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더운 바람이 옷깃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지독스러운 여름밤,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서늘함은 비단 더위때문이 아니리라. 복통에 모지름을 쓰는 서은의 곁에서 봉선과 령이의 얼굴에서는 땀이 방울지어 흘러내린다.

“공주님, 태후마마를 부르시지요.”

몸을 돌려 나가는 령이의 옷자락이 누군가의 손에 잡혔다. 령이는 머리를 돌려 그 손의 임자에게 역증을 냈다.

“봉선, 어찌 이러시옵니까. 이대로 두시면 공주님의 옥체가…”
“”령아, 부탁이다. 가지 말거라.”

봉선이 입을 열기도전에, 미약하게 들려오는 서은의 목소리에 령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어찌하오리까, 저는 두말할 것 없고 봉선낭자도 출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있지 않사옵니까.”
“우리끼리 대처하자…하지 않았더냐.”

겨우 말을 내뱉는 서은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굴러떨어진다. 봉선은 입을 꾹 다물고 흰 깁을 북 찢은 후 머리를 돌려 령이에게 명했다.

“여기서 이러고있지 말고 가서 물이나 떠오시오.”

령이가 방문을 나선 후, 봉선은 허리를 굽혀 서은의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조심스레 쓸어올려 주었다.

“정녕 괜찮겠습니까.”
“봉선을 믿겠습니다.”

미약하게 웃어보이는 서은의 얼굴이 배꽃처럼 청초하다. 봉선은 알릴락말락 머리를 끄덕인 후, 그녀의 몸을 부축하여 편안한 자세를 취하게 했다.

“잠시 힘을 추스리옵소서. 령이가 오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봉선은 그녀의 통증을 잊게 하려는 듯 일손을 놀리며 화제를 돌린다.

“아기의 이름은 생각하였습니까.”
“천충(天忠)이라…하겠습니다.”
“천충…하늘의 뜻에 따르겠다는 말이옵니까.”

서은이 희미하게 웃었다. 고통을 참고있는 그녀의 눈빛이 하도 절절하여 봉선이 시선을 거두었다.

“어찌 공주님답지 않은 약한 모습을…”
“그 사람과 이 아이가 무사할수만 있다면…모든것을 하늘에, 운명에 맡기겠습니다.”

봉선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다. 서은도 서글프게 웃었다. 석달이다. 꼬박 석달동안 이여백은 전혀  소식이 없다. 설마 그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그럴수가 없다. 그럴리가 없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변화도 일어난 것이 없다. 차라리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뭐라도 했던 것을, 차라리 운명에 대항하기 위해 몸부림이라도 쳤던 것을…아이…오직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모든것을 감내하였던 것인데…뒤이어 물밀듯이 밀려드는 통증에 서은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아이…아이의 울음소리가 그녀의 귀전에 울린다. 하지만 눈을 뜰수가 없다. 어떤 섬세한 손이 그녀의 이마에 와 닿았지만 곧바로 막심한 공포가 그녀를 엄습한다. 뭔가…저 비릿한 웃음은…염라대왕…

문득 귀가에 울리는 산뜻한 거문고 소리가 그녀의 눈앞에서 염라대왕의 모습을 거두어간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휘장에 가리워진 침상위에는 그녀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고, 휘장밖에서 누군가가 정신을 가다듬어 거문고를 타고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자세히 보려다가 이내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봉선…아이…아이는…”
“유모에게 데려가라 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녀는 화뜰 놀라 눈을 떴다. 이태후…휘장밖에서 거문고를 타는 여인은 분명 이태후의 모습이었던 것을…그녀의 당혹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이태후가 거문고 줄을 골라 곡조를 변했다.

“심기가 허하니 예상우의곡을 들려주마.”
“어마…마마.”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이태후가 흔들리지 않는 가벼운 미소로 답했다.

“나를 어미로 생각하거든 그대로 누워있거라. 나를 원수로 생각하거든 그 아이를 찾아 데려오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는 한, 당신은 제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방안에서 차겁게 울렸다. 뒤이어 약속한듯이 찾아온 침묵 이후, 조용히 그것을 깨는 곡조에 그녀는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녀의 또렷한 음성이, 휘장을 뚫고 이태후의 행동을 제지시켰다.

