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뽀얗게 앞을 가리는 장마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 흉포하게 내리퍼붓는다. 느닷없는 폭우때문에 밀림속에 갇힌 서은 일행은 속수무책으로 비가 멎기만을 기다렸다. 장막안에서 초조하게 밖을 응시하던 서은을 바라보다가, 이성량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같은 날씨에 무순까지…네 갈 길이 심히 걱정되는구나.”
“괜찮습니다, 아버님…”

서은은 머리를 돌려 이성량과 우사를 보았다. 단정하게 뒤로 묶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스쳤다. 그녀는 손을 올려 잠시 머리카락을 매만지다가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약간의 무예를 아니 절대 지휘사님의 부담은 되지 않으리다.”

그래도 두 사람의 눈빛이 그리 석연치 않자, 그녀는 다시 몸을 돌린후 문득 손을 들었다. 비바람에 날려 그녀앞을 스쳐지나던 그 무엇을 손에 넣은 그녀가, 담담한 표정으로 옆에 놓인 차잔에 내려놓은건 눈깜짝 할 사이의 일이었다. 차잔위에 뜬 그것은 비에 젖은 나뭇잎이었다.

“이만하면 제 재주가 너무 허술한 것은 아니겠지요.”
“줄곧 궁금한 일이온데…공주님은 언제 무예를 익히신 겁니까.”

우사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둘러대기엔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어머니와 오라버니 주위에 워낙 쟁쟁한 고수들이 많아서…”

그녀는 다시 장막밖을 바라보았고, 이성량은 뒷짐을 지고 잠시 장막안을 거닐었다.

“간밤에 천문을 보니, 근자에 태백이 대미에 들어가고 달이 화성을 범하니 불길할 징조(사람이 죽을 징조)라. 너는 부디 몸을 조심하여 일신의 안위를 지키도록 하여라.”
“아버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너와 여백…그 누구의 신상에 일이 있더라도 이 아비는 가슴이 찢어지고 눈에서 피눈물이 흐를것이다. 그리 알고 조심, 또 조심하거라.”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득한 기억 저편에 있던 아버지의 자상한 눈빛…이성량의 눈에서 그녀는 그것을 보았다. 뭐라고 대답하려 했으나 순간 목이 메어와서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심려 마시옵소서. 꼭 서방님을 찾아 무사히 아버님 앞에 대령시키겠습니다. 하오니 부디…강녕하시옵소서.”

그녀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속에서 나직히 따르는 중얼거림이 비소리에 묻혔다.

“아버님은 분명 강녕하시고, 또 오래도록 천수를 누리실 것입니다…”

……

밤도와 말을 달려 밀림을 벗어난 두 그림자가, 희미한 새벽빛속에서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잠시 말고삐를 늦추고 숨을 돌리던 서은이, 희붐히 밝아오는 동녘하늘에 시선을 던졌다.

“내일 정오쯤이면 광녕성밖에 닿을수 있겠군요.”
“공주님께선 이 길이 익숙해졌나 봅니다.”

그녀와 말머리를 가지런히 한채 우사가 말했다. 서은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보다가 다시 말고삐를 조였다. 그리고 뒤에서 뚜벅뚜벅 따라오는 우사의 말이 조금 뒤쳐졌을 때에야, 무심한 듯 한마디 입밖으로 내던졌다.

“이젠 그만 가보십시오.”
“왜 항상 저를 쫓아내려 하십니까.”

우사의 언성이 언뜻 높아졌다. 그녀는 말머리를 돌리고 똑바로 그의 눈을 보았다. 후자의 얼굴에 약간 민망한 기색이 떠오르더니, 그만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해버린다. 그녀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우사에게 알릴 듯 말 듯 거리를 둔것이…그가 봉선의 남자라는 이유때문이 아니라, 두번째로 궐을 떠날때 경성밖 밀림에서 그가 한 말때문이었다.

“그 인기에 형님도 한몫 하셨습니까.”

