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슬프도록 절륜한 모습의 한 남자가 연꽃이 만개한 연못옆에 그린듯이 서있다. 오롯이 서있는 그의 모습이 연못의 안개속에 가려 약간은 희미하게도 보였다.

“상경한다 들었는데 어찌 이러고 서있느냐.”

뒤에서 들려오는 중년남자의 목소리에 젊은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소자 불미하여 이처럼 참담한 비극을 빚어냈으니 능지처참해도 오히려 그 벌이 가볍습니다. 상경하여 그 어떤 죄책이 내려진다 하여도 아버님은 절대 관여치 말아주십시오.”
“그게 어찌 네 탓이겠느냐.”

중년남자가 머리를 들어 찌뿌둥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담담한 표정 가운데 차넘치는 슬픔을 감추지는 못했다.

“아가는 어디 있느냐.”
“중복이라 데리고 오지 못했습니다…철령 숲속의 동굴에…안치하였습니다.”

중년남자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눈귀에서 맑은 눈물 한방울이 새어나왔다.

“그 아이가 널 찾아 갈때, 내가 천문을 보았느니라.”
“…”
“태백이 대미에 들어가고 달이 화성을 범하니 불길할 징조(사람이 죽을 징조)라고 하였다.”
“아버님…”
“나는 어쩌면 그 아이가 그리 될줄 알고 있었다…그러고도 보냈었다.”
“…”
“그러니 내탓이니라. 이 모든것이…폐하께 내 그리 상소를 올렸다.”
“아버님…아니되옵니다. 부디 중벌을 받아 제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시옵소서.”

젊은 남자의 절규를 등뒤에 남긴채, 중년남자는 낮게 드리운 하늘을 보며 중얼거린다.

“아가, 이생에 네게 진 빚, 다음생에 니 아비가 되어…니 평생을 지켜주고 갚으마. 약속한다…”

……

“임서은.”
“네, 아버지.”

성과 이름을 합쳐 부를때는 아버지가 상당히 화가 났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서은은 테이블에서 고개를 들었다.

“부르셨어요.”
“윤아랑 이상한 얘기 했다면서.”
“내가요?”
“윤아 전화 왔었다. 네가 간밤 꿈을 꿨다면서 이상한 얘기 하더라고.”

망할 기집애…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다가 책을 덮고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전생 믿냐고 물어봤었어요. 그랬더니 아주 절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거 있죠.”

아버지가 미간을 구긴채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한참 그녀를 응시하다가 테이블과  마주한 의자에 앉았다.

“넌 믿냐.”
“저요?”

그녀는 대답을 피하기라도 하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카텐을 열어젖혔다.

“글쎄요…전같으면 코웃음을 쳤을테죠.”

그녀는 창밖의 단풍잎을 한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가만히 아버지를 응시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부모는 전생에 자식에게 빚을 진 사람들이라고 하네요.”
“알면 되었다.”

아버지는 우뚝 일어서더니 그녀의 방을 나선다. 그러던 그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 그녀의 무심한 듯한 말이 그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진 왜 혼자세요?”
“…”
“내가 기억에도 없는 엄마가 돌아가신지도 이십년…아버진 왜 줄곧 혼자죠?”
“내가 왜 혼자야. 이렇게 내 딸이랑 같이 살고있는데.”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이 애비가 혼자든 둘이든 니가 상관할바 뭐냐. 왜, 니가 시집갈때 걸림돌이라도 될가 두렵던?”
“아버지!”
“걱정하지 말거라. 네가 좋은 남자 만나 시집이라도 가게 되면 이 애빈 고향으로 돌아갈란다. 절대 네게 부담을 주지 않을테니…”
“그런 얘기 아닌줄 알잖아요. 무슨 뜬금없는 남자 얘길…”

그녀가 발을 구르자 아버지는 허허 웃었다.

“부녀지간에 남자 얘기 하니 좀 그렇냐? 그렇다고 평생 이 애비랑 살 거야?네 나이가 얼만데.”
“됐어요, 이제 이십대중반인 딸을 두고 참, 오늘 얘기 없었던 걸로 해요.”

그녀가 앵돌아지자 아버지는 정색을 하고 그녀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윤아 말이다.”
“…”
“졸업하고 바로 취직한 방송국에서 제작PD로 승진을 했단다. 입사 2년만에.”
“잘됐네요.”