“언제부터 묻고싶었습니다…왜 저 아이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지…”
“…”
“저 아이뿐만 아니라, 요동도, 아버님도, 총병부도, 서방님도…다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
“그리고 왜 굳이 저로 하여금, 어머니를 원수로 대하게 하는지…저는 알수 없었습니다.”
“…”
“한낱 유왕부의 시비가 한 나라의 국모로 되기까지, 당신의 모략과 지혜가 출중하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있습니다.”

이태후는 잠깐 멈추었던 손을 거문고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 특유의 냉정함을 유지한 채, 피씩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칭찬받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처음이군.”

서은은 묵묵히 그녀를 보았다. 아무것도 담지 않아 텅 빈, 그래서 투명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얼굴로.

“당신의 일장설화가 아버님을 속일수는 있어도, 저를 속이지는 못합니다.”
“그래, 다 정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 거짓인 것은 아니다.”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미소가 잠시 이태후의 얼굴을 스친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것을 싸늘히 지워버렸다.

“해서, 네가 날 어떻게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지금처럼 허약한 몸으로, 지금의 네 세력으로.”
“제 아이를 돌려주십시오. 해하지 말아주십시오.”

허구픈 미소가 이태후의 입가에 걸렸다. 그녀는 마치 놀리는 듯한 눈길로 처연한 표정의 서은을 보았다.

“이미 태어났은즉 저 아이의 명은 내 소관이 아니다.”
“복중의 태아에게도 손을 쓰는 당신이, 이미 태어난 목숨에게 관대할수 있겠습니까.”
“뭣이?”
“당신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생명의 위협을 받는 아이입니다. 당신이 아니더라도 지옥의…”

문듯 실언을 느낀 듯 서은의 말이 끊겼다. 하지만 곧 뭔가를 결심한 듯, 그녀가 그뒤의 말을 이었다.

“지옥의 세례를 받는 아이입니다. 그러니 부질없는 죄를 추가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사욕을 위해 희생된 사람은, 총병부인 한사람으로 충분합니다.”
“…”
“모든것을 바꾸고 싶었다고 하셨지요. 당신은 당신이 연모하는 남자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그 사람의 부인을 희생시켰습니다. 당신의 아들의 정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정계에서 막역한 지기였던 장거정을 희생시켰습니다. 지어는 요동으로 시집가는 당신 딸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한 무고한 남자에게 그토록 많은 자객을 파견했었지요…”
“…”
“하지만 유독 제 앞길을 막는 데엔 실패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어린 아이에게까지 손을 뻗친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전장으로 내몰고, 그 사람의 아이를 해한다면 당신 딸의 운명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나요.”
“…”
“그런데 어쩌죠…제 운명은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 걸…아니, 설마 바뀐다 해도 당신이 원하는대로는 되지 않는 걸…그래서 비상을 삼킨 것임을, 그래서 요동으로 간 것임을 당신은 알기나 할까요.”
“그게…무슨 말이냐.”

이태후가 눈을 들었다. 휘장을 꿰뚫고 그녀의 눈빛이 예리하게 서은의 얼굴에 와 닿았다.

“네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고.”
“네,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봤자, 운명은 정해진대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서안공주의 운명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겁니다.”

드디어…이 말을 내뱉었다. 염라대왕…올테면 오라…천기를 누설한 죄, 어떻게 다스리는지 내 똑똑히 볼테다. 그녀는 가슴속이 후련해남을 느꼈다. 타의가 아닌 자의로 이것을 알리게 된다면, 분명 천기를 누설한 죄를 엄히 다스린다고 염라대왕은 말했다. 한 여름밤의 미풍이 잠시 창문을 스쳤고,공기마저 그녀의 주위에 정지한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을 깨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안공주의 운명이라…”

관자노리에 지그시 손을 댄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이태후가 문득 두눈을 감았다.

“바뀌지 않는다면…지금…지금 일어나는 이 일들은 다 무엇이란 말이냐.”

