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제법 쌀쌀한 가을날씨어서 서은은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녀는 지금 심양 고궁…바로 누르하치가 평생을 머물러 살던 궁궐에 우두커니 서있다. 눈앞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스탭들 사이로 오주명과 윤아,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인다. 그녀는 가만히 몸을 돌렸다.

“거기 서.”

등뒤에서 울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녀는 흠칫 멈춰섰다가 한참 지나서야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얼굴에 아부섞인 웃음을 떠올렸다.

“나 먼저 호텔 가있으면 안돼요?”
“마지막 신이야. 끝내고 같이 가면 돼.”

추호의 여지도 없이 딱 잘라 말하는 아버지의 말투가 은근히 그녀의 비위를 거슬렸다.

“뭐에요. 여기까지 와서도 자유를 속박할셈인가요?”
“말타면 경마 잡히고 싶으냐.”
“됐어요. 그럼 나 저쪽 편의점에 잠깐 갔다올께요. 춥고 배고파서 견딜수가 없네요.”

이번엔 아버지가 별말이 없다. 그녀는 홱 몸을 돌려 정문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핫도그 하나를 사고 돈을 지불하려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편의점 벽걸이티비에 가 멎었다.

“엇, 추워추워…이동네는 왜 이리 빨리 추워지는 거야.”

말소리와 함께 편의점 문이 벌컥 열리며 윤아가 씽하니 안으로 들어오더니 멍해 서있는 그녀를 밀친다.

“넌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오늘 촬영 다 끝났으니 빨리 오래.”

그래도 그녀가 멍하니 서있자, 윤아는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그녀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뭐해? 내 말 안들려?”

비로소 그녀의 눈동자가 윤아에게로 움직인다. 하지만 초점을 잃어 눈앞이 희미하기만 할뿐, 그녀는 다시 그런 시선을 티비쪽으로 돌리며 들릴락말락 물었다.

“누구…야?”
“누구…아…저 사람?”

윤아는 티비쪽으로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바르르 몸을 떠는 그녀를 의식한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저 사람이 왜? 텔런트 이자현이잖아. 하긴 뭐 넌 원래 배우들에게 관심이 적어서. 그러면서 왜 연극연기학과를 전공했는지 몰라.”

한참 말을 이어가던 윤아는 격한 감정을 누르려는 듯 이를 악무는 그녀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아, 저 사람 너도 알텐데?…얼마전에 감독님이랑 저 사람 얘기도 했었잖아. 3년전 만력황제 그 드라마, 저 사람을 캐스팅했는데 너보다 일찍 사고 났어. 두 주역이 다 사고가 나버리니 불길하다고 그 드라마 무산됐고. 저 사람은 너처럼 혼수상태에 있다가 얼마전에…”

그녀의 몸이 떨렸다. 윤아는 그녀의 손을 꼭 잡더니 편의점 직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죄송하지만 여기 히터 좀 켜주실래요?”
“나 괜찮아.”

서은은 간신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후 윤아에게 몸을 의지해 비척비척 편의점을 나온 그녀에게 아버지가 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금방까지도 멀쩡하던 애가…웬 일이냐.”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호텔 먼저 데리고 갈께요. 아버님은 감독님이랑 천천히 오세요.”

아버지가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자, 윤아는 그녀를 부축해 택시에 몸을 실었다. 차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기사에게 호텔 위치를 알려주던 윤아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언제 사고났냐고. 저 사람.”
“그러니까 니가 사고나기전? 교통사고였는데 의식불명 상태여서 오감독님이 상황 호전되길 기다리기로 한 거야. 그러다가 너마저 승마장에서 추락사고가 났고.”

잠깐 눈을 감았던 그녀가 한참후에 다시 미약하게 물었다.

“그럼 언제…갔어?”
“몇달전. 하도 오래 누워있었는지라 지인들은 오히려 홀가분해하는 눈치였어. 장례식에 잠깐 갔었는데 부모형제는 없이 친구들만 와서 보냈어. 가는 길이 좀 쓸쓸하긴 하더라.”

주르륵.

