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요즘에야 봤다. 굳이 말해두자. 손예진 때문에 본건 아니라고. 3.8선을 넘나드는 내용이라길래, 북에 대한 많은 디테일이 있다길래, 뭐 또 다들 재밌다길래 방콕하는 중에 본거다. 

확실히 북에 대한 디테일들이 있었다. 과장과 왜곡이 적지 않다고 보여지지만. 역으로 남에서 북에 대한 인식, 즉 북이란 이미지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도 보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①북에도 전과 다른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②한류를 비롯한 남의 영향력이 강하다; ③남에서 사라진 정겨운 옛 모습 옛 정서들이 북의 이미지에 오버랩되어 향수를 푸는 대리만족 상대로 그려져있다는 것이다. 

뭐 조선족 이미지도 있지만, 그 정도 아량으로 밖에 그리지 못하는 드라마 작가와 감독의 그릇 크기는 결국 한국 대중의 입맛 수준을 대변한 것이니 더 말하고 싶지 않고. 오늘은 우리말 배우미로서 흥미를 느꼈던 한 장면에 대해 풀어보고자 한다. 

서재를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고 했다. 드라마에 나온 손예진의 대사다. 다른 대사를 빌자면 ‘유치한 초딩같은’ 서재 고백법을 선보이는데, 그 내용과 그 책들에 그냥 끌려서 쓸데없이 자판을 두드려 본다. 

9회 에피소드 중

드라마 9회에서 손예진이 현빈의 평양 집에 붙잡혀 왔다가 현빈 침실에 머물게 되는 동안 현빈(북측 군인 리정혁)의 책장을 보게 된다. 뭔 사람이 이렇게 항상 심각하냐고 쌓여있는 책들 가운데서 뽑아서 책장 한구석을 정리한다. 후일 집에 왔다가 책장의 변화를 발견한 그 장면의 클로즈업이 위의 사진이다. 

보다시피 책제목들의 머리글자가 “사랑해리정혁”으로 배열되어 있다. 여자가 사랑고백을 한 것이다. 현빈이 고위간부 자제이자 유학파이자 군인이라는 신분을 고려한 책 리스트 설정이다. 어학적으로는 북에서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점을 감안하여 ‘‘ 자를 썼다. 근데 나는 저 시점에서 저 책들이 과연 북에 존재하는, 아니면 존재할 수 있는 책일까 하는 것을 검증해 보고 싶어졌다. 위의 캡쳐화면에서는 일부 제목이 완전히 알리지 않아 아래 화면도 잡았다. 

일단 하나씩 살펴 본다면:

1. [사] 사상과 정의(저자: 안나옴, 출판사: 안알림)

포털사이트 검색(상응한 영문, 한글, 중문 키워드)이나 중국내 북의 책이 있을 법하고 한글검색이 가능한 도서관 자원인 연변대학 도서관 사이트에서는 해당 도서를 찾을 수 없음. 북의 <우리민족끼리> 사이트에도 실마리 없음. 북스럽게 지어낸 책이름이 아닐까 싶음. 

2. [랑] 랑만의 시대(XXX 시집, 출판사: 안나옴)

두음법칙 때문에 남쪽이라면 ‘랑’으로 시작하는 책이름은 외래어 밖에 없었을 터. 북이라서 한자어 ‘浪漫’이 ‘낭만’이 아닌 ‘랑만’으로 짓는 것이 가능. 실제 있는 책있지는 확인 불가. 1번과 같은 절차로 찾아 봤으나 못찾음. 화질 때문에 저자명 안알림. 실마리일 수 있는데. 

3. [해] 해방의 력사(저자: 안나옴, 출판사: 안알림)

실제 있는 책있지는 확인 불가. 1번과 같은 절차로 찾아 봤으나 못찾음. 그럴듯한 책이름인데 진짜 출판됐다면 사회과학출판사 정도에서 내지 않았을까. 

4. [리] 리얼리즘(저자-출판사: 안알림)

‘랑’이 두음법칙의 편의를 본 사례라면 ‘리’는 두음법칙(성씨가 ‘이’가 아니라서) 때문에 애먹은 사례가 아닐까 생각함. 그래도 ‘리별’ 이라든가 ‘리씨왕조’ 라든가 ‘리상’이라든가 뭔가 만들어낼 건수는 있었을상 싶은데, 굳이 ‘리얼리즘’을 택한 건 옥의티 아닌가. 북에서는 이 외래어보다는 ‘사실주의’란 단어가 더 보편적이라고 보는데. 심각한 책 고르느라 무리한듯. 저자명 실루엣으로 봐서 미국의 페미니스트 예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의 책이 맞는듯. 사실주의 화가들은 소외계층인 노동자, 농민, 빈민 등 대상을 그렸으니 내용적으로도 부합. 