이여백의 말에 우사가 한 대답이 어딘가 진지하게 느껴지는 건 그녀만의 착각이었을까.

“네놈만 아니였으면 어떻게라도 수단을 써보겠는데 말이지.”

따져보면 그때 이미 그에겐 봉선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아니, 봉선은 애초부터 있었다. 그렇다면 우사가 그녀에게 베푸는 관심은 구경 무엇인가. 이여백에 대한 억하심정인가, 아니면 그녀에 대한 호감인가. 그 호감이 아무리 어명이라 해도 회임한 봉선을 두고 요동으로 떠날 정도까지라면,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나, 봉선을 위해서나 우사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일까.

“경성이 비어있습니다. 오라버니 곁도 비어있습니다. 그리고 봉선도…”
“어명이라 하였습니다.”
“그 어명을 거두어달라 주청할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
“서방님에 대한 우의가 그 정도입니까, 한때는 그토록 미워하고 싫어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대답이 없었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채 우사가 땅만 내려다 보고있었다. 밀림을 뒤로 하고 무연한 평원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오라버님의 환후는 어떻습니까.”
“가끔 용안이 흐려있으시고 자주 환각에 시달리십니다. 근신을 믿지 못하시고 조회에 전혀 납시지 않으십니다.”
“…”
“이미 민간에서는 페하께서 태정을 하신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
“다 그 [규화보전]때문에…”

문득 우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속에 어려있는 안타까움이 아쉬움처럼 들려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그녀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한 채 우사는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건 도대체 어떤 책인데 저렇게 한번 빠지면 누구도 헤여나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참으로…”
“지휘사님.”

그녀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우사는 언뜰 놀라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엄숙하게 말했다.

“그 궁금증을…버리십시오.”
“…”
“지휘사님은 이미 당대 강호의 고수입니다. 더 이상의 욕심은 금물입니다.”
“제가 언감생심…”
“무예의 최종 경지까지 가보고 싶은 것이 무림 고수들의 소원이긴 하나, 제 소견으로는 무예는 호신이 목적입니다. 무예의 최종 경지라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며, 지휘사님같은 고수는 적당한 경지에서 멈출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공주님의 가르침이 지당합니다. 소인 명심하겠습니다.”

우사가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입밖으로 새어나오는 한숨을 삼킨 후 다시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욕심이 없어 출사에 담백한 이여백, 욕심이 넘쳐 의욕이 강한 우사…닮지 말아야 한다…이여백이나 우사나, 결코 [의천도룡기]의 양소(杨逍)와 범요(范遥)의 운명을 닮아서는 안되었다…하지만 그녀는 왠지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휘사님은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까, 아니면 무예를 정진시키는 일입니까…저는 지금에 와서 지휘사님이 평소 뜻하는바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글쎄요…”

그녀의 말을 받는 우사의 목소리가 어딘가 공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도 저의 평소 뜻하는바가 구경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가문의 명예도 회복되고, 봉선도 취하여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아직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봉선은 남으로 내려가자 하지만 저는 아직 그것이 제가 가야 할 길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남으로 내려가서 제 한생을 이렇게 녹록하게 보내야 하다니…”
“그렇다면 궐에 남아계심은 어떠실지. 봉선도 굳이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저렇 듯 태정을 하고 계시니, 궐 또한 제가 머물러야 할 곳이 아닙니다.”
“경성으로 돌아가면 당면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해답을 찾고자 왔습니다. 공주님을 뵙고 곁에 있느라면 혹여 그 답이 있을까 해서요. 그러니 제발…저를 쫓지 말아주십시오.

서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뭔가…이 석연치 않은 요상한 기분은.

“이대로 지휘사님과 동행할수 없습니다. 광녕성까지 길은 익숙하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적어도 공주님을 광녕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후에는 제 갈길을 가겠습니다.”