그녀의 눈가로 눈물이 새어나왔다. 이자현…그의 환생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단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게 해달라는 그녀의 청을 염라대왕이 들어주지 못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리라. 그의 혼백이 없은 것은, 그가 이미 환생을 했기때문이고, 다시 명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운명의 조롱일까. 뭐가 이렇듯 서로 엇갈리는가.

다시 죽음으로 돌아간 그의 혼백은, 삼천도를 지나고 내하교를 지나 이생의 기억을 다 지운 후 최판관이나 염라대왕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명부의 판결을 거친 후 다음 윤회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에게 윤아가 못내 걱정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미안해…그때 일을 거론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에겐 아직 충격이 큰 모양이구나.”
“…”
“그만 잊어버려. 그건 누구에게라도 일어날수 있는 사고야. 너랑 상관도 없는 일이고.”
“…”
“너보다 일찍 사고가 난 사람이고, 넌 의식을 회복했지만 그 사람은 가버렸다는 게 비교될뿐이야. 그건 다 타고난 팔자인걸 어떡해. 장례식은 굉장히 잘 치뤄져서 가는 길 너무 한산하진 않았어.”
“부모형제도 없다면서 장례식은 어떻게…”
“아마 자기가 그렇게 될 걸 알고있었나봐. 사고 전에 유언처럼 작성해놨다고 하더라. 젊은 나이에 그렇게 해놓은 게 이상해서 타살이냐고 경찰까지 왔었는데 별다른 단서는 없었어.”
“…”
“유언대로 골회함은 철령 묘지로 옮겨졌고. 그래서 아까 여기 티비에 나온 건가봐.”

문득 그녀가 눈물젖은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뚫어져라 윤아를 보다가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철령?”
“응. 꼭 그리로 옮겨달라고 말을 남겼대. 자신에게 특별한 곳이겠지.”

왜 하필 철령일까? 이 모든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호텔방에 도착한 그녀는 서둘러 인터넷에 접속했다. 검색창에 이자현이라고 입력하자 눈에 익숙한 한 사람의 프로필이 떴다. 불과 다섯달전밖에 안되는 사망시간이 그녀의 눈을 자극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마우스를 내리던 그녀는 갑자기 손을 멈췄다.

“학력: H대 연극연기학과. 특기: 무예, 피리”

크다란 의문이 그녀의 가슴을 지지눌렀다. 그녀와 같은 대학 선배였다니…그리고 특기도 하필이면…이 또한 우연의 일치일까.

문득 한가닥 차거운 바람이 머리속으로 훅 불어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잠시 마음을 다잡고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너 설마 어제 밤샌 거야?”

아침밥을 먹으면서 윤아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흘깃 보았다.

“몸은 괜찮은 거냐.”
“별로 좋아지진 않았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쉴래요.”

머리도 들지 않은채 서은이 말했다. 무기력한 그녀의 어조에 윤아도 동조하듯 움찔거렸다. 연일 지속된 촬영에 윤아 역시 노곤을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곧 윤아가 오감독에게 간청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요. 감독님…나도 하루 쉬면 안될까요? 오늘은 촬영신이 몇 개 없잖아요.”
“차라리 그러면…”

오주명은 고개를 들어 그들 둘을 번갈아 보았다.

“어차피 날씨도 춥고 비가 올 것 같으니 오늘 하루 쉬었다 갈 거야.”
“역시 감독님…감독계의 이해와 배려의 아이콘…”

윤아는 신이 나서 떠들어대다가, 서은이 상밑으로 그녀의 발을 밟자 금세 조용해졌다.

“선배님은 저랑 같이 금주에 한번 가시죠. 하루 일정이면 될 거 같아요.”

오주명의 말에 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서은쪽으로 눈을 돌렸다.

“오늘 하루 푹 쉬어라. 어디 나가지 말고.”
“비도 온다는데 어디 나가겠어요. 시름 놓으세요, 아버님…”

윤아가 그녀 대신 서둘러 대답했다. 그녀 역시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주명과 아버지가 자리를 뜨기 바쁘게 그녀는 금세 눈을 빛내며 윤아의 얼굴을 주시했다.

