌아가거라.”
“지금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그녀는 고집스레 그 자리에 버티고 서있었다. 그의 아무 일 없다는 듯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지만 그녀는 애초에 자신이 온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자꾸나.”

배웅해나온 봉선을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그녀는 굳어진 얼굴로 앞장서서 걸었다. 그가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밤길을 울렸다. 내심 그가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길 바랐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문채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결국 참지 못한 것은 그녀쪽이였다.

“익수 삼천이라도 그중 한바가지만 취하겠다구요.”
“…”
“아마 유백아와 종자기가 무덤에서 뛰쳐나올 겁니다.”
“…”
“제가 헤아림이 짧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마음을 두신 곳이 나치야가 아닌 봉선각이였군요. 봉선이 가능하다면 나치야는 왜 또 불가합니까.”
“…”
“아…알겠습니다. 나치야와의 혼인은 제가 주선한 것이라 싫은 거군요. 그래서 형님께서 그런 말씀 하셨군요.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고…지아비가 될 사람을 다른 여인에게 떠미는 것은 안되고, 그 지아비가 다른 여인에게 찾아가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은 된다는 말씀입니까.”
“…”
“어디 변명을 한번 해보십시오. 제가 소진, 장의라면 형님은 손빈, 방연이 아닙니까. 어디 36계를 내놓아 지금의 추궁받는 상황을 종료해 보시던가요.”

그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뒤로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 바싹 눈앞에 다가온 그의 얼굴에 하마트면 이마를 부딪칠뻔 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로 물러섰다.

“뭡니까.”

그녀가 여전히 화를 내자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운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혹시, 질투를 하는 것이냐.”
“네?”
“그동안 의연한 모습에 난 오히려 답답했었는데…이런 모습도 보여주니 오히려 고맙구나.”
“농은 그만하십시오.”

그녀가 얼굴을 흐리며 돌아서자,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변명해야 하는 것이냐.”
“뭐라구요?”

그녀는 팔을 비틀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 아버님께서 편찮으신데 기루에 드나든 것은 잘한 일입니까.”
“아버님께선 꾀병을 하신 것이야.”

그는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잠깐 그녀의 기색을 살펴보다가 그가 다시 말했다.

“봉선각에 드나드는 것이 그리 신경 씌였더냐.”
“제가 신경 씌일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왜 갑자기 봉선각에 드나드는지, 그것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녀가 본심을 숨기고 말하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건…아직은 말할수 없다.”
"물론 제겐 말씀하지 않으실테지요. 하긴 요동 제1기녀인 봉선의 매력을 그 누가 잊을수 있겠습니까. 전에는 신충일과 제가 동행했으니 어쩔수 없었겠지만 지금에야 꺼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그게 무슨…"
"전에 봉선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천하에 그녀의 사향 향기에 넘어가지 않는 남자가 없다고…형님이라고 예외겠습니까."
"날 믿지 못하는 것이냐."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제가 형님때문에 얼마나 동분서주 하는지 아십니까. 형님께서 저의 이런 고초를 헤아려주지 못하신다 해도 어찌 제게…제게…”

그녀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그만 몸을 돌려버렸다. 왠지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다소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이만 가시지요. 아버님께서 기다리고 계신지 오랩니다.”
“이번엔 아버님까지 당신 협조해서 나를 다그치는 것이냐.”

그의 말에 그녀는 눈을 올롱하게 뜨고 그를 마주했다.

"다그치다니요. 어찌 그런 말씀만 골라 하십니까. 아버님께서 이번 일로 얼마나 번민하시는지, 그리고 제가 얼마나 마음을 쓰는지 형님께선 전혀 안중에 없으십니까."
"서은아…"
"아무리 국사에 관심이 없기로 어찌 한가로이 기루를 드나들며 이렇듯 저희 마음에 못을 박고 있는 겁니까."

그녀의 말에 끝내 물기가 어렸다.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네가 지금은 날 믿기 어려울진 몰라도, 머지 않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번뇌하지 말아. 다 부질없는 고민이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 절레절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저는 지금 번뇌할뿐만 아니라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형님을 따라 요동에 와서 이러고 있는지…”
“서은아.”

그의 눈에 잠시 놀라움이 스쳤다. 그는 그런 눈으로 그녀를 보면서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후회…한다고.”
“네…후회합니다. 그리고 저는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형님께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희미한 안개가 서렸다.