대답대신 긴 한숨을 날린 후 그녀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봄잔디가 그녀의 말발굽에 어지러이 짓밟혔다. 우사의 고집에 화가 난 듯 말에 가하는 그녀의 채찍질이 매섭게 울려퍼졌다. 우사는 잠시 어정쩡해 있더니 말을 재쳐 늦을새라 그녀의 뒤를 바싹 따랐다.

이튿날 정오가 될무렵 둘은 광녕성밖에 이르렀다. 곧추 성문으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던 우사는, 멍하니 뒤에 처져 산길을 올려다보는 서은을 보자 영문을 몰라 말에서 뛰어내렸다.

“성안으로 들어가 부중에 들린 후, 바로 무순으로 가야지요. 어찌 지체하고 계십니까.”

서은은 대답대신 채찍을 들어 산위를 가리켰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기가 광녕사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광녕사…”

문득 우사의 말이 끊기였다. 서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나더니, 바로 말을 몰아 산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언뜻 뭔가 생각이 난 듯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이젠 돌아가셔도 됩니다. 바로 저 광녕사가 제 목적지입니다.”

우사의 아연한 표정을 뒤로 한채 서은은 말에 채찍을 가해 산위를 향해 질주했다. 언젠가 나치야와 함께 왔다가 누르하치에게 납치를 당했던 그 사찰이였다. 한산한 사찰 대문은 정오의 해볕 속에서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서은은 말에서 내려 잠깐 뭔가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문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정전을 지나 사찰 뒤쪽에 자리잡은 작은 방앞에 이르자, 누군가 그녀를 등지고 싸락싸락 마당을 쓸고있었다. 서은은 한참 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치야.”

마당을 쓸던 사람이 몸을 흠칫했다. 남루한 비구니 옷차림이 미처 감추지 못한 낭창한 몸이 바람에 알릴락말락 떨고있었다.

“여기 계실줄…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나치야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냉정을 회복한 얼굴로 그녀는 서은에게 살풋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후 방에서 나온 그녀는 찰랑찰랑한 물 한그릇을 차반에 받쳐들고 있었다.

“갈증이 심해 보입니다.”

나치야에게서 물을 받아든 서은은, 마른 입술을 추길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뚫어져라 보았다.

“어찌 애초에…총병부에서 합류하자는 약속을 저버렸습니까.”
“그것을 문초하고자 하신 걸음은 아닌 듯 하옵니다.”

나치야의 눈이 담담히 웃고있었다. 서은은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녀가 광녕사에 있는줄 알면서도 찾지 않았던 이유는, 한때 아황과 녀영을 효칙하고자 한 마음고생이 극심해서가 아니었던가. 나치야가 다시 말했다.

“총병부는 제가 있을 곳이 못됩니다.”
“우리가…어떤 사이가 되어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나치야의 말에 그녀에게서 엉뚱한 반문이 나왔다. 나치야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눈빛만 살짝 흔들렸을뿐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마치 서은의 말에 그 어떤 감흥도 느끼지 않은 것처럼, 그녀가 서은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왜 나치야를 내시고, 또 저를 내신 겁니까. 그때 당신이 여기서 하던 말,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은은 고개를 들고 생긋 웃었다. 맑고 티없는 하늘과, 높이 걸려있는 정오의 태양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의 뜻을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
“그 이유는…당신과 저는,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우리를 붕우로 만들고자, 둘을 동시에 내신 겁니다.”
“…”
“우리는 이생에 친구로 될 것이고, 내생에 또한 둘도 없는 절친으로 될 것입니다.”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나치야의 눈에 의혹의 빛이 스쳤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치야를 보았다. 전에없는 신뢰어린 눈길로, 그녀가 나치야를 깊이 응시했다. 나치야가 천천히 미간을 찌프렸다. 그녀의 이런 모습이 전혀 생소하다는 듯.

“대체 무슨 말씀을…하시는 겁니까.”
“하늘의 뜻을 알고싶다는 말입니다.”

