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안개 자욱히 어린 호숫가, 오랜 시간 대치하고 서있는 두사람이 보였다. 흐릿한 시선안으로 긴 수염을 흩날리는 싸늘한 얼굴이 들어왔다. 서은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들이 어디 있어도 집요하게 찾아올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사람이라고 이름지을수 없는 경외스러운 존재였다.

“자네 힘으로 뭘 바꿀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염라대왕의 냉랭한 말을,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받았다.

“명부의 규정에 따르면 저 사람의 후생은 없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면 저 사람은 어찌 존재하게 된 것입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서안공주가 자결이라면 윤회의 기회는 없어야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저 사람이 공주의 후생이라면 자결이 아니라는 말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생에서 저 사람의 결과는…”
“그대는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는도다.”

염라대왕이 손을 들어 이여백의 말을 막았다.

“명부가 지시하는대로 움직이면 될 것을.”
“놓아주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저 사람대신 저를 이용하라고도 부탁드렸습니다. 분명 약조하셨지요.”

뭔가…온몸이 소름이 확 끼치는 감을 느끼며 서은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둘의 그림자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호숫가의 모피로 깐 자리에는 자신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는 그녀의 눈안으로 멀리 이여백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벌써 깼느냐. 더 자지 않고.”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걸어오는 말에, 그녀는 일순간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어디…가셨댔습니까.”
“잠깐 바람쐬러. 밖은 매서운 바람이 불어치는데 안은 아늑하기 그지없네.”

그는 저벅저벅 걸어 그녀의 옆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좌선을 하듯 그녀옆에 올방자를 틀고 앉았다. 그때 그녀의 가녀린 팔이 그의 허리를 왈칵 끌어안았다. 그는 흠칫 놀라는 듯 했지만, 곧바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갑자기 사라져서…깜짝 놀랐잖아요…”

가볍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배어나오는 듯 했다.

“이 몇일동안 단 일보도 제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약속해놓고…”
“깊게 잠들어서 깨우기 아까웠다.”

이여백이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풀었다. 하지만 그녀는 옭아매듯 더욱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그녀를 힘주어 감싸안았고,그녀는 한참후에야 유유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제가 요즘 생각하는 거지만, 이 세상 그 어떤 생명도 태어날 권리가 있고 사랑받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요. 우리 아기도 그래요…”
“…”
“우리 아기가 태어나서 자랄 때까진 온전한 부모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하는데, 제발 그게 욕심이 아니라고 말해줘요.”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던 그의 손이 느리게 멈췄다. 그리고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 그가 말했다.

“행복할 거야. 당신이나 나, 모든 부담을 잊고 지금에 충실하고 싶을 테니까. 그래서 최선을 다할 테니까.”

그녀가 머리를 쳐들었다. 뭔가 곤혹스러운 것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문득 아까 비몽사몽중에 봤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도 느껴졌다. 아니, 아닐 거야…그가 그런 생각을…이건 그녀의 명이지 결코 그의 명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안온하고도 조용하게 평생을 지낼수도 있는 것을.

“아까…염라대왕을 본 것 같아요.”

그녀의 조심스러운 말에 그가 흘깃 그녀를 보았다.

“잠결에도 명부와 염라대왕은 꼭 거론하더군. 내가 나갔다 온 사이 꿈을 꾼 것이 분명해.”
“설마 당신…나 몰래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니죠?”

그녀의 질문에 그가 피씩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한 질문인데.”
“우리…다시 만나면 서로 투명해지자 약속도 하셨죠?”

그녀의 바싹 들이대는 질문에, 그가 난감한 듯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을 바로 앉히고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후 자리로 되돌아온 그는 그녀의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것을 내려보다가 영문을 알수 없어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 이것까지 가지고 오셨습니까.”
“당신이 가출을 했던 그때…”

그때 일을 떠올리면 흥미롭다는 듯, 그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봉선각에서 울리는 천상의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언제 만나면 꼭 다시 듣기를 원했는데 지금이 기회인 것 같아서.”

서은은 한숨을 내쉬며 거문고를 내려다보았다. 애써 무언가를 억누르듯,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살짝 표정을 구기고 그를 주시했다.

“가사는 듣지 못했는지요.”
“멀어서 똑똑히 듣지 못했지만, 도저히 잊혀지지 않더군. 옥적으로 옮겨볼까 하는데 먼저 운을 떼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옷섶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 거문고를 마주했다. 정해진 운명이라면, 까짓 가사 하나를 기피한다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그녀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맑고 청량한 옥적소리가, 거문고 소리 먼저 울려퍼진 것이다.