“차표는 예약했어?”
“내가 누구냐. 여긴 한번도 안와봤어도 요즘은 인터넷으로 손가락 한번 까딱하면 다 해결되는 거 알지?”

윤아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식후 커피를 한모금 들이켰다.

“하지만 철령으로 갔다가 또 광녕으로 가는 이유가 뭐야? 전혀 다른 방향이던데.”
“찾아봐야 할곳이 있어.”
“정말로…이번에 같이 가면 내 전생을 알수 있게 해주는 거야?”
“굳이 같이 가자는 얘기 안했다. 니가 억지 써서 따라가는 거잖아.”

그녀의 담담한 말에 윤아는 바로 기운이 빠진 듯 보였다.

“그럼 어떡하냐. 니가 왜 그리로 가야 한다는 걸 알려주지도 않는데, 차표하고 맞바꾼 내 전생이라도 알아내야지.”
“니 전생 얘기라면 따라가지 않아도 지금 알려줄수 있어.”
“아니…아니야. 됐어. 난 직접, 같이 따라가서 내눈으로 알아낼 거야. 광녕성밖 광녕사라고 했었나? 일단 거기부터 가는 건 맞지? 터미널에 가면 두곳으로 가는 뻐스가 시간당으로 있대.”

그녀는 얼굴을 돌려 웃었다. 하지만 순간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그녀는 웃음을 거두었다.

현대에 이르러 작고 한산한 시가지로 변해버린 광녕, 그런 곳에 총병부의 유적이 남아있을리 만무하다.

어제밤 윤아를 통해 여러가지로 알아보았지만, 정작 이자현의 지인들은 누구도 골회함이 어느 묘지로 옮겨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의 소속사와 관계자, 매니저도 이미 다 연락이 닿지 않은 상태였다. 분명 존재했던 한 사람에 대한 정리가 이토록 깔끔하고 신속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분명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염라대왕, 만일 그가 의도한 것이라면 그녀는 그가 예상하는대로 움직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눈빛이 단호하고 냉정했다. 윤아는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그녀를 보았다. 그런 윤아를 향해 그녀가 짤막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철령으로 먼저 가자.”

……

“윤아야…빨리…”

서은은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는 윤아의 손을 잡고 앞으로 줄달음쳤다. 설사 그녀가 약간의 무예를 익히고 있다 해도 상대방은 대여섯이나 되는 장정들이었다. 어쩌면 터미널에서 이미 경각성을 높여야 했다. 뻐스에서 내려 옛날보다 완전히 달라진 철령의 변화에 정신이 팔릴 무렵, 은연중 그녀들의 뒤를 미행하고있는 낯선 남정네들을 발견한것은 불과 한시각전의 일이었다.

“난 더이상 안되겠어.”

윤아가 그녀의 손을 놓더니 허리를 굽히고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윤아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저기로 들어가자.”

그들이 들어간 곳은 교외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있는 어느 아담한 절이었다. 철령은 한때는 불교가 성행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어서, 명대로부터 내려온 유명한 절이 서너곳은 된다고 터미널에서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얼핏 고개를 들어보니 편액에 자청사(慈清寺)라는 세 글자가 눈에 띄였다.

대웅보전을 지나 뒤쪽의 괴성루(魁星楼)에 이르러서야 뒤따르던 장정들의 모습이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비록 많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이 이곳저곳 다니고있어 그들이 잠시 몸을 숨기기에는 적합한 곳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그녀의 손을 놓은 윤아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뒤를 살핀다.

“우리 왜 여기로 왔어? 저 사람들은 왜 우리를 따라온 거지?”
“나도 몰라.”
“모르면서 뛰기부터 했단 말이야?”

윤아가 억이 막힌 표정으로 그녀를 본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터미널에서부터 우릴 미행했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를 따라온 것은 틀림없어.”

문득 한 장정의 모습이 눈에 띄어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윤아를 끌고 괴성루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따라 들어오던 윤아는 정전(正殿)에 모셔놓은 괴성(魁星)의 모습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전국 각지에 모셔둔 괴성의 모습은 많이 봐왔지만 이런 모습은 또 처음 보네.”
“괴성은 다 똑같지 뭐가 다른 게 있어?”