그녀의 심드렁한 대꾸에 아버지는 뭐라 더 말하려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방문을 나섰다. 아버지가 나가기 바쁘게 그녀는 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참 가다가 윤아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조윤아입니다.”
“너 죽을래?”

그녀의 말이 뜬금없었던지 윤아가 저쪽에서 당황해하는게 느껴졌다.

“서은아?”
“너 자꾸 그럴 거야?”
“내가 뭘.”
“꿈얘긴 왜 또 했는데.”
“아…그거…”

윤아의 말이 잠깐 빨라졌다. 뭔가 급급히 해석하는듯한 말투로 그녀가 서은에게 말했다.

“요즘 니가 하도 이상한 얘기들만 하기에…저번엔 전생 얘기도 하고. 아까 아버님이 또 내 근황도 물어보고 널 걱정하시기에 그냥 말나온 김에 얘기가 나갔어. 너 요즘 이상한 꿈 자주 꾼다 했었잖아. 그 일이 있은지 거의 3년인데 아직도 그래?  아직도 난 니가 깨어나서 하던 행동들이 기억에 생생한데…완전, 완전…”
“완전 뭐.”
“히스테리도 그런 히스테리가…”
“야!”
“깜짝이야…귀 떨어지겠다. 그러니까 헛생각 하지 말고 글이나 써. 왜 갑자기 배우생활 포기하고 드라마작가를 한다고 그러니. 니가 그때 그 사고만 없었더라면…”
“그러는 넌 왜 배우 포기하고 감독계에 입성했어?”
“이게…생각보다 재미있더라구. 현장에서 뛰는 스릴도 있고. 오감독님 불러서 이만. 주말에 보자.”

윤아가 덜컥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꿈 아니라고. 현재진행형…아니, 과거진행형일지도 몰라. 지금 다른 시간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라고. 그게 꿈으로 내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그저 입속말로만 중얼거렸을뿐, 큰 소리는 내지 못했다. 아버지가 들었다면 또 그녀를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몸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그녀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다. 그녀가 겪은 그 시간들을, 그리고 그토록 생생한 그녀의 기억들을.

처음엔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다. 평행우주가 일어나지 않았고, 역사는 그대로 흘러왔다는 사실을 확인한후 그녀는 절망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역사에 기재된대로 자결을 했고, 그로 인해 영원히 환생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아버지와 윤아는 그런 그녀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녀는 자신의 병실 침대옆에 두 희미한 그림자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우두마면(牛头马面)의 저승사자였다.

“이번엔 실수하지 말자구. 전에 이 아이에게 맹강탕을 먹이지 않은 바람에 대왕께서 크게 화를 내셨어.”
“맹강파가 어찌나 꼬치꼬치 캐어묻는지 겨우 한사발 얻어왔다네. 이걸 어떻게 먹인다?”

두 저승사자는 그녀가 자는 줄로만 알고 수근거렸다. 그녀는 바짝 긴장해져서 이불안에서 주먹을 틀어쥐었다.

“저기 주전자안에 넣어두자구. 어차피 밤이면 목이 말라 물을 마실테니까. 역시 나는 머리가 좋아.”
“소머리가 좋아봤자.”

퉁을 주면서도 말머리를 한 저승사자는 더이상 좋은 수가 생각나지 않는지 소머리 저승사자의 말을 따랐다. 그들이 주전자의 물을 바꿔놓고 사라지자 서은은 가만히 눈을 떴다. 두 사자가 가면서 하는 말이 귀전에 쟁쟁히 남았다.

“그런데 대왕님은 이번엔 왜 꼭 이 아이의 기억을 지우라고 하셨지?”
“누군가와 약조를 하였다네. 그래서 그건 꼭 지켜주고 싶은 모양이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 테이블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두손을 내밀어 주전자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게 당신이 원하는 것인가요? 망각…이게 당신이 제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군요…”

고개를 든 그녀의 눈이 창밖의 계명성에 잠깐 머물렀다. 그녀의 눈안에 하늘의 별들이 가득 담겼다.

“고마워요. 이게 정녕 당신의 뜻이라면…”

그녀는 천천히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랐다. 맑고 청량한 물이 컵에 그득 담겼다. 그안에도 같은 달과 별이 담겼다.

“잊진 않겠습니다. 가슴에 깊이 묻어두겠습니다. 그것이 제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길이라는 걸, 당신이 제게 알려준 셈이네요.”

