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심열을 보다가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를 끌고 종점을 향해 달렸다.”라는 구절을 보았다. 고중생의 글이였다. ‘철철’이라는 단어가 자꾸 걸린다. ‘철철’이라는 정도는 얼마 가량일가? 계량단위로 측정한다면 몇그람에 해당되는 량일가? 어감으로 봐서는 몹시도 많이 흘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많이 흐른다면 과연 달릴 수 있을가? 병원으로 실려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수정하지 않은 채로 복심에 넘겼다. 복심에서도 같은 의견이였다. 복심 선생님이랑 나는 머리 맞대고 가장 적당해보이는 단어를 찼다가 ‘줄줄’로 바꾸었다.
“피를 줄줄 흘리며 종점을 향해 달렸다.”는 어디로 봐도 무난할 것 같았다. 그렇게 수정을 해놓았지만 ‘철철’은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저녁에 잠간 다리를 일자로 벌리고 서서 앉았다 일어나는 스쿼트운동을 했다. 50개씩 2조를 하고 나니 이마로부터 땀이 흘러내렸다. 친구와 문자를 주고 받다가 “땀 철철 흘려가며 저녁엔 운동을 했다.”고 적어보냈다.
그러다가 ‘철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였다. 등곬으로 땀 한두줄기가 흐르고 앞머리가 흥건히 젖는 이 정도의 땀을 ‘철철’이라 묘사할 수 있을가? 내가 흘린 이 정도의 땀이 ‘철철’이라면 낮에 본 원고의 주인인 고중생이 흘린 피가 ‘철철’이지 않을 리유는 무엇인가. 내가 흘린 땀은 타인이 보기에는 ‘줄줄’이 합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철철’로 표현하고 싶었다. ‘줄줄’로서는 온데가 뻐근해나며 격렬하게 운동을 하고난 뒤의 이 상태를 표현하기에 미진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튿날에 ‘줄줄’로 고쳐놓았던 원고를 ‘철철’로 돌려놓으며 생각해봤다. 사람은 왜 이토록 남에게는 랭정할 수 있으면서 자기에 대해서는 이토록 주관적인 것일가… 남의 ‘철철’에는 계량컵의 눈금처럼 엄격한 자대를 들이대며 스스로에 대해선 이다지도 후한 것일가.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더라고 남이 흘린 피보다 내가 흘린 땀이 그저 중한 것이다. ‘내로남불’의 전형적인 례이다.
대개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글의 문제는 이런 것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작가 스스로가 자기의 감정에 푹 빠져서 ‘객관화’가 안되는 경우이다. 앞머리 둬오리 적신 땀을 기어코 ‘철철’로 적고 싶어하는 주관성이 앞서기 때문에 대개의 글은 설득력을 잃고 만다.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글들은 대부분이 덤덤한 서사때문이였던 것 같다.

여화(余华)의 《인생(活着)》이 그랬고 리패복(李佩甫)의 《생명의 서(生命册)》가 그랬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의 인생을 저자는 호들갑 떨지 않고 덤덤하게 아무 일 아닌 듯 묘사를 하며 풀어나간다. 독자는 거기에서 감동을 받는다.
갓 아이를 낳고 나는 본격적으로 모범적인 부모가 되여보려고 온갖 육아서들을 사들였다. 리론지식으로 중무장하여 아이교육을 철저하게 장악해보려 했다. 지금에 와서 그 많은 지식정보들은 많이는 잊혀졌다. 그중의 어떤 말들이 간혹 기억에 남았는데 그중에 “내 아이를 남의 아이 보듯이 하라’는 말이 있었다. 덜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조급함을 내려놓으라는 뜻일 것이다.

남의 아이는 돌 되여서 걷기를 못해도, 두돌이 지나서 말을 번지지 못해도 그럴 수 있는 일이였다. 늦되는 아이도 있다고 했으니까. 애들은 그러면서 크기도 하니까. 그러나 내 아이라면 말은 달라진다.
13개월인데 왜 아직 걷지 못해?
남의 아이는 벌써 산수를 한다는데 얘는 왜 아직 수자도 모르는 거야?
내 아이고 보면 괜찮을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보면 조급함을 참지못해 닥달을 하게 된다. 그렇게 엄마와 아이는 같이 지쳐간다. 조금 거리를 두고 ‘남의 아이 보듯’이 지켜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좌절을 겪고 마음이 힘들 때가 있었다. 인생은 노력한 만큼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노력을 포기한 적이 없는데 내 인생에는 왜 이런 시련이 닥친 것일가? 리해할 수가 없었다.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예기치 못했던 불행을 겪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좌절한 나에게 아무 도움이 돼주지 못했다. 그들이 처한 슬픔에 깊이 공감하며 사람 사는 것은 원래 이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고 아무 연고 없이 불행은 닥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며 울고 웃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인생이였다. 막연하게 나는 내 인생은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너무 사랑하는 내 인생이였으므로. 내 인생을 남 인생처럼 보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그때 처한 상황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자기련민이라는 감정이였다.
어느날, “인생이라는 것은 길에 난 잡초 같은 것이다.”라고 한 어떤 스님의 말이 마음에 들어왔다. 남에게도 닥칠 수 있는 슬픔이 나에게 닥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남들보다 더 신의 은총을 받아야 할 리유는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그냥 보통의 한 인간이고 길에 난 잡초같이 예기치 않게 밟힐 수도, 뽑힐 수도 있는 것이였다.
글이든, 아이든, 삶이든 거리 두고 바라보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글이라서, 내 아이여서, 내 삶이라서 무엇보다 더 사랑하고 애착이 가기때문에 더구나 거리두기가 필요할 것이다. 내 글을 남의 글 보듯이, 내 아이를 남의 아이 보듯이, 내 삶을 소설 속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듯이 본다면 많은 것은 원활해지지 않을가 생각한다.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한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일이 아닐지…


거리두기 그게 또 어렵습디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꾸 삐치개질을 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정답대로 맞춰가려구…
상당한 마음의 수련이짐요. 아 잘 안돼요 . ㅎㅎ
반성적이면서도 경쾌한 문장 읽기가 참 편하네요.
경쾌~ 고맙습니다
남의 글이 다 내글보다 재밌는 1인 ㅋㅋ
실은 저도 그래요 ㅎㅎ
그래도 몽실이님은 길에 난 잡초가 되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그런건 차라리 깨닫지 못하고 철없이 사는게 복이겠더군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인생이 참 녹록치는 않아요 그져 ?
그래서 결국 “철철”로 돌려놓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