“그날 제가 한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나치야를 거두지 않으면…전 형님곁에 더이상 머물수 없다구요.”

어찌 알아듣지 못한단 말인가. 그녀가 말속에 감추어서 전하는 그 수많은 의미를.

"저는…이렇게도 제게 숨기는 것이 많은…그리고 전혀 출사를 념두에 두지 않는 형님이 실망스럽습니다."

그녀의 뜻은 이것이 아님을…그는 알아들을수 있을까.

"지금의 형님은, 제게 한없이 낯설기만 합니다. 하여 이미 제가 곁에 있을 이유가 없어진 듯 합니다.”

이리 독한 말속에 감춰진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는 알까.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도 명리를 추구했느냐."

모르는구나…알아듣지 못하였구나…역시 그렇구나…

"아무리 사연이 많았어도, 내게 준 네 마음은 순수한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어찌 이리도 욕심이 많은 것인가.”
“형님을 위한 욕심입니다. 형님을 위하고 저희 앞날을 위한 욕심입니다. 그것이 어째서 잘못된 것입니까…”

그녀가 반박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안타까운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과 그의 모순이 쉽게 해소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말았다.

"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네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냐."

그가 이 한마디를 내뱉자, 그녀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형님…"
"아니면 왜 이렇듯 성정이 변한 것이냐. 공주 신분을 버릴 때는 언제고, 지금은 총병부인 자리가 욕심 나더냐."
"어찌 그런 말씀을…"

그녀는 잠시 멍해있다가 홱 몸을 돌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설음이 그녀의 눈앞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꼭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꼭 이토록 그녀를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몰아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렇게도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일까.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면서 그녀는 앞으로 몇걸음 걸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그녀는 멈춰섰다. 그녀의 뒤로부터 와락 그녀를 잡으며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잘못했다.”
“…”
“방금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그러는 저의 말은 진심이었을까요…가슴 찌르는 심한 말을 한쪽은 저인데 어찌 당신이 사과하신단 말입니까…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떴다. 얼굴 한가득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그런 그녀에게, 하염없이 눈물만 쏟는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당신 뜻대로 할께."
"…"
"나치야를 거두고, 총병이 될 것이다. 우선 혼례식을 올리고 연후에 네 뜻을 따를 것이려니."

원하는 답을 얻었으나.

"그러니 울지 말거라."

슬픔은 더할나위 없었다.

……

혼례식 준비로 총병부는 상하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인들과 시비들이 눈코뜰새없이 바삐 돌아치는 가운데, 이여백의 혼례식이 이틀후인 길시에 치뤄진다는 소식이 후원에 있는 서은의 귀에까지 전해왔다. 그동안 광녕에서 금했던 불꽃놀이와 기녀들의 참석까지 있다고 하니, 후원 각 처소의 시비들은 오랜만에 좋은 구경을 하게 되었다고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서은은 자신의 방안에서 쓸쓸한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보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성량이 시비를 시켜 그녀에게 보낸 옷이였다. 보나마나 혼례식에 참가할때 입을 옷을 요량해서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이여백은 그녀에게 그날의 답복을 준 후 더이상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지금의 이 상황이 구경 정답이 맞는 건지 헛갈렸다.

“총병님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의 시비가 고하는 말에 그녀는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평복을 입은 이성량이 문안으로 들어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녀는 이성량을 향해 머리를 숙여보였다.

“혼례준비로 앞채쪽도 바쁘실텐데 어찌 오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네게는 미안한 일이구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머리만 가로저었다. 이성량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최대한 규모를 작게 하여 총병부에서 며느리를 들이는 것으로 인근에 알렸다. 다들 특별히 축하하러 올 필요가 없다 하였으니 모레는 우리 가족들만의 잔치일뿐이다.”
“네.”
“이 일이 지나면 바로 길일을 택해 네 혼사도 마무리 해주마.”

그녀는 시선을 들어 이성량을 바라보았다.

“제 일은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이렇게 찾아와 위로해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성량은 머리를 끄덕인 후 그녀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어찌 아직 옷을 입어보지 않고 있느냐. 여백이 침모들에게 일러 각별히 여러날 준비한 것이라 했거늘.”
“이 옷…형님께서 보내주신 겁니까.”

그녀가 되묻자 이성량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입어보거라. 혹여 몸에 맞지 않는다면 다시 고쳐오라 할터이니.”
“네, 아버님.”

