乌衣巷과 谢安

 

남경에 있는 명승지들 중 제가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乌衣巷이였습니다. 이 乌衣巷은 아주 전형적인 인문학여행의 관광지중 하나입니다. 그곳에 깃든 이야기들과 그곳에 흔적을 남겼던 명인들에 대해서 잘 모르면 가봐도 별 볼일 없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乌衣巷의 巷은 골목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乌衣巷처럼 하나의 골목에서 수많은 역사명인들이 나온곳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乌衣巷을 “천하제일항天下第一巷“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일단 乌衣巷에서 나온 역사 명인들부터 소개하겠습니다. 동진의 최고의 名门豪族이였던 왕씨가문과 사씨가문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이 두가문에서 무수한 정치가 군사가 문학가 서예가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했습니다.

 

일단 사씨가문이 배출한 명인은 오늘 주로 소개하려는 谢安입니다, 谢安은 동진 최고의 정치가이며 군사가이고 그 유명한 “肥水之战”에서 8만명의 군대로 前秦의 80만 대군을 격파한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중 이전에 소개했던 최고의 재녀 咏絮才女 사도온谢道韫이 있습니다.. 사도온이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왕응지王凝之에게 시집을 가기전에는 여기 乌衣巷에서 태여나서 자랏습니다.

 

그리고 谢安의 동생 사현의 손자 사령운谢灵运은 우리나라 山水诗派의 시조이고 또 谢安의 다른 조카 손자 사혜련谢惠连이라는 유명한 시인입니다. 李白이 “群季俊秀,皆为惠连。吾人咏歌,独惭康乐。”라고 평가했던 사람입니다. 리백은 사씨네 남정네만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ㅋㅋ

 

谢安의 형님의 손자였던 谢眺사조라는 산수시의 발전에 굉장히 큰 영향력을 끼친 시인이였습니다. 谢眺도 이곳 오의항에서 태여났습니다. 사령운은 대사大谢 谢眺는 소사小谢라고 불렀는데 우리나라 시단에 지극히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문학적 소양이 굉장히 높았던 梁武帝萧衍은 三日不读谢诗,便觉口臭라고 할정도로 谢眺의 시를 사랑했구요. 

당조의 시선 리백도 사조의 시를 극찬해서 자신의 시에서도 늘 항상 사조의 시를 거론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후세의 문인들이 리백은 负尽狂名十五年,一生低首谢宣城라고 말할 정도 谢眺를 흠모하고 존경했습니다. 여기서 谢宣城은 谢眺가 선성태수를 지낸적이 있어서 고대에는 그 사람이 관직을 맡았던 지역이름과 성을 같이 불러서 존경을 표했던 것입니다. 

 리백은 自负狂傲 한 사람이라 다른 누구의 시에 대해 높게 평가할 때가 거의 없었는데 시대를 뛰어넘어 사조를 엄청 흠모했었습니다. “蓬莱文章建安骨,中间小谢又清发”, “明发新林浦,空吟谢朓诗” “洞庭张乐地,山逐汛舟行。诺为楚人重,诗传谢朓清” “宅近青山同谢朓,门垂碧柳似陶潜” 이외에도 수많은 후대의 시인들이 谢朓를 노래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乌衣巷의 다른 명문거족은 왕씨 집안인데 랑야 왕씨琅琊 王氏 중 王导라는 사람이 사마예司马睿를 도와 东晋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고 남경에 수도를 정했는데 乌衣巷에 거주했고 사씨집안과 늘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 王导는 아주 탁월한 정치가이자 문학가였는데 书圣 王羲之의 큰아버지였습니다. 왕희지도 이곳 乌衣巷에서 태여나서 자랐고 그의 아들들인 저명한 서법가 王献之, 왕휘지王徽之, 王凝之도 이곳에서 태여나서 자랐습니다. 왕희지 가문은 후에 이곳 乌衣巷에서 소흥으로 이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남북조시기의 저명한 시인들인 연연년颜延年、심약沈约、포조鲍照 그리고 《昭明文选》의 편집자 照明太子 萧统, 중국고대 최고의 문학이론서 《文心雕龙》의 저자 刘勰,최고의 시문학 이론서 《诗品》의 저자 钟嵘。성구“画龙点睛”의 주인공이였던 화가 张僧繇도 여기 오의항 출신들입니다. 위에 소개한 분들은 모두 “중국문학사”에 이름이 올라있을 만큼 우리나라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고 시대를 주물렀던 엄청난 문인들입니다.

