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리 평강벌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읍내가 있다. 복동하, 장인강과 해란강 등 세 내가 모이는 아우라지라 옛 이름은 삼하(三河)진이라 했다 하고, 평강벌이란 이 하곡평원의 하류로부터 상류로 가면서 세어보면 첫번째 골짜기라서 두도(头道沟)진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한다. (좀 더 얘기를 풀자면, "二道沟"는 서성진이고, "三道沟"는 현 화룡 시가지이다)

평강벌과 신흥소학교(2009)

조선 한자음으로는 "두도"이지만, 더 익숙하게는 중국어 발음과 섞인 "투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것은 중국에 살며 민족성을 지켜온 조선족의 특성을 엿볼수 있는 예라고 할 수도 있겠다. 

두도는 반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온 선인들이 일찌기 정착한 지역 중의 하나로서 청나라, 일제시대, 항일전쟁, 해방전쟁과 항미원조를 모두 겪으면서 그 역사에 이름을 비치는 연변의 여러 고장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1909년 청나라와 일본이 체결한 <간도협약>에 따라 용정촌(龙井村)에 일본영사관이 세워지고 국자가(局子街), 두도구(头道沟), 백초구(百草沟) 세 곳에 영사관 분관이 설치된다. 실제로 원 두도진  정부 울안과 직업고중의 터에는 일제시대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다. 

일제 문서에 등장하는 "두도구(頭道溝)"(셋째 줄)

1913년경의 두도구 일본영사분관

공화국이 건립된 후인 계획경제 시기, 화룡지역의 술사탕(糖酒), 오금(五金), 백화(百货), 식품(食品), 약재(医药) 등 5대피발(도매, 批发)이 모두 두도에 위치하여 있어서 화룡 시내에서도 모두 두도에 와서 물품들을 사갔다고 한다. 그리고 60년대에는 화룡현의 행정중심지를 두도로 옮기려는 논의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안은 무산되었고 시장경제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도매상점들도 차차 사라졌다. 그래도 장터가 커서 1일자와 6일자 큰장날이면 황소장도 열리고 인파가 북적거리며 흥성흥성했던 어릴적 기억들이 있다. 

현재는 사람들이 다 대도시로 빠지고 인구가 3만명이 채 안되는 작은 진(镇)에 불과하다. 아직도 두도에는 명물인 투도온면이 있는데, 얼마전 한국 SBS의 요리프로 <백종원의 3대천왕>에서 방문을 해서 이슈가 된 적도 있었다. 이 시골에까지, 그것도 실제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인정하는 온면집을 찾아 갔다는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 "덕분"에 요즘은 작은 가게에 운전하고 온 외지인들로 꽉 차있어서, 정작 두도 사람들은 한 끼니 해결할려고 찾았다가 뒤돌아서는 경우가 많아졌다. 

노배(무우) 채지에다 투도온면 한 사발 뚝딱

가게에 백아재 방송화면 캡쳐해서 붙여놨음…


옛날부터 조선사람들은 어디 가든지 벼농사를 짓는 동시에 학교부터 짓는 것으로 유명하다. 평강벌 첫 골안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도에도 유서깊은 조선족 민족학교들이 있다. 1913년에 설립된 두도진 신흥소학교(新兴)와 1938년에 설립된 광흥중학교(光兴)가 바로 그것이다. 

신흥소학교는 1913년에 세워져서 역사의 비바람을 헤치면서 수많은 졸업생들을 배출해냈으며, 얼마전에 이미 건교 100주년을 넘긴 교육장이다. 50-60년대에는 학생수가 3000명 정도의 규모였고 글쓴이가 다니던 90년대 말까지도 1000명을 넘겼다. 

신흥소학교에서 발급했던 상장

이 학교의 또 하나의 특색은 "소년해군학교"의 타이틀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두도에서 멀지 않은 서성령대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기지와 우호관계를 맺어서 국방교육과 군사훈련을 지도해 주었다. 

과거 정문의 "소년해군학교" 패쪽

교복도 해군복이 따로 더 있었다는..