여전히 문밖을 살피며 그녀가 무심히 윤아의 말을 받았다. 윤아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래 괴성은 과거를 보는 사람들이 와서 참배하는 신이잖아. 보통 흉한 얼굴에 붓과 벼루를 들고있는건데 여긴 특이해서 그래.”

그녀는 여전히 문밖을 살폈다. 하지만 윤아의 뒷말이 그녀로 하여금 시선을 돌리게 했다.

“발에 북두를 꿰차고있는 모습만 똑같네.”

돌아본 순간 그녀는 아연해졌다. 어디선가 봤던 얼굴이다. 아니 저 얼굴이 왜, 여기에, 이런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건지…그녀의 놀란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듯 윤아는 여전히 감탄조로 말했다.

“그래도 흉한 얼굴보다는 이런 자상한 얼굴이 더 어울려. 자청사라는 이름과도 매치되고.”

그때까지 그녀의 얼굴에서 놀란 기색이 가셔지지 않는다. 그랬다. 언제부터 저 얼굴이 보고싶었다. 항상 흔들리고, 동요하고, 고통스럽고, 해탈하고 싶을 때 떠오르던 얼굴이었다. 그녀에게는 어려웠고 경외스럽고 또 그래서 아득히 기억에만 묻혀있었던 얼굴…한때 방황하고 고통스러웠을 때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소신대로 세상을 살아가라고 가르쳐주던 얼굴…철령의 무당 할머니…

문득 꿈에서 깨어나듯 그녀는 소스라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보면 볼수록 괴성(魁星)신의 얼굴은 철령의 무당 할머니를 완벽하게 닮아있었다. 그 얼굴과 신상 발밑에 있는 북두의 모습을 번갈아 지켜보던 그녀는 아득한 기억 저편에서 뭔가를 떠올렸다.

“…너와 나의 인연이 다하지 않았다면, 혹여 네가 위기에 몰려 어려움이 있거든 내게 향 한가치만 태워다오.”

그녀는 홀린 듯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그리고는 신단위에 놓인 향 한가치를 들어 불에 붙였다. 그녀가 막 향을 꽂아놓고 뒤로 물러서는 사이, 스님 한분이 정전안으로 들어섰다.

“이만 문 닫을 시간입니다.”

스님의 축객령은 깍듯했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자청사 문을 나섰다. 다행이 절밖에 장정들의 모습이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짧은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윤아는 몸을 잔뜩 옹송그렸다.

“오늘저녁 광녕 가기는 다 틀렸네. 어디 모텔이라도 잡자.”
“난 가봐야 할곳이 있는데.”

그녀의 말에 놀란 윤아는 하품을 하려다가 그만 그대로 멈춰버렸다.

“뭐라고?”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인데…그때는 숲이었는데 지금은 다른곳으로 변했어. 암튼 거기.”
“미쳤냐?”

윤아는 도저히 못들어주겠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여기까지 와준 것도 얼마나 혼날지 모르는데, 뭐? 한밤중에 숲으로 가겠다고? 거기가 어딘줄 알고?”

윤아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그녀의 담담한 표정에 잠시 얼떠름한 기색을 지었다.

“어딘줄 알어?”
“알어.”

그녀는 핸드폰으로 미리 검색해둔 위치를 입력한 후 윤아에게 보여주었다. 윤아는 그것을 들여다본후 잠시 멍해있다가 바로 몸을 돌렸다.

“나 심양 돌아갈래.”
“나혼자 갈 거야.”