 

그리고 수학자 祖冲之,천문학자 虞喜,화학가 葛洪,의학자 陶景弘,철학자 范缜도 남경출신들이므로 당시 남경의 가장 번화한 지역이였던 여기 乌衣巷과 이런 저런 인연들을 다 맺고 있습니다.

 

하나의 골목에서 이토록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은 아마 세계 어느곳에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가 乌衣巷은 “천하제일항”이라고 감히 말씀드릴수 있었고 또 乌衣巷 관광은 전형적인 인문학관광지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사실 이분들 대부분 1700년전에서 1500년전 즈음에 등장했던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수당시기에는 이곳이 전쟁으로 인해 페허로 변했었고 현재의 乌衣巷은 주로 명청시기의 건물들이고 위에서 소개한 분들의 흔적은 없습니다.

 

그냥 이곳이 이런분들이 자취를 남겼던 곳이구나 하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분들의 작품들을 떠올릴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분들에 대해서 사전에 숙지 하지 않고 간다면 크게 의미는 없겠죠.

 

수조시기에 이곳은 이미 페허가 되어 왕씨가문과 사싸가문의 옛터들과 또 이런 명인들의 자취는 페허속에 파뭍혔고 그들의 흔적은 시와 문학작품들속에만 남아있었지만 그들을 흠모했던 수많은 문학가들 시인들이 이곳을 찾아왔었고 또 수많은 怀古작품들도 남겼습니다.

 

당조때에는 시인 李白,崔颢,刘禹锡,杜牧,李商隐,韦庄이 와서 시를 남겼구요. 송조때에는 王安石,周邦彦,朱敦儒가 찾아왔고 글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그냥 자신들이 존경했던 옛문인들이 이곳에서 태여났고 생활했다는 이유만으로 흠모의 정을 품고 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명승고적들을 찾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과 동일한 마음을 품고 찾아가는 거죠.

 

옛 문인들을 기리면서 이들 또한 유명한 시구들을 남겼는데요 그중 가장 유명한 시구는 류우석의 “乌衣巷”이라는 시입니다. 교과서에서도 필수로 공부하는 시인데요. 

朱雀桥边野草花,乌衣巷口夕阳斜

旧时王谢堂前燕,飞入寻常百姓家

흠모의 정을 품고 찾아온 乌衣巷은 옛날의 그 번화함을 잃고 또 최고의 名门世家는 보통백성들 집으로 변해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깊은 아쉬움과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한 명시입니다.

 

인문학여행은 현대인의 전유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랜 옛날부터 수많은 문인들과 학자들은 옛 고적들을 찾아 온 천하에 游学을 다녔던 것 같습니다.

 

취학중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은 여행을 떠나기전에 과문에서 배웠던 이런 시들을 그리고 이런 역사인물들의 이야기들을 자녀들과 함께 공부하고 떠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수업시간에 공부한 내용보다도 더욱 인상깊은 오히려 평생 유익한 그런 공부가 될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乌衣巷이란 뜻은 검은 옷의 골목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의 유래는 두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삼국시기 손권의 친위부대가 여기에 주둔을 했는데 이들이 전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乌衣巷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의 해석은 위에서 소개했던 왕씨가문과 사씨가문등 권문세족들의 자제들이 새까만 비단옷을 입고 다녔는데 워낙 인물들도 준수하고 기품들도 좋은데 세련된 검은 색옷들을 입고 다니는 귀족자녀들이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고 그들을 乌衣子弟라고 불렀답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乌衣巷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乌衣巷은 현재 남경의 여행중심지인 夫子庙가까이에 있고 이곳에는 현재 명청시기의 풍모를 갖춘 상업보행거리가 조성이 되어있습니다. 강남지역의 특색인 粉墙黛瓦의 건축물들인데 새하얀 벽에 검은 기와를 엊은 층차감이 아주 아름다운 그런 건축형태입니다. 이 보행거리를 걷다보면 “乌衣巷”이라는 글을 쓴 골목이 나오는데 현재는 규모가 아주 작은 골목입니다.