이성량이 문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바로 보자기를 풀었다. 화려한 흉배와 넓은 소매의 원삼, 붉은 활옷이 눈앞에 겹겹히 펼쳐졌다. 그녀는 잠깐 미간을 찌푸리다가 머리를 돌려 시비를 불렀다.

“밖에 누가 없느냐.”
“무슨 일이십니까.”

시비가 문안으로 들어서면서 물었다. 그녀는 시비에게 보자기를 가리켜 보였다.

“옷이 이상하구나. 어서 도련님을 찾아 돌려드리거라.”
"도련님께서 분부하시기를, 이는 아씨님의 신분을 나타내는 대례복이라 결코 잘못 가져온 것이 아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
"아씨님께서 모레 꼭 이 옷을 입고 참석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시비의 말에 그녀는 머리를 기웃하다가 몸을 일으켜 경대를 마주했다. 시비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틀어올린 후, 경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화려하다. 이건 뭐 주객이 전도되는 기분이니.”
"참으로 고우십니다."
"도련님께 드려서 고쳐달라 하거라. 내겐 과한 옷이다."

그대로 옷을 도로 벗어 시비에게 건네주며 그녀가 말했다. 시비는 난감한 기색으로 옷을 안고 나갔다가 한식경이 지나서야 되돌아왔다.

"도련님께선 처소에 계시지 않사옵니다."
"또 봉선각에 갔느냐."
"그것은 잘 모르겠으나 도련님 처소의 시비에게 물은즉 모레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였사옵니다. 이 옷은 총병님께 보내어 침모들에게 일러 고쳐달라 하겠사옵니다."

그녀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가 더 지나 혼례식 전날 밤이 되자 그녀는 더욱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후원 한쪽끝에 있는 나치야의 처소가 연몇일 조용했다는데도 생각이 미쳤다.

"여진족은 신부의 집에서 혼례식을 치른다는 풍속 때문일까."

하지만 도륜성으 이미 폐허가 되어있을텐데…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시비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씨님…옷을 고쳐왔으니 한번 더 입어보시옵소서."

시비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입던 서은은 문득 밖에서 왁자지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 의혹어린 시선으로 시비를 돌아보자 시비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앞채에서 혼례식을 위해 준비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나 봅니다."
"그런데 왜 벌써…"
"아씨님은 잘 모르시옵니다. 불꽃놀이는 밤에만 그 풍경을 구경할수 있어 흔히 식을 앞둔 전날 밤부터 시작되옵니다. 그렇게 밤새 불꽃놀이를 하다가 날이 밝으면 의식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렇구나."
"아씨님 단장을 마치고 저희도 함께 구경 가사이다."

그녀는 뭐라 더 말하려다가 시비의 들뜬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괜히 자신때문에 문밖의 시비들이 불꽃구경도 가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것 같아서 그녀는 못이기는척 따라나서기로 했다. 그녀가 옷을 입고 가벼운 단장을 끝낸 후 시비들을 따라 앞채에 이르자, 요란한 굉음과 함께 밤장막을 깨뜨리며 찬연한 불꽃들이 하늘을 현란하게 수놓고 있었다.

그녀는 그 호화로운 정경에 정신이 팔려, 누가 옆에 와 선것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잠시후 그녀가 들었던 고개를 내리자 옆에 선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길시가 되었는데 어찌 여기서 지체하고 있는가.”

그녀는 시선을 내리며 쓸쓸히 한마디 던졌다.

“혼례에 다망하신 신랑께서 어찌 친히 여기로 납시셨습니까.”
“혼례에 참석해야 할 중요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내 몸소 데리러 왔거늘.”

이여백은 태연히 그녀의 말을 받았다. 사모관대 차림의 그의 절륜한 모습이 불꽃아래 선연하게 보였다. 그녀는 차츰 눈앞이 흐릿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혼례식, 그러나 신부는 그녀가 아니었…

문득 그녀가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여진의 흰색 혼례복이 아닌 사모관대 차림이 다시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길시가 되었으니 어서 시작하시지요. 다들 대청에 모여있습니다.”

그녀를 데려온 시비의 말에 그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여전히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비가 뒤로 물러서자 그가 따뜻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었다.