약속해요 이 순간이 다지나고 다시보게 되는 그날
모든걸 버리고 그대곁에 서서 남은 길을 가리란걸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수가 없죠
내 생에 이처럼 아름다운날 또다시 올수 있을까요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걸
이 사랑이 녹슬지 않도록 늘 닦아 비출게요

취한듯 만남은 짧았지만 빗장열어 자리했죠
맺지 못한데도 후회하지 않죠 영원한건 없으니까

운명이라고 하죠 거부할수가 없죠
내 생에 이처럼 아름다운날 또 다시 올수 있을까요

하고픈 말 많지만 당신은 아실테죠
먼길돌아 만나게 되는 날 다신 놓지 말아요

이생에 못다한 사랑 이생에 못다한 인연
먼길돌아 다시 만나는 날 나를 놓지 말아요

그녀는 거문고에서 손을 뗀 후, 놀라운 눈길로 그를 주시했다.

“언제 이 곡조를 익혔습니까.”
“음률에 정통하려면 한번 들은 곡조는 잊지 말아야 하는게 그 첫번째 순서.”

그는 어리둥절 해있는 그녀를 웃는듯 마는듯 바라보다가, 다시 옥적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언젠가 총병부 후원에서, 당신에게 고산유수로 고백하다가 거절을 당한적 있었지.”
“아, 그건…”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옷 앞섶을 말면서 나직히 중얼거렸다.

“그땐…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걸려서 당신 몰래 이 곡을 익혔어. 고산유수는 유백아가 종자기에게 들려준 곡이고, 이 곡은 내가 당신에게 들려주는 곡이 될 거야. 지금 들으니 가사가…"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옷 앞섶을 적시며 눈물이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옥적을 내리고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울지 말거라.”

줄 끊어진 구슬마냥 그녀의 눈물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은 것을 보며, 그는 어쩔바를 몰라 허둥댔다. 그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괜히 당신에게 뜻밖의 기쁨을 주려다…내가 괜한짓을 했지, 곡조는 왜 익히고, 가사는 왜 거론했는지…지금 들으니 가사가 너무 예뻐서…”
“인연입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는 말을 중단하고 그녀를 주시했다.

“뭐라고?”
“이 가사의 제목 말입니다. 인연이라고 합니다.”
“…”
“인연을 맺게 해놓고 왜 운명을 갈라놓는지…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또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슬픈 듯 웅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단박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절망이 어려있었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던 그가, 갑자기 무엇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숙여 웃었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엔…”

그가 더 말을 잇지 않고있어서 그녀가 물었다.

“그땐 왜요?”
“당신이 이처럼 울보인줄 알았더라면…”
“알았더라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녀가 눈을 올롱하게 뜨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얼굴을 돌리고 더 크게 웃었다.

“이렇듯 당돌한 성정이 정녕 당신답지 않은가.”

그녀는 억이 막혀 잠시 가만있다가, 주먹을 쥐고 그의 어깨를 살짝 때렸다.

“정 매를 벌고 싶어 이러시는 거라면, 제가 서방님의 그 념원을 헛되이 저버리지 않겠사옵니다.”

그는 맞으면서도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그녀의 작은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당하며,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있다는, 또 그래서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다정하게 웃고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맥이 진할때쯤,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녀가 힘없이 그의 품에 쓰러지자,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어미가 조폭하여 아기가 그대로 배울까 두렵군.”
“조폭?”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화난 듯 되물었다. 그리고는 눈썹을 곤두세우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제게 부드럽고 유순함은 기대치 말라 분명 경고하였습니다.”
“걱정 마라. 남장을 하고 요동을 누빈 처자에게 그 무슨 유순함을 기대하겠느냐.”

