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궐에서 환관들이 진시(辰时)의 끝을 알리는 종을 쳤다.

날이 채 밝지 않았지만 궐을 떠나는 준비는 충분히 끝나있었다. 서은은 강보(襁褓)에 싼 아기를 둘러업고 수수하고 가뜬한 옷차림으로 영화전 문을 나섰다. 그녀에 대한 금령(禁令)은 해제된지 오래되어 누구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새벽녘에 겨우 잠든 령이를 깨울새라 그녀는 발걸음소리를 죽여 영화전을 나선후 곧추 궐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령이가 알면 꼭 따라나설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는 더이상 령이의 운명에 영향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아니라면 령이는 언녕 출궁하여 자유의 몸을 회복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주마마께서 이른 시간에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궐문을 지키는 수비군사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서은은 침착하게 미리 준비한 만력의 옥패를 꺼내들었다.

“오라버니께서 환후가 중하시어 망경루의 서양의원을 청하러 가는 길이니라.”
“어찌 마마께서 친히 행차하시는 것이옵니까. 양심전의 내시에게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군사 하나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다. 서은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채 낮게 호령했다.

“무엄하구나. 한낱 내시를 시켜 의술이 출중한 의원을 부르다니, 어의도 어쩌지 못하는 오라버니의 환후를 그리 허술히 대하다니 네들이 정녕 살기를 거부하는구나.”
“그것이 아니오라…”
“이 일을 그르쳐 금상의 용체에 영향을 준다면 태후마마께서 필히 이 궐문의 수비군사부터 엄하게 다스릴 것이다.”

서은의 위엄있는 어조에 군사들은 서로 면면상고를 하다가 마침내 길을 틔워준다. 서은은 궐문을 나선후 잠깐 주위를 살피다가 망강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기전에 망강루에 이르자, 주점 문앞에서 초조히 기다리고있는 이성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님…”

이성량은 급히 수하를 불러 서은의 등에서 아기를 받아안게 한 후, 그제야 시름 놓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채봉에게서 소식을 받은 후에도 반신반의 하였더니, 네가 기어이 그곳을 빠져나왔구나.”
“오로지 이날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궐에 한시각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숨이 막혀 죽었을 것입니다.”

뭔가 결의를 다진 듯한 단단한 표정으로 서은이 말했다. 이성량은 고개를 끄덕인 후 뒤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주점 마당의 마차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말에 뛰어올라, 이성량이 그녀를 보았다.

“태후가 발견하기전에 속히 성을 빠져나가야 하겠다. 너는 마차에 오르거라.”

서은이 마차에 오르기 바쁘게, 일행은 성밖을 바라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오무렵에 성문을 벗어난 후 그들은 여전히 한숨도 쉬지 않고 요동을 바라고 말을 달렸다. 오후가 거의 되어 산해관으로 통하는 숲속에 이르자, 문득 한가닥 휘파람소리가 일더니 선두에 선 이성량이 말을 멈추었다. 언젠가 서은과 이여백이 경성을 떠나 요동으로 향할 때 우사를 만나던 그곳이었다.

“영원백은 무엇이 그리 급해 작별인사도 없이 가시는 겁니까.”

마차밖에서 울리는 누군가의 또렷한 말소리에 서은은 고개를 숙이고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노기를 감추지 않고 냉랭하게 말하는 이태후의 목소리가 다시 서은의 귀를 파고들었다.

“공주와 왕실의 아기를 겁박한 죄에, 성상의 허락 없이 경성을 비운 죄도 같이 받으시겠습니까.”
“태후마마께서 예로부터 상벌이 엄하시니, 소직 또한 궁궐의 변란을 막은 공으로 이 죄를 용서 받을까 하옵니다.”

이성량의 목소리가 힘이 빠져있었다. 그 또한 알리라, 이처럼 간단한 말 몇마디로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 아님을.

“아버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일은 소녀가 서방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아버님을 협박한 것입니다.”

휘장을 거두며 서은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런 그녀의 앞에 이태후가 다만 몇기의 군사를 거느리고 노한 얼굴로 서있었다. 미처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궁복 그대로 나온듯한 모습이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내 분명 아기는 두고 가라 일렀거늘.”
“아기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렇듯 지나친 관심을 보이시는 겁니까. 서방님이 무사하다면 분명 아기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실 겁니다. 저는 꼭 이 아기를 데려가고 말것입니다.”