흥겨운 풍악소리가 울리며 대청문이 활짝 열렸다. 동시에 무수한 불꽃들도 눈부신 광염을 뿜으며 하늘높이 날아올랐다. 그 뒤를 이어 대청안에서 사뿐사뿐 걸어나오는 봉선의 낭창한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망사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화려한 등장에 모두 조용해졌다.

봉선이 그들을 향해 잠깐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녀는 머리를 들고 손을 올려 가볍게 손벽을 쳤다. 풍악소리가 잠깐 바뀌며 기녀들이 가벼운 우의(羽衣)차림으로 “예상우의(霓裳羽衣)무”(중국 당나라때 당현종이 만든,양귀비가 잘 추었다는 표일하고 경쾌한 춤)를 시작했다. 대청안팍의 사람들은 눈앞의 정경에 정신이 팔렸으나, 서은은 누가 보기에도 참담한 얼굴로 이여백을 돌아보았다.

“형님…”
“쉿.”

그가 가볍게 그녀를 제지했다. 이윽고 음악이 멎고 우의춤이 끝나자, 하늘 가득 춤추는 불꽃을 뒤로 한채 봉선이 표연하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금세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서있는 서은을 향해 정중히 만복을 했다.

“봉선이 오늘 예상무의곡을 가지고 두분의 희사에 감히 축하주를 마시러 왔사옵니다. 다만 이리 고우신 신부께서 저희를 반겨 맞아주시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봉선…어찌 당신까지…오늘의 신부는 제가 아니라…”

서은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뒤이어 그녀는 이여백을 돌아보다가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형님께서 벌이신 일입니까. 그동안 봉선각으로 다니면서 봉선과 함께 이 일을 계획하셨군요."
“하마터면 들킬번 했었지.”

그가 잔잔히 눈꼬리를 휘었다.

“그날 사세 부득이하여 너의 요구에 응하였다만, 너 역시 혼례를 올리겠다는 내 말에는 묵인하지 않았더냐.”
“그건…!”

형님의 덫이었습니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형님과 나치야와의 혼례인줄로 착각하게끔…

그녀는 도리머리를 저으면서 천천히 뒤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태도에 놀란 그가 황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난…네게 답을 하였다. 나치야를 거두고 총병이 되겠다고. 난 내 소신을 대가로 오늘의 혼례를 바꿔온 것이야."
"…"
"그러니 더이상 도망가지 말아."

제가 뭐라고 형님의 소신까지 포기하신단 말입니까…

"널 위해 목숨도 걸수 있거늘 뭔들 포기 못할까."

그녀의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한 말을 그는 눈빛으로 알아차린듯 했다. 그런 그였기에 그녀는 더욱 서글퍼졌다.

“안됩니다. 저는 형님의 뜻을 따를수 없습니다. 일단 아버님을 뵙고 말씀…”

그녀의 말을 그가 단칼에 잘랐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 고집을 접을수 있겠느냐."
"형님…"
"아버님께서도 오늘 일을 뭐라 못하실터. 내가 나치야의 일에 타협을 했으면, 너도 오늘의 혼례 정도는 넘어가줄수 있는 것이 아닌가.”
“형님께서 이러시면…제가…제가 지금까지 노력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녀의 안타까운 어조에 그의 눈빛도 간절해졌다. 그는 그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의연하게 말했다.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상함을 알겠다. 사심보다는 대의를 중시하고, 작은 것보단 큰 그림을 보는 너의 뜻도 알고있다. 하지만 하늘에 눈이 있고 땅에 귀가 있다면, 오늘의 내 처사쯤은…탓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돌렸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여인과 혼례를 올리는 것을 편하게 바라볼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명부의 그 잔인한 규정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두 사람은 순수하고 온전한 감정으로 서로에게 임할수 있었을 것을. 명부…그녀는 오싹 몸을 떨며 다시 그를 보았다.

“안됩니다…절대 안됩니다.”

“더이상 안된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이 목소리는…등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한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의심을 증명하는 듯 이여백이 그녀의 뒤를 향해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뒤이어 봉선을 비롯한 기녀들과, 대청안의 모든 사람들도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멀리서 귀객이 오는줄도 모르고 접대가 소홀하였사옵니다. 다들 어서 대청안으로 드시지요.”