……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아까 보다만 책을 펼쳐들었다. 되돌이켜 생각하면 졸업한지 2년이 되는 지금까지 누구도 그녀의 미래 타산을 묻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녀의 미래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시 되어야 할 사항과도 같았다. 그녀에게는 동경할만한 미래 따위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 그녀 자신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이별을 연습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되어 가겠지.
그 이별의 끝에서 우리는 정말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
한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몰라.
기다려서 얻어야 한다는 걸, 나는 이제 알아.
세월은 누군가를 만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지.
사랑하고 있다면, 너도 언젠가 그를 만나게 될 거야.
이별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연습 같은 거야.

– 이용범<열한번째 사과나무>–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져서 다시 책을 덮어버렸다.아무리 인내심을 가져본다 한들 그녀가 만나고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 사람을 만나려면 염라대왕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염라대왕을 만나려면…

“이생에 네게 진 빚, 다음생에 니 아비가 되어…니 평생을 지켜주고 갚으마. 약속한다…”

이성량…그녀의 현대 아버지는 이 약속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혹시 그녀가 옥생각을 할까봐 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지어는 그녀의 외출마저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죽어서 염라대왕을 만나러 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현실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온 후의 과거 일들까지 그녀의 꿈에 나타나는 동안 염라대왕은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왜 일까. 그녀가 맹강탕을 마셨다고 시름 놓아서인가.

“아니면 여기가 귀신이 출몰하는 곳이 아니여서 그런가.”

그녀는 언뜻 미간을 구겼다. 귀신…귀신이 출몰할수 있는 곳이라면.

전화벨소리가 다시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윤아의 잔뜩 들뜬 목소리가 그속에서 흘러나왔다.

“얘, 좋은 소식이야.”
“…”
“최근에 우리 방송사에서 제작을 맡은 타임워프 드라마 알지?”
“타임워프?”
“[궁궐] 말이야. 요즘 홍보 그렇게 하는데도 모르고 있어? 대체 드라마작가를 꿈꾼다는 애가…”

그녀가 잠자코 있자 윤아는 그 침묵의 의미를 알았다는 듯 잔소리를 끝내고 그뒤를 이어 말했다.

“하긴…이게 중점이 아니고. 암튼 그래서 나 그 드라마 촬영지 가게 되는데 그전에 촬영장소 헌팅이 있어.”

그녀는 여전히 잠자코 있었지만 수화기를 든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 헌팅장소가 바로 자금성인 건 알지?”
“자금성…”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나도 가면 안돼?”
“이럴줄 알고 전화했지. 오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내일 같이 가자고 하더라.”
“진짜?”
“당연하지. 너 자금성 못가서 병나기 일보 직전이라 말씀드렸어. 너 그때 퇴원할때 자금성 몰래 갔다가 아버님한테 잡혀온 후로 한번도 못가봤잖아. 이참에 바람도 쐴겸 같이 가자.”
“고마워…그런데…”

그녀의 우려를 예상했다는 듯 윤아가 꺄르르 웃었다.

“아버님한텐 내가 말씀드릴테니 빨랑 준비해. 내일 신무문(神武门, 자금성 뒷문)에서 보자.”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녀는 잠시 두팔로 어깨를 감쌌다. 심장이 후둑후둑 뛰기 시작했다. 2년전 병원에서 퇴원할때 그녀는 아버지 몰래 자금성에 간적 있었다. 그녀로서는 따로 생각이 있어 간 것이었지만, 하필 그 시간대가 밤중이어서 뒤따라온 아버지에게 끌러온후론 자금성으로의 출입이 완전히 차단되었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거기로 다시 들어갈 기회가 주어지다니…그것도 광명정대하게.

“꼭 만나고야 말거야.”

입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순간 무섭게 뛰는 심장을 억제하지 못하고 두손으로 가슴을 꼭 눌렀다. 불안할 정도로 묘한 기시감이 일었다.

“이럴리 없어…”

그동안 기억은 살았으되, 마음은 깡그리 죽어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생하게 그 마음이 살아나는 소리가 들리는 건, 단지 염라대왕을 만날수 있다는 그 한가닥 희망이 생겨서일까.

자신의 기억이 꿈이 아닌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3년전 그날 밤, 병실에서 맹강탕을 쏟아버리는 순간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꿈이 아니어서, 그동안 더 슬펐는지도 모른다.