그의 야유섞인 말에 그녀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곧 무엇을 생각해낸 듯 그녀가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는 문득 손을 올려 그의 상투에 꽂은 은잠을 뽑았다.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남장을 했다 하여, 여인의 모습을 제대로 숨기지 못한 제가 지금 와서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그녀가 그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그녀의 농염한 눈빛에 그는 잠깐 무연한 상념에 젖는 듯 했다. 뒤이어 그의 시선이 흐트러진 그녀의 옷매무시에 닿았다. 금방 그에게 주먹을 안기느라 어깨에 걸친 학창의가 흘러내리고 저고리섶이 살짝 벌어져있었다. 흘낏 그의 눈길을 따라 자신을 내려다본 그녀는 두손으로 옷앞섶을 감쌌다. 그리고는 조용히 시선을 들어 그를 보며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멀리 떨어져 지냅시다.”
“당신도 참…”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두손을 꼭 잡았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는 역할을 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리고는 손에 힘을 주어 벌어진 옷깃을 잡았다. 두 사람사이에 난데없는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그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그녀를 보았다.

“나더러 유하혜(柳下惠,춘추시기 노나라 대부,여인을 보고 마음을 동하지 않은 군자)가 되라고?”
“못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그녀의 짐짓 태연한듯한 말에, 그가 바로 답했다.

“내가 졌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전에 그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옷섶이 벌이지며 찬 냉기가 확 하고 전해졌다.

“추워요…”

그녀가 뒤로 몸을 빼자, 그는 더욱 강하게 그녀의 손을 당겼다.

“지아비로서, 내자가 춥다고 하는데 가만 있어서야 되겠느냐.”

그녀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봉긋이 솟은 배가 그녀의 시선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중얼거림에 이어, 그의 시선이 문득 온천쪽으로 향했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녀는 당황하여 더욱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가 자신을 건뜻 안아들고 온천안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은 막지 못했다. 오히려 떨어질세라 그의 목을 감싼 채, 그녀는 두손으로 깍지를 단단히 꼈다.

“서방님…”
“쉿.”

그녀의 말을 끊으며 그가 그 무엇보다도 더 뜨거운 입술을 그녀의 몸에 내렸다. 그 열기에 그녀는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싸는 물속에서, 그녀는 크게 몸을 뒤틀었다. 변할줄 모르는 유구한 지열의 힘이, 그들의 감미로운 율동을 조용히 지켜주고 있었다.

……

눈보라가 일고있었다. 나뭇가지에 수북이 앉은 눈꽃이 바람에 흔들리다 끝내 추락하는 것을 서은은 물끄러미 보고있었다. 안일한 날들이었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날들이기도 했다. 그것이 다만 짧은 몇일뿐이라도, 그녀는 이미 만족하고 있었다. 어쩌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할수도 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이제 추위가 지나가면 저 두툼한 눈속에서 머리를 쳐드는 파아란 새싹처럼, 그녀 배속의 새로운 생명도 장차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될 터이니.

“이 세상 그 어떤 생명도 태어날 권리가 있고, 사랑받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들고 가느다란 한숨을 흘렸다.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은 이토록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체 운명이란 무엇이기에 이토록 인간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

등뒤에서 저벅저벅 발자국소리가 들려온다. 머리를 돌리지 않고서도 그녀는 그 사람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상상할수 있었다. 그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 시각 이여백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맹고가 도망갔다.”

서은은 잠깐 멈칫했다가 뒤로 머리를 돌렸다.

“총병부에서 온 소식인가요.”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곁에 와 앉자, 그녀가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잡았다.

“어차피 당신은…저희가 돌아가면 맹고를 놓아줄 것이 아닌가요?”
“…”
“출전을 앞두고 있지만 당신은 맹고를 인질로 잡아두지 않을 거잖아요.”
“왜 그렇게 장담하지?”

그가 담담히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스치는 낯선 느낌에 그녀는 왠지 오싹해졌다. 그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

“출전을 앞두고 맹고를 놓아줄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럼 당신은…한낱 여인을 앞세워 누르하치를 치려고 했던 거에요?”

서은은 웃으며 머리를 가로젓다가, 그의 무거운 표정에 차츰 웃음을 거두었다.

“설마…정말입니까?”

그가 여전히 아무 말 없자, 그녀는 힘주어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 내게 맡기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움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뒷말을 이었다.

“바람이 차니 오래 앉아있지 말거라.”
“추잉이 있지 않습니까.”