그녀의 고집스러운 어조에 이태후의 얼굴이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그 일그러진 얼굴에는 한가닥 간절함까지 보였다.

“정녕 이 세상을 거스를 작정이냐. 너는 아기도, 서방도 달리 하는 명인 것이다. 너는 내년에 새로이 혼례를…”
“소녀 비록 무심하오나…’

서은이 이태후의 말을 가로챘다. 이태후는 혼란스러운 눈길로 단호한 표정의 그녀를 보았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소녀 비록 열녀로 자청하긴 어려우니 전혀 마음에 없는 사람과 혼례를 치르지는 못하겠습니다.”
“만일 만후와 혼례를 치르지 않는다면…어떤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지 네 아느냐.”
“세상이 뒤집힌다 하여도 그리 할순 없습니다. 만일 그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면, 왜 저로 하여금 서방님을 만나게 하였겠습니까. 이 모든것이 하늘의 뜻이었다면, 저는 감히 그 하늘로 하여금 뜻을 바꾸게 하겠습니다.”
“너는…네 자신의 앞날이 두렵지 않느냐…또한 너로 인해 피해보게 될 사람들이 걱정되지 않느냐…”
“지금 제가 알고있는 건…”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가 똑바로 눈을 들어 이태후를 응시했다. 그녀의 말들에 천지가 뒤바뀌는 충격을 받은 듯, 이태후가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망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본다.

“저의 앞날은 제가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고, 저때문에 피해를 본 모든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싶을 뿐입니다.”

그녀가 내뱉은 이 말은 이태후에게 하기보다는,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일지도 몰랐다. 이태후의 의문과 놀라움을 뒤로 한 채, 그녀는 단연히 몸을 돌려 가마에 올랐다. 그러던 그녀는 이태후의 다음 말에 행동을 멈췄다.

“네게 줄 것이 있다.”

고개를 돌린 그녀에게, 이태후가 군사에게서 건내받은 뭔가를 내밀었다. 그녀는 잠간 주저하다가 발길을 돌려 이태후를 향해 걸어갔다. 꽤 묵직한 목궤였다. 목궤를 받아든 그녀가 빤히 이태후를 응시하자, 이태후는 그제야 홀가분한 듯 석연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네 용기가 부럽구나.”
“…”
“가는 길에 열어보거라. 네가 오매불망 기다렸던  것이다.”
“…”
“너는 정녕 그리 생각하느냐…나때문에…그번의 그 사고가 나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이 모든 것은 정해져있는 운명이라고,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느냐.”
“네,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고가 두려워 역사의 순리에 따르도록 행동하는 건, 더 사악한 행위라 사료되옵니다.”
“그리 말해줘서…고맙구나.”

이태후의 얼굴이 처연해졌다. 그리고 힐끗 한쪽에 서있는 이성량을 보던 그녀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고개를 돌린다.

“바꿀수 있겠느냐.”
“네?”

느닷없는 이태후의 질문에 서은은 미간을 구겼다. 이태후의 눈에는 실의의 기색이 역력했다. 반생을 고집해온 그 무엇이 무너진양, 질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서은을 바라보며 이태후가 다시 입을 연다.

“세상을, 운명을 바꿔가겠다 하였다. 정녕 바꿀수 있겠느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발버둥이라도 쳐보겠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을 겁니다.”
“내 운명도…바꿔줄수 있겠느냐.”

서은은 선뜻 대답할수 없었다. 만력의 치세에서 빼놓을수 없는 참모와 부흥을 이룬 이태후…하지만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여인…그 무가내한 운명을 자신이 바꿔줄수 있을까. 이태후가 허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다…그냥 한번 물어봤을 뿐이다.”
“제가…무엇을 도와드릴수 있을까요…”

왠지 측은한 생각이 든 그녀를 향해, 이태후가 또 한번 서글픈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그녀에게 말했다.

“목궤 제일 밑에 내 서신이 있다. 네가 사명을 다해 돌아갈수 있을 때, 그 서신을 전해주면 고맙겠구나. 하지만 만일 돌아가지 못한다면…그냥 없애도 된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여기서 작별인사를 하자. 우리 인연도 여기까지인 듯 하니.”