……

유난히 높고 청량한 가을하늘, 간밤에 비가 내려서인지 한결 청신하고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서은은 가슴 한가득 심호흡을 한 후 고개를 돌려 뒤에서 오는 윤아를 보았다.

“웬 국화꽃 향기?”
“여기가 신무문이잖아. 자금성 어화원에서 나는 향기 같은데?”

캡모자를 눌러쓴 다른 스탭들과는 달리 화려한 옷차림에 귀걸이를 반짝이며 윤아가 말했다. 그뒤를 따라온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나들이 왔냐? 옷차림에 그게 뭐야. 오늘 일정이 빡빡하니까 서둘러.”
“감독님!!!”

윤아는 목소리 높게 부산을 떨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왜 자꾸 제 머리를 건드려요? 자꾸 그러면 머리가 나빠진다니까요!”
“조PD 더이상 나빠질 머리가 있었어?”

감독 오주명이 짐짓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힐끗 서은에게 머물렀다.

“몸은 괜찮습니까?”
“오랜만이네요, 감독님…그리고 제게 이런 기회 주셔서 고맙습니다.”

급히 시선을 내리며 그녀가 말했다. 만력…오라버니…오주명감독…그녀에게 주연배우의 기회를 주었던 사람…그리고 3년전 그 무산된 드라마…고개를 들어보니 같은 기억을 더듬는지 오주명의 눈길이 눈앞의 자금성을 향한다.

“그때 그 사고만 아니었어도…”
“다 제 잘못입니다.”

깊이 자책어린 그녀의 말에 오주명이 다시 그녀를 힐끗 보았다.

“아닙니다. 그때 서은씨 사고뿐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남주로 캐스팅이 된 그분도 사고가 있어서.”
“그때 교통사고를 당한 그분 말씀이시죠? 그분은 근황이 어때요?”

불쑥 그들사이를 끼어들며 윤아가 말했다. 오주명은 의아하다는듯 윤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PD는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걸 몰라? 얼마전 장례식에도 다녀왔었잖아. 또 깜빡했지?”
“아…죄송해요. 바로 그때 그분이신가요? 3년동안 식물인으로 혼수상태에 있다가…”

목을 움츠리며 윤아가 홀랑 혀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서은을 본다.

“미안…”
“뜬금없이 뭐. 내가 그렇게도 이상한 사람이야? 내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게?”

서은이 싱긋 웃자 윤아도 한시름 놓았는지 그녀의 어깨를 치며 웃었다.

“그러니까! 넌 운이 좋은셈이야.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니 장례식에 참가해서 울고불고 할지도…”

오주명이 듣다못해 헛기침을 해서야 윤아는 입을 다물었다. 피씩 웃음을 지은 서은은 시선을 자금성 성벽에 돌렸다. 최근에 복원공사를 해서인지 유난히 진붉은 벽이 그녀의 눈을 자극했다.

“역시 이 도시는 가을이 최고야.”
“그래서 여기 단풍도 이름있잖아요. 참 자금성 말고 향산에 갔어야 하는데…”

말머리를 돌리는 오주명에게 윤아가 엉뚱하게 동을 달다가 다시 구박을 당하는게 보였다. 그것을 보며 서은이 희미하게 웃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서은에게 구원을 청했다.

“넌 지금 이상황이 웃겨? 나대신 감독님 좀 어떻게 해봐. 항상 우리 신입PD들만 못살게 군다니까. 오죽하면 그때 그 진PD님도 사표 내고 다른데로 옮겼겠어.”
“미안…나도 세상 돌아가는 건 잘 모르지만 진PD님 감독님과 돈둑한 합작 관계라는 건 잘 알고있거든.”

담담하게 말하는 서은을 향해 오주명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역시 우리 서은씨가 사람 볼줄 아네요.”
“쳇…우리 서은씨래. 아직 말도 못놓으면서 친한척은…”

윤아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끝내는 오주명에게 꿀밤 한대를 맞고 말았다.

“빨리 가서 티켓 가져와. 사람들 기다리는 게 안보이냐?”

윤아가 입을 삐쭉거리며 스탭들에게 간 후 오주명은 서은의 얼굴을 보면서 잠깐 침묵했다.

“서은씨.”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오…감독님.”