그녀의 말에 윤아가 주춤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던 윤아는 드디어 인내심에 한계가 온 듯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울려퍼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쨍쨍하고 높았던지 서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너 제정신이야? 거긴 묘지란 말야! 묘지!!! 철령의 묘지!!! 그것도 교외에 자리잡은 공동묘지!!!”
“알어.”
“아는데도 간다고? 왜 하필 이시간에? 가면 날이 어두워져! 그것도 왜 혼자서 가려고 하는데?!!!”
“아까 우연하게 자청사로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지금 꼭 가려고 하지 않아. 하지만 이젠 안되겠어. 내가 뭔가를 알아버린 것 같아. 그동안 내가 몰랐던 것들을, 이제야 조금 알아낸 것 같아.”
“그게 뭔데?”
“…”
“봐, 말도 못하면서 왜 거기 가려고 하는데? 꼭 가려거든 오늘 지나서 내일 가자.”
“오늘 꼭 가야 해. 오늘이 지나면…늦어버릴수도 있으니까. 네가 굳이 같이 안가도 돼.”

그녀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으로 말을 마친 후 곧바로 손을 흔들어 택시를 불러세웠다. 그리고는 멍하니 서있는 윤아를 그 자리에 남겨둔 채 택시에 앉자마자 문을 탕 닫았다. 윤아가 뭐라고 소리치면서 뒤를 쫓아왔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어느새 땀에 흥건히 젖어있었다.

철령…왜 그곳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의 비밀아지트…그가 독을 다스렸던 그곳, 한때 우사와 접전했던 그 동굴…거기에 가면 그에 대한 단서가 있지 않을까. 단검도 아직 그곳의 온천에 있지 않을까…

가슴이 먹먹해오고 심장이 아파났다. 어제 티비에서 보았던 그 사람의 환생…이자현의 골회가 철령 묘지에 안치된다는 것 또한 우연이었단 말인가.

윤아를 따돌리고 혼자 온것 역시 이때문이다. 윤아는 그녀가 이미 묘지로 변해버린 그곳으로 가는 것도, 그곳에 가서 그 사람의 흔적을 찾는 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그녀가 미쳤다고 판단할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묘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곳에 그녀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불안했는지 시동을 거는 택시기사의 행동이 사뭇 굼떴다.

드디어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녀가 이자현의 묘를 찾아내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석에 있는 그의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떨렸다. 만일 그녀의 추측이 틀림이 없다면…그는…그 사람은…30년을 전생에서 기다렸고, 30년을 후생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갔을 것이다.

그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더라도 혼백이라도 한번 보게 해달라고 염라대왕에게 청을 들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없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갔고 혼백은 명부에 가있다. 그녀의 두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라리 나도 같이 갈 것을…”

한때는 그에게 신신당부했던…절대 지키지 말라는 생사의 약조가 그녀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흘러나왔다. 죽으면 만날수 있을까…단 한번이라도 다시 만날수 있다면…그것이 그렇게도 욕심이었을까.

찌뿌둥하게 흐려있던 하늘도 그녀의 슬픔을 동조하는 듯 굵은 비줄기들이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음속 깊이 품었던 한가닥 희망의 끈도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딱딱한 흙속을…이속에 묻혀있는 사람을…그토록 가긍스러운 그를…

얼굴에 떨어지는 비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북쪽하늘을 노려보았다. 사람의 수를 관장한다는 북두성…명부가 거두어가지 않는 그녀의 부질없는 목숨을, 거두어준다면 좋으련만. 자결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자신의 몸을 허타이 구는 것쯤은 용서할수 있지 않을까.

여러날 무리했던 그녀의 몸이, 끝내는 슬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속에 천천히 쓰러졌다.

……

머리가 쑤셨다. 온몸이 아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추웠다. 그러다가 한가닥 온기가 느껴졌다.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눈앞의 정경에 그나마 남아있던 판단능력마저 깡그리 상실해버렸다. 실실이 피어오르는 안개와 기이한 화초들, 무릉도원이면 이보다 더하랴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혹은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대로 그녀의 수가  다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곳은…천당? 지옥? 하늘? 명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는데 몸에서 뭔가가 흘러내렸다. 얇은 겉옷이었을 뿐인데 거기에 남아있는 온기에는 왠지 가슴 시리게 하는 느낌이 풍겼다. 뭔가…굉장히 중요한 것을 놓친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딱히 그것이 무엇인지 그녀로서는 알수 없었다.

그 느낌은 그녀가 인기척을 듣고 머리를 돌려서야, 비로소 짜릿한 아픔으로 승화하여 가슴에 전달된 후 그녀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있었다.