광흥중학 역시 이제 80주년을 코앞에 두고있는 오래된 중학교로서, 50년대말 광흥중학에 붙으려고 당시 시험장이었던 신흥소학으로 몰렸는데 신청자 인원이 학교 운동장을 넘어나서 중학교 운동장에까지 일부 이동을 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이렇듯 유구한 교육문화 속에서 두 학교의 졸업생들은 건국초기부터 시작하여 화룡과 연변 기타 지역의 각 기관들에서 일하면서 고향건설에 힘을 이바지하였으며, 개천에서 용 난다고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에 진학한 이들도 여럿 된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1977년 대학입시 회복 후 첫 시험에 합격하여 78학번으로 북경대학 정치학부에 진학한 리홍걸 학우로서 졸업후 줄곧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일하였으며 현재는 민족정책연구실 부주임으로 재임중이다. 

하지만 빛나는 과거를 뒤로 하고 지금은 연변 대부분 향진이 그렇듯 학생래원이 고갈되어 급기야 2014년 4월 18일에는 두 학교를 합병하여 두도진 신흥학교로 개칭을 하게 된다. 

학교청사 로비의 소개문

요즘은 연변에도 교육부 예산이 내려와서 각 학교마다 건물을 전반적으로 리모델링하고 통학버스도 마련해주는 등 인프라적인 개선은 많지만, 정작 교육의 주체인 학생과 교사 자원은 역부족이다. 

옛 교수청사

새 교수청사

새로 지은 정문
청사 로비의 모습

복도의 공용도서

교실의 모습

학교생활의 모습들

현재 신흥학교도 소학부과 초중부 모두 합쳐서 학생이 100명 좌우 밖에 안되며 한개 학년이 한개 학급 정도도 근근이 가르침을 이어가는 상황이다. 그리고 올가을(2017) 새로 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유치원 아이들이 전 진(镇)에서 최대 6명이란다. 참으로 냉혹한 현실이다. 

학교 옆의 유치원 건물

두도 제일유치원 모 학급 단체사진(1994)

백년 넘게 이어온 우리 민족의 삶과 교육의 맥이 이제는 이처럼 미약하게 태동을 겨우 보여주고 있는 현실 앞에서 씁쓸한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가 없다. 다만 인구이동은 도시화, 관내화와 글로벌화의 물결 속에 이미 몸을 실어버렸다. 인구 기초수가 상대적으로 작은 조선족 사회에서 좀 더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당안자료가 부족하여 간단하게 답사를 하면서,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지간에 일단은 이러한 소중한 기억과 유산들을 잘 정리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다시금 느꼈다. 

지금도 차를 타고 60리 평강벌을 달리느라면 이름못할 벅참과 푸근함에  가슴이 벌렁인다. 황금파도가 설레이는 모습과 구수하게 흥정을 벌리던 조선말 소리들이 계속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따스한 햇살이 비추면 그 기억의 뿌리가 다시 움을 내밀고 푸르게 자랄거라고, 다른 지역에서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 맺을거라고 믿으면서, 이 글을 적어본다. 

초판: 2017.01.11
교정: 2019.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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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떠돌면서 듣고 모으고 배우는, 이야기 "꾼"이 되고싶은. 연변, 북경을 거쳐 교토에서 고전과 씨름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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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게 걱정이긴 합니다. 일단은 현상황을 인정하는데서 출잘해야 허망한 구호를 웨치는데 헛맥을 팔지 않을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0년, 30년 그리고 50년씩 내다보면 지금 연변의 상황 또한 역사의 좌우진폭의 범위 안에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그래서 과거를 잘 알고 기록해야 이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수 있지 않을까, 그게 어떤 미래이든, 하는 생각을 요즘에는 하고 있습니다.

      1. 간절합니까? 간절하다면 우리를 비롯한 이런 젊은 청춘(?)들부터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봅니다. ㅋㅋ 아직은 여러모로 돌아가기엔 모순이 많지만, 언젠가 목표가 정해지고 때가 되면은. 사실 지금 학교 건물, 교실 설비랑 보면 예전에 우리가 학교 다닐때보다 비교도 안되게 좋아졌는데, 학생수는 또 비교도 안되게 적어졌지 말임다.

  1. 필명이 그래서 “평강”이였군요. 우리 누구나 모두 어릴적에 뛰놀면서 보았던 고향의 모습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거 같습니다. 투도에 대하여 새로운걸 많이 알아가는 시간이였습니다. 어릴때 받았던 상장 사진 또한 인상 깊었는데… 저도 소학교때부터 받은걸 이제 찾아봐야겠습니다. 아직 있을지 모르겠지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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