하마터면 오라버니라고 부를뻔 하였다. 그녀의 말에 오주명은 대답대신 다시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서야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신무문쪽을 보았다.

“왜 꼭 자금성에 오려고 했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냥…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어서요.”

그녀는 잠깐 말을 중단했다가 오주명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꼭 마치 감독님이 항상 명나라 역사드라마를 고집하는 것처럼…그것과 같은 이유에요.”

오주명의 눈에 잠시 착잡한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 찰나, 신무문 쪽에서 뭔가 왁작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윤아의 챙챙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래서, 지금 안된다는 거에요? 우리가 누군줄 알고 그런 소리 하는 거죠?”
“무슨 일이야.”

오주명이 급급히 그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윤아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글쎄 이분이…우리가 자금성 관할부서 통해서 장소 헌팅 다 얘기된 상황인데 안된다고 하잖아요.”
“죄송하지만 그런 연락 받은적 없습니다.”

딱딱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신무문에 버티고 선 모습이 다소 위압적으로 보였다.

“설사 그런 결정이 내려졌다 해도 지금 이 시간에는 안됩니다. 자금성 개방 시간이 오후 다섯시까지인걸 모르셨습니까.”
“그걸 우리가 왜 알아야 하죠? 그리고…당신이 뭔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에요?여기 문지기에요?”

윤아는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은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오주명의 시선이 남자쪽으로 향했다. 오주명을 따라 그 남자를 보던 서은은 잠시 몸을 흠칫했다. 어쩐지 목소리가 귀에 익다 싶었다.

“저는 여기 고궁박물관 책임자입니다. 다시한번 말씀 드리지만 지금은 오후 3시여서 여러분들을 들여보낼수 없습니다. 자금성은 반나절을 돌아도 다 돌지 못하는 크기인데 지금 겨우 2시간을 어떻게 다 돌아보신다고 그러십니까. 돌아가셨다가 내일 다시 오십시오.”
“이봐요…”

벌컥하는 윤아를 뒤로 잡아당기며 오주명이 남자를 마주했다. 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오주명에게 옮겨졌다. 오주명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남자에게 담담히 손을 내밀었다.

“감독 오주명입니다.”

남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잠시후 다시 냉정함을 되찾은 채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성함은 익히 알고있습니다.”
“그쪽 성함은 제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만.”

여전히 손을 내민 채 오주명이 말했다. 남자는 잠깐 망설이는가 싶더니 품안에서 명함을 꺼내 오주명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면서도 끝내 그가 내민 손을 잡지는 않았다.

“고궁박물관 관리를 책임진 정우진이라고 합니다.”
“여기 박물관 부관장님이시군요. 저 또한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오주명은 명함에서 시선을 뗀 후 다시 정우진을 똑바로 보았다.

“다섯시까지라 하셨습니까.”
“…”
“자금성 개방시간이 다섯시까지라 하셨습니까.”
“네.”
“다섯시까지 개방시간이지, 다섯시까지 들어가지 못한다는 규정은 없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그건…”
“그리고 방금…여기가 반나절을 돌아도 다 돌지 못하는 크기라고도 하셨죠.”
“네.”

정우진은 오주명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약간은 벙벙한 모습이었다. 오주명이 피씩 웃었다.

“그러면 부관장님께서 인도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네?”

정우진의 눈이 휘둥그래지자 윤아가 킥 웃었다. 오주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 부관장님이시니 반나절 돌수 있는 거리도 2시간이면 족할거라 생각합니다. 분명 신무문으로 돌아오는 지름길도 알고계실테구요. 다른 그 어떤 분보다 부관장님께서 직접 길을 인도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번 드라마가 흥행하게 되면 그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정우진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윤아가 갑갑하다는 듯 발을 구르며 말했다.

“무슨 남자가 그리 꾸물거려요? 명색이 자금성 부관장이라는분이 설마 지름길을 모르셔서 그러는 거에요?”

정우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길이 윤아의 얼굴을 잠시 주시했다. 그러다가 무가내한 한숨을 내쉬며 그가 옆으로 몸을 돌렸다.

“2시간뿐입니다.”

윤아는 날듯이 기쁜 표정이 되어 오주명과 서은을 바라보았다. 오주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서은을 잡아끌고 정우진의 뒤를 바싹 따랐다. 그뒤를 오주명과 스탭들이 따라왔다. 앞장선 정우진의 뒷모습을 보며 윤아가 서은에게 귀속말로 수근거렸다.