나직히 시선을 내린 채, 그녀가 조용히 침묵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마치 선언이라도 하는 듯 입을 열었다.

“미래의 저를 여기로 데리고 온, 그래서 당신들을 만나게 한 하늘의 뜻이 정녕 알고싶다는 말입니다.”

사찰 주위의 공기가 일순간 고요해졌다. 사찰뒤 숲속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그녀 이마의 땀을 식혔다. 나치야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미처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혹은 그녀의 말이 너무 뜻밖인 듯 벙벙한 얼굴로 나치야는 제자리에 그린 듯 서있었다.

“미래.”

입속으로 한번 되뇌이던 나치야가 그제야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치야의 미간이 또 한번 깊숙히 구겨졌다. 그리고는 곧 허황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됩니다.”
“그래요. 바로 그것이 정상적인 반응이죠.”

그녀는 살풋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나치야를 보면서, 그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믿지 않을테지요. 하긴 저도 믿고싶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왜 하필 사백여년전의 과거로 오게 되었는지, 왜 여기에서 이같은 고초를 겪어야 하는지…”
“…”
“이제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왜 여기로 왔는지를 궁금해 하기보단,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모색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 누르하치를 징벌하러 갑니다. 제가 아는 역사에서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망하게 하고 청나라를 세웠지만, 저는 이제 그 길을 막아 명의 하늘을 보존하겠습니다.”
“…”
“제가 알고있던 것들이 정답이 아니라, 제가 만들어 가는 것들이 또 다른 답이라는 것을 이젠 알았으니까요.”
“그게…가능하겠습니까.”

나치야가 드디여 입을 열었다. 서은은 차분히 웃으면서 나치야의 말을 받았다.

“쉽지는 않겠죠. 관군도 대적하기 힘든 누르하치를…수많은 가시밭들이 앞을 막을 것이고, 상상치도 못한 고통의 순간들을 견디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로 온 이상, 이대로 발버둥조차 치지 못한채 돌아가는 건  싫습니다.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보다, 성격이 운명을 만들어간다는 말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성격이 운명을 만들어간다…”

그녀를 보는 나치야의 눈빛이 처연해졌다. 뒤이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나치야가 말했다.

“그래서 제 운명은 이런 것일까요. 당신 같은 그런 용기가 없어서…저는 남은 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당신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서은은 역사의 어느 한 귀퉁이에도 남아있지 않은 나치야의 운명을 떠올렸다. 나치야는 무엇때문에 누르하치 부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까. 그녀가 청등을 동반하여 이 사찰에 남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누르하치의 운명이 역사와 길을 달리해서 였을까.

“당신의 운명을 알지는 못하지만, 만일 운명을 스스로 만들고싶다면, 저와 함께 헤투알라성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나치야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일장설화가 나치야를 설득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나치야가 동행한다 하여, 무순의 추잉을 데리고 헤투알라성에 가서 누르하치를 협박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녀의 사주를 받은 나치야는 누르하치를 다시 만나 맹고를 대신하는 대푸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동가가 병석에 있으니 대푸진의 자리는 맹고가 노리게 될 것이나, 나치야가 있게 되면 맹고의 대푸진의 자리도, 대푸진인 맹고가 낳은 홍타이지의 성장도 물거품으로 될 것이다.

역사는 무릇 역사여서 지난 삶을 다시 돌이킬수는 없으나, 지금부터 헤쳐나가야 하는 길은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리 생각했다.

“역사를 뒤엎고, 세상을 바꾸겠습니다. 그것이 당신을 구하는 길이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는 더이상 중요한것이 아니었다. 문득 눈을 들어 산밑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귓전에, 광녕사의 종소리가 출전을 재촉하는 듯 은은히 들려왔다. 다시 나치야를 돌아보며, 그 무엇도 무색할만큼 그녀는 아름답게 웃었다.