“괜찮습니까.”

남자의 눈부신 미소가 그녀의 눈을 자극했다. 비로소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드디어 알수 있었다. 단 한번이라도, 혼백이라도 좋으니 단 한번이라도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그 사람, 이여백.

“여긴…”

그녀는 문득 입을 다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취색의 호수…그리고 정취있는 종려석바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바로 이곳이다. 철령 숲속의 그 동굴, 그녀와 그의…

“비밀아지트죠.”

마치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듯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미소가 너무도 맑고 순수하여 그녀는 일순 할말을 잃었다.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누구…시죠? 댁은.”
“저요?”

별로 어려운 질문이 아닌데 남자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그를 향해 그녀가 얼핏 미소를 지었다.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안해도 돼요.”

저으기 시름을 놓는 듯한 표정의 남자에게 곧바로 그녀의 두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제가 왜 여기 오게 되었죠?”
“묘지에 쓰러져 계셔서…”
“그랬군요…”

그녀의 중얼거림이 공기속에 공허하게 흩어졌다. 먼 길을 에돌아와 만난 사람이지만, 그는 그녀를 모른다. 알수가 없다. 그 사람을 닮은 그였지만, 그의 환생이 아니다. 그의 기억도 전혀 없다. 이것이 정녕 자신이 원하고 기다려왔던 해후였을까.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환생이 있었다는 건, 그 사람이 자결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역사에서 자결로 기록된 그 사람의 억울함은 구경 누가, 어떤 식으로 풀어줘야 하는 것인가.

문득 머리가 혼란스러워져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바람에 남자의 눈길이 아까부터 줄곧 그녀를 응시하는 것을, 그리고 그 눈빛이 가슴시리게 절절한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말았다.

……

“여기까지 태워다주셔서 고맙습니다.”

터미널에서 그녀는 가볍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맑고 순수했다. 꼭 마치 세간의 모든 시름과 걱정을 멀리한 듯한 표정이었다.

“별말씀을요. 어차피 저도 올라오는 길인데요.”
“서은아!”

저쪽에서 윤아가 가쁜 숨을 내쉬며 달려왔다. 막 야단치려던 그녀가 옆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주춤했다.

“이분은…”

서운의 눈길이 그제야 윤아를 따라 남자에게로 옮겨졌다. 남자는 밝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고보니 통성명도 안했네요, 우리.”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서은은 냉랭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려 윤아를 보았다.

“가자.”

윤아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눈인사를 한 후 서은의 뒤를 따라오며 말했다.

“누군데? 되게 훈남이네.”
“몰라. 관심 꺼.”
“얘는…저런 미남들은 세간의 관심을 받아야 마땅한 거라구. 그런데 꼭 누굴 닮은 얼굴이야.”

윤아는 말하다 말고 손벽을 탁 쳤다.

“맞네, 맞어. 텔런트 이자현 닮았다. 아까부터 누굴 닮았다고 생각했거든.”

문득 가슴이 저릿해났다. 서은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종종걸음을 옮겼다. 광녕으로 가는 차에 타려면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빨리 따라와. 니 전생을 알고싶다며.”

광명사에서 윤아는 절에 걸어놓은 그림 한점에 입을 딱 벌렸다. 완벽하게 자신을 닮은 얼굴이었다. 그림속의 미인은 승복을 입었지만 머리는 기르고 있었다. 얼굴은 윤아와 똑같았지만 그 달관한 눈빛에는 세상의 모든 정과 의를 온건하게 겪어낸 흔적이 담겨있었다.

“아마 출신이 비밀스러운 보살님이셨지요.”

승방에 차를 내어온 스님의 눈빛은 아득한 기억을 더듬는 듯 보였다.

“저의 스승님의 스승님에게서 들은 얘기인데…그분 역시 스승님의 스승님께서 말씀해주셨다고 합니다. 누르하치의 첩부인중 한분이라는 설도 있고, 도륜성에서 탈출해나와 요동총병 이성량의 부중에 머물고 있던 시비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성량의 둘째아들 이여백의 소실이었다고도 합니다.”
“뭐가 되게 파란만장하네.”