서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찌물쿠던 하늘이 드디어 비를 내리기 시작했는지, 휘장사이로 물내음 비슷한것이 날려들어왔다. 그녀의 손안에 차츰 땀이 내배이기 시작했다. 무예를 아는 이태후,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이태후, 거문고로 “인연”의 곡조를 타는 이태후, 그리고 제일 의심스러웠던 것은, 채봉에 대한 이태후의 기억이었다. 채봉은 어릴때부터 유왕부에서 자라 그녀를 보아왔다고 했지만 이태후는 채봉에 대해 십여년을 곁에 둔 아이라고만 하였던 것이다. 설마…그녀의 의심을 증폭시키며 이태후가 그녀를 향해 허한 미소를 지었다.

“너 또한 운명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더냐. 왜 지금은 너답지 않게 움츠러드느냐.”

서은은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를 꿰뚫고 있는 듯한 이태후에 대한 당혹감이 그녀의 머리속을 텅 비게 만들었다. 그녀가 눈앞의 상황에 어쩔바를 몰라 멍해있을 때, 이태후가 드디어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이태후의 눈빛에서, 뭔가 자신과 비슷한, 그래서 더할나위없이 익숙한 그 무엇을 발견하자, 돌연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설마…”

불쑥 목이 탔다. 가볍게 호선을 긋는 이태후의 입술이 그 무엇을 말하려는지 어렴풋이 예상이 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놀라움, 그녀의 두려움이 오롯이 전해졌는지 이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천천히 휘장을 열어젖힌 이태후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긴장한 얼굴의 그녀를 보았다.

“그래. 지금 니가 하는 그 생각이 맞아.”

그녀는 순간 멍해졌다. 이태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미처 의식치 못한 채, 그 허구픈 미소가 불행이도 낯설지 않음을 그녀는 발견했다. 번쩍 하고 피어난 번개에 이태후의 얼굴에 한줄기 빛이 그어졌다. 그리고 하늘을 가르는 소리가 그 뒤를 이음에도, 그녀는 이태후의 차분한 목소리를 분명히 가려들을수 있었다.

“그래서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

여름장마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간밤의 놀라운 일들을 깡그리 씻어내려는 듯, 하늘은 창대같은 비줄기를 쉴새없이 내리퍼부었다. 서은은 몸을 기울여 아기의 자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아기의 용모는 비범하고 준수했지만, 미간에 비쳐있는 약간의 설음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아기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그녀는 나직히 한숨을 흘렸다. 만일 어제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면, 이 아기는 아직도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눈자리가 나겠습니다. 이젠 더이상 데려가지 않겠으니 안심하라고 하더이다.”

언제 들어왔는지 봉선이 웃으면서 건네는 말이다. 그리고는 앞으로 다가와 가볍게 아기를 안아들었다.

“잠시 유모에게 데려가겠습니다. 이만큼 보셨으니 이젠 그만 눈을 좀 붙이십시오.”
“어마마마는…”
“본채에 계시옵니다. 공주님께서 생각을 정리하신 다음 오시겠다 합니다.”
“괜찮으니 여기로 와달라 해주시겠습니까.”

서은은 침상에 기대어 앉아 긴 머리를 어깨뒤로 넘겼다. 형편없이 나른해보이는 그 모습이 걱정되는 듯, 봉선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나간다. 그녀는 잠시 머리를 돌려 경대위를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보기에도 창백한 얼굴이 음울하리만치 흐려져 있었다. 어제 그 일후로 도저히 이해 안되는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닌 탓이리라.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리며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혼자만이 아니었다. 이 시간대에 편승한 인물이 그녀 혼자만이 아니라는것이 묘하게 위로가 되고 있었다. 만일 그 인물이 이태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다지도 착잡하지도 않을 것을.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자신과 대립관계인 이태후일까.

“잘 잤느냐.”

이태후의 치마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시선이 모전을 깐 바닥으로부터 이태후의 얼굴로 옮겨졌다. 위엄을 띈 아름다운 얼굴,알릴락말락 조소를 머금고있는 붉은 입술…현대에서도 충분히 미인 소리를 들을만한 미모였다.

“명의 마지막 황제는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명의 뒤를 이은 조대는? 자금성의 현대 이름은?”

느닷없이 쏟아지는 그녀의 질문에, 이태후는 뜨아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그걸 내게 시험이라고 내는 것이냐.”
“기필코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제 신분을 유추해서 그리 말했는지는 누가 안답니까.”