그녀가 문득 내뱉는 말에, 그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를 주시하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인질로는 추잉이 있지 않습니까. 추잉이 아버님 손아귀에 있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일전에 누르하치가 당신을 인질로 아버님을 겁박하려고 했을 때, 아버님이 동가와 추잉으로 누르하치를 제압했었죠. 후에 동가는 몸을 빼어 헤투알라성으로 갔지만 추잉만은 줄곧 무순의 외갓집에 살고있다는걸 당신도 알고계시지 않습니까. 또 아버님이 파견한 사람이 줄곧 그를 은밀히 감시하고 있다는것도 알고계실텐데요.”
“추잉으론 안돼. 누르하치에겐 대선이 있으니까. 그는 결코 대가 끊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다고 맹고를…”

그녀는 잠깐 고개를 떨군 후 다시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이건 당신답지 않습니다.”
“…”
“어찌 이다지도 승부에 연연해 하십니까. 누르하치와 당신 사이는 아직 길고 긴 전쟁이 있습니다.”
“이번 싸움에 지게 되면, 봄이 되어 여진이 광녕을 짓밟을 수가 있다.”
“진정 그것때문입니까.”

그녀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그가 조용히 침묵만 지켰다.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수상하다. 눈앞의 남자가 언제부터인가 수상한 기미를 보인다. 그토록 승부욕이 없던 담백한 남자가, 누르하치를 치기 위해 연약한 여인과 아이를 인질로 삼기조차 서슴치 않는다. 그녀의 기분이 묘하게 어그러졌다.

“당신 설마…누구에게 조종을 당하는 것입니까. 혹시 저때문입니까.”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이여백이 그만 시선을 피한다.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서 문득 안쓰러운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누군들 두렵지 않으랴. 가끔 그럴때가 있다. 아무리 담담한척 버티려 해도 문득문득 무너져 내리는 순간들, 아무리 괜찮다고 억지를 부려도 모든 것을 송두리째 부정해야 하는 것을 견딜수 없을 때 인간은 운명앞에서 머리를 숙여버린다. 눈앞의 가엾은 남자에게 자신은 너무 각박한 것이 아니였던가.

“총병부로 돌아가시죠.”

그가 머리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가만히 호선을 긋는다.

“량원이 좋지만 오래 있을곳은 못됩니다. 맹고가 도망갔으니 서둘러 출병해야 합니다. 그녀가 여기를 알고있으니 저희가 늦추다간 큰 낭패를 볼수 있습니다.”
“미안하다.”

그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말했다. 그녀는 싱긋 웃어보였다.

“그게 왜 서방님이 미안해할 일입니까. 이만큼 나와있었으니 돌아갈 때도 되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돌아갈줄은 생각 못했느니.”
“당신 탓이 아닙니다. 모든것이 때가 된 것뿐입니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늑한 동굴안과 그윽한 호수를 한번 둘러보았다. 마치 이 순간을 눈안에 담아두기라도 하려는 듯.

“짧기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여행, 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

총병부로 돌아온 그들에 앞서 총병부에는 칙서가 당도해 있었다. 아마도 출병을 재촉하는 내용일 거라는 서은의 예상과는 달리, 칙서를 읽는 환관의 목소리가 조금은 갈려있었다.

“영원백은 들으라. 짐이 덕이 없어 보위에 처하매 근자에 기력이 쇠약해져 좌우에 보필할자 없음을 저어하더니, 이제 경이 사가에 높이 앉아 향수함을 시기하여 곁으로 불러 조정 일을 같이 담론코자 하니 부디 지체치 말고 상경토록 하라. 또한 여백이 출병하매 서안의 기거가 불편할지라 경을 동행케 하라. 오호라 경의 금석지론으로 짐의 용인함이 가리워진다면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
“신 이성량은 만세를 우러러 조서를 받들겠사옵니다.”

이성량이 칙서를 받아들자 환관은 몸을 돌려 내당으로 들어갔다. 이여백은 서은을 부축해 가마에서 내리자, 이성량을 향해 깊숙히 머리를 숙였다.

“아버님…”
“돌아왔느냐.”

이성량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있었다. 소리 없는 한숨과 함께 그는 그들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더니 환관의 뒤를 따라 내당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여백의 다음 말에 그는 잠시 멈추어섰다.

“아버님께서 상경하시면…광녕이 비어있게 됩니다.”
“알고있다.”
“이 사람을 부르는건 이해가 가지만, 아버님까지 상경케 하는건 수상합니다. 좀 더 소상히 알아보시옵소서.”
“칙서는 거짓이 아니다. 다만…”

이성량은 흘깃 그들을 돌아보았다.

