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악운(噩运)   

   딸, 너의 할아버지 계셨으면 더욱더 상세하고 섬세한 내용들을 들을수 있겠지만, 아빠는 어렸을때는 지난 이야기들에 관심이 없다보니 많이 물어보지 못해서 근년에 할머니(지금 너의 할머니)와 고모 외 주변분들에게서 듣고 또 인터넷에 있는 자료들을 참조했다. 년대가 좀 안 맞을수도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인터넷 百度百科에서 정확한 년대를 찾아보고 지적하기 바란다. 

   해방후 왕청인민공사(汪清人民公社) 산하에는 왕청대대(大队), 동풍대대(大队), 승리대대(大队) 3개 대대(大队)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족들로 구성된 동풍대대(大队)는 주로 비닐하우스(塑料大棚) 채소농사를 위주로 하였고, 조선족들로 구성된 왕청대대(大队)와 승리대대(大队)는 벼농사외 조, 옥수수, 콩 등 기타 농작물(农作物) 재배 위주로 세분화 되었다.

   왕청대대(大队)는 대부분 조선족들로 총 11개 생산대(生产队), 600여호 가구(家庭)로 구성된 농사일 위주로 종사하는 농업단체였다. 왕청대대는 1대부터 10대까지는 한전(旱田), 수전(水田)를 다루는 생산대였고, 마지막 생산대인 11대는 채소(蔬菜)를 위주로 하는 생산대로 구분되었다. 

   해방되면서 왕청대대는 생산대(生产队)를 1대부터 순차척으로 편입 되었으며 한개 생산대에 보통 45가구로 편입되었으나 맨 마지막에 편입 된 11대는 총 67가구로 제일 많았다.  

   9대, 11대에 한족 가구가 10여 세대가 섞여 있었는데, 채소 전문 생산대인 11대에 가장 많았다. 산동성이 본적지인 11대 한족들은 채소농사에 능한 경험이 많은 기술자들이 였다. 

[인터넷 사진]

   생산대(生产队)외 따로 대대(大队)에서는 양돈장(养猪场)과 염소사양장(山羊养殖场)도 있었는데, 양돈장은 2대에서, 염소사양장은 11대에서 운영했다.

   앞에서도 얘기 하였다만 할아버지는 한어(汉语)와 수학계산과 암산(心算)에 능하셨으나, 농사일은 물론 간단한 공구도 사용 할 줄 모르는 선비(书生)였다. 충분히 대대 간부로 될 자격이 있을만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였지만 계급성분이 나쁜 탓으로 차려진 것은 염소사양장 사양원이 였다. 

[인터넷 사진]

   이때는 벌써 할아버지 슬하에는 작은 할머니가 와서 낳은 큰 딸 1명 외, 아래로 아들 4명으로 총 5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두 할머니는 11대에 배치 받아 채소농사 하면서 자녀들을 뒷바라지 해 왔다.

   양식난으로 허덕이던 중국해방 초기에는 젖소가 흔치 않아 우유를 구하기 힘들었다. 생산대대에서 키우는 염소는 젖을 짜서 모유가 부족한 산모들을 위해 공급 되고 있었다.

   그러던 1960년 어느날 할어버지가 일하던 염소사양장(山羊养殖场)에서 사고가 났다.

   사양장에서 키우던 염소들이 갑자기 하루밤새 모두 죽었는데, 계급성분이 나쁜 할아버지가 사회에 불만이 있어서 저지른 반혁명자로 지명되어 사양장의 염소들을 죽인 독살자로 무기형(无期徒刑)으로 판결 받아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つづ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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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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