그녀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태후도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문득 한걸음 앞으로 다가와서 그녀를 품에 안는다. 그 품이 어쩐지 따뜻하고 포근하여 그녀는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로서 이생에서의 이태후와의 관계도 단순한 모녀 사이로 귀결된 걸까. 잠깐 서은의 등을 다독이던 이태후가 고개를 돌려 조용히 이성량을 응시한다.

“아까는 급한김에 무례함을 범하였으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이 아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태후마마께서 소직의 죄를 다스리지 않으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부디 옥체 보중하시옵소서.”

이태후의 인사를 받는 이성량의 눈에도 석연한 빛이 역력했다. 이태후는 서은에게서 떨어져 몇걸음 뒤로 가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수레에 올랐다. 이태후 일행이 숲속을 나설 때까지 서은은 그녀의 뒷모습을 줄곧 바라보았다. 석양에 비낀 그 뒷모습이 하도 아름답고 처량해보여 문득 참고 있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은은 그만 고개를 돌렸다.

“이젠 길을 조여야 하겠습니다.”

마차에 오른 서은은, 한동안 멍하니 석양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 목궤를 열었다. 그러던 그녀의 눈이 잠시 휘둥그래졌다. 목궤안에 차곡차곡 접힌 서신들…겉봉의 글씨를 보니 분명 이여백의 필체였다. 필체에 닿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렇다면…지금껏 연락이 단절된 것은 이태후가 중간에서 서신을…”

그녀는 제일 위의 서신부터 펼쳤다. 날짜를 확인하니 분명 두달전의 서신이었다. 종이 위로 날아오를 듯한 초연한 필체가 그녀의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졌다.

“당신의 소식이 없어 심히 걱정된다. 여긴 나의 세상이지만 당신의 세상은 아니니, 어쩌면 당신의 세상으로 되돌아 가버린 것인가. 그래서 아버님께서 차마 내게 이르지 못하는 것인가. 그래도 무사하기만 하다면 더이상 바랄것이 없다. 어차피 가야 하는 사람이라면…보내줘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젠 이 세상의 내 사명도 다한 것인가.”

아닌데…이건 아닌데…불길한 생각이 한가득 밀려들었고 그녀는 머리를 저으면서 그전의 편지를 펼쳐들었다.

“누르하치가 심히 용맹하다. 초봄에 시작된 싸움이 여름이 다 되도록 끝나지 못하다니, 시간을 보면 이제 두달만 더 있으면 아이가 태어날 시간인 듯 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천근이라고 짓고싶다. 하늘의 근본을 기억하라고,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라고…당신은 우리 아기에게 어떤 이름을 지었는지. 이 아기는, 당신이 내게 남긴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 될 것이다.”
……
“만일 내가 전장에서 죽는다면 당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내 운명을 피해갈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예외없이 이 한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있다. 경성으로 간후 소식이 없는 당신에게 불안감 대신 다행이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 건지? 당신이 요동의 모든 것을 잊든가, 당신이 돌아가든가 둘중 한가지가 내가 바라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혹시 당신이 요동으로 되돌아오는 길이 하나 더 추가된다면 나는 단연 그 길을 차단하고 싶다. 오늘의 요동은 변란의 땅이자, 전쟁의 땅이 되었으니까.”
……
“장마비가 내려 군사들의 고생이 막심하다. 노을이 지는 헤투알라성은 영채를 굽어보는 장신 같은 존재다. 오늘밤은 환락한 피리 곡조로 뼈속을 스치는 군사들의 외로움을 위로해 주어야겠다. 그리고 내 자신의 외로움까지도. 만일 전장에서 죽지 않는다면 나는 이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적어도 앞으로 내 생이 다 할 때까지는. 어쩌면 그것은 죽음보다 못한 생이 될지도 모른다.”
……
“내가 요동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 땅이 사계절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꼭 마치 인간의 희노애락처럼. 전쟁은 시작되었지만 봄은 어김없이 이 땅에 찾아와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 반갑지 않은 봄이다. 봄이 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당신이 온지 만 2년이 되는 시간이니까. 만일 당신이 2년 기한이 되어도 가지 않으면…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염라대왕이 말했으니까.”

