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백을 하면

그 흔한 고백이란 단어도, 고백하는 장면도 없지만 왜 그 사람이랑 스치는 매 순간이 고백받는 기분이 들까


굉장히 여유로운 하루들이 있다. 

늦잠을 푹 자고, 침대에서 마음껏 딩굴딩굴 하다가 느긋하게 일어나서, 딱히 계획 된 하루일정이 없이 빈둥거리는 하루. 의무식으로 할 출근도, 필요식으로 할 잡일도, 적당히 즐겁지만 적당히 에너지 소비가 필요한 만남식으로 할 인간관계도, 생활식으로 할 일상적인 집일도.. 아닌, 그저 아무생각없이 멍 때려도 되는 하루가 있다. 

자의식 없고 사유없고 푸시 알람없는 이런 날들은, 많지 않지만 또 나름 꽤 있는, 안주머니에 넣고 아껴쓰고 싶은 하루들이다. 

나는 보통 이런 날들이면, 주변 동네에 나가서 가벼운 산책을 하고 집에 와서 샤워를 마친 뒤, 얼음가득 넣은 아이스 라떼 한잔을 내리고 영화를 본다. 특히 요즘처럼 여름날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절엔 해볕도 따스하고 하루도 길어서 뭔가 그 하루가 두배로 늘어난 더블 보상 느낌을 받는다. (대부분의 일상이 빡세기 때문에 이런 비유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는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취향이 비슷한 주변분들에게서 추천받았던 걸 기록해둔 노트가 있는데, 그 노트리스트에 가서 한번  훑어보면서 맘이 가는 걸 볼 때도 있고 혹은 그냥 감이 오는대로 클릭해서 볼 때도 있다. 상영되 길 손꼽아 기다리면서 보는 새 영화도 종종 있지만, 되짚어보면 진한 감동이나 여운은 늘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생각없이 클릭했을 때 가슴속에 훅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이 아마 그 날인 거 같다. 

구름도 영화도 좋았던 그런 날..

오늘은 구름이 너무 예쁜 하루였다.  섬네일에 첨부한 사진은 우리집에서 내려가는 언덕아래로 향해서 찍은 사진이다. 경사가 있어서 핸드폰 카메라를 갔다대면 늘 하늘과 지면이 조화롭게 절반씩 한 폭에 들어오면서 편안한 느낌을 준다. 

여름이라 길 양 옆은 초록이 무성하고 하늘색 하늘엔 몽실몽실 겹겹이 구름들이 빈틈을 꽉 채워준다. 그 사이로 전보대 전기선이 얼키설키 오가고 띄염띄염 움직이는 차량들이 고요한 화폭같은 장면에 바람처럼 약간의 움직임을 선사한다. 나는 한참을 앞마당 뒷마당을 번갈아 가면서 구름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소 지친 일상의 피로들은 이런데서 조금씩 위로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현재 보여지는 걸 눈길이 닿는대로 정성스레 몇장 담아내고 집에 들어와서 멜로영화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도 여름도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다.  

뭘 볼까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봄날은 간다"를 보기로 했다. 이 영화는 너무 유명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봤었고 아직 제대로 못 본 나도 안에 웬만한 대사는 다 안다는 점. 스토리도 술술 말할수 있을 만큼 예상이 가는 영화였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첨부터 끝까지 완정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건, 내가 자주보는 싸이트에 이 영화가 등재되어 있지 않는지 검색이 되지 않는다. (명작이라 무조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없다니, 거참..그럼 뭘 볼까 순간 좀 당황했다.)

마우스를 아래위로 슥슥 이동하는 데, 제목이 "내가 고백을 하면" 이란 포스터가 유난히 내 맘을 끌어당긴다. 포스터에 측면으로 반대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남녀주인공도 좀 애절해 보이고 제목을 보아하니, 고백하기 전 이야기 같기도 하고.. 그냥 너무 평범해 보이는데 또 이상하게  영화보다 더 평범한 오늘같은 일상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보기 완료)

그 흔한 고백이란 단어도,  고백하는 장면도 없지만 

왜 그 사람이랑 스치는 매 순간이 고백받는 기분이 들까

영화는 너무 내 취향이었고, 영화가 끝나서 스크린에 배우들이 이름이 올라가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스토리는 아직 안 끝났다는 생각에 컴퓨터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난 이제야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게 여기서부터 시작이란 생각이 들었다. 앤딩이 시작이다. 내가 바라던 앤딩 역시 이런게 아닐까…

그래, "내가 고백을 하면"이란 제목이 왜 탄생했는 지 이제야 알거 같았다. 

영화는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만나  가까워졌는지 그 과정을 여유 있는 시선으로 풀어낸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멋이 퍼그나 있고, 굉장히 현실적인 느낌으로 흐르기에 감정이입도 잘된다. 자연스럽고 거창하지 않고 소소해서 좋았다. 아무 내용도 모르고 클릭했다가 오히려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고 누군가 내 옆에서 날 감싸안으면서 토닥토닥하는 따뜻한 힐링이 됐다. 

처음부터 과장되거나 과한 설정보다는, 특별한 사건 없는 일상을 담아내는 거라, 자기도 모르게 스며드는 분위기였고 감성적인 부분에 더욱 매료 되기 쉽지 않았나 싶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까 금방 본 영화 였지만 머리에 딱히 기억나는 대사나 명장면은 별로 없다. 그저, 어떻게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서 거의 두시간이란 시간동안 날 행복하게 해줬을까 싶기만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산다는 건 참 고단하고 피곤한 일인 거 같다. 분명 하루하루를 빈틈없이 살아낸 것 같은데도, 딱히 성취 된 뭔가는 노고에 비해 적다. 하지만, 좀 전 같은 이런 시간들이 나를 그냥 살고 싶게 만든다.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어쩌다 가끔 제대로 느껴지는 확실한 행복들..그 행복들의 질량은 거대하지 않더라도 내 맘속에 와서 꽂히는 속도는 가히 굉장하여 그 힘은 강력하다. 

시종일관 담담한 이 영화와 어울리는, 남자주인공의 어리숙하지만 따뜻한 눈빛과 낮은 목소리가 생각난다. 서로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또 그 사람과 우연히 만나 자연스레 만남이 이뤄진다면, 그건 분명 축복받을 일이고 용기내서 고백해야 할 일이다. 

내가 고백을 하면…

가뜩이나 지친 나의 삭막한 요즘 일상에 단비 같은 영화였다.

그리고, 

두고두고 다시 떠올려보기를 할 것 같은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이다. 

영화스포는 하지 않겠다. 심지어 간단한 줄거리에 대해서도. 나랑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추천한다. 그리고, 소감을 교류해주면 나야 더 좋겠다. 마지막으로 영화 안에서 나오는 백석의 시 몇줄로 마감하겠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내가 고백을 하면 

우린 이루어질까

내가 고백을 하는 날이면 

구름은 그날도 예쁠까

 

이 글을 공유하기: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