윤아가 중얼거렸고 서은은 시선을 내려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외에 더 기억나는 건 없습니까.”
“아, 저 그림 말인데…이여백이 그린거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여백의 소실이라는 신분이 제일 근접하겠군요…”
“그런건 아닙니다. 스님.”

서은이 재빨리 말했고 윤아는 힐끗 그녀를 보았다. 서은은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 그림을 구매할 방법은 없을까요?”
“광녕사의 다른 물건들은 다 재단에 등록이 되었는데 저 그림은 별로 진귀한 것이 아니라서 마침 그 목록에서 빠졌습니다.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될까요?”

서은이 묻자 스님은 윤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위 물건이란 인연이 있는 분에게 가기 마련입니다. 지난밤 비에 젖어 그림 한점이 훼손되었더군요. 두분께서 나가실때 가지고 나가서 적당한 곳에 버려주십시오.”
“정말 고맙습니다.”

윤아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서은은 고개를 들어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몇백년전 광녕 총병부의 은혜를 갚은 것입니다. 항상 시주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셨습니다.”

광녕사를 나선 윤아는 고개를 돌려 사찰 뒤쪽의 울창한 대나무 숲을 보았다.

“참 아름다운 숲이야.”
“그래, 참 아름다웠지…”

서은도 고개를 돌렸다. 멀리 대나무 숲에서 은은한 바람이 불어나왔다. 그것은 은은한 나무들의 마찰소리를 동반했다. 누군가 귀가에 속삭이는 듯한  그 소리는 꼭 마치 나치야의 목소리인 듯 했다.

“이제 다시 만나면 저희는 어떤 사이로 만나게 될까요.”
“아주 허물없는 친구 사이로요.”

“가자.”

서은은 손을 내밀었다. 뜬금없는 친근한 제스처에 윤아가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해쭉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산밑으로 향하는 둘의 유려한 모습이 차츰 멀어지고 있었다.

……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은에게 그나마 평온한 날들이 이어졌다. 철령 터미널에서 그녀를 미행한 장정들은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녀는 끝까지 모르는척 해주었다.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필사적인 노력이라는 걸 그녀 또한 모르는바는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그때 어디에 갔는지, 무엇을 했는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되었다.

“엄마도 그렇게 허망하게 잃었으니…”

아내에 이어 딸까지 그런 식으로 잃는다면 아버지가 겪을 상실감은 아버지의 남은 생을 송두리채 갉아먹는 어마무시한 파괴력을 발산할 것이다. 아무리 삶의 희망을 잃고 산다고 해도 아버지로 하여금 그런 고통을 겪게 할수는 없었다.

만일 그녀의 꿈이 전생의 사실과 틀리지 않는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이성량의 환생일 것이다. 전생에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한을 이생에 풀기라도 하는 듯 아버지가 그녀에 대한 걱정은 완벽한 과잉보호 그것이었다. 그것은 베이징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철령에 다녀온 후 그녀는 오래동안 전생의 꿈을 꿀수 없었다. 아마 그의 환생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 파멸되어서 그런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밥을 먹고, 글을 썼다. 윤아가 가끔 연락을 해왔으나 최근 드라마 촬영때문에 이곳저곳 다니느라 그녀를 찾아오지는 못했다. 아버지 역시 눈코뜰새없이 바쁜 모양이었지만 촬영이 없는 시간은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서은아, 임서은…”

이날도 방에서 글을 쓰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는데 아버지가 현관문을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길게 하품을 하면서 방문을 나섰다.

“이번 촬영은 짧네요? 이젠 본격적인 로맨스에 들어가나…”

하품을 하며 말하던 그녀가 뚝 말을 멈췄다. 기지개을 켜던 두 팔도 허공에 든 채였다. 아버지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얼굴이 그게 뭐냐? 또 밤을 샌 거냐?”
“…”
“이해하게. 내가 너무 오냐오냐해서 저모양이네.”
“괜찮습니다.”

그녀는 뻣뻣해진 팔을 내렸다. 그리고 한참 아버지 곁에 서있는 사람을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기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하느님맙소사!