언제 왔는지 이성량의 목소리도 그녀의 옆에서 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라버니…아버님…”

만력이 그녀의 얼굴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평복차림의 만력이었지만, 그에게서는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수 없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만력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너를 향한 여백의 마음이 가상하여 천리를 마다하고 왔은즉, 내 얼굴을 봐서라도 더이상 안된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하오나…”
“어허…더이상 무엇이 걱정인고. 그토록 총혜 넘치던 내 동생은 어디 갔느냐.”
“오라버니.”
“내 동생은 결코 사내들에게 지지 않는 기개와 포부를 지녔고, 신분과 성별의 틀에 갇혀있지 않은 용감한 아이었지 않느냐.”
“하지만 일전에 오라버니께선, 제가 오라버니의 동생답지 못하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래도 난…지금의 네가 좋구나. 그리고 이런 네가, 부디 행복하길 바란단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들먹히 차올랐다. 그녀를 위해 불원천리 요동까지 걸음을 한 황제…이런 황제가 태정을 하고 명나라로 하여금 쇠운의 길을 걷게 하다니…그런 역사는 바꿔야 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이여백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난감한 눈빛으로 이여백의 곁에 서있는 이성량을 보다가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끝내 결심을 내렸다.

"명 받잡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쳐들었다. 움츠렸던 허리도 곧게 폈다.

“식을 시작하시지요.”

이젠…두렵지 않습니다. 그 어떤 화가 떨어진다 해도 달갑게, 그리고 당당하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저 한사람만 벌하시고 그 사람과 제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을…다치지 말게 해주십시오.

이여백은 눈을 들어 그녀를 깊이 주시했다.

“당신…”
"혼례를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형님께서 대답하신 그 두가지 일이 무마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모를 박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있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슬프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인 후 천천히 대청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풍악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밤하늘의 불꽃은 별들과 함께 현란하게 춤을 추었다. 성대한 혼례식이 시작되었다.

……

“대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거라.”

축하연이 무르익은 틈을 타서 후원의 처소로 돌아온 그녀가 내린 명이었다. 그녀를 따라온 시비가 머리를 기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둘째아씨님…”
“너는 왜 따라왔느냐. 가서 도련님의 시중을 들 것을.”
“송구합니다. 소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이여백의 심복이 분명한 시비가 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되었다. 가서 빗장을 지르고 그 누구도 들이지 말거라.”
“네에.”

시비가 물러간지 얼마 안지나 대문쪽에서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후 문 두드리던 사람이 시비와 몇마디 주고받더니 삐걱 대문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화가 나서 처소문을 벌컥 열었다.

“내 누구도 들이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하오나…도련님이십니다. 둘째아씨님.”

시비가 낯색이 하얗게 질려 버벅거렸다. 그녀는 들어온 사람이 이여백인 것을 보자 얼굴을 굳히고 바로 몸을 돌렸다. 시비들이 인사를 한후 모두 물러나가자, 그는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화를 내는 것이냐.”
“어찌 감히 화를 내겠습니까.”

그녀가 새초롬히 하는 대답에, 그가 나직한 웃음소리를 냈다.

“화를 내는 것이 분명하구나. 항상 넌 화를 낼때면 이런 말투였다.”
“형님께 화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힐끗 그를 바라본 후 덤덤히 말을 이었다.

“그저 아무것도 할수 없는 제자신에게 화가 났을뿐입니다.”
“차라리 나한테 화를 내지 그러냐.”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채 대답한 후,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깊이 주시했다.

“그렇다고 나를 문안에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더냐.”
“그냥…오늘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을뿐입니다.”

그녀가 변명조로 하는 말에 그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신혼 첫날밤에 신랑을 문전박대 하다니. 이는 고금에 둘도 없는 악처일터."
"이리 방안에 들어와 계시면서 어찌 그런 말씀을."

그녀의 반박에 그는 말문이 막힌 듯 했다. 그런 그를 한참 보다가,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살풋이 웃었다. 그녀의 옅은 미소에 그는 잠깐 멍해있다가 말했다.

“옛날 주유왕이 천금으로 일소(一笑)를 산다고 했었는데, 오늘 당신이 웃는 것을 보니 천금이 아니라 만금도 아깝지 않느니…”
"그럼 주십시오. 만금을."

그녀가 미소를 거두고 손을 내밀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만금이 아니라 이내 목숨을 준다 해도 기꺼운 일이지.”
“왜 하필…”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등불아래 유달리 창백하게 보였다.

“왜 하필 이렇게 된 것입니까. 제가 그렇게도 노력했는데…왜 일이 제 의지와는 달리 이렇게 되는 겁니까.”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의 성패를 결정하는 건 하늘이기 때문이다."

