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엄청 바쁘다. 

기말 레포트 제출 마감시간, 연구회 발표날짜, 학술회의 통역원고 번역 마감날짜, 회의 당일 통역준비까지 겹치다 보니(물론 질질 끌었던 것도 있다) 몸을 두 개로 쪼개고 싶은 심정이다. 

특히 월례연구회 발표는 지도교수에 지도교수의 지도교수(祖师爷), 타 대학 교수들까지도 참석하는 터라 나도 모르게 심적 부담이 엄청 강했던가 보다. 발표자료를 제출한 다음에도 준비는 계속 이어졌다. 급기야 발표 전날은 연구실에서 밤을 샜고 발표가 오후 1시 반인데 그 직전인 점심때까지도 연구실에서 자료를 뒤지다가 부랴부랴 집에 돌아왔다. 

집문에 들어서니 12시 40분 정도. 일단 컴퓨터를 켜놓고 온라인 발표에 사용할 파일들을 열어 놓고나니 12시 55분. '점심 먹을 시간  있을 것 같애?' 아내가 묻는다. '아니, 못 먹을거 같애.' 당연히 그럴 시간은 없다. 

하룻밤 동안 삭은 몸을 씻지 않고는 도저히 정신이 안날 것 같아서 샤워실에 들어갔다. 머리가 아직도 조금 흐릿하다.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몸을 적시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딸아이가 다가오는 실루엣이 샤워실의 불투명 유리 너머로 보인다. 

'아빠 지금 샤워 중이야. 프라이버시!' 

평소와 같은 대사로 내가 급하게 외친다. 그런데도 딸아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더니 들려오는 목소리. 

'아빠~ 냐옹~~'

그 야옹이 소리와 함께 문 틈 사이로 쏙 들어온 고사리 손. 그리고 그 손에는 탐스러운 포도 두 알이 쥐어져 있다. 

'아빠(를 위해) 남겨 줬어.' 

'아빠 냐옹'은 요즘 즐겨 읽는 그림책 <구름빵>에 나오는 대사다. 비오는 날 출근시간에 늦을까봐 아침도 못 먹고 허둥지둥 뛰어나가는 아빠가 걱정되었던 아기 고양이들, 그들이 구름빵을 먹고 두둥실 날아올라 아빠한테 구름빵을 배달하러 가면서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 안에 있는 아빠를 부를 때의 바로 그 대사. 

그림책의 해당 페이지

뒤에 들었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왜 아빠가 안 왔냐고 물었단다. 어제 저녁 잠들기 전에 엄마가 아빠가 늦게 올거라고 먼저 자라고 했는데, 아침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아침밥 후에 과일을 먹으면서, 자기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포도를 다 먹지 않고 아빠한테 두 알 남겨준 것. 머리를 내려 한입에 받아 씹으니 입안 가득 달콤한 포도즙이 퍼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조금 지나니 이번에는, 

'자기야.'

 하는 소리가 문 밖에서 들린다. 그리고 쑥 들이민 손에는 갓 튀긴 감자스틱 세 가닥이 들려있다. 내 최애지만 샤워하고 나가면 먹을 새도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는데, 이렇게 먹어보라면서 내 입안에 넣어준다. 음~ 역시 언제 먹으나 고소하다. 오늘따라 유달리 따뜻하기까지. 

하룻밤 동안의 피곤과 발표 직전의 초조함이 가신다. 이 두 귀여운 여인이 나를 불러준다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먹여준다는 것 만으로도 갑자기 기분이 바뀐다. 행복이란 이런건가 싶다. 확실하게 다가오는 이 느낌. 절대 작지 않은 '확행'. 이 작은 욕실에서도, 이 미지근한 물줄기 속에서도, 이 짧은 시간 안에도 나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1시 10분. 이제 미리 접속을 해서 간단한 테스트를 해야 한다. 다시 마주한 책상 위에는 작은 접시에 과일 조각이랑 감자스틱이 쉽게 집어먹을 수 있게 플레이팅(?) 되어있었다. 미닫이 저편에는 두 여인이 점심을 먹는 뒷모습이 정답게 비춰진다. 

야옹이 아빠라서, '자기'라서, 어디에 사는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그런 순간이다. 

+ 교찾로 시리즈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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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떠돌면서 듣고 모으고 배우는, 이야기 "꾼"이 되고싶은.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돌다가 고전과 씨름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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