……

달이 구름에 쌓여 어느덧 자취를 감춘다. 비장함이 감도는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청초한 얼굴의 여인이 있었다. 어깨위를 스치는 여인의 짧은 머리카락이 잠시 바람에 나붓긴다. 그런 여인의 어깨위로 그 무엇이 씌워지는가 싶더니, 한 가냘픈 그림자가 여인의 곁에 나타났다.

“어찌 이리 나와 계시는 겁니까.”

나치야의 목소리가 옆에서 낮게 울리자,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겁니까.”
“그게…정말입니까.”

나치야는 두 팔로 어깨를 껴안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가 왠지 추워보여서 서은이 금방 받았던 겉옷을 건네주려 하자, 나치야는 고집스럽게 머리를 흔들어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고는 말을 이었다.

“사백년후의 미래 말입니다, 그곳은 어떤 세상입니까.”

서은이 말없이 웃기만 하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멀리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같은 하늘이겠지요. 달도 같은 달이고, 별도 같은 별이겠죠. 무엇이 달라질까요.”
“달라지는 게 많다면 많고, 없다면 없는 것인데…당신의 성정만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나치야가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는 것일까, 그녀는 알수 없었다. 다만 나치야가 전과는 사뭇 다른, 그녀에 대한 신뢰의 눈빛을 보이고 있다는데 그녀는 위로를 느꼈다. 그 사람을 제외하고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절친이 된 것입니다. 저는 엉뚱하고, 당신은 밝은 성격이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아픔이 있는 친구로서 우연하게 친해졌고, 당신은 한때 제게 임대협이라는 별명을 달아주기도 했었죠.”
“임대협…”

나치야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지금의 나치야는 더이상, 그녀를 피하고 꺼리던 나치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제일 외롭고 초조한 지금,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유일한 지인이었다.

“당신에게 꼭 맞는 별명입니다. 이 세상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당신, 대협이라고 칭하기엔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여중호걸, 화목란(북위[北魏]시기 여자영웅)도 울다 가는 요동의 영웅임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서은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지금까지 옴짝달싹 할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가 새삼 떠올랐다.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하고, 지키지 못할 것을 헛되이 지켜 많은 일을 그르쳤습니다. 이런 저를 화목란에 비교함은 전혀 가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허나 제게는 아주 좋은 귀감이 되었는데요.”

나치야의 시선이 서은의 짧은 머리에 닿았다.

“애초에 남장을 하고 이도련님을 따라왔을 때부터, 그리고 헤투알라성에서 맹고의 처소에 잠입했을 때부터 저는 당신에 대해 줄곧 경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듯 경외하시던 분이 하늘이 사람을 두번 내심을 탓하셨습니까.”

알릴락말락 작은 미소가 서은의 입가를 스쳤다. 나치야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그걸 아십니까…만일 당신이 남자였다면…아니, 애초에 남장을 했음을 제가 몰라봤다면, 또 얼마만한 인연이 서로 얽혔을지를…”
“그렇다면 제게도 심히 영광이오나, 그대의 혜안에 걸려 처음부터 신분이 탄로났는데 또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서은의 미소에 나치야도 밝은 미소로 답한다.

“그 말인즉, 당신이 남자였다면 저를 여자로 봐줬을지도 모른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응당 그리 이해해야지요. 여자들의 우정 또한, 서로 매력을 느끼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서은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렸다. 겉으로는 홀가분한척 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광녕에 거의 들어섰지만 헤투알라성의 전장 소식은 누구도 입에 담는 걸 보지 못했다. 설마 이곳 요동에서도 이여백의 소식이 철저히 봉쇄된 걸까. 그렇다면 그것은 구경 무엇때문일까.

“저는 이도련님과 당신의, 서로에게 유일한 사랑이 부럽습니다.”

그녀의 불안감을 눈치채지 못한 듯, 나치야가 공허한 시선으로 멀리 태백성 쪽을 바라본다.

“사랑을 나눠 갖는 걸 뼈저리게 싫어하던 내가, 한때는 당신의 그 유일함을 빼앗으려 했으니…”
“사람은, 항상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동경을 품고있지요.”