서은은 화가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염라대왕의 간사함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그녀를 협박하다 못해 그에게까지 손을 뻗치다니. 그로서는 당연히 그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녀를 원래 세상으로 보내려고 할 것이다. 그녀는 간신히 화를 가라앉힌후 이여백의 첫번째 서신을 펼쳐들었다. 하지만 서신을 훑던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당신을 떠나보낸후 한달에 한번 서신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이 서신들은 당신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이 서신들은 이태후마마의 손에 들어갈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태후마마께 다른 서신을 동봉할 것이다. 우선은 나를 위해 이 서신들을 간수할것을 약속할 것이며, 내 서신이 두달이상 끊긴다면 이것들을 당신에게 보여줘도 된다고 약속받을 것이다. 그래야만 당신이 이 세상을, 요동을, 그리고 나를 잊는데 도움이 될터이니. 당신의 소식은 아버님께 부탁해서 전해들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이 서신을 읽는 날이 있다면, 어쩌면 나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그러니 당신은…”

좌르륵…종이장들이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와 마차에 흩날렸다. 뒤이어 목궤가 떨어져 퉁 하고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힌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와락 휘장을 제치고 이성량을 향해 목갈린 소리로 외쳤다.

“아버님…빨리…좀 더 빨리 달려주십시오!”
“무슨 일이냐.”

이성량이 고개를 돌리다가, 그녀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자 곧 말에서 뛰어내렸다.

“갑자기 무슨 일인게냐. 어디 말을 해보거라.”
“서방님이…서방님이 아마 흉(凶)이 많고 길(吉)이 적을 것입니다…”

그녀가 흐느끼면서 하는 말이다. 이태후가 전해준 이여백의 서신들이 무거운 돌이 되어 그녀를 지지눌렀다. 가슴에 손을 올려 진정시켰지만, 몸이 휘청거렸다. 그와의 상봉의 꿈이 산산히 부서졌다. 그 잔인한 사실 앞에, 그녀는 가련히 떨었다.

“믿을수 없지만…믿기 싫지만…지금쯤 서방님은 아마…”

이성량이 눈이 커졌다. 뒤이어 마차위에 흩어져있는 서신들과 그녀를 번갈아보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를 믿겠느냐.”
“네?”
“버틸 것이다.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갈때까지 버틸 것이다. 그놈은 그런 놈이다. 유연해 보이지만 한없이 강한, 그래서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끝까지 버티는 그런 녀석이다.”

맥없이 눈물만 흘렀다. 입을 다문 그녀는 노린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터질 듯한 감정이 가슴을 꽉 메워 숨이 막혔다.

“영원백의 말을 믿으십시오.”

등뒤로 누군가의 말이 들렸다. 이성량이 눈섭을 꿈틀했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흐릿한 그녀의 시야속으로 단호하고 빠른 동작으로 한 사내가 말을 재쳐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지휘사님…”
“혼례를 치르자마자 그놈때문에 길을 떠나는 걸음인데, 그리 쉽게 잘못되면 내 수고가 허사로 되지 않겠습니까.”

툭…하고 또 한번 눈물이 떨어져 그녀의 옷깃을 적셨다. 나약한 눈물이 더 흐르지 않게 입을 꼭 다물고 그녀는 조용히 몸을 돌려 마차에 올랐다. 두 팔로 몸을 끌어안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채 터지는 울음을 온몸으로 참았다.

차라리…자신이 그 사람 대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쩌면 그 누가 원하는대로 살기보단, 내 운명이 미지의 운명이라면 더 살아볼만할 거 같은데. 내가 노력한만큼 변화가 올수도 있다는 것도, 내가 최선을 다하면 결과가 바꿔지기도 한다는 것도 내게는 그토록 절실하니까.”
“설사…그 결과가 원래 정해진 것보다 좋지 않다고 해도요?”
“당연하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해진 운명을 산다면, 사람의 한생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이여백이 원한 결과인가. 정해진 운명을 살지 않는 것…그래서 이것이 그 결과인가.

밤바람이 행렬을 가로질러 서은의 마차 휘장을 흔들었다. 바람에 실려 온 것인가. 어디선가 전해오는 불안한 느낌에 그녀는 잠깐 마음이 심난해졌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쉰 후 서신을 차곡차곡 정리해 목궤에 넣었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듯 단단한 눈빛으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남으로 내려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마차 밖에서 낮게 울리는 이성량의 목소리에 이어,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우사가 그 말을 받는다.