흥클어진 머리하며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 돗수 높은 안경에 게다가 입가에 묻는 이것은…뭐야? 침???

얼굴을 빡빡 문지르다가 그녀는 투덜거렸다.

“집으로 사람 데리고 오면 연락이라도 좀…”
“그 연락을 니가 안받았잖냐.”

거실에서 아버지가 딸의 말을 냉큼 받아쳤다. 그녀는 그제야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가득 들어와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손님 한분 모시고 간다. 옷 좀 갈아입어.”

그녀는 발을 탕 구른후 후드티와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대충 머리를 묶고 거실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또 뵙겠습니다.”

그의 말에 그녀가 아차 했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는 사이니?”
“아, 그게…그러니까…”
“저번 심양 헌팅때 먼발치에서 잠깐 뵈었습니다.”

그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그녀는 가만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시현이도 그때 같이 갔댔군. 난 왜 못봤지?”
“전 개인 일 처리하러 먼저 가있었습니다. 촬영팀과 동행을 하지 않아서요.”
“그래. 지금은 어느 작품 하고있나.”
“잠시 쉬고있습니다.”
“자현이 일은 참 유감이네.”
“준비가 있은 일이라 너무 뜻밖이진 않습니다. 심려 마십시오. 선생님.”
“그래. 자네는 항상 똑 부러져서 내가 거의 걱정을 안했지. 자현이도 동생인 자네가 오히려 항상 챙겼는데…”

서은은 머리를 숙이고 앉아 둘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시선을 들었다.

“다시 소개를 하마. 이쪽은 이시현, 제자라고는 말하기 그렇지만 선생님으로 불러줘서 항상 고맙네.”
“하루 가르쳤어도 제겐 선생님입니다. 하물며 저희가 익힌 약간의 무예는 다 선생님 덕분이 아닙니까.”
“난 그때 자현이 감독이었고, 자넨 옆에서 어깨넘어로 배운 거였지만. 배우는 건 자네가 훨씬 빨랐어.”
“과찬이십니다. 선생님.”

여전히 멍해 앉아있는 그녀를 향해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 인사해. 내일부터 니 트레이닝을 책임질 선생님이시다.”
“네?”

그제야 영문을 알아차린 듯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트레이닝…왜요?”
“널 좀 봐. 3년동안 한번도 운동하지 않아서 몸이 그게 뭐냐. 재활운동 후에도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진이가 그러지 않던?”

서은은 한숨을 삼켰다. 이미 실습기간이 끝나서 그 병원의 정식의사로 입지를 굳힌 진이는 윤아 못지 않게 그녀에 대한 터치가 심했다.

“나 혼자 할께요.”
“뭘 말이냐. 운동을?”
“운동이든 뭐든, 나 혼자 하게 좀 내버려둬요.”
“내일부터 난 출장을 가게 돼. 그동안 운동은 고사하고 때시걱도 제대로 안끓여먹을 게 뻔한데…내가 널 어떻게 믿겠냐.”

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이시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려운 부탁인줄 알면서도 염치불구하고 아까 얘기를 꺼냈네. 자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몇시부터 가능하겠습니까.”
“…”
“운동 말입니다. 조깅은 몇시부터 가능하겠습니까.”
“저 조깅 안해요.”

그녀의 쌀쌀한 말에 그는 여전히 티없는 미소를 지었다.

“하게 될 겁니다.”
“안한다니까요!”

그녀의 언성이 높아지자 아버지가 눈을 부릅떴다.

“너 이게 무슨 말버릇이냐!”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일아침 뵙겠습니다.”
“저녁식사라도 하고 가지…”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와 그녀의 말이 거의 동시에 떨어졌다. 그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웃었다.

“괜찮습니다. 내일아침 오겠습니다.”
“안와도 되는데.”

그녀의 중얼거림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의연하게 몸을 돌렸다. 현관문을 나서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슬퍼보여 그녀는 울컥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녀는 그 생경한 느낌을, 자신의 의중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마음대로 일을 결정해버린 아버지의 횡포에 대한 불만이라고 일축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3년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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