 

이곳에서 六朝文化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딱 한곳이 있는데요 “王谢古居”입니다. 왕도와 谢安의 옛집이라는 뜻인데요. 사실 동진시대의 왕도와 谢安의 옛집은 수조시기에 이미 타 없어졌고 지금의 “왕사고거”는 그냥 자그마한 마당에 집 몇 칸을 짛고 동진시기의 일부 문물을 전시해놓은 소형 박물관입니다.

 

비록 건물은 왕도와 谢安의 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건물이지만 꼭 한번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동진시기의 문화를 약간이라도 了解할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접하기 힘든 그런 남북조시기의 문화를 아주 조금이라도 공부할 수 있는 곳입니다.

 

굉장히 인상깊었던 건 남북조시기 동진의 귀족가문의 가구들을 모방해 놓은 자그마한 방인데요. 의자라든지 침대라든지 굉장히 생소한 그런 양태와 색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딱 두 가지 색채만을 썼는데요 주홍색과 검은색이 였는데 생각보다 세련되고 심플하지만 웬지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그런 스타일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대에 가장 유명했던 화가 顾恺之의 작품들이 전시되였는데 진품은 안닌 것 같았습니다. 고개지는 谢安의 절친이였기에 谢安의 가족이나 가택을 작품의 내용으로도 삼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乌衣巷은 구경거리는 이 하나뿐입니다. 원래 인문학여행은 90%는 듣는 것 읽는 것 10%가 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거창한 건 기대하시지 않으시는게 좋을 것입니다. 대신 거창한 역사이야기 문학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런 곳입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기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강남의 미를 잘 살린 그런 배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분위기 좋은 사진 한 두장 건질수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乌衣巷은 夫子庙 秦淮河등 관광지들과 보행으로 5분정도의 거리에 있어서 다른 관광지로 가는 도중에 약간 역사공부 문학공부 할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 谢安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중국역사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사기 캐릭터입니다. 거의 완벽한 사람이였습니다.

 

谢安은 당시 동진의 명문가족 사씨 가문에서 태여났는데 아버지는 당시 吏部尚书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조직부 부장이죠. 사안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단정하며 성실하고 재능이 뛰여나서 소년시기에 이미 사씨가문에서 뿐만아니라 당시 최고의 권력가였던 동진의 개국공신이자 재상이였던 왕도의 큰 관심을 받았고 당시 상류계층에서 높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근데 谢安은 학문과 재능이 뛰여났을뿐만아니라 용모도 출중한 동진 최고의 미남자였다고 합니다. 요즘말로하면 거의 아이돌수준이였느데요. 谢安이 입는 옷은 모든 명문가자녀들이 따라입고 谢安이 쓰는 모든 물건은 품절이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말로 하면 당시 동진 최고의 인싸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谢安의 친구중 한명이 처음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부채 5만개가 팔리지 않아서 부도나기 직전이였답니다. 그래서 谢安에게 부탁을 하여 그 부채를 들고 乌衣巷 번화가를 그 부채를 들고 왔다갔다 하게 했는데요 완전 인기상품이 되어서 한주일도 안되서 다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谢安이 약간의 비염이 있어서 시를 읊을 때에 콧소리가 많이 났는데요. 당시 전국의 젊은 선비들이 전부 따라 하느라고 시를 읊을때면 손으로 코를 막고 시를 읊는 것이 유행이 된 웃지도 울지도 못할 황당한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훗날 대시인 소동파가 젊은 시절에 그 이야기를 빗대어 有客高吟拥鼻 이라는 시구까지 쓰기도 했습니다. 谢安의 소년시절 인기는 지금의 아이돌들을 초월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소 谢安은 또 달변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당시 동진 문인들 사이에는 청담清谈이라는 토크쇼나 토론회 같은 모임이 유행이였는데 청담이라는 것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명사들과 문인들이 모여앉아 그 주제에 대해서 토론하는 변론대회와 같은 문인들의 게임이였습니다.

 

谢安은 방대한 지식량과 명석한 두뇌, 예리한 논리, 빠른 반응력들을 갖추고 있어서 소년시기부터 거의 청답에서 백전백승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당시 최고의 학자였던 왕몽王濛도 “此客亹亹,为来逼人” 이라면서 谢安의 언변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였다고 합니다.