그녀의 고집스러운 태도는 이태후의 더욱 큰 폭소를 끌어냈다. 한참 얼굴을 돌리고 웃던 이태후가 드디어 정색을 하고 그녀를 보았다.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네 의심을 해소시킬수 있다면 대답하마.”
“…”
“명의 마지막 황제는 숭정황제. 명의 뒤를 이은 조대는 청. 자금성의 현대 이름은 고궁박물관이다. 됐냐.”
“되었습니다…”

그녀는 맥없이 손을 내저었다. 사실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한번 더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내심 이태후와 같은 시간대에 왔다는 것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때문이었다. 설사 그런들 어떡하랴, 둘 사이는 이토록 모순되고 대립되는 관계임을. 죽이려고 하고 지키려고 하는자, 결국 상봉의 시간은 잠깐이고, 각자 자신의 소신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임을.

“내 사람은, 내가 지킵니다. 더이상 서방님과 제 아이를 해하려 들지만 마십시오.”

갑자기 딱딱해진 그녀의 어조에, 이태후는 조용히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지킨다고? 설사 그것이 이 세상과 건곤을 바꾸게 되는 일이라 해도?”

허한 웃음이 입술사이로 새어나왔다. 역시나…그랬다. 소위 대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처럼 작은 행복조차 송두리채 빼앗아가려 하고있다. 질리고도 질리다. 염라대왕, 이태후, 그리고 항상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이 역사의 순리라는 것조차.

“그것이 저 아이가 없어져야 하는 이유입니까.”
“이여백은 소생이 있어선 안돼. 아니, 서안공주 주요원이 이여백과 부부의 인연이라는 자체가 역사와 어긋난 사실이다. 서안공주는 만력13년 즉 내년에 만휘에게 시집을 가게 될 것이고, 천계년간에는 대장공주로 봉해진후 천수를 누리게 될 것이야. 만력의 누이들중 제일 팔자가 좋은 공주였지.”

서은은 조급해졌다. 이토록 역사 사실을 환히 꿰뚫고 있는 이태후에게 감복할 시간조차 없었다.

“저는 서안공주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안공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꼭 마치 본래 이태후가 아닌 내가, 이 생에 와서 이태후의 모든 죄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지어는 기억에도 없는 총병부인을 죽였다는 누명까지 쓰고.”
“지금 그 말씀은, 서방님의 어머니는 당신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날카로운 서은의 말에 이태후가 시선을 떨궜다. 잠시후 고개를 든 그녀는, 드디어 올것이 왔다는 비장한 얼굴로 서은을 보았다. 그녀의 하도 괴이한 눈빛에 서은은 머리카락이 쭈볏 일어설만큼 긴장이 일었다. 한참의 적막이 흐른 후 이태후가 조용히 말했다.

“그것이 바로…내가 역사를 바꿔서…생긴 처음이자 마지막 사고였지.”

……

“만일 시간을 되돌릴수만 있다면…”

서은은 이태후의 말을 신중하게 듣고 있었다. 잠깐 말을 끊고 이태후는 한숨과 눈물을 함께 떨구었다. 살짝 놀라웠다. 냉철해 보이기만 하던 이태후가, 유독 자신앞에 보이는 저 연약한 모습이.

“여기로 오게 된 건 사고…였습니까.”

자신이 이 시대로 오게 된 연유가 떠올랐다. 지금쯤 그녀의 몸은 현대에서 사라져 있는것일까. 아니면 현대의 어느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혼수상태의 식물인간으로 잠들고 있는 것일까.

“사고…라기보단 살해당했지.”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래졌다. 사고는 사고였으되 이태후의 사고는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대체 어떤 놈들이…”
“나도 모르는 일이였다. 사학과를 전공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 난 명말청초 역사에 묘하게 끌렸었다. 베이징을 거쳐 중국 동북으로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난 배낭을 메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 북경에 와서 자금성을 구경하고 성문밖으로 나섰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길을 잃어버린 나는 한참 헤매다가 어느 한 골목에서 누군가의 습격을 당했지.”
“…”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엔…난 이미 융경제—유왕의 둘째 부인이 되어있었다.”
“어떻게 피살인 줄 아십니까, 어쩌면 현대에 당신의 몸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서은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그녀 자신이 바로 서안공주의 몸을 빌어 환생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태후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이태후의 몸을 빌었다면…원래의 이태후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태후가 시선을 들어 망연한 표정의 그녀를 보았다.