그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복숭아같은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리고 하늘은, 이런 내 편을 들어주었느니."
"…"
“그러니 더는 날 밀어내지 말거라. 네가 날 밀어내면 낼수록…난 이런 네게 더욱 내 마음을 빼앗길 뿐이니까.”
“형님…”

그녀의 함초롬한 눈동자를 적시며 끝내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입술로 그녀의 눈물을 훔쳤다.

“대체 무엇이…널 이토록 슬프게 하는지…내가 알아갈수 있게…서로 마음 가는대로 지켜봐주면 안되겠느냐.”
"…"
"지금은 내게 말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입을 열수 있게…내가 배로 노력할테니…이젠 내 마음 그대로 받아주면 안되겠느냐."

그녀는 눈물만 흘리고 있다가, 팔을 내밀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절절한 입맞춤이, 잠자리가 물을 스치는 듯 애틋한 입맞춤이 그녀의 입술로 미끄러지듯 옮겨가자 그녀의 방어선은 드디어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는…그 어떤 화가 떨어져도 어쩔수 없었다.

“제가 정말…제가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동안 명부와의 신경전으로 기진맥진한 그녀는, 지금 순간만은 그의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졌다. 천기를 누설한 벌과, 역사를 변화시킨 죄가 그녀 한사람의 고통으로 그칠수만 있다면…그녀는 체념어린 한숨과 함께 그의 품에 깊숙히 얼굴을 묻었다.

방안의 등불이 꺼지고, 사창에 비친 두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다.

……

원앙을 수놓은 비단 금침위에 서은의 겹겹한 대례복과 검은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다. 창문을 꿰뚫고 들어온 희미한 달빛이 이불밖에 드러난 그녀의 하얀 어깨를 몽롱하게 비춰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지난밤의 뜨거운 정사를 되새겨 주려는 듯, 그녀의 가녀린 쇄골위에 찍힌 입술자욱에 그가 다시 열기어린 입술을 겹쳤다. 잠시 혼곤하게 잠에 취해있던 그녀는 수줍은 듯 팔을 뻗어 그의 가슴을 밀었다.

"형님…"
"흠…이젠 호칭을 달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홍시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떻게…말입니까."
"어허…부인, 정녕 알면서 이러는 것이요."

그가 나직히 웃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렸다.

"서방…님."

그의 눈에 훅 뜨거운 불길이 스쳤다. 하지만 잠시 눈을 감았다 뜬후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드러난 어깨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괜찮느냐."
"네…"
"지난밤 탐닉이 과하여 네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되는구나."
"…정말 괜찮습니다."

말하고 보니 왠지 그를 유혹하는 것처럼 들려 그녀는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실은…좀 피곤하여 잠깐 졸던 중이었습니다."
"이리 오너라."

그가 팔을 내밀자 그녀는 다소곳이 그의 품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가 그녀의 가는 허리를 단단하게 감았다.

"이리 연약한 것을…"
"…"
"어찌 여린 몸으로 모든 일을 홀로 감내하려 드느냐."
"서방님."
"내가 그렇게도 믿음이 가지 않는단 말이냐."
"아닙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절륜한 얼굴을 눈에 담았다.

“제가…말이에요. 혹시 제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다면…하지만 당신 기억속에서는 존재한다면 당신은 어떡하겠습니까.”

그의 따뜻한 품속에서 그와 시선을 마주 한채, 그녀가 슬프도록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그녀를 힘주어 껴안으며 그는 의연하게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찾아야지. 당신 간곳 알아내서…그게 세상 끝이라 해도…찾아내야지.”
“찾아내지 못하면요.”
"찾아낼 것이야. 꼭 찾아낼수 있을 것이다."
"…"
"넌 날 절대 버려두지 않을테니까. 혹여 일이 여의치 않더라도 뭔가 단서라도 남길테니까. 허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난 널 찾아낼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그에게로 바싹 몸을 밀착했다. 그녀의 행동에 멈칫하던 그가 바로 그녀의 살결에 뜨거운 입술을 내렸다. 아침이 되려면 아직 먼 시간이었다.

정담이 넘치는 방안에서는 현란한 봄빛이 무르녹고 있었고, 창문밖의 밤하늘에서는 두 사람을 축복하는 듯 눈부신 별무리가 화사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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