 

최고의 권문세족의 도련님인데 영향력은 아이돌급, 학문과 언변 인품 모든 면에서 동진 전국에서 으뜸이였던 谢安이였던 고로 모든 사람들이 그가 스무살이 되자 출세가도를 달릴줄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갖춘 비현실적인 캐릭터잖아요.

 

그런데 이런 谢安은 남들이 예상하는 삶을 선택했을 리가 없습니다. 관직으로 출세가도를 달린 것이 아니고 동산이라고 불리웠던 소흥에 있는 회계산으로 들어가서 은자의 삶을 택했습니다. 모든 권리 재부 명성 이런건 다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청풍명월을 벗 삼아서 간소한 삶을 살아간거죠.

 

대단한 인재이니까 조정에서는 높은 관직을 내리고 정치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谢安은 젊은 나이에 담백하고 자유로운 삶을 택했습니다. 세가지 이유였는데요 하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谢安은 어디에 묶인 거추장 스러운 삶이 싫었고 둘째로는 자신의 권문세가의 금수저의 신분으로 출세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또 다른 하나는 당시의 관리들이 너무나 부패해서 그들과 어울리기가 너무 싫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소흥 회계산에 은거했던 기간에 천하의 최고의 문인들이 그에게 찾아갔고 그들 산좋고 물좋은 곳들에서 함께 음주가무를 즐기고 함께 시를 쓰고 문장을 담론하고 그림을 그리고 거문고를 뜯으면서 신선같은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谢安과 서성 왕희지王羲之가 절친이였는데요. 그들이 소흥 란정에서 가졌던 모임을 기록한 글이 우리나라 서예역사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왕희지의 “란정서집兰亭序集”입니다.

 

특히 “청담”이라는 변론모임에서 谢安은 늘 가장 간략한 언어로 제일 논리적이고 독특한 주장들을 쏟아내서 당시 문단을 놀라게 하는 말들을 많이 쏟아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개서생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담력도 갖추고 있어서 친구들이 한번 배를 타고 나갔다가 큰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할 위험에 처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사시나무떨듯하고 갈팡질팡할 때 谢安만은 얼국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미동도 하지 않았답니다.

 

산속에서 은거하고 있었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모두가 공인하는 儒林의 령수로 추대받았다고 합니다.

 

산속에서 신선같은 인생을 보내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방법없이 안일한 삶을 버리고 관직으로 나오는데요. 동산재기东山再起라는 성구가 이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당시 북쪽에 있는 전진의 부견이 장강이북을 통일하고 동진을 향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오는데 谢安은 8만명의 군사로 맞서서 대승을 거둡니다. 그 전투가 유명한 “비수에서의 싸움”입니다. 谢安은 전략을 짜고 모든 명령을 장수들에 내린후 자신은 그 전투를 바라볼수 있는 팔공산 중턱의 정자에서 싸우기도 전에 이미 대승할 것을 예언하면서 바둑을 두었다고 합니다. 전투는 谢安의 계획대로 흘러가게 되었고 그의 예승대로 10배가 넘는 적군을 대파 한것입니다.

谢安은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거의 완벽한 그런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광오狂傲했던 리백도 가장 닮고 싶었고 존경했던 사람이 바로 谢安이라고 합니다. 리백은 사안의 骨灰级粉丝였는데 후세에는 “리백의 시에서 나타난 谢安情结“라는 연구논문들도 굉장히 많을 정도였습니다.

东山高卧时起来,欲济苍生未应晚

谢公终一起,相与济苍生

三川北虏乱如麻,四海南奔似永嘉。但用东山谢安石,为君谈笑静胡沙

尝闻谢太傅,携妓东山门。楚舞醉碧云,吴歌断清猿。暂因苍生起,谈笑安黎元。余亦爱此人,丹霄冀飞翻

自有两少妾,双骑骏马行。东山春酒绿,归隐谢浮名

安石在东山,无心济天下。一起振横流,功成复潇洒

이런 시구들이 모두 리백의 사안에 대한 흠모의 정을 보여줍니다.

 

谢安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은데 시간상 관계로 여기 까지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乌衣巷과 谢安”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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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石

문학사 동서양철학사, 그리고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깊이 있게 공부한 분야는 하나도 없지만 여려분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여행과 독서 사진 촬영을 취미생활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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