“현대의 내 기억을 갖고있는 한, 난 이것이 바로 시간여행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여행자는 두가지 경우를 통해 시간여행을 할수 있다. 하나는 너처럼 남의 육체를 빌어 환생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나처럼 자신의 육신이 죽어 그대로 오게 되는 것이다. 너의 경우에는 현대로의 회생이 가능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돌아가는 길을 잃고 영원히 여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시간여행자는 부동한 시간대의 자기 자신과 마주쳐서는 안되며, 심지어 자신의 전생과도 직접 만날수 없다. 너와 서안공주가 서로 마주치지 않은 것처럼, 나 또한 유왕부의 내 전생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녀가 어디 갔는지, 왜 사라졌는지 나는 알수 없었다. 어쩌면 나처럼 죽었을수도 있고. 내가 알수 있은 것은…죽어서 여기로 온 이상…현대에서의 내 존재는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럼…돌아갈 방법이 정녕 없는 것입니까.”

서은의 안타까운 어조에, 이태후의 얼굴은 더욱 처연해졌다.

“줄곧 돌아갈 방법을 찾았다…항상 잊지 않고 돌아가려 했었다…여기에 온후 내 신분은 유왕의 소실이었고 이미 아들과 딸들이 있었다. 나는 억이 막혔고 이 모든 것을 돌려세우고 싶었다…나는 유왕의 잔약함과 정실의 시기를 이용해 유왕의 곁을 멀리 벗어날수 있었지만, 그것을 이용한 정실부인은 나를 냉궁으로 내쫓은 것도 성차지 않아 내 아이들을 박해했지.”
“그래서 그분과 사이가 좋지 않군요…”

참으로 질긴 인연이다 싶었다. 2대에 걸친 인연, 단지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한 명부의 수단이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유왕부에서 어렵게 지내던 차, 나는 어느 우연한 기회에 유왕을 찾아온 이성량장군을 뵐수 있었지.”
“그렇게 아버님을 만나셨군요.”

이태후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옅은 슬픔이 묻어났다.

“그때 난, 어떻게 해서라도 유왕부를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아는 역사사실로 유추해보면 이성량장군은 부녀자와 약한 자들을 동정하는 분이셨다. 나는 죽어도 유왕부를 벗어나서 죽겠노라고…그러니 요동으로 데려가 달라고 영원백에게 애원했다.”
“아버님이…그 청을 들어주셨나요.”

상념에 젖어있던 그녀가 눈을 들어 이태후를 보았다. 이태후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영원백은, 그건 당치도 않은 부탁이라고 했다. 자신은 현명한 부인이 있으며, 이생에 절대 소실을 들이지 않겠노라고 맹세한바 있다고…난 소실이 아니라 총병부의 시비로 살게 해도 좋은 거라고…제발 나를 유왕부에서 구해달라 했었지.”
“…”
“그렇게 영원백에게 애원하던 나는, 문틈 사이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았다.”

서은의 가슴이 꿈틀했다. 그녀의 놀라운 눈길을 의식했는지, 이태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유왕부로 함께 온 총병부인이었다. 그때는 내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혀, 그녀가 받을 상처 같은 것은 생각할 시간이 없었지. 내가 사라지면 이태후가 역사에서 사라지고, 어머니를 잃은 만력과 서안공주는 어떻게 되는지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깟 역사…그깟 명나라 역사가 좀 변한다 하여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생각했다. 하루빨리 그 지옥 같은 유왕부를 벗어나는 것이 소원이었고, 요동에 가서 천천히 후일을 도모하자 생각하였다.”

서은은 고개를 숙였다. 이태후의 생각이 공감이 가진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그녀의 당시 심정이 이해되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온 갈등이기도 했다. 인간은 구경 얼마만한 갈등을 감내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영원백이 간 후 나는 마지막 희망도 사라져버렸다. 때마침 포로를 놓아보낸 영원백의 일로 인해, 유왕이 탄핵을 올렸고, 토번과 결탁했다는 무함을 받고있는 영원백을 구하기 나는 유왕을 구슬렸다. 비록 내 청탁을 거절하긴 했지만 나는 그런 영원백에게 감복했고 조금이라도 그를 도우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유왕의 곁으로 돌아갔고 이태후의 신분으로 이곳 생활에 적응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총병부인은 어쩌면…”

서은의 질문에 이태후는 잠깐 침묵했다. 그녀의 얼굴은 서은을 향했지만, 시선은 아래로 내렸다.