“집사람이 마침 태기가 있어 쉬이 경동하지 못하옵니다.”
“저런…경하할만할 일일세.”

이성량의 치하는 등뒤에서 울리는 서은의 목소리에 잠깐 끊겨버렸다.

“돌아가십시오, 지휘사님.”

우사가 말없이 뒤돌아보았다. 휘장을 걷어올린 서은의 얼굴이 달빛아래 옥처럼 빛났다. 그 경건하고 단호한 눈빛에 우사는 언뜻 시선을 내렸다.

“공주님.”
“혼례를 치르자마자 이게 무슨 짓입니까. 돌아가십시오. 봉선의 전정을 그르치고 싶지 않거든.”
“그 뜻인즉, 이번 길은 두분께서 최후를 각오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우사의 날카로운 눈길이 서은의 얼굴을 꿰뚫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짐짓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은 지휘사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저 또한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어명을 받들뿐입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그들을 둘러싼 밀림이 쏴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서은은 일시 말문이 막혔다.

“양심전에 앉아서도 천하 일을 아시는군요. 오라버니는.”
“요동 전장의 일도 손금보듯 알고계십니다. 지금의 요동이 이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까지.”

우사가 피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더이상 그녀와 말을 하고싶지 않다는 듯, 그가 고개를 돌려 이성량을 보았다. 이성량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고삐를 당기며 앞을 보았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또 누가 오시는 겁니까.”

우사의 목소리에 의혹이 넘쳤다. 그녀가 묻고싶은 물음이기도 했다. 이성량은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에 대답한 것은 먼곳에서 울리는 듯한 은은한 말발굽 소리었다.

잠시후 그들앞에 나타는 일행은 서은에게는 어딘가 낯선 얼굴들이었다. 약간 지긋한  나이에 이여백과 닮은 듯한 얼굴의 사내가 앞장섰고, 사내의 뒤에 따라온 여인도 말고삐를 당기며 차분한 미소로 그들을 마주했다. 이성량을 보자 둘은 미끌어지듯 말에서 내려섰다.

“아버님…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둘이 이성량에게 깍듯이 절을 하고나서, 우사가 둘에게 머리를 숙여 읍을 했다. 서은은 어정쩡한 기분이 되어 이성량을 보았다. 담담히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난 이성량이 잠깐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가, 저 둘은 산서에서 이리로 오는 길이다. 여백의 큰형님과 형수님이시다.”

서은은 속으로 묵묵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여백의 큰형인 이여송(李如松)…이성량의 맏아들로서 1583년(萬曆 11) 산서[山西]의 총병관(總兵官)이 되었으며, 임진왜란때는 군사를 끌고 동정을 나갔으나 조선의 산수가 화려하고 인재가 많음을 보고 산천의 혈맥을 끊은 일화로 후세에 찬반이 반반인 사람…이성량이 왜 이런 때에 맏아들을 이곳으로 불렀을까. 서은은 더이상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서 둘에게 만복의 예를 올렸다.

“형님의 성함을 우러러 들었사오나 이렇게 뵙게 되니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혹여 앞으로 제가 진퇴주선에 허물됨이 있더라도 부디 용서하시고 그 부족함을 교훈하소서.”
“제수님은 너무 겸양치 마시라.”

이여송이 미소를 지어 답례하자, 그의 뒤에 서있던 여인이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아직 몸을 조섭할 때인즉 어찌 벌써 거동하십니까. 어서 마차로 되돌아가시지요.”
“이제 너희도 왔으니 잠시 쉬어가도록 하자.”

이성량의 말에 여럿은 마차뒤 바람이 없는 곳에 자리를 옮겨 앉았다. 이성량의 시종이 아기를 안고와서 서은에게 넘겨주자, 서은의 곁에 앉은 여인이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디 한번 안아보게 해주십시오.”

서은이 몸을 돌려 아기를 넘겨주자, 여인은 아기를 품안에 안고 이윽토록 내려다보다가, 만면에 희색을 담고 이여송을 바라보며 말했다.

“과연 영특한 아기입니다. 어쩌면 이 먼 길에 조금도 노곤한 기색이 없는지요.”
“부인이 그렇듯 사랑한다면 차라리 의자로 삼도록 하시오.”