“부관장이 의외로 젊은 사람이네…”
“사람 외모로 판단하지 마.”

서은이 대답하자 윤아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리고 스스로도 우스운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저렇게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책임지니 오늘같은 일도 생기잖아. 젊은 사람이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어.”
“그건 모르는 소리야.”

서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높고 붉은 성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저 사람이기때문에 오늘 우리가 들어올수 있었다는 걸…넌 어쩌면 모를수도 있겠지.”

윤아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어느새 앞장선 정우진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간간히 귀를 기울이던 서은은 사람이 적어지자 차츰 발걸음을 늦추었다. 황혼이 스며드는 자금성의 담벽이 어둑하게 내려앉고 있었고, 윤아와 정우진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져가고 있었다.

“부관장님, 왜 자금성은 다섯시에 문닫는 건가요?오후 다섯시면 아직 날도 밝은데요.”
“다섯시가 지난 자금성을 뭐라고 하는줄 아십니까.”
“뭔데요?”
“그 시간대는 자금성의 영이(灵异)시간입니다.”
“…”
“특히 황혼이 지는 자금성은 음침한 기운이 쌓여서, 날이 어두워지면 곳곳에서 영혼들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얘기만 들어도 오싹하네요…부관장님은 들으신적 있나요?”
“…”

드디어 주위가 조용해졌다. 서은은 우두커니 서서 윤아 일행이 사라진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 영혼들은…어쩌면 당신 손에서 죽어간 역사의 영혼들일지도 모르죠…누르하치.”

고궁박물관 부관장이 된 누르하치, 전생에 후금을 세웠으되 자금성에 입주하지 못한것이 그렇게도 한이 되어, 이생에 자금성을 지키는 부관장으로 다시 태어난 건가. 그리고 평생 산해관을 뚫고 들어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오늘 신무문에서 오주명—만력을 막으려고 한 것인가.

“누르하치까지 환생을 했는데…왜 하필 그 사람만은…!”

그녀의 목소리가 담벽에서 메아리쳐 오고있었다. 자기 목소리에 깜짝 놀라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아직 발각되어서는 안되었다. 자금성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는, 그리고 자금성 전설속의 영이(灵异) 시간이 되기 전에는.

“염라대왕…명부에 가지 않고서도 당신을 만나는 방법…내가 찾아내지 못할줄 알았죠.”

뼈속깊이 스치는 소슬한 가을바람속에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외롭게 흩날렸다. 멀리 신무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자금성 붉은 담벽사이로, 역사에 사장된 영혼들의 슬픈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리고 있었다.

……

“염라대왕!”

자금성 어화원에서 서은의 목소리가 담벽에 크게 메아리쳐서 다시 그녀의 귀가로 들려왔다. 그녀는 긴장감으로 두손을 마주 잡았다.

“지금이 자금성 영이 시간이에요. 가히 귀신과 대화를 할수 있는 시간…명부에 가야만 당신을 만날수 있는건 아니잖아요. 염라대왕…! 나와주세요…!”

바람이 불어온다. 마치 지옥에서 불어오는 듯한 차거운 바람이…그녀는 잠깐 숨을 죽였다.

“염라대왕…오늘이 지나면 언제 다시 기회가 나질지 모르겠어요…제발…나와주세요…!”

굳게 닫힌 신무문, 고요한 어화원, 화원 곳곳에 피어있는 하얀 국화꽃들이 달빛에 어른거린다. 그녀의 표정이 한결 처연해졌다. 고개를 숙인 채 한참 사색에 잠겨있던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미리 준비해둔 작은 칼을 꺼내들었다.

“대왕님은…제가 명부까지 찾아가길 기다리는가요?”
“멈추어라.”

그제야 담벽을 비집고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 그녀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오셨군요.”
“그토록 불러대는데 시끄러워 안올수가 있냐.”

담벽사이로 희미한 모습이 언뜰했다가, 염라대왕이 서서히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나를 불러낸 이유가 뭐냐.”

그런 염라대왕이 뻔뻔하게 느껴졌다. 분명 알면서도, 분명 그녀의 간절함을 알면서도 저리 묻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염라대왕을 노려보았다.