“그래. 어쩌면 의심을 했을수도 있다. 그렇지만 유왕으로 하여금 여진과 사사로운 정을 주고받는다는 탄핵을 올리면, 조정 대신들의 입막음을 할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을 시켜 여진을 가까이 해야 토번을 막아낼수 있다는 영원백의 입장을 대변하는 상소를 올릴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면 부인이 우리에 대한 의심을 풀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때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지.”
“…”
“하지만 얼마 안지나 나는 이성량장군이 상처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부인이 병으로 돌아간 것이긴 하나, 돌아가기전 줄곧 우울한 정서에 시달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
“내가 백인을 죽이지 않았지만, 백인은 나로 인해 죽은 것이다. 난 부인의 죽음에서 자유로울수 없었다. 그래서 부인의 명복을 빈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분과의 약조를 어긴 것을 기억하지 못하셨군요.”

탄식섞인 한숨이 서은의 입술사이로 흘러나왔다. 이태후는 그녀를 흘깃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몸은 보리수, 마음은 명경대, 부지런히 털고 닦으면, 티끌 먼지 묻지 못하리.”
“신수대사[神授大師]의 계 아닙니까.”
“그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였다. 하지만 그때 영화전에서, 이여백 그 아이는 내게 다른 계를 전했지.”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은 또한 받침대가 없느니, 본디 없는 사물에, 티끌 먼지 있을까.”
“혜능스님의 계였지.”

이태후의 얼굴이 문득 붉어졌다. 그녀는 잠깐 서은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옷소매를 내리쓸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내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내 마음이 이토록 절박하다면 언젠가는 내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 생각했는데…그때 나는 다시 깨달았다.”
“무엇을요…”
“돌아가고 싶다 하여…내 상황을 바꾸고 싶다 하여…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고 목숨까지 잃게 하다니…총병부인은 죽어서는 안되는 명이었다. 아무리 그녀를 위해 명복을 빈단 들, 그녀의 운명은 어쩌면 내가 역사를 바꾸려 하였기에 변화가 온것이 아닌지…”
“…”
“그전까지는 내가 탈출한다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었다…어쩌면 이것은 하늘이 내린 벌이었음을. 내가 평생을 두고 죄책감을 느끼도록…하늘이 내게 내린 경고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더 고심하셨지요.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일에.”

이태후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쌀쌀하게 웃었다.

“역사에서 인성태후마마의 아들딸들은 다 죽고 이태후의 자녀들은 살아남았지요.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그건 내가 오기전의 일이다.”
“그러면 정귀비의 유산은 어떻게 된 일인지요?”
“현대로 치면 정귀비는 천성으로 체질이 약해서 습관성 유산 증상이다. 역사대로 간다면 그녀는 2년후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 아이는 원자와 태자의 자리를 다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제게 준 탕약은…”
“그건 난산을 예방하는 탕약이다.”
“하지만 유산을 촉진하기도 한다지요.”
“임신 개월수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 내가 임신 초기에 약을 내려주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러니까 이게 다 오해란 말씀입니까.”
“적어도 내가 니가 생각하는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제 아기도 안아가셨잖아요.”
“이 궁궐에서 자신이 낳은 아기를 자신이 직접 돌보는 경우는 니가 처음이다. 아기는 유모가 돌보는 것, 그것이 명나라 궁궐의 법도이거늘.”

서은은 자신의 마음이 요상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이태후에 대해 경계로 가득차있던 자신이, 지금은 그녀의 설명에 그 경계가 풀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신이 역사 그대로 만들어가려면, 어쩔수 없이 무고한 사람을 해쳐야 할지도 모릅니다. 꼭 마치 그 사람에게 극독을 쓰는 것처럼.”

서은의 말에 이태후가 입꼬리를 치켜올려 웃었다.