이 한마디를 하고나니 문득 스치는 것이 있었다.한때는 그렇게 그 사람이 누구한테라도 한눈 팔기를 바랐건만, 본의 아닐지라도 그래야만 자신이 떠난 빈자리를 견딜수 있다고 여겼으니…그녀는 얼굴을 돌려 가볍게 웃고는 다시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훑었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 인연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짓궂은 인연을 그녀가 이토록 애써 이어가려고 하고있으니.

“이도련님은 소식이 있습니까.”

그녀의 허를 찌르는 한마디를 드디어 나치야가 물어왔다. 그녀는 나직히 한숨만 삼켰다. 그리고는 바싹 마른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헤투알라성에 가면 자연 알수 있겠지요.”
“싸움이 지속되고 있으니 아직 장수가 쓰러진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장수가 쓰러진다 하여도 소문을 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녀의 불안섞인 말에 나치야는 조용히 머리를 흔들었다.

“누르하치가 모를리 없습니다. 이토록 오래동안 누르하치를 헤투알라성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할 사람은 이도련님밖에 없습니다. 그바람에 누르하치와 손을 잡기를 기다리는 니탕개와 울지내, 그리고 예허의 모든 군사들도 안병부동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서신 한통 정도는 전할수 있을텐데요…”

그녀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승방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몇시간만 있으면 날이 밝을 것이고, 날이 밝으면 그녀는 나치야와 함께 산을 내려 무순으로 길을 재촉할 것이다. 이쯤 되면 산밑에서 따라오지 못한 우사도 그만 단념하고 경성으로 돌아갔으리라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승방문을 연 그녀는, 문앞에서 싱글벙글하는 한 얼굴을 발견하고 크게 미간을 구겼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은채 우사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곳에 지인이 있다고 언녕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저는 공주님이 봉변이라도 당했나 하여 급히 올라온건데…”
“무사한 걸 알았으니 이만 되돌아 가시지요.”

그녀가 인상을 구긴 채 말했다. 참으로 종잡을수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꼭 마치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이라도 지닌 듯, 우사는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승방앞을 버티고 서있었다.

“광녕성안에 들어가지 않고 이길로 무순으로 가시렵니까. 그렇다면 더욱 떠날수 없는 것이지요. 적어도 무순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무순에 도착한 후엔 헤투알라성까지 데려다준다 하겠지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녀의 빈정거리는 말투를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우사는 여전히 천연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저의 이 길이 단순한 호위로 끝난다면, 칠척 장신이 부끄러워 할것입니다. 저도 요동의 효웅과 한번 진검승부를 펼쳐봐야지요.”

“그만 같이 데리고 가시죠. 공주님…”

언제 나왔는지 나치야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녀는 다소 흥미로운 눈길로 우사를 훑어보다가 다시 서은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공주님이 돌려보내시면, 우리를 미행해서라도 따라올 잡도리인 듯 합니다.”
“역시 효웅의 부인 되실 분은 남다른 덕행과 지혜를 갖추고 계십니다.”

우사가 늦을새라 보내는 찬사에, 나치야는 수줍게 웃어보인 후 행장을 가지러 방안으로 들어갔다. 서은은 탄식 비슷한 한숨을 내쉰 후, 우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헤투알라성까지만 동행하겠습니다. 그후부터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더이상 저를 따라오지 마십시오.”
“네, 공주님.”

여공불급하게 대답하는 우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거두어진 것은, 냉정하게 내뱉는 그녀의 다음 한마디를 들은 후부터였다.

“만일 지휘사님이 제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차라리 지금부터 깨끗이 단념하십시오. 제가 이생에 있는 동안은 절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

하늘의 붉은 태양이 요동의 땅에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뽀얗게 이는 먼지바람이 시야를 가리는 가운데, 끝없이 펼쳐진 무연한 평지를 내달리며 서은 일행은 누구도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길을 재촉하던중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서은이 말했다.