“어디에 있나요?”
“…”
“어디에 있나요? 그 사람…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되었나요?”
“역사에 다 기재되어 있지 않았더냐.”
“역사…그 역사는 대체 누구의 역사이며, 또 누구를 위한 역사란 말입니까.”

평정을 유지하던 얼굴이 차츰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전에 없던 차거운 분노가 일었다.

“오로지 이긴자의 역사, 이겨서 살아있는자를 위한 역사가 아닙니까.”

순간 염라대왕의 눈섭이 묘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술 또한 치켜 올라갔다.

“이긴자라…네 입에서 그러한 말이 나올진대, 네가 진 것을 인정하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느냐.”

그녀가 얼굴을 한쪽으로 돌렸다.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스쳤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 뭔가 선뜩한것을 거두어갔다. 다시 평정을 회복하고 그녀는 염라대왕을 보았다.

“대왕님이 미웠습니다.”
“…”
“제가 왜 죽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제가 부르자 대왕님이 만사를 제치고 오셨는지…이 모든 궁금증을 풀기전에…저는 그 어떤 방법을 쓰든지 지옥에 가서라도 대왕님과 독대를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
“대왕님은 대왕님의 입장이 있고, 저는 저의 입장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대왕님의 입장은 명부의 관리와 인간세상의 죽음의 질서를 관장하는  것이라면, 저의 입장은…명부의 방식대로 이 모든것을 다 겪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척 남은 생을 조용히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염라대왕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눈물도 함께 떨어졌다.

“그 이유는…이렇게 사는 것이 죽기보다 만번 더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염라대왕이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던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쉰 것은 잠시후.

“그 아이와 약조를 하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서 눈물이 반짝였지만 기대에 찬 눈빛이 염라대왕으로 하여금 그 뒷말을 잇게 하였다.

“명부에 이용당하는 대가로, 너의 기억을 지워주기로.”
“기억…그래서 저승사자를 파견했나요?”
“그놈들이 또 일을 그르쳤구나.”

그녀는 잠시 한숨을 쉬었다. 염라대왕의 애매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였다.

“벌써 두번입니다. 처음은 우연이라 쳐도 두번째는 너무 작위적인 게 아닙니까.”
“…”
“왜 제 기억을 남겨주셨습니까.”
“…”
“약조를 어겼으니 책임도 져야지요.”
“무슨 책임을 말이냐.”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 거나…사람의 명수를 고치는 건 당연히 안된다 하시겠죠.”
“당연히 그 두가지는…안되는 것이다. 명부는 주신의 뜻을 거스를순 없다.”
“그럼…자결을 한 사람은 환생을 못한다는 규정만이라도 고치면 안될까요?”
“몇겁을 내려온 명부의 규정이다. 어찌 너의 한마디로 고칠수 있다더냐.”

그녀는 웃었다. 마치 미리 짐작했다는 듯 참담하게 웃으며 염라대왕을 보다가 그녀가 말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만나고싶어요. 단 한번이라도. 사람이 아닌 혼백이라도.”

그녀의 눈빛이 방금전과는 달리 단호해졌다. 이번에는 염라대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어렵구나.”
“명부의 소관 범위가 그토록 작은 건가요? 그 사람의 혼백을 만나는 것까지 어렵다구요?”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가 물었다. 그런 그녀를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염라대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혼백이, 없다.”

……

“한 사람의 혼백이 없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며 서은이 무심한듯 물었다. 하얀 카텐이 나붓기는 나른한 오후. 드라마 촬영지로 떠난다고 작별인사를 하러 온 윤아에게 그녀가 던진 말이었다. 윤아는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너…너 또 웬 헛소리야.”
“아니야. 그냥 물어본 소리야.”

그녀는 몸을 반쯤 일으킨 후 그제야 윤아의 행색을 눈여겨 보았다.

“언제 떠난다고?”
“내일아침.”
“그렇구나.”

그녀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 후 문득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간다고?”
“너 참…지금껏 얘기했는데 뭘 듣고있었니? 내일아침, 심양(瀋陽,중국 요녕성)으로 간다고.”
“심양…”

그녀는 입속말로 되뇌이다가 윤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왜 횡점(横店)이 아니지? 자금성을 모방해서 지은 영화 촬영기지는 그쪽에 있잖아.”
“그것도 아까 얘기했는데? 심양에 누르하치의 궁궐이 있어. 그쪽에서 먼저 촬영하고 횡점 세트장으로 옮길거야.”