“그가 하도 나를 원수 취급 하기에, 독으로 겁을 주려 한 것뿐이었다.”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돌에, 지나가던 사람이 맞아 죽을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일부러 독침을 쓴다면 사람이 상하는 것은 시간 문제지 않습니까. 제가 그 독에 상한적이 있어 하는 얘기입니다.”
“…”
“저 역시 우발적인 사고와 일부러 작정한 살인은 그 죄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순리라는 그 멍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당신은 언제 어디에 있어도 영원히 불행할 것입니다.”
“…”
“또한 당신이 총병부인 일에 겁먹어 역사의 순리에 따르려고 행한 일들은 어떤 일인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영화전 마당에서 군사를 동한 일이며, 요동 그 먼 곳까지 자객을 파견한 일…”
“그만.”

이태후가 고개를 돌렸다. 서은은 냉정한 시선으로 이태후를 바라보며 자신의 말을 말을 끝맺었다.

“그러니 저는 바꿀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막는다 하여도, 저는 세상을, 운명을 바꿔갈 것입니다.”
“참으로 고집불통인 아이로구나. 꼭 누구처럼.”
“저는 당신과 적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제 앞길을 막는다면, 저는 맞서 싸울 겁니다.”

그녀의 단호한 눈동자에, 이태후의 허탈한 모습이 비쳤다. 이태후는 공허한 얼굴로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정녕 아기를 데리고 홀로 궐을 나서시렵니까.”

투덜거리며 행장을 꾸리는 령이의 입이 한발이나 나와있다. 봉선이 곁에서 그녀를 툭 치며 말했다.

“어찌 본인 생각만 하시오. 서방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더 이상 궐에 못있겠다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태후마마 교지대로 아기는 궐에 두고 가셔도 되지 않습니까. 요동까지 어찌 홀로 가신단 말입니까.”
“그분께 아기를 맡기느니 차라리 데리고 가는편이 낫다.”

서은이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에, 봉선이 고개를 갸웃하고 묻는다.

“설마 그분께서 아직 아기님을 해하려고…”
“아닙니다. 다만 그분 생각이 바뀌기전에 빨리 가는편이 좋다 생각되어서…”

서은은 허리를 펴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가느다랗게 실눈을 하였다.

“이제는 그 무엇도 제 앞을 막지 못합니다. 아기를 위해 참고 견딘 열달이 지긋지긋 합니다.”
“출산 한달만에 아기를 데리고 전장으로 떠나는 공주마마는 고금에 전무후무한줄 아뢰옵니다.”

봉선이 웃으며 하는 말에 령이가 두눈 가득 눈물을 글썽인다.

“제발 저도 같이 가게 해주십시오.”
“내가 한 말을 잊었느냐. 이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가자고.”

서은은 말을 마친후 두손을 내밀어 둘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령이는 궐에 있다가 갈곳이 없게 되면 요동으로 오너라. 내가 없어도 총병부에서 거두어 줄 테니.”
“공주님…”
“봉선은 갈곳이 있게 되었으니 시름 놓겠습니다. 듣자니 폐하께서 두분의 혼례를 치루어 주시고 지휘사님의 성씨도 회복시켜준다 들었으니 참으로 경하드릴 일입니다.”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폐하께서 줄곧 장재상님 부인님의 기거를 살펴주시다니 저희로서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어제 그 일을 알고나서 저희가 바로 어머님을 가 뵈었는데 모자간이 서로를 대하여 낙루하니 보기에도 마음이 찡하더이다.”
“장재상의 유훈을 받들어 부디 가문을 새로이 일떠세우기 바라겠습니다.”

서은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둘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눈에 눈물이 고인 걸 숨기려고, 그녀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거의 다 준비되었으니 봉선은 이만 퇴궐하시지요.”
“공주님…”

봉선이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그녀의 눈물을 보자,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이 서은의 숨구멍을 막았다. 어쩌란 말인가. 상봉과 이별을 반복했지만 이번만은 마지막인 걸 그녀더러 어찌 모르는척 하란 말인가…애써 미소를 지으며 서은이 말했다.