“갈증이 심해서 잠시 쉬여가야 겠습니다.”
“제가 가서 물을 구해오겠습니다.”

우사가 말머리를 돌려 인가쪽으로 향했다. 그의 모습이 멀어지길 기다려 말에서 내린 나치야가 서은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휘사님이 공주님께 사뭇 충심인 듯 합니다.”
“제발 충심뿐이라면 좋겠습니다.”

말에서 내려 고삐를 나무에 매면서 그녀가 말했다. 알쑹달쑹한 그녀의 말에 나치야가 고개를 기웃했다.

“공주님의 말씀인즉, 저분이 다른 마음을 품고있다는 말씀입니까.”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낮은 한숨만 내쉬는 서은을 향해, 나치야가 눈섭을 치켜올리며 의외라는듯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설마…이도련님의 생사가 확실치도 않은데…그리고 봉선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게 아닙니다.”

서은이 뭐라 더 말하기전에 우사가 되돌아왔고,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무에 기대 잠시 쉬다가 다시 말에 오르려는 찰나, 문득 우사가 멀리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앞에서 티끌이 이니 이상합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요양을 지났으니 반나절이면 무순에 도착하게 됩니다. 저 티끌이 북쪽에서 내려오니 철령쪽에서 오는 군사가 아닌 듯 싶습니다. 저 정도 티끌이라면 족히 몇천군은 되는것 같군요.”
“철령…”

문득 뭔가 심장을 스친 듯 그녀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철령이라면…언젠가 자신도 가본적 있는 이여백의 고향이 아닌가. 그쪽에서 몇천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올수 있는 인물이라면, 이성량을 내놓고는 단 한사람밖에 없다…

훌쩍 말에 뛰어올라 채찍을 추켜든 그녀에게, 우사가 뜨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리로 가시렵니까?”
“확인해야겠습니다. 몇천군이라면 관군을 내놓고 다른게 없습니다. 철령위의 관군을 움직일수 있는 사람이라면…”
“총병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헤투알라성에 닿기전 섣뿔리 관군을 움직이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서은의 말에 우사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했다. 더이상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서은은 등자에 꿴 발을 힘껏 굴렀다. 나치야도 말에 뛰어올라 그녀의 뒤를 바싹 따랐다. 평원을 가로질러 티끌이 이는쪽으로 다가가자, 수풀처럼 치켜든 군사들의 창과, 해빛에 번쩍이는 갑옷들이 차츰 눈에 들어왔다.

“…!”

갑자기 그녀의 심장이 한박자 놓친 듯 멈췄다가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군사들이 호위하는 수레에 높이 건, 황금색 장수기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그 깃발에는 크게 “이(李)”자가 씌여져 있었다.

“나치야…”

그녀의 눈에 담긴 절절함에 나치야도 바싹 긴장한 표정이었다.

“설마…이도련님…”
“멈추…십시오!”

목이 잠겨 말이 나가지 않았다. 외쳤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미약한 부름에 불과했다.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내려와 앞을 가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말고삐를 잡고있던 손이 맥이 풀려 당장이라도 말에서 떨어질 듯 하였다. 그녀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잠시…멈추십시오…”

말고삐를 쥐고있다는 것을 잊은 채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 찰나, 몸이 허공중에 붕 뜨는 감을 느끼며 그녀는 그대로 낙마를 하고 말았다. 옆에서 나치야의 새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의 팔이 자신을 받아안았다.

“공주님…”

흐릿한 시야안으로 우사의 걱정어린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는 급히 우사의 팔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지휘사님…그이가…그이가…저기 저 수레를…어서…수레를 멈춰 세우십시오.”
“공주님, 진정하십시오. 제가 가서 세우겠습니다.”