“금상께서 근래에 거동이 불편하시어, 자성태후 마마께서 모든 정사를 처리하고 계신다 들었다.”
“그렇다면…”
“자연 이 칙서도 자성태후 마마께서 내리신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수상합니다. 그분께서 왜 하필 아버님을 부르십니까, 그것도 하필 이때에…”

이성량은 손을 들어 이여백의 말을 막았다.

“수상하긴 하나 그분께서 부르실 때엔, 경성에 변이 생길 거라 염려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이여백은 아무 말도 없었고, 이성량은 서은에게 눈길을 주었다.

“다른 건 괜찮지만 먼길에 네 몸이 심히 걱정되는구나.”
“저는 과념치 마시옵소서, 아버님…”

그녀는 늦을새라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도 불안에 젖어있었다. 영원백의 상경이라…기억을 되살려봐도 이 시간대에 명에 어떤 변고가 일어났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공연히 이태후의 기인우천으로 이성량을 부르는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은…

자정이 깊도록 서은의 처소에는 등불이 휘황했다. 령이는 행장을 꾸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서은은 등불밑에 머리를 숙이고 고즈넉히 앉아있었다. 그러다 령이가 머리를 숙이고 물러가서야 그녀는 이여백이 방에 들어섰다는 걸 알수 있었다. 그녀가 일어서려 하자 이여백은 손짓으로 그녀를 막았다.

“실은 보내고 싶지 않은데.”

그는 짐짓 홀가분하게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하고. 텅 빈 총병부에 있기보단 궁에 가서 조섭하는 게 더 좋은 일이니까.”

그녀는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긍정을 표하지도 않았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그녀가 응답이 없자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눈치가 빠르니까, 이번 출병이 그리 순조롭지 않은줄은 알고 있겠지. 하지만 걱정하진 말아. 당신이 알고있는 역사의 내용대로라면, 나는 자결을 하지 결코 전장에서 죽지는 않을 거니까.”
“어찌 출전전야에 그리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녀는 물기어린 눈망울을 들었다. 이 시간대에 경성에 무슨 변고가 일어나는지 조금이라도 기억이 난다면 그녀는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였다. 아무리 텅 빈 총병부가 위험하다 해도, 아무리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도움이라고 해도.

“어쩌면 제가 알고있는 역사에…변화가 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변화를 주려고 저희가 애쓰기도 했지요. 그러니 저희의 미래는 불투명한 것입니다. 꼭 마치 지금 경성에 어떤 일이 일어난줄 모르는 것처럼. 그러니 서방님께서도 출병을 앞두고는 절대 그런 말씀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런 미지의 운명이 더 좋지 않느냐.”

그가 웃었다. 그의 눈빛에는 착잡한 기색이 어렸다.

“어쩌면 그 누가 원하는대로 살기보단, 내 운명이 미지의 운명이라면 더 살아볼만할 거 같은데. 내가 노력한만큼 변화가 올수도 있다는 것도, 내가 최선을 다하면 결과가 바꿔지기도 한다는 것도 내게는 그토록 절실하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잇는 말이었지만 그속에 가려져있는 간절함은 그녀의 마음속에 잔잔한 공명을 일으켰다.

“설사…그 결과가 원래 정해진 것보다 좋지 않다고 해도요?”
“당연하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해진 운명을 산다면, 사람의 한생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

그는 중얼거리듯 말한 후 그녀를 보고 다시 싱긋이 웃었다.

“이참에 어머니와 회포도 풀고, 몸을 잘 추스려서 이쁜 아기와 함께 만나도록.”
“어머니…”

그녀는 입속말로 한번 되뇌인 후, 문득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보았다.

“참으로 수상합니다. 그분에게 저는 이미 버려진 딸입니다. 왜 하필 이번에 같이 부르시는지요.”
“자고로 천륜은 쉽게 끊을수 없는 법.”

그는 담담히 말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초생달이 청량하게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뒷모습도 전에없이 쓸쓸해보였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그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부디…몸조심하시옵소서.”

그가 작게 머리를 끄덕였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다가 말을 이었다.

“출산후 바로 오겠습니다.”

그가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그제야 불안이 가셔진 듯, 그녀가 그의 등뒤에서 살풋이 웃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에 옅게 깔린 슬픔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캄캄한 하늘에는 별빛 한점 없었고, 초생달은 차츰 희미한 그림자를 거두고 있었다.

이 글을 공유하기:

pandora

판타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판타지입니다.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응원합니다 응원합니다
5
응원합니다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