“봉선만 깨가 쏟아지게 살고, 이 몸은 서방님과 천리만리 떨어지라는 말입니까.”
“공주님…”
“령이를 부탁합니다. 자주 궐에 들러 회포를 푸십시오.”
“염려 마십시오. 자주 서신을 드리겠습니다.”
“자, 나갑시다. 궐문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 서은은 그녀와 함께 영화전을 나섰다. 봉선이 몇번인가 뒤를 돌아보면서 궐문을 나서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쉰 후 양심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양심전 마당에 들어서자 안으로부터 희희낙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안으로부터 정귀비가 급히 마중나왔다.

“어찌 이시간에 거동하시옵니까. 옥체에 무리가 있을까 염려되옵니다.”
“긴히 할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정귀비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서안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있던 만력도 놀란 얼굴이었다.

“서안아, 벌써 거동을 해도 괜찮겠느냐.”
“벌써라니요. 저는 언녕 움직이기 시작했는 걸요.”

서은은 웃으며 정귀비가 권하는 좌석에 앉았다. 정귀비가 차를 가지러 나가자, 그녀는 눈을 들어 만력을 보았다.

“용체는 쾌차하셨나 봅니다.”
“심히 부끄럽구나. 환관 하나 제거하지 못해서 그 변을 당하다니.”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그 일로 인해 지휘사님의 충정을 알아주시고, 그 성씨를 회복시켰으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영화전에 앉아서도 소문은 다 듣고있구나. 과연 내 동생답다.”

만력이 부채를 펼치며 빙그레 웃는다. 서은은 그를 주시했다. 그리고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말씀 드릴 것은 귀비마마에 대한 일이오나…”
“그래, 말해보거라.”

만력이 머리를 끄덕이자, 서은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뭔가 생각하다가 도리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두분의 정이 부럽사옵니다. 부디 아끼고 사랑하시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 하시옵소서.”
“새삼스럽게 네게 덕담을 듣는구나.”
“연후에 어마마마께 효도해주시옵소서. 그분에게 의지할만한 분이라곤 오라버니밖에 없습니다.”
“효도는 네가 하면 되질 않느냐.”

만력은 여전히 아무 영문 모르고 웃고 있었고, 서은은 몸을 일으키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오라버니.”
“또 무엇이냐.”
“언젠가 동쪽의 이웃 나라에서 구원요청이 오면, 설사 정사에 관여치 않더라도 그 일만은 허락해 주시옵소서."
“구원요청?”
“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입니다. 그 일만 허락하시면 비록 태정을 하시더라도 오라버니의 업적이 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서은은 금방 막 들어서는 정귀비에게 가볍게 웃어보인 후 작별을 고하고 양심전을 나섰다.

방에서 아기를 보살피고있던 령이가 그녀를 보더니, 그녀 얼굴의 눈물흔적을 발견하고 혀를 찬다.

“그렇게 슬퍼하시면서 왜 기어이 떠나십니까. 요동이 얼마나 위험한데…”
“아버님도 같이 가실 것이고, 서방님도 거기에 있다. 그리고 거기엔 내가 해야 할 일들도 있다.”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공주님께선 모든 일을 다 완벽하게 하시려 드니 힘이 드신 겁니다. 왜 보통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늘에 맡길 건 하늘에 맡기십시오.”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이지만,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다. 어찌 일을 꾸미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일이 성사되기만을 바라겠느냐.”
“말에선 공주님을 이기지 못합니다. 다만 보기에 안스러워서 하는 말입니다. 얼마만한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야 행복할수 있는 겁니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으셨기에 금생에 이렇듯 고를 겪으십니까.”
“금생뿐이겠느냐.”
“네?”
“과거와 미래…삶은 과거와 미래가 반복되는 영원한 순환이고, 미래는 과거를 살아온 우리 손에 달려있으니.”

알쏭달쏭한 말을 한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령이의 표정이 망연하다. 그녀는 소리없이 웃었다. 잠시후 그녀는 창문곁에 다가가 창문을 열어젖히고 자정에 기울어지는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침전에 눕혀져있는 아기를 돌아보았다. 아기를 지키려면, 그리고 그녀의 사랑을 지키려면, 더이상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을 그녀는 다짐했다. 지금껏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제 손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바꿔야 한다, 악착같이…그 누가 어떻게 막아도.”

그녀는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감내하기 힘든 무거운 것이 그동안 그녀의 마음을 지지눌렀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수 있었다. 길은 아직 있었고,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제는 저 아기를 위해서라도…더이상 물러설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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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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