우사는 그녀를 나치야에게 넘긴 후, 급히 몸을 날려 앞서가는 수레를 쫓았다. 그녀는 맥없이 나치야에게 기댄 채, 우사가 수레를 멈추고 뭔가 한참 싱갱이질 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가봐야겠어요.”

나치야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비칠거리면서도 눈앞의 수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수레위의 장군기 밑에 좌정한, 한 준수한 얼굴에 꽂혔다. 그리고는 온 힘을 다해,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 사람에게 말했다.

“이장군님…”

그 사람이 눈을 들어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숨막힐 듯한 침묵이 내려앉는 가운데, 그 사람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누구냐, 넌.”

서글피 시선을 내리며 그녀는 참담하게 웃어버렸다. 옆에 있던 나치야가 미간을 구기며 우사를 보았다. 우사는 가만 있으라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그녀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전혀 생소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 사람을 향해, 그녀가 물기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장군님께선 어디로 가는 길이시온지…헤투알라성의 전장은 어찌되었는지…알려주실수 있사온지요.”
“내 어찌 한낱 아녀자에게 전장의 일을 고한단 말인고. 썩 물러가지 않으면 군사를 막은 죄 중히 다스리리라!”
“되먹지 못한 자식…네가 지금 누구한테…”

우사가 펄쩍 뛰자 군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얼굴이 사색이 된 나치야가 다급히 그녀를 보았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소인들이 눈이 어두워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다들 또 한번 놀랐다. 뭔가 생각이 미친 듯 냉정을 회복한 그녀가 다시 그 사람을 보았다.

“허나 이장군님이 통솔하는 관군이 한낱 전세를 묻는 요동 백성의 목숨을 허타이 굴 일은 없을테지요.”

그 사람이 손을 젓자 군사들이 칼을 거두었다. 그리고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그 사람이 그들에게 말했다.

“더이상 관군의 길을 막지 말아라. 그때에는 더이상 용서가 없을터이니.”

수레가 싸늘한 표정의 그 사람을 싣고 되돌아섰다. 우사가 주먹을 틀어쥐었고, 나치야는 눈앞의 상황에 억이 막힌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한식경이 지나 나치야가 그녀를 위로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마도 공주님을 보호하려는 생각에서…아는체를 안하셨던 겁니다. 분명 그런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닙니다…”

문득 그녀의 볼로 흐르는 한줄기 눈물이 나치야와 우사의 다음 말을 막았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새 노을이 비낀 저녁 하늘, 갈가리 찢겨진 구름사이로 비쳐지는 작은 하늘을 보며 그녀가 낮게 입을 열었다.

“오늘이 몇일입니까.”
“육월하고…아, 열흘이 지났습니다.”

우두커니 서서 우사의 대답을 듣던 그녀가, 다시 수레가 사라진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는 저으기 확신에 찬, 그러나 절망에 가까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그 사람이 아닙니다.”
“네?”

눈을 크게 뜬 두 사람을 무시한 채, 그녀는 고개를 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그 편이 더 낫겠군요.진진가가(眞眞假假),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당신이 전에도 썼던 방법이죠.”

입으로는 그리 말하였으나 그녀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그들먹히 차올랐다.

“그런데 이 허허실실은…당신이 목숨이 위태로울 때 썼던 방법이었죠.”

갈기갈기 찢어져 넝마와 같은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석양비낀 하늘은 어찌 저리 아름답고, 그녀를 어루만지는 바람은 어찌 이리 청명할까. 원망이 가득 비낀 물기어린 눈초리로 군사가 사라진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희마하게 보이는 무순의 성곽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되뇌였다.

“이젠 보름밖에 남지 않았어…뭐든지 해야 한다…어떻게든 해야 한다…”

바싹 마른 입술을 너무 깨물어서 피멍이 졌지만, 이제 그녀는 더이상 그 어떤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글을 공유하기:

pandora

판타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판타지입니다.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좋아요 좋아요
4
좋아요
오~ 오~
0
오~
토닥토닥 토닥토닥
0
토닥토닥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