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부모님은 네가 이렇게 머리 나쁜 줄 알고 계시냐" 드라마에서 나이 좀 든 의사가 젊은 의사에게 한 말이다. 숨겨진 말은 아마도, '너가 머리 나빠서 잘 도와주지 못하니 내가 수술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일 것이다. 이는 '멸시'의 감정이라고 조심스레 판단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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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작가님은 책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 소설에서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 48가지 감정을 분해하고 해석한다. 멸시의 감정을 다루는 부분에서 작가님은 미움에 대해  상대방에게서 원인을 찾을 때 멸시라는 감정이 시작되며, 멸시라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상대방이 관계를 끊어 주기 바란다고 한다. 자신이 직접 미움의 관계를 단호히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멸시를 통해 상대방을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멸시하게 될 때, 관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려는 비겁함을 드러내는 셈이다. 타인을 멸시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다.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관계가 파탄나면, 희생자 코스프레를 아낌없이 하게 될 것이다. 마치 부당한 일을 당한 선량한 사람인 것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시작하여 멸시로 끝을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리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도 늘 그럴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강신주 작가님은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에서 인간은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악 중에서 최소의 악을 선택한다고 한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있으면 누구부터 깨워야 할까? 당연히 초식동물부터 먼저 깨워야 한다. 토끼를 깨우면서 "오늘은 싱싱한 풀을 많이 먹고 독수리를 조심하렴!" 하고 발원한다. 배고픔도 고통이지만 포식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도 고통이라는 감수성이다. 그 다음에 독수리를 깨우며 발원한다. "오늘은 배곯지 말고, 인간에게 잡히지 않도록 주의하렴!"  독수리도 배고픔과 포획의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자비의 마음이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발원인가? 독수리가 배고픔의 고통을 면하려면 토끼를 잡아먹어야 하고, 토끼는 온몸이 찢기는 고통을 면하려면 독수리를 피해야 한다. 나아가 토끼도 배고픔의 고통을 면하려면 식물을 뜯어 먹어야 한다. 그러니 모든 생물에게 배고픔의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얼마나 모순인가? 모든 생명이 유한자로 태어나기에 모든 비극이 생긴다. 누구도 자기 힘으로, 자기 살을 파먹고 살 수는 없다. 크게 보면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다

애절하다. 식물을 위해 토끼를 모두 잡아 죽일 수도 없고 토끼를 위해 독수리를 모두 잡아 죽일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식물과 동물을 위해 인간이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굶어 죽을 것이다

작가님은 스님들이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는 이유는, 주어진 것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어야 다른 것을 죽여서 먹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 죽은 것들, 아니, 정확히 말해 죽인 것들로 배고픔의 고통을 최대한 완화시켜야 하니까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폭력과 비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종류 혹은 폭력의 정도를 선택하는 것뿐이다. 폭력 중 최소의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다

작가님은 최소 폭력의 감수성은 인간 사이에도 적용된다고 한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폭력 혹은 폐를 끼치는 존재임을 자각하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점할 수 있는 공간을 점유하고 다른 누군가가 취업할 수 있는 직장에 자리 잡고 있고 다른 누군가 더 잘 할 수도 있을 배우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오만에 빠지지 말자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존재에 폐를 끼친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한다

삽시에 겸손해진다. 작가님은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 겸손이라는 감정도 다룬다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을 인정할 때 누구나 겸손해진다. 겸손하게 되었을 때 자신을 지배하던 해묵은 편견, 허영, 그리고 자만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신의 무능력을 직시할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정확히 알게 된다. 겸손해진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무능력과 약함을 느꼈을 뿐이다. 이것은 반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 진지하고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마저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것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자만심에서 절망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균형 잡힌 겸손에 이를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도 알지만, 동시에 자신의 능력과 강함도 알게 될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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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드라마에서 막말을 한 의사는, 젊은 의사가 인품 좋은 겸손한 의사를 도울 시간을 앗았음을, 본인 대신 다른 의사가 이 병원에 취직하여 수술실에 서 있을 기회를 점했음을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만심에 차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면서 본인이 비겁하고 무책임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직장에서 가끔 누군가를 아니꼽게 볼 때가 있다. 심지어 저 사람은 겸손하지 못하며 상대방을 멸시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나야말로, 오만하고 자만에 차 있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정확히 구분하여 자각했더면 좋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욕심, 다른 사람이 내 의지대로 움직였으면 하는 바램,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망상,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니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착각은 깨끗이 버리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으면 좋았을 텐데

배고픔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섭취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친다고 한다. 그러니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최소의 악, 최소 폭력을 선택해야 한단다

균형 잡힌 겸손에 이르기까지 자만과 절망 사이를 한참 더 왔다갔다 하겠지만 조금씩 가까워지리라 기대한다

 

강신주  <강신주의 감정수업>

강신주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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