이여송이 웃으며 하는 말에 서은은 순간 흠칫했다. 여인은 석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준조와 응조(이여송의 큰아들과 둘째 아들)도 장성한지 오랜데 제가 어찌…부인한테 둘을 잘 키우겠다고 약조했으니 그 약속을 지켜야지요.”

이여송이 잠깐 낯빛을 흐렸고, 서은은 그들의 대화에서 눈앞의 여인이 이여송의 소실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여인이 다시 서은에게 아기를 넘겨주자, 이여송은 무거운 기색으로 이성량을 보았다.

“여백의 소식이 묘연하다 들었습니다. 어찌 제가 군사를 데리고 오는 것을 막으십니까.”
“산서를 비우는것만 해도 중죄인즉, 어찌 성상의 허락 없이 군사까지 동하려 하느냐.”
“그렇다면 이곳에 저희를 비밀히 부르신 이유는…”

이성량은 시선을 들어 서은을 보았다. 왠지 그의 눈빛이 괴이하여 그녀는 또 한번 몸을 흠칫했다.

“설마…”
“이 아이를 산서까지 부탁해도 되겠느냐.”

역시…그녀의 짐작 그대로였다. 서은은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이성량을 보았다. 뭔가 불길한 생각이 그녀의 가슴을 스쳤다.

“아버님…”
“이번 길이 각별히 험난하여 칠척 사내라도 견디기 어려운즉, 차마 너를 요동까지 데리고 갈수 없다. 경성을 빠져나왔은즉 너를 궐에서 나오도록 도운 나의 사명도 다한 것이다.”
“아니되옵니다.”

그녀는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옥문채 말했다. 이름못할 좌절감이 온몸을 스쳤다.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이성량의 부정임을.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님…불초하오나 저는…아버님은 저를 막지 못합니다.”
“너는, 네 혼자 몸이 아니니라.”

이성량의 공허한 목소리가 밤공기속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서은은 천천히 품속의 아기를 내려다 보았다. 아기는 평온한 얼굴로 쌔근쌔근 자고있었다. 여인의 말대로 아기의 얼굴에는 좀처럼 노곤한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더 슬프게 만들고 있었다.

“이 아이때문에…서방님의 곁에 있을수 없어 지금은 생사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런 저더러 또 이 아이때문에 산서에 가서 제 일신의 안일을 추구하라니요. 절대 그럴순 없습니다.”

말을 마치자 입술을 문 채 땅만 응시하는 서은을 보다가, 이성량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길에 여백이 무사하면 그 또한 좋은 일이려니와, 혹여 만일이 있게 되더라도 이 아이가 그 대를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뭔가 날카로운 것이 그녀의 심장을 관통했다. 역사에서 자결한 여백…대를 이을수 없는 여백…그렇게 할수는 없다. 역사가 제시한 운명 그대로 가게 할수는 없다…그러면 너무…불공평하니까.

그녀의 눈에 그 어떤 결연한 의지가 스쳤다. 몸을 돌려 품안의 아기를 옆에 앉은 여인에게 넘겨주고, 그녀는 천천히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것이 여럿의 눈을 현란하게 하는 순간, 그녀의 손에서 뭔가 섬광이 번뜩였다.

“아!”

아기를 안은 여인이 놀란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한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동작은 번개같이 빨랐다. 까만 머리카락이 그녀의 발치에 툭 하고 떨어졌다. 순식간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짧은 머리로 변한 그녀가, 손에 들었던 가위를 버리고 천천히 시선을 들어 여럿을 보았다.

“여러분이 보시는 앞에서 머리카락을 잘라 제 결의를 다집니다. 이번 길에 서방님을 찾지 못하면 저 또한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아가…”

이성량의 눈에 놀라움과 경건함이 스쳤다. 그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서은은 몸을 돌려 조용히 여인을 응시했다.

“실례지만 형님의 함자를 여쭤봐도 되겠사옵니까.”
“저는 조선 통진 금씨 가문의 태생입니다.”

서은은 아까부터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더듬으며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치마자락을 거두고 조용히 여인의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안에 눈물이 고였다.

“이 아기를…부탁합니다.”
“네…네?”

여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뒤이어 어쩔바를 모르는듯 그녀가 이성량과 이여송을 보았다.