5. [정]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저자: 안나옴, 출판사: 안알림)

마르크스(맑스)의 핵심저서이자 <자본론>의 초고. 북에 없어서는 안될 책. 저자 표기 할 필요도 없음. 

6. [혁] 혁명의 시대(저자-출판사: 안나옴)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좌익 근대사 대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霍布斯鲍姆)의 시대 4부작 중의 첫 책이다. ‘장기 19세기’란 개념의 제기로 유명. 북에서는 반드시 출판됐을 법한 책. 아마 사회과학출판사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이상이 손예진의 서재 고백에 사용된 책이고, 이에 답하듯 서울로 월남한 현빈이 손예진(극중 재벌 딸이자 패션기업 사장 윤세리)의 집에서 책장을 손 좀 본다. 그 결과가 아래 화면이다…

마지막회 중 캡쳐

1) [윤] 윤리와 경영(저자: XXX노?, 출판사: 안나옴)

‘네이버 책’ 에서 동일한 이름의 책 못찾음. Google Books에서 ‘ethics’ ‘management’ 라는 두 키워드로 검색했으나 비슷해 보이는걸 못찾음. 한국 측의 서재 책이라면 그래도 실제 있을 법한 걸 찾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상하다. 

2) [세] 세계사 강독(저자: 안알림, 출판사: 안나옴)

위의 ‘윤’의 경우와 비슷함. 이상하다. 

3) [리] 리더의 리더십(저자: 안알림, 출판사: 안나옴)

위의 ‘윤’, ‘세’ 의 경우와 비슷함. 

4) [사] 사피엔스(저자: 찰스 하윌?, 출판사: 안나옴)

유발 하라리의 유명한 그 책(人类简史)을 생각한 것이 틀림없으나, 저자명이 다름. 이쯤 오면 알린다. 이상하게 못찾는게 아니라 일부러 책이름을 조금 바꾸거나 저자를 바꾸거나 했다는 것. 특정된 책으로 상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이러는 것임을. 특정된 책이나 이념적 경향을 피하는 의도도 있을 법 하지만, 그 동전의 반대면은 저자나 출판사로부터 딱히 홍보비용을 받은 것도 아니라서. 이런 몹쓸 자본주의라구야.  

5) [랑] 랑데뷰 경제학(저자: 장세윤?, 출판사: 안나옴)

여긴 다시 두음법칙 때문에 외래어(남쪽이라 한자어도 안됨) 아니면 안되는 곳. 랑데뷰(rendezvous)라는 프랑스어 유래의 외래어, 만남 약속 및 그 장소를 뜻함. 뭐 나름 있어보이는 척할 수 있는 책인가. 역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책. 

6) [해] 해외 마케팅 분석(저자, 출판사: 안나옴)

역시 앞의 경우와 비슷. 실제 없는 책인 듯.

그니까 간단히 정리하자면, 북의 책은 어차피 시청자로서는 확인이 거의 불가하니 비슷하게 있을 법한 책을 갖다 붙인거고, 남의 책은 시장과 자본 논리 때문에 오히려 실제 있는 책 정보 그대로 쓰면 안되었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북의 <리얼리즘>이란 책이름은 옥의티 냄새 풀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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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 좋다. 내가 원하는 건 이걸 말꼬로 우리말과 글에 대한 좋은 책들을 적어보자 하는 것이니까. 아래 우리말 배우미로서 이 머리글자로 책리스트를 완성해 본다면:

(1) [윤] 윤동주 평전 – 송우혜; 윤동주 코드 – 김혁

한국 출간의 평전

시인의 평전으로서는 괜찮은 책이지 않나 싶다. 일본에 와서 여러 기록들도 수집하여 지은 책이라 노력의 성과를 어느정도 건질 수 있을 듯. 2006년 출판, 저자 소설가 송우혜.

연변 출간의 칼럼집

2016년 윤동주탄생 99돐을 맞아 연재칼럼을 묶어서 출판된 책. 스물아홉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시인을 스물아홉개의 코드로, 그리고 그나 나서 자란 땅의 풍성한 살을 입혀 여러 각도로 조명해 보려고 한 책. 향토애가 짙은 칼럼 저자가 다방면의 자료수집과 깊이있는 문학적 고찰로 다가간 글들이다. 고향인 연변에서 깊이있는 연구나 조명이 부족한 중에 힘을 쏟은 결과물. 다만 시중에 찾기 어렵게 됐다는게 함정. 

윤동주 시인은 아직 파고 또 파야 할 우물이다. 그가 산 시간과 공간, 그가 만난 산과 꽃과 별과 사람들, 그가 걸었던 이곳 거리와 그가 했을 생각들. 더 풍성하게 그려지고 환원되고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아직 많다.