그녀의 마음이 언뜻 움직였다. 요녕…누르하치…그녀가 다녀왔던 그곳…잊지 못할 요동의 땅.

“윤아야, 나도 가면 안될까?”
“미쳤냐? 저번에 자금성 가서 잃어져서 우리 싹 미치게 만들고 나중에 겨우 통화가 되니 집에 벌써 와있다고 하고. 이번에 같이 갔다가 또 잃어지면 나 아버님한테 죽어.”
“말 안하고 가만히 가면 돼.”

그녀가 씩 웃자 윤아는 말도 안된다는 듯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아버님은 니가 잠깐 외출하는 것도 꺼리시는데 그 먼곳까지 따라 간다면 더 허락 안하실 걸? 감독님도 허락하실 것 같지 않고…설사 감독님이 허락하신다 해도 아버님 그쪽은 어떻게 할 거야?”
“그러니까 부탁할께. 감독님한텐 니가 잘 말씀드려줘. 아버진 내가 설득할테니까.”
“그게…될까?”
“밑져야 본전이지 뭐. 일단 감독님 그쪽은 너만 믿을께.”

윤아를 등 떠밀어 보낸 후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씻은 듯 가셔졌다. 애써 유지해왔던 평온도 함께 가셔졌다. 의자에 무너져 앉은 그녀는 슬픈 눈매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혼백이 없다는 건…죽음도 초월한…영원한 소실인가…무(无)로의 귀환인가.”

한동안 그렇게 앉아있던 그녀는, 끝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아무리 애써 소리를 죽이려고 했지만 손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큰 울음을 막지는 못했다. 그바람에 문밖에서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도,삐걱 방문을 여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말았다.

“이젠 말해줄수도 있잖니.”

아버지의 무기력한 한탄소리가 등뒤에서 울렸다. 비록 그녀가 울음을 그칠때까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서있어 주는 것만으로 그녀에게는 적잖이 위로가 되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몸을 일으켰다.

“마음에 담아둔…사람이 있었어요.”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진정을 되찾은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는 잠자코 듣고있기만 했다.

“꿈이 아니었어요. 모든것이 기억에 그토록 생생한 것을…그래서 가슴도 이렇게 아픈 것을…그것을 꿈이라 생각하며 살고싶었는데…내가 내자신을 속이진 못하겠더라구요.”
“…”
“꿈이라고 믿고싶었어요. 그래서 자금성에도 갔었고, 만나고싶은 사람을 만나 확인도 했어요.”
“결과는.”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래 심혈을 기울인 그 무엇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 크다란 상실감에 의아한 것도 잠깐, 그녀는 여전히 말을 이어나갔다.

“결과는…참담했어요. 차라리 확인하지 말 걸 그랬어요. 그러면 한가닥 희망이라도 있는 것을.”
“…”
“왜 살아야 하는지…무엇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계속 머물러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주르륵…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훔쳤으나 이내 새로운 눈물이 다시 솟구쳐 나왔다.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버리는 게 보였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차분한 어조가 더 큰 슬픔을 만들어냈다.

“죄송해요, 아버지 속상하게 해서…이런게 불효라는걸 아는데, 그걸 아는데 내 마음이…”

문득 그녀의 말을 중단하며 아버지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아버지의 표정에 역력히 씌여져있는 그 비장함을. 분명, 아주 큰 결심을 내린 듯한 얼굴로 아버지가 그녀를 깊이 주시했다.

“그래서…심양에 다녀오면 괜찮아질 거냐? 약속할수 있겠냐?”
“네, 그런데 어떻게…”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듯, 아버지는 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명아, 내일 일정에 스탭 한명이 추가되었으니 그리 알고 준비해줘.

그녀는 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 아연한 기색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감독 오주명의 이름을 이처럼 다정하게 부를수 있는 아버지 정체란…마치 그녀의 궁금증에 대답이라도 해주 는듯, 아버지가 통화를 끝내고 담담히 그녀쪽을 돌아보았다.

“[궁궐]이라는 드라마 무술감독이 바로 나였다.”
“아…대체 언제부터…”

경이로운 표정의 그녀를 뒤로 하고 아버지는 방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오감독은 내 후배가 되지.”
“아.”

그녀의 우러러 나오는 감탄을 듣는둥 마는둥, 아버지는 평온하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짐 안쌀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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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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