“무…무슨 말씀이신지…”
“이 아이를 부탁합니다. 형님…형님께서 이 아이를 잘 돌봐주실거라 믿겠습니다. 이름은 이천근(李天根), 자신의 뿌리를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게 만일이 있게 되면 이 아이는 형님의 아이입니다. 부디 잘…거두어 주십시오.”
“…”
“시간이 좀 지난 후에는 어쩌면 조선 거제도(巨濟島) 아주(鵝洲)로 이사가서 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
“준조와 응조는 큰형님의 뒤를 잇게 하고, 이 아이는 형님이 거두어주시되 부디 자신의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서은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명나라가 망한후 거제도(巨濟島) 아주(鵝洲)로 뿌리 내린 농서 이씨의 중조…이여송의 조선 출신 부인의 소생으로서, 임진왜란후 조선에 남은 이천근(李天根), 이제야 알것 같았다…이여백의 서신에서 아기의 이름이 이천근이라는 내용을 보았을 때부터, 희미하지만 그녀를 잡고 집요하게 놓지 않던 그 불안한 느낌을…

“동생의 마음이 진정 그러하다면…제가 불미해서 줄곧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습니다. 이 아이는 동생이 아무 탈 없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제가 당분간 맡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부탁하겠습니다.”

서은의 안타까운 눈길이 아기의 깨끗한 얼굴에 머물렀다.

“말씀하십시오.”
“만일 제가 돌아오게 된다면 차후를 도모하려니와, 제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굳이 이 아이에게 저의 일을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
“빨리 가십시오. 제 마음이 변하기전에.”

그녀가 문득 언성을 높였다. 언뜻 정신을 차린 듯 여인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여송과 함께 이성량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부랴부랴 말에 올랐다. 이성량은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고, 우사는 숨도 내쉬지 못하고 그녀를 보았다.

“공주님…”

막혔던 설음이 터지듯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렸다. 그녀는 등뒤의 말발굽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듯 두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한참 지나서야 맥없이 손을 내린 그녀가, 흐릿한 시선을 들어 이성량과 우사를 바라보았다.

“아버님…지휘사님…”

두 사람은 감히 대답조차 할수 없다는 듯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녀는 참담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북받치는 오열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는 다시 시선을 내려버렸다.

“다…제탓입니다.”
“?”
“제가 그때 누르하치를…놓아주지만 않았어도.”
“아니다…다 내탓이다.”

이성량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셋은 한동안 침묵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밤바람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릎에 놓여져있는 이성량의 주먹이 떨리고있는 게 보였다.

“여백이 마지막으로 전한 소식에 의하면…동가가 앓아 누웠다. 동가는 임종전에 추잉의 얼굴을 보기 바라고, 누르하치는 추잉을 돌려받기 위해 요동의 모든 병력을 동원했다.”
“…”
“누르하치는 이번에 예허의 군사까지 합쳤고, 니탕개와 울지내(여진 기타 부락 추장)의 잔여 세력까지 선동했다. 아들을 찾아 어미를 보이려는 누르하치의 목적은 정당한것이고, 추잉을 이용해서 요동 소수민족을 진압하는 관군의 목적은 부당한것이다. 민심을 거스르게 되면 자연 여진 다른 부락도 들고 일어나게 될터이니, 그렇게 되면 누르하치가 철령을 밀고 광녕까지 들어오는 것은 민심에 순응한 손쉬운 일일수밖에 없다.”
“추잉이 무순에 있다고 하셨지요.”

잠자코 듣던 그녀가 문득 눈을 들어 이성량을 보았다. 물기가 가시지 않은 그녀의 눈에 싸늘한 빛이 스쳤다.

“추잉을 제게 주십시오.”
“네게?”

이성량이 의혹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단호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네, 제게 주십시오. 내일 우선 지휘사님과 함께 무순으로 가겠습니다. 아버님은 총병부로 가셔서 광녕을 지키십시오.”
“추잉을 내어준 후엔 어떡하겠느냐.”
“추잉을 데리고 찾아갈 사람이 있습니다. 추잉으로 부족하다 해도 그 사람이면 족합니다.”

달빛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이 슬픔을 넘어서 왠지 차갑게 느껴졌다. 짧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밤하늘을 직시하는 그녀의 눈앞에 항시 담정한 표정의 이여백의 모습이 환영처럼 일렁거렸다. 그 모습은 모든것을 꿰뚫어보는 듯 담담했고, 지어는 모든것을 해탈한 듯 초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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