(2) [세] 세계와 만난 우리 역사 – 정수일

사실 이 책은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문명교류 교양서이다. ‘세’에 맞추누라 조금 억지스럽지만 이 저자를 절대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같은 내용의 어른용 교양서는 <한국 속의 세계>(상하 2권)이며, 연구자 전문서로는 <신라-서역 교류사>(2005), <고대문명교류사>(2001), <실크로드학>(2001) 등이다. 독특한 경력의 조선족인 저자는 그 경력에 걸맞는 시야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근대사회의 민족국가의 재구성 아래의 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선사시대와 고대와 중세에서 초원문명, 서역 문물, 이슬람 문화와 해양문명과 교류하고 활약해 왔는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우리 말과 문자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꼭 가져야 할 안목이라 말하고 싶다. 

(3) [리] 리두연구 – 홍기문

<림꺽정>을 지은 소설가 홍명희의 장자 홍기문(1903-1992). 광복후 아버지를 따라 북에 감. 유명한 국어학자로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이자 사회과학원 원장도 지냄. <리두연구>는 1957년 평양에서 출간된 이두(吏讀)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꼭 참조해야 할 책. 남에서는 <해외 우리 어문학 연구총서> 시리즈로 북측의 출판물을 영인 인입하여서 찾아볼 수 있음.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우리 말을 한자(한문이 아님 주의)를 빌어서 표기하는 방법을 크게 말하여 ‘이두(리두)’ 라고 하는데, 우리의 언어생활과 문자생활 나아가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반드시 익혀야 할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분야.

대표작도 곁들여 얘기하자. 간송 전형필 선생이 기와집 열채 값을 주고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을 구입하고 나서 일제의 눈을 피해 광복까지 잘 건사한 이야기와 함께, 사실 이 원본을 제일 처음으로 보고 훈민정음 연구를 진행한 학자가 홍기문 선생인 이야기 역시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조선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훈민정음에 대해 학문적인 연구를 한 <정음발달사>(1946)가 그 결과물이다. 클래식이다. 

(4) [사] 사씨남정기 – 김만중(金萬重, 1637-1692)

한글로 씌어진 이른바 국문소설로서는 굉장히 이른 작품이다. <구운몽>이란 다른 작품으로도 이름있는 김만중은 조선왕조의 문인으로서, 한글로 쓴 글이라야 진짜 우리 문학이라는 문학관을 가진 이였다. 우리가 알고있나는 대부분 옛날 역사 이야기는 사실 대부분 한문으로 전해져온 것들이다. 진정 한글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사씨남정기>와 같은 시기에야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알려면 이러한 원문을 제대로 알지 않고서는 안된다. 인현황후와 장희빈을 빗대어 쓴 소설이라 흥미를 느낄만할 것이다. 

(5) [랑] 랑그와 빠롤 – 서연

이 책은 소설이다. 사실 내용은 추천과 상관없다. ‘랑’으로 추천할 만한 책명을 못찾아서이다. 책명이 말과 관계되는 중요한 단어라서 억지로 갖다 맞췄다. 추천할 사람은 같은 ‘ㅅ’으로 시작하는 ‘소쉬르(索绪尔)이다.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 ‘语言’과 ‘言语’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e) – ‘能指’와 ‘所指’

공시적(synchronic, 共時的)인 것과 통시적(diachronic, 通時的)인 것 – ‘共时’와 ‘历时’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 스위스)

위와 같은 개념들을 제기한 근대언어학의 아버지이자, 이러한 언어학적 사상으로부터 파생되어 기호학이 생기고 구조주의가 나오고 19세기부터 20세기를 지나 오늘날에까지 이어 철학, 예술, 문학 등의 넓디넓은 영역에 크나큰 영향을 주는 이다. 랑그와 파롤로 대변되는 그의 생각들은 말과 글(모국어든 외국어든) 을 파고들려 하는 이들에게 기본적으로 장비되어야 할 것들이다. (이전 관련 글)

(6) [해] 해동가요 – 김수장(金壽長, 1690-?)미국 버클리대 소장본

조선후기에 묶여진 시조집. 영조 31년(1755)에 처음 만들어졌고, 같은 39년(1763)에 개정본이 나옴. 883수가 수록되어 있는 한글 시문학의 보물창고. <청구영언>, <가곡원류>와 함께 조선 3대 시조집. 한글이 15세기에야 만들어졌으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태산이 높다하되’ 라든가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같은 시조의 제일 이른 한글기록 원형이 다 이러한 시조집에 있음. (버클리본 이미지)

역시 한 분야에 한하여 머리글자를 의식하면서 추천리스트를 짜기란 쉽지 않은 가보다. 겨우 짜냈다고나 할까. 그래서 옥의티도 있었나 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자기 분야만의 클래식들로 
서재 고백을 해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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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떠돌면서 듣고 모으고 배우는, 이야기 "꾼"이 되고싶은. 연변, 북경을 거쳐 교토에서 고전과 씨름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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