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아이가 즐겨듣는 라디오에서 싱글 얘기를 하고 있길래 물었다.
– 얘야, 나도 싱글이야?
– 아니지, 有夫之妇지
– 그럼 그 '부'는 어디 있어? 왜 안보이는데
– 天涯海角
5년전부터 아저씨는 天涯海角가 소재한 도시에서 일을 했다. 어쩌다 보니 거기서 마음에 드는 일을 만난게 인연이 돼서. 처음에는 1년만 있고 온다더니, 1년이 지나니 내가 승진을 해서 일자리가 안정적이면 온다더니, 2년이 지나니 3년만 채우고 온다더니, 3년이 지나니 5년을 있겠다더니, 5년이 지나니 이제 8~10년을 더 있겠다고 했다.
그러던 아저씨가 일을 그만두고 집에 온다고 한다. 주말이나 휴가에 며칠 다녀가는게 아니라 짐을 다 들고 온다고 한다.
꿈이냐 생시냐. 웃음을 감출 수 없으니 퍽 난감하군.
***
난 이제 이 글을 쓸수 있다. 떨어져 사는 동안 무엇을 깨닫고 배웠는지.
1. 그 사람은 내가 원할때가 아니라 본인이 원할 때에야 온다.
처음에는 출장을 가야 할 때, 잔업을 해야 할 때, 외로울 때마다 싸웠다. 아니, 내가 힘들다는데, 내가 필요하다는데, 내가 오라는데, 왜 안와? 그때마다 돌아온 대답의 요지는 '그건 니 생각이고'였고, 할머니나 이웃을 도움을 받으면 되지 않으냐, 군대 갔다고 생각하면 안되느냐는 식으로 '해결방안'을 내놓으려 했다.

서서히, 나는 공주가 아님을, 세상이 내맘대로 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결코 그의 생각을 좌우지할 수 없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그가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너는 왜…'는 어리석은 질문이고 쓸데없는 투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잘 돌보는 것 뿐이였다.
너는 오고 싶을 때 와라, 안와도 된다.
2. 그 사람을 좋아하면 내가 기쁘다.
'꽃이 참 이쁘네' 하면 꽃이 좋아요, 내가 좋아요?
'하늘이 참 푸르네' 하면 하늘이 좋아요, 내가 좋아요?
법륜스님이 그러셨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하면 사실은 내가 기쁘다고.
1년이 지나면서부터 그 사람의 좋은 모습을 더 보기 위해, 같은 모습도 좋게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짠돌이는 살림군으로, 자사자리는 자기주장이 뚜렷한걸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건 멀리 내다보는걸로.
신기하게도 좋다고 하니, 잘한다고 하니, 점점 더 좋아지고 잘하는거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누고 좋은 책을 같이 읽고 얘기 나누면서 통화하면 시간 가는줄 모르게 됐다. 소울메이트가 따로 없다.
3. 떨어져 사는건 합의의 결과다.
가장 괴로웠던건 '내가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드는거였다. '내가 싫어서', '내가 매력적이지 않아서' 떠났고 오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좋은데 안보고 살고 싶을리가 없지. 아무리 일이 중하고 돈이 중요한들.
그래서 따지고 들면 돌아온 대답은 '나는 연이고, 너는 연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였다.
본인이 연이라는데, 날게 해달라는데… 하지만 연줄은 쥐고 있으라는데…
연줄을 당기지도 놓지도 않은건 내 선택이였다. 그리고 연이 되여 같이 날지 않은 것도.
결국 떨어져 사는건 우리가 합의한 결과다.
4. 있을 때 잘해
처음에는 원을, 한을 한바구니 모았다가 만나면 쏟아부었다.
집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밖에 나가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불행한지 알게 하고 싶었나보다.

싸우다 떠날 시간이 되고, 울다가 떠날 시간이 되고, 삐지다 떠날 시간이 되고를 반복하다가, 떠난 후에 울더라도 웃으면서 보내주기로 했고, 어느새 보낸 후에도 울지 않게 되였다.

떠날 때 같이 집을 나서서 공원에 가거나, 영화보러 가거나, 쇼핑을 하다가, 점차 '드문드문 오라' 하고 문을 닫고는 집에서 하던 일을 마저 할 수 있게 되였다.
오소희 작가님의 어차피 련애할바엔 아이 아빠랑 하는게 좋지 않냐는 말이 한몫 했다. 남편이라 생각하면 기대가 높아지니, 그냥 한 남자라 생각해보라는 제안도 꽤 도움이 됐다.
같이 있을 땐 서로에게 최대한 집중했고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썪는줄 모르겠다', '이대로 있으면 사회발전에 불리하니 각자 일하러 갑시다' 우스개도 했다.
있을 때는 있어서 좋고, 떠나면 자유라서 좋고.

5. 엄마만 괜찮으면 아이도 괜찮다
가장 걱정이 된건 아이였다. 아빠가 옆에 없어도 괜찮을가.
처음엔 아빠가 떠나면 아빠 옷을 씻지 말라고 터져 울었다. 红豆沙腐烂的味道가 나는 아빠 옷을 씻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우리가 싸우면 화장실에서 소리 없이 울거나 방문을 닫고 엉엉 울거나, 고모에게 전화해서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러다 법륜스님 말씀을 듣고 엄마의 정서가 안정적이고 엄마가 문제 삼지 않으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고, <닥치고 군대육아>를 읽고 쿨하게 나왔다.
– 내 아이를 내가 키우는게 당연하다
– 어머, 저 아저씨, 내 아이를 저렇게 이뻐하니 고맙네

***
자유의 맛을 본 굴레벗은 말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집을 뛰쳐나갈 수 있음을 안다.
그러면 그런대로 응원하고 축복하려 한다.
대신 집에 있는 동안에는 언제 떠나보내도 아쉽지 않게 찐득하게 붙어있어야지.
우리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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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 즉문즉설, <행복수업>
오소희 태평양의 끝, <엄마의 20년>
김선미 지랄발랄 하은맘, <닥치고 군대육아>

글 몇줄로 적으면 별로 뭐 아닌듯 보일지도 모르지만, 글 뒤에 많은 것들이 겹쳐있는 느낌입니다. 이 글을 쓸수 있는 경지까지 온 것에 박수를 보냅니다.
박수 들립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해빛을 받아서 쓰고 신 물을 달콤한 즙으로 만들면서 맛있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애 썼고, 돌아보면 애 쓸만합니다
글도 재밌고 그림도 글씨도 다 예쁘네요.
꽃님의 글에 등장하는 그림들이 참 이쁩니다. 누구 작품입니까?
세 식구의 작품인데요 하하하 어쩌다보니 셋 다 전문은 아니지만 아마추어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합니다
아빠까지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다니, 어느 그림이 아빠 그림인지 짐작이 안가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